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74
교랑의경 574화
반근이 잠시 고민하는 사이, 진호는 마치 정교랑과 반근이 대꾸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 혼자서 말을 이어갔다.
“정 낭자, 지금이라도 원칙을 조금 바꾸는 건 어떻습니까? 이번 일에는 고위급 관료와 막강한 권력이 연관되어 있으니, 주씨 가문과 혼사를 치르는 건 가장 좋은 선택이 아니에요. 하지만 우리 집안이라면 괜찮잖습니까. 우리 집안이라면, 이번 일을 잘 마무리 지을 수도 있을 거고, 굳이 낭자가 스스로 손해 보지 않아도 될 겁니다.”
진호가 한꺼번에 말을 다 한 뒤, 조심스럽게 눈앞에 있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이번 일은 내가 나서게 해 줘요.”
“뭘 나서요?”
정교랑이 물었다. 멈칫했던 진호는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설마 못 알아들은 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괜찮아. 더 명료하게 이야기를 해 줘야겠다.
“낭자는 내 생명의 은인입니다. 그러니 우리 가문과 혼사를 치르는 것은 몹시 이치에 맞는 일이자 미담으로 남을 일이기도 하죠. 태후와 평왕의 마음에 들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이치에 합당한 일이라면 그들도 아무 말 못 할 테고요. 게다가 저희 진씨 가문은······.”
진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정교랑이 소리 내어 진호의 말을 끊은 것은 아니지만, 진호 스스로 말하는 것을 멈췄다.
“그 일로 왔던 거예요?”
진호가 말을 멈추자, 정교랑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일은 이제 마음 쓰지 말아요. 더는 이 일을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정교랑이 미소를 머금고 예를 표했다.
또 이러네.
진호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그는 정교랑이 단정한 자세로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더는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얼핏 계산해 보아도, 정교랑을 제일 많이 만난 사람은 바로 자신이라는 것도 진호는 잘 알고 있었다. 선상 연회, 꽃등 놀이, 화괴의 춤 감상과 꽃놀이까지, 진십삼은 정교랑과 가장 다양한 일을 함께한 사람 또한 자신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아직도 이렇게 낯설기만 할까. 정 낭자와 마주 보고 앉을 때마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렇게나 가까이 있으면서도,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는 사람.
“알겠어요. 그럼 내가 신경을 쓸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알려 줘요.”
진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교랑이 미소를 머금으며 예를 표하자, 진호도 답례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호가 말을 타고 정씨 저택을 떠날 무렵, 저택 근처에 다다른 주복이 그를 발견했다. 하지만 진호는 주복을 보지 못한 채 지나쳤다.
십삼이 여기에 있었네. 혹시 또 무슨 방법이라도 생각해 낸 건가?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어딘가에 정신이 팔린 사람 같던데.
생각에 잠겨 말을 천천히 움직이던 주복이 무언가를 보고 다급하게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앞쪽을 내다보았다.
정씨 저택의 문 앞에 또 누군가가 멈춰 서더니 여름 햇볕을 받으며 말에서 내렸다. 화려하지 않은 옷을 입은 사내였지만, 누가 보아도 한눈에 주목할 만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말에서 내린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주복은 사내의 용모를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멀리서도 그 사내의 여유로움과 가벼운 발걸음이 느껴졌다. 사내가 층계를 올라 대문을 두드리자, 금세 문이 열렸고 사내는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저 사람이 여길 왜? 아니, 저 사람이 언제 경성으로 돌아온 거지?
주복은 티 나지 않게 저잣거리 주위를 훑어보았다. 노점상들의 호객 소리와 바쁘게 오고 가는 행인들 사이에 어딘가 날카로운 기운이 정씨 저택 주위에 도사리고 있음이 주복의 예리한 시선에 느꼈다.
“군왕 전하, 여긴 어쩐 일이세요?”
진안 군왕이 마당 안으로 들어서자, 사환의 말을 듣고 달려나온 반근이 소리쳤다. 마당에 들어선 뒤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그늘 밑에 선 진안 군왕이 씩 웃었다.
“나랏일을 잘 마무리하고 돌아오는 길이지.”
정말 이상하네. 이 저택에는 오늘 처음 들어온 건데, 왜 이렇게 집에 돌아온 느낌이 들지?
아니야, 아니야. 그런 식으로 말할 수는 없고, 좀 익숙하다고 해야 하나?
진안 군왕은 마음이 놓이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밖으로 걸어 나온 여인과 몸종을 쳐다보았다.
사람이 익숙하니, 장소도 익숙하게 느껴지는 거구나.
“정말이에요? 이런 엄청난 일에, 왜 미리 연통도 없으셨어요?”
반근이 의아한 얼굴로 묻자, 진안 군왕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창피한 일을 저지르고 왔는데, 무슨 낯짝으로 거창한 환영을 바라겠느냐. 마음 같아서는 성 밖에 땅굴을 파서 몰래 기어들어 오고 싶었다.”
진안 군왕이 우스갯소리를 하자, 반근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전하, 무슨 창피한 일인데요?”
“너는 어째 점점 더 말 많은 반근을 닮아가는구나. 내가 큰소리 떵떵 치고 혼자서 산적을 잡으러 산채에 들어갔다가,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상황에 폭죽으로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쳐 나오지 않았더냐. 그 창피한 일을 굳이 내 입으로 직접 말하라고?”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반근은 배를 잡고 허리를 펴지 못할 정도로 웃었고, 정교랑도 진안 군왕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그건 창피할 일이 아니죠. 행운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니,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에요.”
칭찬의 말을 수없이 들은 진안 군왕이었지만, 정교랑의 입에서 나온 ‘칭송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진심이 가득 담긴 웃음이 피어올랐다.
“오늘 전하께선 저희 아씨의 축하를 받기 위해 오신 건가요?”
반근이 웃으면서 진안 군왕에게 길을 안내했다. 반근의 말을 들은 진안 군왕은 무언가 생각난 듯이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은, 오늘 낭자와 진지하게 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회랑 아래까지 걸어갔던 정교랑이 몸을 돌리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진안 군왕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고 정교랑을 향해 물었다.
“정방, 나한테 시집오는 건 어때요?”
으응? 뭐라고?
반근은 무언가를 들었으면서도 아무 말도 듣지 못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반근은 넋이 나간 채로, 마당에 서 있는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정방, 나한테 시집오는 건 어때요?
마당에 정적이 흘렀다. 반근의 놀란 얼굴을 본 진안 군왕이 앞으로 한 걸음 더 내디디며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정방, 내게 시집오는 건 어때요?”
진안 군왕이 여유롭고 솔직한 모습으로 물었다.
정말로 그 말을 한 게 맞구나. 군왕 전하도 고씨 가문이 태후를 이용해서 강제로 혼인하려는 걸 알고 있었던 거야.
반근이 정신을 차리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반근이 놀란 건 진안 군왕의 청혼 때문이 아니었다. 요 며칠 청혼하러 온 사람이 벌써 세 명이나 되는데, 이토록 솔직하게 청혼한 사람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고씨 가문이든, 주 노야든, 진호든, 모두 완곡하게 혼담을 꺼냈었다.
어찌 됐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씨를 위해서 나서 준다는 건 참 기쁜 일이야.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예를 표했다.
“전하께서 마음을 써 주시는 건 감사하나, 이런 사소한 일에 굳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이게 어떻게 사소한 일이에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말을 끊고 웃었다.
맞아요, 아씨. 혼사는 절대로 사소한 일이 아니라고요.
반근이 속으로 한탄했다.
“벌써 잊었어요? 전에 내가 그랬잖아요. 낭자가 혼사를 치른다면, 좋은 신랑감을 골라 주겠다고 했죠.”
진안 군왕과 정교랑이 대청에 마주 앉자, 반근은 차를 올리고 뒤로 물러났다.
그게 아마 삼 년 전이었지?
반근은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때는 내가 아씨 곁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 정씨 가문과 주씨 가문에서 아씨의 혼수 때문에 서로 혼사를 치르겠다고 난리를 쳤지. 맞아, 아씨께서 혼담이 오간다고 말씀하시니, 군왕께서 담벼락 위에 매달려서는 아주 친절하게 자기가 신랑감을 잘 알아봐 주겠다고 했어.
– 결정을 못 내리겠거나 알아보기 힘들면 나한테 물어봐요. 내가 확실히 알아봐 줄게요. 중매하겠다고 나서는 이들이 절대 못 속이게 한다고 장담합니다.
정교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나요.”
“내가 정말 진지하게 고민해 봤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리 골라 봐도······.”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내가 최선인 것 같단 말이죠.”
정교랑이 또 웃었다.
“누구라 해도 상관없어요. 별일 아니니까, 굳이 마음 쓰지 않아도 돼요.”
“정방, 난 당신을 도우러 온 게 아니에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반근이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도우러 온 게 아니라고?
“근래에 여러 곳에서 낭자에게 혼담을 넣으러 왔다는 건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정말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그 사람들이 당신의 신랑감으로 적합할지, 그 집안에 시집을 가면 좋을지 나쁠지는, 내가 판단할 게 아니라 낭자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게 맞겠다 싶었습니다. 혼사를 치른 후의 생활은 오롯이 낭자의 것이니까요.”
정교랑은 미소 띤 얼굴로 진안 군왕을 쳐다볼 뿐, 그의 말을 끊지 않았다.
“이건 당신의 일이고, 당신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인데, 내가 뭐라고 낭자를 돕겠어요.”
정교랑이 웃으면서 진안 군왕에게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그래서 낭자에게 청혼하러 온 겁니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반근은 결론이 이상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역시 나는 이분들의 말을 못 알아듣겠어.
“근래에 일어난 일들을 알게 된 뒤로, 정말 열심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결국 나 자신부터 먼저 생각하기로 했어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눈부실 정도로 밝은 한낮의 햇살이 정교랑을 비췄다. 밝은 햇살 때문인지, 오늘따라 정교랑의 인상은 유난히 부드러워 보였다.
정교랑이 입는 옷은 언제나 비슷했다. 진안 군왕을 처음 알게 된 그날 밤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정교랑은 가슴께까지 오는 수수한 색깔의 치마를 입고 있었다. 겨울에는 그 위로 짙은 색의 겉옷을 걸치고, 날이 더워지는 여름에는 촘촘히 짜인 얇은 반소매를 걸쳤다.
정교랑의 얼굴에는 아주 옅은 색의 연분홍 연지가 발려 있었고, 새까만 머리카락은 하나로 묶어 나무 비녀로 고정해 두었다. 정교랑은 늘 별다른 장신구 없이 작은 은빗 하나를 머리 옆에 꽂고 다녔다. 정교랑의 의상과 장신구는 무척이나 간소해서, 그녀의 시중을 드는 반근보다도 단출해 보였다.
정교랑은 항상 허리를 꼿꼿이 곧추세우고 서 있었는데, 그 자세는 황궁의 상궁들조차 지적할 곳 하나 없을 정도로 바른 자세였다.
그날 산에서 늑대 떼를 함께 물리쳤을 때도, 모닥불 옆에 서 있을 때도, 같은 자세였어.
조용하고 담담하게 서서, 좋고 나쁜 것을 분별하고, 이 세상에 일어나는 온갖 위험한 일들을 겪고, 간혹 아름다운 것을 보기도 하고, 무언가를 얻었다가 잃는 경험도 하고.
방백종, 슬퍼하지 마요.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말만 생각하면 내 마음은 너무나도 평온해져.
이 세상에 내가 슬퍼하지 않길 바라는 사람은 단 둘.
한 명은 내가 지키지 못해 잃게 된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곧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어쩌면 앞으로 영원히, 내가 이 여인의 뒤에 서서 그녀를 든든하게 지켜 줄 수 있는 일은 없을지도 몰라.
그런 건 상상하기도 싫고,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야.
진안 군왕이 앞으로 또 한걸음 내디뎠다.
“내가 정방과 혼인하고 싶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가 당신과 혼인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진안 군왕이 한 손을 자신의 가슴 위에 올려놓고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나 방백종이, 정방과 혼인하고 싶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