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655
교랑의경 655화
귓가에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금세 멈췄다. 진안 군왕은 몸을 뒤척이고 또다시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누군가의 손이 그의 손을 가벼이 쓰다듬다가 무언가에 걸린 듯 미끄러졌다. 순간 눈을 번쩍 뜬 진안 군왕은 정교랑과 눈이 마주쳤다. 새벽빛 속에 반짝이는 검은 두 눈이 그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진안 군왕은 벌떡 일어나 앉으려 했지만, 정교랑이 손으로 진안 군왕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그의 몸 아래로 깔린 머리카락을 빼냈다.
“아직 새벽이에요. 좀 더 자요.”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으로 진안 군왕의 얼굴을 쓸어 보았다.
“역시 아프니까 좀 조용히 자네요.”
검고 반짝이는 두 눈이 밝게 빛났다.
또 나를 놀리고 있어!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른 진안 군왕은 손을 탁 풀고 도로 누웠다.
“혼자 자야 조용히 자죠. 시끄럽게 하지 마요.”
정교랑은 말없이 미소를 짓고는 침상에서 내려와 휘장을 내려 주었다.
밖에서 시녀가 나지막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자, 진안 군왕은 귀를 쫑긋 세웠다. 정교랑이 욕실에 들어가 간단히 몸을 씻은 다음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바깥에 있던 시녀는 벌써 맞은편 대청 벽에서 장궁을 꺼내 들고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고요해졌다.
침상 위에서 몸을 뒤척이던 진안 군왕은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날이 훤히 밝았을 무렵이었다. 휘장을 들어 올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경 공공이 보였다.
“부인께서 말씀하시기를 전하께서 고단하실 거라며 더 주무시랍니다.”
경 공공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눈으로 진안 군왕의 몸을 이리저리 훑었다. 귀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타까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딘지 모르게 뿌듯해하는 것 같기도 한, 아무튼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눈빛이었다.
진안 군왕은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아이고, 조심하셔야죠.”
경 공공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진안 군왕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인지 눈은 여전히 뻑뻑한 감이 있었다.
경 공공이 진안 군왕 앞으로 약차를 올렸다.
이것도 그 여인이 특별히 날 위해 우린 거겠지?
진안 군왕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손을 뻗어 찻잔을 받았다.
“전하.”
경 공공이 바짝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이 밤새 달였사옵니다.”
거무스름한 진안 군왕의 눈가를 보자 경 공공은 마음이 아팠다.
“원기를 보하는 것이니, 어서 쭉 들이켜시지요.”
진안 군왕이 멈칫하고, 손에 든 찻잔을 보며 물었다.
“네가 달였다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경 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하기만 한데 무슨 원기를 보한다고.”
진안 군왕은 손에 든 찻잔을 도로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난 아무거나 안 먹는다.”
이게 어떻게 아무거나란 말씀입니까.
경 공공은 초조해졌다.
“전하, 전하는 아직 춘추 미령하여 잘 모르시겠지만, 이런 일에 젊음만 믿고 몸 생각을 안 하며 제때 원기를 보하지 않으면 큰일 나십니다.”
도통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원.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는데, 마당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부인, 큰일 났어요.”
정교랑이 문 안으로 들어서자 시녀 하나가 황급히 막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진안 군왕은 즉시 일어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당에는 이 태의가 울상을 짓고 서 있었다.
“늙었구먼, 늙었어. 약을 달이다가도 깜박 잠이 들다니.”
이 태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린 내시들이 물통에 있는 물을 끼얹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연기마저 사그라들었다.
“부뚜막이 좀 탔을 뿐인걸요. 사람만 무사하면 됐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건 단순한 부뚜막 문제가 아닙니다.”
집사 하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군왕부의 안마당이고, 바로 옆에 진안 군왕의 대청이 있었다. 오늘 부뚜막이 탔다면, 내일은 마당 전체가 탈지 모를 일이었다.
“이만한 일은, 딱히 큰일이라 할 수도 없지.”
뒤쪽에서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황급히 몸을 돌리고 예를 표했다.
진안 군왕이 여전히 손에 활을 들고 있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어서 정리들 해라.”
진안 군왕이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진안 군왕이 일을 덮겠다고 했으니, 정교랑도 굳이 따지려 들지 않았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따라 들어가 씻고 옷을 갈아입자, 아침상이 준비되었다.
“내 왕부는 이래요.”
진안 군왕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정교랑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가만히 내려놓고 진안 군왕을 보며 귀를 기울였다.
“여기뿐 아니라 예전에도 그랬어요. 어디서나 똑같았죠. 이런저런 사람들이 곁에 섞여 있었어요. 오고 싶은 사람은 오고, 가고 싶은 사람은 갔죠.
내 옆에는 바람이 새는 벽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무슨 색깔 내의를 입는지조차 밖에서 알고자 한다면 얼마든 알아낼 수 있어요.”
풉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 서 있던 반근이 웃음을 터트리다 말고 얼른 입을 가렸다. 정교랑도 따라 웃었다.
“당연히 그래야죠. 폐하께서는 경성 밖에 있는 친왕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도 빠짐없이 소상히 알고 계세요. 황궁에서 자란 데다 친왕의 아들이기도 한 당신한테야 오죽하겠어요?”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이 여인과 이야기하면 늘 이렇게 가볍고 마음이 편했어.
“남 앞에 떳떳하게 공개하지 못할 일은 없으니, 드러내요. 보고 싶으면 보라죠.”
정교랑이 말했다.
보여 주고 말고는 내 일이지만, 그것을 제대로 꿰뚫어 볼 수 있을지는 내 소관이 아니지.
진안 군왕은 또다시 웃음을 터트리고,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반찬을 집어 입에 넣었다.
“어서 먹어요. 난 경왕이랑 같이 지내느라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게 습관이 됐어요. 안 그럼 경왕이 잠시도 제대로 앉아 있질 못하거든요.”
정교랑이 내려놓은 젓가락을 보며 진안 군왕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입을 열 때부터 정교랑은 밥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있었다.
얼핏 자연스러워 보이는 동작에서 그녀의 예법이 드러났다. 의식하고 행동하는 게 아닌, 자연스러우면서도 편안한 움직임이었다.
“난 앉아 있을 수 있어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도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교랑은 말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반근은 웃음기를 감출 수 없는 눈으로, 머리를 맞대고 마주 앉아 밥을 먹는 부부를 바라보았다.
밥을 먹고 나니 경 공공이 이 태의와 함께 들어왔다.
“몇이던가?”
진안 군왕은 두 사람을 힐끔 보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경 공공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왕부의 안마당까지 들어 올 수 있으면서 이 태의 곁을 지킬 수 있는 내시라면 전부 고르고 고른 자들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하나씩 줄고 또 줄었기에, 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매번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분노가 이는 동시에 가슴 아픈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본왕을 노렸으면서 약을 태우다니 아둔하군. 약을 더 넣었어야지.”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전하의 약 때문이 아닌 듯합니다.”
이 태의가 소매 속에서 함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저건?
진안 군왕과 경 공공이 놀란 눈빛으로 이 태의를 쳐다보았다.
“부인, 제가 몸에 늘 지니고 다녔습니다. 잃어버리지 않았지요.”
이 태의가 말했다. 정교랑이 손을 뻗자 소심이 이 태의의 손에서 함을 받아 정교랑에게 건넸다.
“열어서 세어 봤어요?”
정교랑의 물음에 이 태의의 안색이 싹 변했다. 탁 소리와 함께 정교랑이 함을 열었다.
“두 개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못마땅한 듯한 표정을 짓자, 이 태의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대청 안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넓고 환한 대청 안.
고능준은 손수건으로 감싼 가느다란 암홍색 향을 두 손가락으로 집어 햇빛에 대고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이거란 말이지?”
“네.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군왕을 해독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고능준의 물음에 막료가 대답했다.
“향으로 해독을 한다?”
고능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종이 연 하나로 벼락도 불러오지 않습니까.”
하긴. 기괴한 방법을 많이도 아는 여인이니까.
“물건을 보내온 자가 경 공공의 분부로 신방의 향내를 확인하는 일에 직접 참여했다고 합니다. 향을 입수한 후 냄새를 맡아 보고는 이 향이 틀림없다고 확인해 주었고요.”
측근이 말을 덧붙였다. 냄새를 맡아 보았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코를 가져다 대던 고능준은 코 앞에서 얼른 동작을 멈추었다.
“이게 무슨 향인지 알아내라.”
고능준은 함에 향을 도로 담고, 손수건도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알아내면, 약을 가감할 방법도 논의하고.”
막료가 멈칫했다.
“대인, 그 약을 계속 쓰시겠단 말씀입니까? 저쪽에서도, 대비를 할 텐데요?”
“그러니 이 향이 무엇인지 알아내라는 걸세. 상극에 맞춰 약을 가감해야지.”
막료는 고능준의 말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승부수를 던지겠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상대방은 대응 방식을 바꿔 대비할 텐데,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공격할 수는 없지. 그렇다면 상대방의 새 대응 방식은 통하지 않을 테고, 옛 방식을 다시 쓴다 한들 상극에 맞춰 가감했으니 그 또한 통하지 않겠지.
“네.”
대답을 마친 막료는 향 두 개를 들고 물러났다.
대청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고능준도 회랑 아래로 나왔다. 눈부신 햇빛 아래 늦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서늘하기만 했다.
내가 너무 방심한 탓에 성공을 눈앞에 두고 어그러졌구나. 무언가를 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그때 사환 하나가 황망한 표정으로 급히 달려왔다.
“대인, 노부인께서 또 기침이 심해지셨습니다.”
사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하자, 고능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능준의 부친은 진작 세상을 하직했다. 그때만 해도 고능준의 관직은 중요하다고 할 만한 위치가 아니었기에 집에서 마음 편히 삼년상을 치르며 힘을 비축할 수 있었다. 모친은 늘 정정했지만, 아무리 정정하다 해도 여든 노인이었다.
좀 더 일찍도 아니고, 좀 더 늦게도 아닌, 하필 지금 같은 때에······.
말하자면 운이 안 좋았다. 월식 때 진소의 함정에 빠진 후로는 뜻대로 풀린 일이 하나도 없었다.
황제, 평왕, 귀비, 태후에게 연달아 일이 터졌고, 매번 그 규모가 커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중 한 가지 일만 겪어도 혼란에 빠져 어쩔 줄 몰랐으리라.
그래도 그렇지, 재수가 너무 안 좋은데.
모친의 건강만 해도 그랬다. 본디 정정한 분이었는데, 모친의 병환을 핑계로 대며 부임지에서 경성으로 돌아온 후부터 차츰 건강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그래서인가?
그런 생각이 스치기가 무섭게 고능준은 얼른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운이니 예언이니 하는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일을 성사시키는 것 또한 사람일 뿐. 그 어린 여인이 괴상한 짓을 많이 저지른다고 해서, 아둔한 이들처럼 덩달아 허튼 생각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기 시작하면 행동에 제약이 생기기 마련이야. 나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주저하거나 위축되는 부분이 생긴다면 이는 곧 큰 화로 이어질 공산이 커.
이 모든 건 사람의 계산으로 이루어진 일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계산할 수 있다. 누가 더 계산을 잘하느냐, 그 차이가 있을 뿐.
“어머니를 뵈러 가야겠다. 어느 태의를 불렀느냐?”
심호흡을 하고 난 고능준은 표정을 수습하고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고능준이 막 발을 떼던 그때, 누군가가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아버지, 아버지, 큰일 났습니다!”
고 관인이 소리쳤다. 고능준은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아 옆에 있던 사환을 확 붙잡았다. 고 관인 역시 부친의 안색을 보고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간신히 숨을 고른 고능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