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17
교랑의경 617화
관청 앞, 누군가가 진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고 관인과 작별 인사를 할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진호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고 관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대꾸했다.
“일부러 자네를 찾아온 건 아니네. 인수인계할 게 있어 잠시 들렀다 가려던 참이지.”
진호가 별다른 대꾸 없이 웃으면서 공수의 예를 표하고 곧장 걸음을 옮기려 하자, 고 관인이 서둘러 그를 다시 붙잡았다.
“아, 마주친 김에 부탁 하나만 하지.”
진호가 고 관인의 손을 뿌리쳤다.
“무슨 부탁?”
“경성에서 정 낭자를 불러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진 않은 것 같아서 말이지.”
고 관인이 능글맞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호가 고 관인의 팔을 덥석 쥐었다.
“그 여인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진호가 목소리를 낮추고 경고했다. 고 관인이 재빨리 진호의 손을 다독이면서 그를 진정시켰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미친놈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잘 들으시게. 오늘 오찬 이후에 정 낭자를 덕승루로 불러서 둘이 오붓하게 차나 한잔하고 있게나.”
고 관인의 말에 진호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 관인을 쳐다보았다. 고 관인이 진호를 향해 씩 웃고는 진호의 손을 자신의 어깨에서 떼어냈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미인과 즐겁고 여유로운 시간 보내길 바라네.”
고 관인이 말하고는 진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진호가 몸을 돌려 고 관인을 쳐다보았다. 말에 오른 고 관인은 진호를 향해 이가 다 보일 정도로 웃으면서 재차 손짓하고 말머리를 틀었다.
진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관청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황궁을 내다보았다.
뿌리를 뽑아야 한다라······. 이게 다 그놈 때문이야. 그놈 때문에 정 낭자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결단을 내려야 할 때를 놓치면 안 돼. 송두리째 뽑아버려야지.
황궁 안, 태후가 손을 휘휘 젓자, 내시 몇 명이 상소문으로 가득 찬 탁자를 얼른 옆으로 치웠다.
“마마, 고생 많으셨습니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태후가 그를 쳐다보면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폐하는 뵙고 왔느냐?”
태후의 물음에 진안 군왕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시울을 붉혔다.
“마마, 강녕하셔야 합니다.”
진안 군왕이 울먹이면서 말하자, 갑자기 태후의 눈에서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옆에 서 있던 내시들이 서둘러 태후에게 다가왔다.
“전하, 어서 마마께 그만 우시라고 위로의 말씀을 올리십시오. 마마께서 도통 눈물 마를 날이 없이 지내신 터라, 더 우시다가는 실명할 위험까지 있다고 태의가 말했습니다.”
내시들이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깜짝 놀란 진안 군왕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무릎을 꿇은 채 태후에게 다가갔다.
“마마, 마마, 어서 눈물을 거두시옵소서.”
진안 군왕이 자신의 눈물을 소매로 아무렇게나 닦으면서 말했다.
“이거 보세요. 소손도 울지 않습니다. 소손도 울음을 그쳤어요.”
태후가 진안 군왕의 손을 맞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 우리는 더 이상 울어서는 안 됩니다. 마마께서도 봉체를 보존하셔야지요. 폐하와 경왕, 그리고 저도 마마께서 안 계시면 아니 됩니다.”
진안 군왕이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면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태후가 진안 군왕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눈물을 닦는 동안, 궁녀들이 따뜻하게 데운 수건을 가져와 태후의 눈을 닦아주고 차를 다시 우려 다과상을 올렸다.
“너도 참 오랜만에 오는구나.”
태후가 말했다. 진안 군왕이 눈을 내리깐 채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마마, 신도 조심해야지요.”
“애가 앞에서 계속 신이니 뭐니,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네가 무슨 신하라고.”
태후가 화가 난 표정으로 내시들이 한쪽에 치워둔 상소문을 가리켰다.
“네가 조심한다는 게, 다 저기 쌓인 탄핵 상소를 말하는 게지? 뭐? 봉지로 나가는 것을 자청해야 한다고? 저들이 어찌 애가의 자손들에게 이래라저래라한단 말이냐!”
진안 군왕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가에는 감동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마, 마마의 뜻은 소손도 잘 알지만, 앞으로 그런 말씀은 삼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소손은 탄핵을 받아 마땅합니다.”
진안 군왕을 바라보던 태후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네가 이렇게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저들은 왜 몰라주는 게냐.”
진안 군왕이 서둘러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마마, 더는 눈물을 흘리셔서는 안 됩니다. 소손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마마께서 계신 한, 소손은 두려울 게 없습니다.”
태후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시들에게 명했다.
“경왕을 데려오너라.”
진안 군왕은 경왕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시선으로 내시들의 뒤를 따라가며 좌불안석한 모습을 보였다.
육가아를 못 본 지가 아주, 아주 오래됐네.
“둘이 안 본 지 이제 며칠이나 됐다고.”
진안 군왕의 모습을 본 태후가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었다. 진안 군왕이 태후를 쳐다보고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지난 무평 출정 이후로는, 이번이 경왕과 가장 오래 떨어져 있던 때입니다.”
진안 군왕은 말을 끝내자마자 또 시선을 문밖으로 돌렸다. 태후가 고개를 저으면서 웃었다.
“둘의 우애가 참 돈독하구나.”
태후가 감탄하면서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붉어진 그녀의 눈가에는 차마 그럴 수는 없다는 머뭇거림이 어렴풋하게 비쳤다.
“마마, 또 눈물을 보이시면 안 됩니다.”
내시가 조용히 마른기침을 하며 태후에게 수건을 건넸다. 내시의 말을 들은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렸다.
“마마, 우시면 안 됩니다.”
진안 군왕은 태후가 수건을 쥐고 눈가를 꾹꾹 누르는 것을 본 뒤에야 안심한 듯이 태후를 바라보았다. 이때, 경왕이 괴성을 지르면서 태후궁으로 들어왔다. 진안 군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에구머니나, 깜짝 놀랐네.”
태후가 실소를 터트렸다. 진안 군왕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문가로 뛰어가 뒤뚱뒤뚱 걸어오는 경왕을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육가아, 육가아.”
진안 군왕이 반가움에 연신 경왕을 불러댔다. 그가 활짝 웃으면서 경왕의 어깨를 붙잡고 분주하게 상하좌우를 살피며 물었다.
“이 형님이 보고 싶었지?”
경왕은 누군가에게 잡혀있는 것을 몹시 싫어할뿐더러, 지금처럼 이렇게 덥석 잡히는 것은 더더욱 싫어했다. 그래서 경왕은 진안 군왕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경왕의 짜증에도 진안 군왕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그를 다독이며 이리저리 살폈다.
“이 형님 안 보고 싶었어? 형님이 너 주려고 맛있는 것도 잔뜩 챙겨왔는데.”
진안 군왕이 주절주절 우스운 말을 내뱉자, 곁에 있던 내시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웃음을 참는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형님이 보고 싶진 않았냐고?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하는데, 형님은 무슨!
“경왕을 돌보시느라 마마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진안 군왕이 다시 점잖게 자리에 앉아 태후에게 예를 표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원래부터 애가가 잘 돌봤어야 하는데, 너무 오랫동안 네게 떠넘겼던 것이지.”
태후가 고개를 저으며 식사 준비를 지시했다. 식사를 준비하라는 태후의 말에, 진안 군왕이 경왕을 잠시 쳐다보다가 태후를 향해 예를 올렸다.
“마마, 소손이 궁에 남아 식사까지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오늘 궁에 머무른 시간이 꽤 길어서요.”
태후의 표정이 급변했다.
“애가가 밥 한 끼 먹이겠다는데, 그것조차 안 된다는 게냐! 여봐라! 가서 저 상소문을 모조리 불태워 버려라!”
태후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탁자를 쾅 내리치며 상소문을 가리켰다.
“마마, 아니 됩니다. 고정하시지요.”
진안 군왕이 서둘러 태후를 말렸다. 그런 진안 군왕을 보자 태후는 또 눈물이 차올랐다.
“네가 조심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조정의 신하들이 또 얼마나 가시 돋친 말만 해댈지. 그래, 그만 가 보거라.”
태후가 경왕을 향해 손짓하면서 그를 불렀다.
“경왕, 이리 와서 형님과 인사해야지.”
하지만 태후의 말을 이해할 리 없는 경왕은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손으로 쥐고 입안에 넣으려 했다. 진안 군왕이 그의 손에서 찻잔을 빼앗았다.
“경왕이 배가 고픈가 봅니다.”
진안 군왕이 다정한 눈빛으로 경왕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쉬운 듯 경왕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이를 악물었다.
“식사를 들여오라 하시지요. 소손도 마마께서 내어주시는 음식을 먹지 못한 지 꽤 오래된 듯합니다.”
태후의 뺨에 살짝 경련이 일더니 태후가 앞으로 내려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태후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움찔거리던 찰나, 옆에 있던 내시가 한발 앞서서 외쳤다.
“식사를 준비하라.”
내시가 진안 군왕을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전하께서 오실 줄 알고, 마마께서 특별히 전하께서 어렸을 적부터 즐겨 드시던 것으로 상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태후를 향해 예를 표했다.
“마마께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후가 진안 군왕을 바라보면서 감탄했다.
“너는 워낙 어릴 때부터 철이 들어서 그런지, 편식도 하지 않고 뭐든 잘 먹어 애가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어.”
얹혀사는 주제에 까탈스럽게 굴어서 좋을 게 뭐 있습니까. 주는 대로 잘 먹어야지요.
진안 군왕이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태후를 향해 빙긋 웃었다.
오찬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태후는 기분이 울적한 탓에 몇 입 먹지도 않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장난을 치던 경왕은 금방 배가 찼는지,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이리저리 배배 꼬았다. 진안 군왕은 그런 경왕을 간신히 어르고 달래면서 밥 한 그릇을 겨우 먹였다. 하지만 경왕은 더는 앉아 있기가 힘들었는지 허공에 대고 손을 허우적대면서 아무렇게나 발길질을 하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됐다, 됐어.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라.”
태후가 말했다. 진안 군왕은 그제야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경왕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하지만 경왕은 성가시다는 듯이 진안 군왕을 힘껏 밀치고 옹알이를 하면서 뛰쳐나갔다. 내시들이 서둘러 경왕을 뒤쫓아 뛰어갔다.
진안 군왕은 몸을 일으키고 저도 모르게 경왕의 뒤를 두어 걸음 따라가다가 멈춰 섰다.
“괜찮다. 나중에 자주 들어와서 경왕을 보면 되지. 남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우리는 한 식구야.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 저들이 뭐라고 하든 애가는 두렵지 않다.”
태후의 말에 진안 군왕이 몸을 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손도 두렵지 않습니다.”
내시가 진안 군왕에게 다가와 차를 올렸다.
“전하, 차를 드시지요.”
내시가 고개를 숙인 채 공손하게 말했다.
진안 군왕은 내시가 바친 차를 잠시 바라보다가, 손으로 찻잔을 가져와 고개를 꺾고 그 안에 든 차를 단숨에 비웠다.
“마마, 소손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담담하게 태후를 향해 예를 올렸다. 태후가 몸을 일으키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진안 군왕이 예를 올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태후가 눈물을 머금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진안 군왕을 불렀다.
“위낭.”
태후가 그를 ‘위낭’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늘 진안 군왕이 입궁한 뒤로 처음이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고 태후를 바라보았다.
“위낭.”
태후가 진안 군왕을 마주 보며 또 나지막한 소리로 그를 불렀다.
“마마, 울지 마세요. 소손이 또 마마를 찾아뵙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말하고는 다시 예를 표했다.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뒷걸음으로 문가에 다다른 진안 군왕을 바라보던 태후가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궁녀들이 서둘러 태후를 부축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위낭.”
태후가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진안 군왕을 불렀다.
“마마, 오늘은 뙤약볕이 너무 심하니 밖으로 나가시진 마옵소서.”
문가에 서 있던 내시가 태후에게 말했다. 문턱을 넘어선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고 빙긋 웃었다.
“마마, 나오지 마세요. 이제 들어가서 좀 쉬셔야죠. 소손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진안 군왕은 말을 마치자마자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태후궁을 떠났다. 점점 더 멀어지는 진안 군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태후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내 새끼, 애가의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프구나.”
가슴에 손을 올리며 힘겹게 말을 내뱉은 태후는 곧바로 온몸에 힘이 쭉 빠진 듯이 쓰러졌다. 주위에 있던 내시와 궁녀들이 재빨리 태후를 부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