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585
교랑의경 585화
진소 부인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차를 마시던 진소는 부인의 말을 듣고 하마터면 사레에 들릴 뻔했다.
“십팔랑? 십팔랑이 언제 돌아왔소? 그런 허튼소리를 멋대로 하고 다니면 쓰나.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궁을 드나드는 십팔랑이 어찌 그런 말을.”
진소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혀를 찼다.
“허튼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십팔랑이 나한테만 한 말이에요.”
진소 부인이 서둘러 해명했지만, 진소는 곧바로 진십팔랑과 평소에 대화를 나누는 형제자매들을 모두 불러왔다.
“아버지, 제가 왜 허튼소리를 하겠어요. 누구나 다 알 만한 일 아니에요? 배후가 있던 게 아니라면, 황궁의 경계는 왜 갑자기 삼엄해졌으며, 안비, 태후 그리고 귀비마마 세 분은 왜 갑자기 병이 났다면서 모습을 보이지 않는 거죠? 아버지, 제가 말하지 않더라도 아버지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아마 세상 사람들도 다 그렇게 생각할걸요?”
나도 알다마다.
황궁에서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아무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이 온갖 추측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지.
폐하의 정서가 안정적이었던 이유가, 슬픔을 대신할 게 생겼기 때문이로군.
이건 사고가 아니다. 하늘이 황제를 벌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누군가가 고의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야.
이런 짓을 저지른 범인을 찾아내어 그자를 벌하면, 불안하고 억울하고 화가 난 폐하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겠지. 폐하는 그렇게 해야만 세상의 빛을 보기도 전에 죽은 황자에 대한 미안함을 덜고, 또 한 번 아이를 잃은 불행을 직시할 수 있는 게야.
이번 일은 폐하의 잘못이 아니라 고의로 이런 짓을 저지른 자의 잘못이고, 하늘의 뜻이 아니라 누군가의 음모라고.
“그렇다면 이번 일은 폐하께서 끝을 봐야만 끝이 나겠구나.”
진소가 천천히 말했다.
“그야 당연하죠. 너무나도 졸렬한 수작이잖아요. 태어나지도 않은 황자의 목숨으로 폐하를 위협하고 귀비마마를 모함했으니까요. 이렇게 심각한 일인데, 어떻게 끝을 보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진십팔랑의 말에 진소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네 말은, 배후가 안비라는 것이냐?”
진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버지, 두말할 필요가 있나요?”
진십팔랑이 대답했다. 진소가 고개를 저었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게다.”
“아버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게 바보 아니에요? 너무 빤히 보이는 수작이잖아요.”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너무 빤히 보이는 수작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무슨 뜻이지?
진십팔랑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을 물으려던 찰나, 사환 하나가 다급히 진소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했다.
진소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또 왜요?”
진소 부인이 서둘러 물었다.
“고능준이 폐하께 알현을 청했다고 하오.”
진소가 대답했다.
“고 대인께서 당연히 폐하를 뵈어야지요. 귀비마마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모함에 휘말렸잖아요.”
진십팔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진소가 웃음 지었다.
“고능준은 귀비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모함에 휘말렸기 때문에 황제를 뵈러 가는 것이 아닐 게야. 아마도 이 수작이 너무 빤히 보이기 때문에 가는 거겠지.”
“아버지.”
진십팔랑이 입을 열었지만, 진소는 그녀의 말을 끊고 진소 부인을 쳐다보았다.
“폐하께서 그 청을 들어주시고.”
진소 부인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곧이어 갑자기 이유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설마······.
“정 낭자도 그 자리에 불렀소.”
정 낭자!
진십팔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여인은 왜 불러요? 이 일도 그 여인과 관련이 있다는 거예요?”
진십팔랑이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이게 정 낭자와 무슨 관련이 있겠어. 궁에 병이 난 사람이 한둘이 아니니 정 낭자를 부른 거겠지.”
그럴 수도 있겠네.
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방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저마다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무엇 때문일지는 몰라도, 결국 이 일도 정 낭자와 어떤 관련이 있다는 거로군.
정말이지······.
진소 부인이 저도 모르게 자신의 입을 손으로 살살 쳤다.
마차에서 내려 궁문을 넘던 고능준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황실 금군에게 검문을 받고, 어린 내시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기려던 정교랑을 발견했다.
“정 낭자.”
고능준이 정교랑을 부르고는 빠른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정교랑이 몸을 돌리고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정 낭자, 이번에 내가 경성에 돌아온 이유는 낭자를 보기 위해서였는데, 잠시 지체하는 사이에 이제야 낭자를 보게 되었군요.”
고능준이 웃으면서 정교랑에게 공수의 예를 표하자 정교랑이 몸을 살짝 낮추며 답례했다.
“바깥이라 충분히 정중한 예를 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선 낭자에게 진심이 담긴 사과를 하고 싶습니다.”
고능준이 말하면서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아닙니다. 잘못이 없던 일에 사과할 필요가 있나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답례했다.
고능준과 정교랑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내시는 언성을 높이거나 재촉하지 않고 웃으며 완곡하게 말했다.
“고 대인, 정 낭자, 폐하께서 두 분을 기다리십니다.”
고능준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 낭자, 다음번에 꼭 댁에 방문하겠습니다.”
정교랑이 알겠다고 대답한 후, 두 사람은 내시의 안내를 받으며 앞뒤로 나란히 걸어갔다.
두 사람은 금세 근정전 앞에 도착했다. 걸음을 멈춰 선 고능준이 고개를 돌리자, 정교랑도 그를 따라 걸음을 멈춘 게 보였다. 고능준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정 낭자는 황궁 여인들의 병을 봐주러 입궁한 게 아니었나? 왜 여기로 온 거지?
“정 낭자.”
고능준이 정교랑에게 말을 물으려던 찰나, 근정전의 문이 열렸다.
“고 대인, 폐하께서 안으로 들라 하십니다.”
근정전 안에서 걸어 나온 내시가 예를 표했다. 고능준은 하는 수 없이 더 묻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걸음을 옮겼다.
폐하를 기다렸다가 같이 내궁으로 가려는 걸 수도 있겠군. 폐하께서는 정 낭자가 진료하는 것을 직접 봐야 마음을 놓으실 테니.
근정전 안으로 들어선 고능준은 곁눈질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몇 달 만에 돌아온 근정전은 사뭇 낯설게 느껴졌다.
역시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야.
망각은 좋은 것이기도 나쁜 일이기도 하지. 원래 세상만사란 이렇게 복과 화가 동시에 오는 법이니, 얼마나 뛰어난 수완으로 이 난관을 헤쳐나가는지가 무엇보다 중요하겠지.
고능준이 옥좌 위에 앉아 있는 황제를 향해 정중하게 읍을 했다.
“폐하, 사실 신은 이곳에 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고능준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뻔한 수작에다가, 남을 음해하려는 의도가 빤히 보이는 일인데, 내가 이리 조급하게 황제한테 달려와 억울함을 호소한다면 황제를 욕보이는 것밖에 더 되겠나. 하지만 궁에서 전해져 오는 소식들이 점점 더 이상해져서 말이야.
귀비는 역시 소문대로 궁에 연금됐고, 황제는 여전히 안비의 궁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고, 태후는 일절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는 탓에 황궁 소식이 이래저래 끊기게 되었어.
무엇보다 중요한 건, 황성사 사람들이 아직도 궁 안을 이리저리 누비고 다닌다는 사실이지. 보아하니, 황제는 이 뻔한 수작을 진지하게 파헤치려는 것이로군.
황제는 안비가 품고 있던 황자를 지극히 아꼈지.
그러나 사실 황자를 아낀다기보다는, 폐하 자신을 아꼈던 것이리라. 안비가 품고 있던 황자는 단순한 황자가 아니라, 황제의 희망이었으니까.
희망은 모두가 품고 살아가는 것이지만, 황제에게는 더욱 간절한 희망이 있었겠지. 신체 건강하고, 무병장수하는 희망.
지금 벌어진 일은 너무도 속이 훤히 보이는 수작인지라, 믿는 구석이 있지 않는 한 절대로 벌일 수 없는 짓이야. 황제의 희망을 철저히 짓밟고, 만천하의 사람들을 장님 취급, 바보 취급하는 것과 다름없으니.
“폐하, 폐하의 지나친 총애가 시샘과 화를 부른 것입니다.”
고능준이 말했다. 한쪽에 서 있던 내시가 깜짝 놀란 얼굴로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고 대인이 실성을 했나? 어떻게 저런 말을 입에 올리는 거야?
황제도 놀란 기색으로 고능준을 내려다보았다.
“고 대인의 말은, 황자가 짐의 잘못으로 변을 당했다는 뜻이오?”
황제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능준은 근정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는 확신이 들었다. 황제는 몹시 침착했다. 그에게서는 자식을 잃은 아비의 슬픔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평온함이 느껴졌다.
황제가 저리 침착한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닌데. 나는 저토록 냉정한 황제를 보러 온 게 아니야.
내가 보러온 것은 분노하는 황제의 모습이지. 적어도 황제가 분노해야만 생각이 더욱 활발해질 수 있으니. 내가 기대했던 모습은 저렇게 무뚝뚝한 얼굴로 남이 설계해 놓은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황제의 모습이 절대 아니라고.
“그럼 안비가 짐의 총애에 기대어, 황자를 저버리고 귀비를 음해했다는 말이오? 안비가 무엇을 위해 그리하지? 귀비를 음해한다고 한들, 안비가 지금보다 더욱 존귀한 대우를 받을 수 있나? 더욱 존귀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한들, 황자 없이 그게 무슨 소용이 있다고! 황자만 살아 있다면, 안비는 궁에서 갖은 영예를 누리며 편안히 살아갈 수 있었을 거요. 하지만 황자가 없어진 지금, 안비가 앞으로 궁에서 어떻게 지낼지는 그대 같은 궁 밖의 사내보다 더 잘 알지 않겠소!”
황제는 말을 하면 할수록 흥분하여 탁자에 손을 올리고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아직 부족해.
고능준이 허리를 숙이고 큰절을 올렸다.
“폐하의 말씀이 맞사옵니다. 안비가 아무리 귀비와 원수지간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앞길이나 다름없는 황자의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이런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를 리 없지요. 그래서 이 일이 더욱 수상하다는 겁니다.”
고능준이 잠시 뜸을 들이고 고개를 들었다.
“폐하, 안비가 황자를 회임했다고 맥을 짚은 태의가 몇 명입니까?”
옆에 서 있던 내시가 경악한 얼굴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 대인이 단단히 미쳤구나!
팍 소리와 함께, 황제가 탁자를 내리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능준, 그 말은 짐이 애초에 황자를 가지지도 못했고, 이 모든 것이 다 안비의 계략이라는 것이더냐?”
황제가 고능준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짐이 이럴 줄 알았어. 꼭 저런 말로 짐을 비웃을 줄 알았다고! 다들 짐이 더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고 비웃고, 애초에 아들을 가지지도 못할 거라고 비웃을 줄 알았느니!
저 봐라, 저 봐. 이제는 생각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아예 내 면전에 와서 저런 말을 지껄이는군.
고능준은 전혀 두려운 기색 없이 허리를 숙였다.
“폐하, 신은 그래서 폐하의 지나친 총애가 화를 불렀다고 한 것입니다. 윗사람이 좋아하면, 아랫사람은 더 좋아하는 법입니다(上有所好 下必甚焉 – 맹자). 신이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그 점이지요. 일부러 허튼수작을 부려 폐하의 눈을 속이는 것이요!”
고능준은 고개를 들고 황제를 쳐다보며 눈빛을 반짝이고 목청을 높였다.
“폐하, 당시 안비가 황자를 회임했다고 맥을 짚었던 태의는 몇 명이며, 누구입니까? 다른 태의들은 뭐라고 하던가요?”
황자를 회임했다고 맥을 짚었던 태의가 몇 명이냐고?
황제가 속으로 잠시 생각을 했다.
몇 명이었지? 한 명이었던 것 같은데.
궁에 있는 비빈들은 회임했을 때 특히 조심하는 편이라, 자신에게 익숙한 태의 하나만을 부를 터. 태의 하나가 맥을 짚고 진단을 내렸다면, 더는 다른 태의로 바꾸지 않았겠지.
“폐하, 태의 몇 명이 그리 말했습니까? 태의국에서는 관련 검증이 이루어졌습니까? 진맥했던 기록은 남아 있는지요?”
고능준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렸다. 그의 물음이 연달아 황제의 고막을 때렸다.
태의 몇 명이었냐고? 한 명이었지.
관련 검증이 이루어졌냐고? 아니, 당시 소식을 듣고는 너무 기쁜 나머지 따로 검증할 생각 같은 건 하지도 못했어.
설마······.
아니야, 아니야!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게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