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yoranguikyung RAW novel - Chapter 71
교랑의경 71화
정교랑이 칼등으로 술 단지의 이곳저곳을 치자 텅 빈 술 단지에서 높고 낮은 소리와 맑고 둔탁한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캄캄한 밤이라 소리는 더욱 기이하게 들렸다. 소년은 엇, 하는 소리를 내며 두모를 조금 벗고 이쪽을 쳐다봤다.
“격부(擊缶: 물장구. 물이 든 동이를 두드려 소리를 내는 일)?”
“천, 고, 의, 풍, 류, 를, 즐, 기, 리.”
정교랑이 천천히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라기보다는 말에 가까웠다. 목소리가 딱딱하고 평온하다 보니 소리에 길고 짧음만 있을 뿐 다른 기복은 없었다. 주변이 워낙 조용하다 보니 목소리가 작은 정교랑의 노랫소리가 퍼져나갔다.
“지기를, 위, 해, 모든, 걸, 내던지고.”
칼등으로 술 단지를 치자 정교랑의 목소리처럼 느린 장단이 흘러나왔다. 자신의 목소리를 따라 정교랑의 마음에도 파란이 일었다. 지기, 그녀에게도 지기가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기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잊었다. 웃게 하고 울게 하던 그 모든 일을 잊었다.
“목, 숨, 까, 지, 바, 치, 리, 라.”
정교랑은 고개를 숙인 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두모로 얼굴을 가리고 느릿느릿 노래를 불렀다. 기억이 있고 경험이 있으니 기쁨과 분노가 있는 게 당연했다. 이토록 분노가 치미는 건 어째서일까?
끓어오른 파란이 세차게 가슴을 쳤지만 얼굴엔 표정 변화가 없고 목소리 역시 무미건조했다. 그녀는 우리에 갇힌 야수와 같았다. 아니, 야수만도 못했다. 포효하고 싶어도 할 수 없으니까.
낮고 무거운 술 단지 소리와 한 자씩 읊는 가사가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특히 ‘목숨까지 바치리라’는 구절을 쉰 목소리로 나지막이 읊조리니 더욱 감동이 끓어올랐다. 주먹을 꽉 쥐는 사람도 있었다.
“생사의 기로에서도 호방한 기개와 정의를 잃지 않으리. 아름다운 여인이여, 날 위해 웃어 주오.”
사내는 갑자기 기억이 떠오른 듯 노래를 따라 부르며 방금 불렀던 구절을 반복했다.
“천고의 풍류를 즐기리. 지기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지고 목숨까지 바치리라.”
사내가 정교랑의 노래를 받아 불렀다. 사내의 목소리는 노래를 부르자 더욱 거칠어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내심 놀라며 가락을 따라 불렀다. 저 사내가 아무렇게나 부르는 노래를 이 아씨가 맞춰 부르다니! 정교랑은 계속해서 손으로 술 단지를 두드리며 사내와 곡조를 맞췄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이 아씨가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함께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큰 소리로 호응하며 잘한다고 소리치는 이는 없었다. 아씨의 노랫소리를 조금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고운 얼굴, 백발이, 되어도, 사랑하는 이 마음은, 늙지 않네.”
정교랑이 느릿느릿 노래를 불렀다. 여전히 딱딱하고 기복이 없는 목소리였지만 술 단지를 두드리는 소리가 어우러져 남다른 정취를 자아냈다. 여인의 목소리와 단조로운 술 단지 가락일 뿐인데 천고의 세월을 관통하는 듯 곡절이 느껴졌다. 목소리 때문일까? 술 단지 가락 때문일까? 아니면 가사 때문에?
“영웅에게, 묻노니, 무엇이, 어려우랴.”
영웅에게 묻노니 무엇이 어려우랴? 무엇이 어려우랴! 무엇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귓가로 들어온 그 가사에 쓸쓸한 마음을 느꼈다. 무엇이 어려우랴? 무엇이?
집에는 내 입신양명을 기다리는 노모가 계시고, 옆집에는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벗이 있다. 동쪽 거리의 술 시장도 아직 못 가 봤고, 아직 공을 세우지도 못했다. 부모의 은혜와 사모하는 연인, 충효와 인의······. 느릿느릿 이어지는 가락 소리에 가장 먼저 나섰던 셋째마저 멍하니 넋이 나갔다.
“인생은 연기처럼 부질없으니 스쳐 지나 없어지는구나!”
사내는 돌연 목청을 높였다.
“번잡한 속세는 한순간이니 그대는 걱정 말라.”
정교랑이 노래를 이었다.
“천금이 다 흩어져도, 꿈은 끝이 없도다.”
번잡한 속세는 한순간이니 그대는 걱정 말라. 천금이 다 흩어져도 꿈은 끝이 없도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또다시 멍하니 넋을 놓았다.
상관없다. 자신이 누구인지 모를지라도, 아무것도 붙잡지 못할지라도, 아무것도 할 수 없을지라도.
상관없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지 않았는가. 비틀비틀 힘겹게 왔을지라도.
상관없다. 근심과 걱정은 필요 없다. 이제는 걸을 수 있고, 움직일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다.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든, 무엇이 다가오고 또 떠나가든. 번잡한 속세는 한순간일 뿐이나 그녀가 있는 한 끝없이 이어지리라.
정교랑이 칼을 든 손을 높이 쳐들었다가 팍 소리를 내며 술 단지를 쳐 엎어 버렸다. 술 단지에 있던 술이 이리저리 튀면서 불꽃이 일었다. 곡이 마무리되면서 노래도 끝났다.
“통쾌하네.”
정교랑이 딱딱한 목소리로 내뱉으며 손에 들고 있던 칼을 아래로 향하게 꺾어 건넸다.
“통쾌하네!”
정신을 차린 셋째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옆에 놓아둔 술 단지를 들어 고개를 쳐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통쾌하네! 진 사노야 역시 흥분을 감출 수 없는 얼굴로 술 주전자를 들어 고개를 젖혀 가며 마셨다.
통쾌하네! 술을 마시지 않고 있던 조 집사도 흥분을 억누를 수 없는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차를 빼내 술을 대신해 병째 마셨다.
통쾌하네! 다른 사람들도 속으로 소리치며 각자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우고 탁탁 소리가 나도록 바닥을 향해 내던졌다.
술 단지 두드리는 소리와 남녀가 쉰 목소리로 부른 노랫가락, 모닥불에서 나는 타닥타닥 소리가 함께 어우러지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혈투를 치른 비장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깟 늑대 몇 마리 죽여 놓고선 ‘풍소소 역수한(風蕭蕭 易水寒: 바람은 쓸쓸하고 역수는 차다. 장부가 큰 뜻을 품고 먼 길을 떠남을 뜻하는 말로 형가가 진시황을 암살하러 가기 전에 읊은 시)’을 찾네.”
소년은 모닥불 근처에 앉아 천천히 말했다. 모두를 가리키는 말 같기도 하고 그 자신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술이 바닥나고 고기도 다 먹었다. 모닥불은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고 모든 게 변함없었다. 하지만 저 모닥불 옆에 석상처럼 앉아 있는 여인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저마다 달랐다. 우아하고 고상하면서도 거친 사내들과 어울려 술 단지 장단에 노래를 부르는 여인이라니. 거칠고 투박하지만 동작 하나하나에 대범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뭐 볼 게 있다고 그러십니까?”
사내 몇 명이 맞은편 모닥불 근처에서 이쪽을 두리번거리며 걸어오는 소년을 노려보며 말했다. 소년은 정교랑처럼 커다란 피풍의를 두르고 두모를 푹 눌러 쓰고 있어 밤바람에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났다. 소년이 다가오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경계 태세를 취하고 물었다.
“아씨인가, 아니면 마님이신가?”
소년이 궁금한 듯 물었다.
“보아하니 아씨인가 본데, 왜, 노부인 같지?”
어디가 노부인 같단 거야?
“이 자식이, 무슨 소릴 지껄이는 거야?”
사내들이 불쾌한 듯 말했다.
“아니라고?”
소년은 몇 걸음 더 다가오더니 걸음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왜 이렇게 듣기 싫지?”
너무 무례하네! 사내들이 우르르 일어서자 소년의 시종들도 저쪽에서 바로 경계 태세를 취했다.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였다.
“괜찮아요. 내가 병을 오래 앓아서 정상과 좀 달라요.”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들었냐? 아씨께선 비정상이셔!”
한 사내가 걸걸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소년은 풉 웃음을 터뜨렸다.
“아씨께서 비정상이라는데 웃긴 뭘 웃어!”
사내는 더욱 열이 받는지 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며 소리쳤다. 옆에 있던 사내가 그 사내의 따귀를 후려치며 호통쳤다.
“봉추! 비정상은 너지! 어디서 아씨를 욕해!”
맞은 사내는 어리둥절한 눈치였다.
“네? 내가 무슨 아씨를 욕해요.”
사내의 멍한 모습에 소년은 푸하하 웃음을 터뜨리고 가까이 다가와 한쪽 옆에 앉았다.
“아니, 이봐요. 어이, 거기. 여기 앉지 마요.”
사내가 한마디 덧붙였다.
“남, 남녀칠세부동석이라잖소. 내외하셔야지.”
소년은 더욱 흥미롭다는 듯 손으로 두모를 살짝 들어 사내를 쳐다보며 물었다.
“그쪽은 남자가 아닌가 보네?”
사내가 순간 눈을 부릅떴다.
“얻다 대고······.”
사내가 소년을 가리키며 욕을 하려고 했다.
“여섯째.”
나무틀에 기대 있던 사내가 제지했다.
“말을 삼가라. 소리 지르지 말고.”
사내들은 입을 다물고 이글거리는 눈으로 소년을 노려본 다음 정교랑 양옆으로 우르르 앉아 그 소년과 정교랑을 떨어뜨려 놓았다. 저쪽에 있던 진 사노야도 그 광경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씨한테 마차에서 쉬라고 하지 그러나?”
진 사노야가 조 집사를 보며 말했다. 조 집사는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네, 그것도 좋죠.”
조 집사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걸음을 옮기지 않고 말할 테면 직접 가서 말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갈증 때문에 고생 한번 했다고 겁내는 꼴 하고는. 노섬 주씨 가문이 그래도 용맹무쌍한 줄 알았더니 별 볼 일 없군. 진 사노야는 속으로 타박하며 모닥불 옆에 앉았다. 이쪽 모닥불 근처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세상인심은 알 수 없고 야박한 법이죠. 오욕칠정을 다 겪은 병자에게 나이가 무슨 소용이겠어요.”
정교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두모 아래로 갸름한 턱이 보였다. 무슨 뜻이지? 사내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소년은 고개를 숙이고 모닥불을 보고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는 웃는 건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런가?
“아씨.”
옆에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아씨도 병을 앓고 계시면서 저희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어 주셨군요. 병을 치료하여 목숨을 구해 주셨으니 부처의 마음씨를 가지셨습니다. 훗날 필시 복을 받으실 겁니다.”
정교랑은 그러냐는 듯 고개를 살짝 돌려 사내를 쳐다봤다.
“글공부를 했나 보죠?”
정교랑이 물었다. 화제 전환이 너무 빠르잖아. 사내들은 어리둥절했다.
“글공부라고까지 할 순 없고 글자를 몇 자 익힌 게 전부입니다.”
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왜 그만뒀는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가난해서요.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군에 들어가 급여라도 받아야 가족을 먹여 살리죠.”
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정교랑은 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시선을 거두고 모닥불을 쳐다봤다.
“그럼 낭자는 왜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겁니까?”
그 소년이 불쑥 끼어들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미간을 찌푸렸다. 또 화제가 바뀐 거야? 아니지. 이 소년이 멋대로 끼어든 거잖아? 한 사내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못 견디겠는지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글공부를 했다던 사내가 그나마 조금 빨리 반응하며 미간을 찌푸리고 소년을 쳐다봤다.
“난 그때 병세가 심해 치료하지 않으면 죽을 지경이었고 옆에는 여기 형제들밖에 없었어요. 역참에서도 쫓겨난 마당이라 갈 곳도 없는 데다 수중에 돈 한 푼 없었죠. 따르는 이들도 없었고요. 공자, 이 아씨께서 도움의 손길을 왜 뻗으셨겠습니까?”
사내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구레나룻까지 세우며 노기를 드러냈다.
“대형의 미모가 마음에 들었는지도.”
소년이 입꼬리를 위로 올리며 말했다.
“이봐요!”
나머지 사내들도 분통을 터뜨렸고, 개중에는 벌떡 일어서는 자도 있었다. 이 건달 같은 놈이 입을 함부로 놀리네. 은인을 불경하게 묘사하는 것도 모자라 이젠 은인의 은혜를 비웃기까지 하다니. 하여간 부잣집에서 고생 모르고 자란 이들은 가증스럽다니까!
“이보시오, 공자. 공자는 인정 많고 정의로운 이를 못 봤는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없는 건 아니오.”
병을 앓았다던 사내가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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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 말. 정교랑이 부르는 노래 가사는 1994년에 방영한 타이완 드라마 주제곡에서 가져왔습니다. 장융샹이 작사한 곡입니다. 우연히 들었는데 절로 가슴이 벅차올라 이 장면에 가사를 쓰기로 했습니다. 여러분도 검색해서 들어보세요. 저도 모르게 손으로 탁자를 치며 박자를 맞추게 되더군요. 느낌이 있는 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