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34
교랑의경 534화
“교랑을 데리고 네 집으로 가겠다고?”
대청 안에 앉아 있던 정 이노야는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손님이 자신의 딸을 데리고 가겠다는 소식에 깜짝 놀랐다.
정 이노야가 매를 부르게 생긴 표정의 주육낭을 노려보았다.
“왜 네 집에 데려가겠단 것이냐?”
“왜 우리 집에 데려가면 안 됩니까? 고모부님께서는 13년 전에도, 제 고모와 누이를 우리 집으로 내쫓았지 않습니까. 누이가 좀 편하게 지냈으면 해서 우리 집으로 데려가는 건데, 왜 안 된다는 겁니까?”
주육낭도 지지 않고 눈을 부릅뜨며 대꾸했다. 정 이노야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네 이놈, 헛소리하지 말아라.”
“고모부님, 제가 아직 어리긴 하지만 제 부모님께서는 모두 건재하십니다.”
주육낭이 냉소를 보였다.
정 이노야가 뭐라 더 대꾸하려 했지만, 주육낭은 더는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몸을 홱 돌려 버렸다.
“고모부라고 부르는 것만으로도 손아랫사람의 본분을 다 지킨 겁니다. 전 고모부의 허락을 받으러 온 게 아닙니다.”
손아랫사람의 본분? 본분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우리 정씨 가문 조카였으면, 벌써 흠씬 두드려 패고 마당에 무릎 꿇렸어. 그것도 모자라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게 했을 텐데!
정 이노야는 빠르게 멀어져 가는 주육낭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주씨 가문은 참으로 염치도 없구나!
당초 그네들이랑은 연고도 없던 강주에서도 우리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이제는 자기 구역라고 아주 눈에 뵈는 게 없어!
이를 부득 갈던 정 이노야의 머릿속에 갑자기 무언가가 떠올랐다.
경성에 들어온 이후로 주씨 가문과 겉치레로라도 인사 한번 나눈 적이 없어. 심지어 경성에 주씨 가문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뻔했지.
그래, 현실은 현실이야. 언젠가 들이닥칠 일은, 결국 들이닥치게 돼 있어.
“노야, 지금 주씨 가문에서 사람을 빼돌리러 온 게 명백하잖아요. 어서 다시 빼앗아 와요!”
뒤늦게 소식을 들은 정 이부인이 안채에서 잰걸음으로 다가오며 소리쳤다.
“어떻게 뺏어? 외조모 댁에서 애를 데려가 며칠 재우겠다는데, 내가 뭐라고 하면서 막아? 게다가 주씨 가문은 무장 출신이라 무식하고 염치도 없는데. 괜히 저들 앞을 막았다가 길 한복판에서 머리끄덩이 붙잡고 싸우기라도 할까? 저들은 창피를 모르는 자들이라지만, 나에게는 체통과 체면이라는 게 있소!”
정 이노야가 눈을 흘기면서 대답했다.
“그, 그럼 만에 하나 교랑이 다시 돌아오지 않으면······.”
정 이부인이 걱정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저놈이 감히 그럴쏘냐! 그때는 우리가 저놈을 관아에 고발해야지! 사흘이 지나면 다시 교랑을 집으로 데려올 것이야. 만약 그때가 돼도 교랑을 못 데려가게 한다면, 도리에 맞지 않게 구는 놈들은 우리가 아니라 저놈들인 게야!”
정 이부인이 아, 하고는 엉거주춤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노야. 그러고 보니 교랑이 저쪽으로 가면 안 되잖아요. 저 애가 가 버리면, 우리가 집에서 먹고 마시는 데 쓸 돈은 어떡해요?”
정 이부인이 갑자기 무언가 퍼뜩 생각난 듯이 소리치면서 문밖으로 뛰어갔다.
“반근, 반근!”
정 이부인의 외침을 듣던 정 이노야는 기가 차서 숨이 턱 막혔다.
우리가 어딜 봐서 이 집안의 웃어른이야?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안 되겠다. 저 계집애 소유의 문서는 이미 내 손에 들어왔으니까, 지금부터 진정한 주인 노릇을 좀 해야겠어.
주육낭이 몇 년 만에 또 정교랑을 남의 집에서 빼앗아 왔다는 소식을 들은 주씨 가문은 발칵 뒤집혔다. 여종과 몸종들은 마당을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정교랑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사 년 전 그날에 비해, 주 부인의 감정에는 기쁨 대신 황공함이 가득했다.
“어느 방을 내어주실 건가요?”
“가구는 어떤 것으로 준비하면 될까요?”
“그쪽 거처에 몸종은 몇 명이면 되나요?”
여종들의 질문이 쉼 없이 쏟아지자, 주 부인은 머리가 터질 듯이 어지러웠다.
“의원을 불러오거라. 내가 진짜 병이 나서 그런다.”
주 부인이 가슴을 부여잡고 말했다.
“병이 나긴 무슨. 당신은 어째 교교가 우리 집에서 지내기만 하면 병에 걸렸다는 거요? 진심으로 교교를 대하는 게 아니라, 교교를 불운 덩어리로 여기는 게 아니오!”
어휴, 이 몸이 어찌 감히요! 난 정말 진심으로 교교를 대하고 있다고요!
주 부인이 몸을 살짝 떨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여종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하고 지시했다.
“부인,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 아씨께서는 편하게 지내는 걸 좋아하세요. 그러니 하인을 많이 둘 필요도 없고요. 마당을 청소하는 몸종 두 명이랑, 심부름꾼 한 명만 있으면 돼요.”
편하게? 내가 어찌 그러겠나.
주 부인은 어떻게 그러냐며 손사래를 치고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말을 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이 나서서 뭔가를 하기에는, 어떻게 해도 적절하지 않을 듯싶어 주 부인은 결국 시녀에게 모든 걸 맡기고 모든 것을 시녀의 말대로 준비했다.
“교교, 여기서 편하게 지내려무나. 괜히 정씨 내외 눈치 보면서 거기 있지 말고. 그놈들이 또 너를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이 숙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야.”
대청 안에서 주 노야가 의분에 찬 모습으로 말했다.
“눈치 보지 않았어요.”
정교랑이 웃으면서 감사의 예를 표했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주 부인이 웃으면서 정교랑이 지낼 거처가 다 정리되었음을 알렸다.
“그럼, 외숙부님과 외숙모님께 잠시 신세 좀 질게요.”
정교랑이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아니다, 아니야.”
“신세는 무슨, 내가 감히······.”
한 사람은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한 사람은 두려움에 벌벌 떨며 주 노야 내외는 정교랑을 거처까지 직접 안내했다.
“저게 어딜 봐서 외손녀가 외조모 댁에 와서 지내는 거야? 꼭 부처님을 집으로 모셔온 것 같네.”
회랑 아래에 선 주씨 가문 자매들이 감탄했다.
“우리도 가서 인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어찌 됐든 자매지간이긴 하잖아.”
한 소녀가 물었다. 잠시 눈빛을 교환하며 생각에 잠겼던 자매들은 끝내 가지 않기로 했다.
“에이, 됐어. 부처는 모시는 것만 해도 충분해.”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올 무렵, 주씨 가문의 연무장에서는 사내들이 한창 무예를 수련하며 신체를 단련하고 있었다. 우렁찬 기합 소리는 아침 식사 시간이 되어서야 멈췄다.
“육낭, 가자.”
한 형제가 주육낭에게 말했다. 탄탄한 어깨를 드러내고 있던 주육낭은 무거운 석쇄(石鎖: 돌로 만든 운동기구) 앞에 서서 알겠다고 대꾸했다.
“먼저들 가. 난 조금만 더 하다 갈게.”
“3년 동안 실제 전장을 경험하고 오더니, 더욱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구나.”
형제 몇 명이 감탄하면서 연무장을 떠났다.
연무장이 조용해지자, 주육낭은 석쇄를 두어 번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고는 시녀가 건넨 손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이때 어린 몸종 하나가 연무장을 향해 뛰어오다가 주육낭을 보자마자 다시 왔던 방향으로 도망쳤다.
“도망가긴 왜 도망을 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주육낭이 호통치자, 어린 몸종은 불안한 기색으로 제자리에 걸음을 멈춰 서서 몸을 돌렸다.
몸종이 예를 표하면서 입을 열었다.
“도련님, 그게 아니라요. 정 아씨께서······.”
몸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몸종의 뒤로 시녀가 걸어왔다.
“어? 주 공자님, 아직 여기에 계셨네요? 지금쯤이면 다들 갔을 시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시녀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주육낭이 콧방귀를 뀌고는 대꾸하지 않고 느긋하게 땀을 닦았다.
“수련은 다 하신 거예요?”
시녀가 또 물었다.
“그래.”
주육낭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시녀가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것을 곁눈질로 느꼈다.
보긴 뭘 봐! 뭘 보냐고!
“수련 다 하셨으면, 옷이라도 좀 걸쳐서 몸을 가리시는 건 어때요? 곧 있으면 아씨께서 활쏘기를 하실 시간이라서요.”
시녀가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주육낭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달아올랐다. 전에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흘깃 쳐다보고 읊조렸던 말이 생각났다.
– 벗으니까, 못생겼어요.
주육낭이 사환의 손에 들려있던 옷을 아무렇게나 몸에 두르고 다급하게 소매 한쪽에 팔을 집어넣었다.
딸가닥거리는 나막신 소리가 들려오나 싶더니, 무채색 저고리에 꽃이 수놓아진 치마를 입고 소매를 동여맨 여인이 어깨에 활을 멘 채 천천히 연무장 안에 들어왔다.
주육낭이 옷을 입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저, 거꾸로······.”
정교랑이 들어옴과 동시에 사환이 말하자, 주육낭은 사환이 정교랑에게 반대쪽으로 돌아서라고 말하는 줄 알고 사환에게 발차기를 날리며 호통쳤다.
“거꾸로 돌긴 뭘 돌아! 괜한 소리를 왜 해!”
“아니, 도련님이 옷을 거꾸로 입었다고요.”
바닥에 주저앉은 사환이 잔뜩 억울한 얼굴로 말했다.
주육낭이 고개를 숙여보자, 옷을 정말로 거꾸로 입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한껏 달아올라 있던 그의 얼굴은 더욱 화끈거렸다.
주육낭이 민망해하며 서둘러 옷을 다시 벗었을 때, 유유히 그 옆을 지나가던 정교랑이 갑자기 발걸음을 멈췄다.
“왜, 왜!”
주육낭이 급하게 마구잡이로 옷을 몸에 걸치고는 눈을 부릅떴다.
“좋은 아침이에요.”
정교랑이 고개를 숙여 문안 인사를 하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좋은 아침은 개뿔! 사내의 헐벗은 몸을 보면서 문안 인사를 하는 여인이 어디 있다고!
주육낭이 정교랑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투덜댔다.
“주 공자님, 그래도 사 년 전보다는 몸이 훨씬 좋아지셨네요.”
시녀가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주인이며 아랫것이며 하나같이 창피를 모르니 원!
주육낭이 옷을 고쳐 입고 허리끈을 꽉 묶을 때쯤, 그의 등 뒤로 활시위가 떨리는 소리와 화살이 쏜살같이 날아가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성큼성큼 걸어 연무장을 벗어났다.
정교랑이 매일 아침 활쏘기를 한다는 소식은 금세 주 노야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서둘러 사람을 시켜 연무장에 있는 과녁들을 모두 새것으로 교체했다. 그리고 집안의 자식들에게 한 시진 일찍 아침 수련을 끝내라고 명했다.
“왜요!”
주육낭이 씩씩대면서 주 노야에게 대꾸했다.
“저희가 무예를 수련하는 건 무장 가문의 자제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 여인은 그저 활쏘기 놀이를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교교가 하는 일은 모두 당연한 일이다.”
주 노야가 눈을 부릅뜨고 한 발짝도 물러날 수 없다는 듯이 호통쳤다.
이튿날, 다른 형제들은 주 노야의 말대로 한 시진 일찍 수련을 끝냈지만, 주육낭은 혼자 연무장에 남아 수련을 계속했다. 때마침 주 노야는 출타하여 집에 없던지라, 그를 말리던 다른 형제들도 결국 그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주육낭은 며칠 전보다 한술 더 떠서, 정교랑이 활쏘기를 하는 와중에도 연무장을 떠나지 않았다. 물론, 정교랑이 오기 전에 미리 옷을 챙겨 입는 것은 잊지 않았지만.
“주 공자님, 진짜 대단하시네요.”
주육낭이 석쇄를 연달아 몇 번이고 들어 올리는 것을 본 시녀가 감탄했다.
어깨가 으쓱해진 주육낭은 대꾸하지 않고 거들먹거리면서 병기를 올려두는 선반 앞으로 걸어갔다.
“주 공자님은 십팔반병기(十八班兵器)를 다 다룰 줄 아세요?”
시녀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주육낭이 말없이 곤봉 한 개를 뽑아 들고 정교랑 쪽을 곁눈질로 힐끔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벌써 세 번째 과녁 앞으로 옮겨갔다. 초봄의 푸르스름한 하늘빛 아래에 서 있는 정교랑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주육낭이 곤봉과 칼을 번갈아 가면서 휘두르자, 그의 옷자락이 사방으로 흩어지는 꽃잎처럼 휘날렸다. 그의 몸놀림을 구경하던 시녀가 연신 손뼉을 치면서 환호했다.
숨이 살짝 거칠어진 주육낭이 장창으로 병기를 바꾸고 고개를 슬쩍 돌려보더니, 잠깐 멈칫했다.
어디 갔지?
“주 공자님, 전장에서는 어떤 병기를 쓰세요?”
시녀가 해맑은 얼굴로 물었다.
“너희 아씨는?”
주육낭이 물었다.
“저희 아씨요? 저희 아씨는 전장에 나가시지 않잖아요.”
시녀가 웃으면서 대꾸했다.
주육낭이 눈을 부릅뜨고 과녁을 가리키면서 다시 물었다.
“너희 아씨는 어디 갔냐고 물은 것이다.”
시녀가 그제야 아, 하고는 고개를 돌려보았다.
“글쎄요, 아마 처소로 돌아가셨을걸요?”
아마 처소로 돌아가셨을걸요? 누가 윗전 시중을 저따위로 들어?
“괜찮아요. 저희 아씨는 제가 시중들 필요가 없거든요. 주 공자님, 주 공자님, 전장에 나갔을 때는 장창을 쓰세요, 아니면 칼을 쓰세요? 저것도 한 번만 써 주시면 안 돼요? 저건 무슨 병기예요?”
시녀가 선반을 가리키며 묻자, 주육낭은 성가시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리 가.”
주육낭은 시녀를 더 상대하지 않고, 겉옷을 손에 쥔 채 연무장을 떠났다. 사환과 몸종들이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아갔다.
연무장을 떠난 주육낭은 시녀의 재잘대는 목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자,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고 따라오는 사람이 없는지 살폈다. 시녀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주육낭은 그제야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근육통이 온 어깨를 주물렀다.
전장에 나가서 싸우는 것보다 더 힘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