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61
교랑의경 561화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요. 마마께서 오랜만에 평왕 전하를 뵙고 있기도 했고, 폐하와 함께 세 분이 오붓하게 식사를 하시던 중이라, 그런 사소한 일은 방해가 될까 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황후마마께서는 잠시 앉아 계셨다가 금방 궁으로 다시 돌아가셨고요. 오가는 길에 계속 가마에 타 계셨고, 가마에서 내릴 때는 언제나 궁녀 둘이 양옆에서 황후마마를 부축하고 있었습니다. 태후마마께서도 깜짝 놀라셨습니다. 황후마마께서 죽을 때가 되어 잠시 기력을 되찾았나 싶어서요.”
귀비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가 미간을 찌푸리고 내시를 나무랐다.
“허튼소리!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니라!”
내시가 헤헤 웃으면서 재빨리 귀비에게 아첨을 떨었다.
“마마 앞에서 못 할 말이 뭐 있겠습니까.”
귀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다.
“마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마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셔도 평왕 전하께서 태자가 된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리고 장차 천자가 되실 거고요. 나중에 황후마마께서 건강을 되찾으시더라도, 이곳 내궁에서 황후마마는 텅 빈 껍데기일 뿐, 실제로 가장 존귀하신 분은 바로 귀비마마 아니십니까.”
이때다 싶은 내시가 얼른 아부를 떨며 귀비를 안심시켰다.
그야 당연하지. 하지만······.
“평왕이 태자로 책봉되지 않는 한, 본궁은 영 마음이 안 놓여서 말이다.”
귀비가 문밖을 내다보면서 두 손을 꼭 잡았다.
고 대인의 말씀이 맞았어. 마마께서는 마음의 병을 얻으신 게야.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거라. 본궁은 진안 군왕이 경성으로 돌아오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고. 본궁은 진안 군왕에게서 들려오는 좋은 소식도 더는 듣기 싫다고 전해라.”
귀비가 ‘좋은 소식’이라는 네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귀비의 살기 어린 말을 듣고도 내시는 겁먹거나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주저하면서 고민할 뿐이었다.
“마마, 너무 급한 거 아닐까요? 천천히 하셔도······.”
내시가 조용히 말했지만, 귀비는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천천히는 무슨 천천히! 십 년씩이나 뜸을 들인 것으로도 부족하더냐?”
내시는 더는 말을 붙이지 못하고 맞는 말이라며 머리를 조아렸다.
“본궁의 말을 명심해라. 본궁도 네놈들이 무슨 생각인지 잘 알고 있어. 본궁에게 신중히 하라고, 더 주도면밀하게 일을 처리하라고 하고 싶겠지. 하지만 한 걸음을 놓치면 다음 걸음도 놓치게 되고, 다다음 걸음도 놓치게 된다. 너희들은 진안 군왕 따위 언급할 가치도 없다고 여기는 게지? 죽이고 싶을 때 쉽게 죽일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귀비가 천천히 말했다.
“소인들이 어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지만 귀비는 콧방귀를 뀌며 피식 웃었다.
“너희들이라면 벌써 그런 생각을 하고도 남았을 거다. 하지만 너희들, 이런 생각을 안 했느냐? 벌써 십 년이 지났고, 그 사이에 그놈을 해치울 기회가 두어 번은 더 있었어. 그런데 번번이 실패하지 않았느냐. 먹는 것으로 해치려 했더니, 이 태의가 정성을 쏟아 고쳐냈고, 사냥하러 나간 틈에 없애 버리려고 했더니 갑자기 평왕이 중간에 나타났다. 드디어 황궁 밖으로 나갈 기회가 생겨 늑대 떼를 불러왔더니, 생판 모르는 행인들과 함께 야영하며 늑대들을 물리쳤지. 쉽게 죽이기에는 그놈 명줄이 보통 질긴 게 아니야.”
귀비가 고개를 돌리고 내시를 쳐다보았다.
“그놈은 운이 너무 좋고, 명줄이 너무 질겨.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운은 점점 더 좋아지고, 명줄은 점점 더 질겨질 거다. 너희들이 손쉽게 죽이기에, 그놈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라고.”
귀비의 말에 내시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하신 말씀이옵니다, 마마. 소인이 당장 사람을 시켜 말을 전하겠습니다.”
내시가 잠시 주춤하고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말씀대로, 태자 책봉은 더는 미룰 수 없습니다. 소인이 즉시 대인들께 말씀을 여쭈러 가겠습니다.”
귀비가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본궁이 급해서가 아니라, 너희들이 너무 상대를 얕봐서 그래.”
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궁은 황후를 보러 가야겠다. 이렇게 좋은 소식이 전해졌는데, 본궁이 친히 가서 축하해야지.”
귀비의 말에 내시는 서둘러 궁녀들을 불러와 귀비가 편히 환복할 수 있도록 물러났다.
잠시 뒤, 귀비가 궁녀들에게 둘러싸여 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것을 본 내시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정말로 이상하긴 하네.
진안 군왕이 이번에 귀비에게 결례를 보인 것과 황후마마의 병세가 갑자기 호전된 것 사이에 어떤 연관이 있으려나?
그런 생각이 뇌리에 잠깐 스쳤지만, 이내 내시는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설령 연관이 있다고 해도, 그게 무슨 대수라고.
황후의 건강이 아무리 좋아진다 한들 결국 황후일 뿐이고, 진안 군왕이 제아무리 황제와 태후에게 잘 보이려 애쓰고, 이번 기회로 공로를 인정받는다고 해도 결국 군왕일 뿐이야.
이번 일로 자신을 향한 질투와 시샘만 더하고, 남들에게 더욱 눈엣가시가 된 것 외에는 아무런 이득도 없을 텐데.
태자 책봉이 가까워지니, 황제에게 좋은 점수를 얻기 위해 발악하는 거겠지. 조금이라도 더 오래 기댈 수 있도록.
생각해 보니, 정말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늦가을의 메뚜기와 죽기 직전에 잠깐 기력이 좋아지는 사람들 같군.
내시가 가볍게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대낮의 덕승루에서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화스러운 상등 별실 안에 사내 일고여덟 명이 관기를 하나씩 옆에 끼고 둘러앉았다. 그중 단연 제일 돋보이는 사람은 정사낭의 옆에 앉아 있는 주 낭자였다.
주 낭자는 머리를 느슨하게 올려 묶고, 별다른 장신구 없이 옥비녀를 하나 꽂고 있었었다. 진한 화장이 아니어서 더욱 청순한 분위기를 풍기는 주 낭자에게서는 다급하게 단장한 티가 났다.
“주 낭자가 사낭을 보고 싶어 마음이 급했나 보네. 제대로 치장하기도 전에 달려오다니.”
옆에 있던 관리들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주 낭자가 소매로 살짝 입을 가리고 웃으면서 두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눈빛은 사람의 영혼을 홀릴 정도로 매력적이었지만, 주 낭자는 오로지 정사낭에게만 그런 눈길을 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사내들은 모두 정사낭에 대한 부러움과 감탄을 금치 못했다.
“관인께서 아직 다친 곳이 낫지 않아 출타하시기 불편하실 줄 알았어요. 소인 홀로 며칠 동안 심심하고 무료했는데, 관인께서 갑작스레 오시는 바람에 소인은 정말······.”
주 낭자가 아양 섞인 표정으로 가볍게 정사낭을 탓했다. 주 낭자가 한 손으로 정사낭의 팔을 흔들며,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리고 말을 이어갔다.
“소인은 정말 창피해요. 소인이 꽃단장을 마치고 오도록 부디 공자님께서 기다려 주셔요.”
별실 안에 큰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무런 단장도 하지 않고 손님을 맞으러 나오는 관기는 없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단장에 차이가 있다면 손님에 따라 단장하는 정도가 다를 뿐, 관기들은 절대로 아무런 준비 없이 손님을 만나지 않는다. 따라서 자리에 앉은 사내들은 당연히 주 낭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주 낭자가 공연히 정사낭에게 잘 보이려고 일부러 저런 말과 연기를 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주 낭자의 모습이 연기인 걸 알면서도 사내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여인이 자신을 위해 연기까지 해 가며 환심을 사려 한다는 게 즐겁고,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기쁨이기 때문이었다.
덕승루의 화기애애한 분위기와는 달리, 조회를 마치고 평왕을 따라 평왕부로 온 고 관인의 표정은 몹시 어두웠다. 고 관인과 평왕의 앞에서도 가희와 무희들이 가무를 펼치고 있었다.
“전하, 아버지께서 가희와 무희들을 왕부에 두지 말라고 하셨잖습니까?”
고 관인이 먼저 입을 뗐다. 평왕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평왕부의 총관이 예를 올리면서 먼저 대답했다.
“관인, 왕부에서 양성하는 이들이 아니오라, 태후마마의 탄신일 축하 연회에 가무를 선보이려 잠시 불러온 자들입니다. 전하께서는 늘 자중자애하는 분인데, 소인들이 어찌 감히 그런 불경스러운 짓을 저지르겠사옵니까.”
“됐네. 본왕은 책 읽을 시간도 부족한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다고. 자네의 부친처럼 본왕을 어리석은 이로 취급하지 말게.”
고 관인이 서둘러 알겠다며 아첨의 미소를 보였다.
“전하께선 글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십니다. 조정 대신들 말로는 이번에 평왕 전하께서 과거 시험을 보셨더라면 아마 십 등 안에는 충분히 드셨을 거라고 하더군요.”
평왕이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인지라, 평왕의 표정이 한결 온화해졌다.
“본왕이 그 문제들을 풀어보긴 했네. 별것 아니더군.”
고 관인이 술잔을 높이 들고 머리를 조아렸다.
“소생이 평왕 전하께 진사주를 바치겠나이다.”
평왕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퉤 하고 침 뱉는 시늉을 했다.
“신선거의 진사주가 아닌 것이 아깝군.”
신선거 얘기에 고 관인의 웃음이 어색하게 굳었다.
“신선거에는 대단한 신선이 살고 있나 봅니다. 이토록 사람을 괴롭히다니.”
고 관인이 이를 악물고 술잔을 비웠다.
신선거는 정씨 가문의 것이었고, 최근 고 관인과 정씨 가문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평왕도 알고 있었다.
“그 낭자의 손이 안 닿는 곳이 없군. 진안 군왕도 그 여인을 연회석에 초대하고 경왕을 부탁한 일로 그 여인이 아주 거드름을 피우며 경왕부를 당당하게 드나든다지? 태후마마께서 경왕에게 붙여둔 궁인들은 그 여인에게 말도 못 건다더군. 무슨 말만 물어도 그 여인이 호통을 친다면서.”
평왕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야기를 듣던 고 관인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기색으로 술잔을 탁자 위에 세게 내려놓았다.
“전하, 이게 다 황실에서 그 여인을 너무 제멋대로 굴게 내버려 두어서가 아닙니까. 여인네 하나가 무당 노릇을 하면서 이리 거만하게 구는데, 이러다가는 폐하께서 그 여인을 궁으로 모셔와 부적을 쓰게 하고 굿까지 할 판입니다.”
그 여인이 진안 군왕과 무척 가깝게 지낸다고 들었어. 게다가 바보인 경왕의 병도 말끔하게 고칠 수 있다고 들었고. 이러다 그 여인이 폐하의 눈에 들어, 폐하께서 그 여인의 말을 듣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면 큰일인데.
폐하 앞에 있을 때마다 걸림돌이 되는 진안 군왕 하나로 부족해 천자를 쥐락펴락하는 신선 낭자까지 더해진다면 내 앞날은 아주 엉망진창이 될 게야!
평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여인네 하나일 뿐인데, 어찌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게 정녕 말이 됩니까?”
고 관인이 씩씩대며 화를 냈다.
여인네라.
평왕이 고 관인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없을 리가 있나. 여인네라면 지아비를 하늘로 삼아야 하는 게 숙명 아닌가. 그러니 그 여인에게 신랑감을 하나 찾아주면 그만이지.”
신랑?
고 관인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고 평왕을 쳐다보았다.
“누가 그런 여인과 혼례를 올리고 싶겠습니까? 그리고 태후마마께서 이미······.”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끝을 흐렸다.
“다른 사람이라면 못 하겠지만 고 관인이라면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평왕이 잠시 고 관인을 쳐다보다가 눈썹을 으쓱하고 말했다.
내가?
고 관인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런 천것을 누가 좋아한다고.”
고 관인의 반응을 보자, 평왕은 자신의 방법이 꽤나 좋은 생각이라고 느꼈다.
“그 천것을 내가 본 적이 있긴 한데, 용모는 나쁘지 않더군.”
“전하, 용모와는 별개의 일입니다. 불가능한 일이에요.”
고 관인이 연신 고개를 저었다. 평왕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불가능한 일이라니? 그 천것의 가문은 어떤 가문이고, 자네의 가문은 또 어떤 가문인가? 경성에서 고씨 가문에 혼담을 넣으려는 사람들은 차고 넘쳐. 정씨 가문은 감히 넘볼 수도 없는 가문과 인연을 맺는 것이야.”
“전하, 저희는 원수지간입니다.”
고 관인이 말했다.
“원수지간이니 자네가 그 여인을 가져야지. 그 여인과 혼례를 올리기만 하면, 그 여인은 완전히 자네의 것이 되는 거잖나. 여인은 지아비를 하늘같이 섬겨야 하니, 자네의 말을 듣지 않는 날에는 혼을 낼 수도 있고.”
혼을 낸다는 자신의 말에, 평왕은 저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