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Loser RAW novel - Chapter 190
브뤼스만은 알렉산드로스에게서 보고를 받았다.
제국 전역에서 외적들과 반란군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동서남북, 어느 방향을 봐도 몰려오는 적들이 보였다. 제국 최대의 위기였다.
그러나 모인지 몇 시간도 안 된 놈들이 제대로 된 연계를 취할 수 있을 리 없다. 더욱이 시대정신인지 뭔지에 취해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놈들을 격파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물량에는 장사가 없어 전선이 밀리고는 있었지만,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각 방위의 최종방위선에는 악마 대왕들이 배치되어 있으니 말이다. 대왕들은 이미 브뤼스만으로부터 [지배의 권능]을 받은 후라 반란을 일으키리란 걱정은 할 필요가 없었다.
더불어 아무리 시대정신이 자결주의라 한들, 스스로의 의지로 제국 측에 서기를 택한 악마군주들도 있었다. 원래도 소수 있었지만, 제국에 충성을 맹세하면 그 즉시 보상을 내린 게 주효했다.
그 보상이란 게 악마 특유의 부활 능력을 없애는 대신 대량의 마기를 즉시 발생시켜 존재의 격을 상승시키는 환단을 지급하는 거였다.
이 환단의 장점은 죽어보기 전까진 그 부작용에 대해 알아차리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다른 악마에게 부작용을 알리는 것이 불가능한 것 또한 좋은 장점이다. 한 번 죽으면 그대로 완전히 죽어버리니 말이다.
환단의 수량에는 한계가 있었고, 따라서 환단을 받을 수 있었던 건 군주급 정도였다. 그 휘하의 병사들은 별다른 보상도 없이 억지로 전선에 내몰리는 셈이라 사기도 낮고 통솔도 잘되지 않았지만 큰 상관은 없었다.
요는 반란군의 전력을 충분히 깎아놓기만 하면 된다. 충성스러운 악마대왕들이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만 전력을 깎고 나면, 최종방위선에서 황제가 직접 이끄는 군대로 막으면 해결될 일이다.
상황은 불리하긴 하지만 그래도 생각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서쪽과 북쪽, 그리고 남쪽에서 오는 세력들은 순조롭게 그 세가 꺾이고 있었다. 각개격파당하고, 함정에 걸리고, 이런 역경으로 인해 내분이 일어나기도 하며 말이다.
그러나 동쪽으로 몰려오는 군대는 그 기세가 사뭇 달랐다. 사기도 높았고, 규율이 서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함정에도 걸리지 않아 군세를 거의 잃지 않았다.
“그곳에 혁명가가 있군.”
알렉산드로스에게 그 보고를 받자마자, 브뤼스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혁명가만 죽이면 시대의 질서는 유지된다. 더 빨리 제국의 힘을 모아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고, 나아가 교단을 침략할 전력을 손에 넣으려면 지금 당장이라도 혁명가를 쳐 죽여야 한다.
“너와 네가 놈들을 막는다.”
“주인님께서 말입니까?”
손 하나도 아쉬운 상황이다. 어쩔 수 없다. 브뤼스만도 직접 나설 결심을 굳혔다. 일평생 가까이 흑막 속에서 살아왔었지만, 항상 그래왔던 건 아니다. 나설 때는 나설 줄 아는 것이 자신의 미덕이다. 적어도 브뤼스만 본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 시간 없다. 빨리 가자.”
“예, 옙!”
사실상의 최종결전이다. 이 고비만 넘기면 모든 것이 그의 뜻대로 될 것이다.
브뤼스만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처음에는 산이 움직이는 걸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뭔가 디딤 발인 걸 눈치채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는 않았다.
지평선에서부터, 긴 그림자를 늘어뜨리며 그것이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황제!”
“악마 황제다!”
“황천의 주인!!”
악마들의 웅성거림이 들렸다. 그제야 비로소 나는 터무니없을 만큼 거대한 존재의 정체가 악마 황제임을 눈치챌 수 있었다.
“거참, 더럽게 크네.”
산처럼 크다. 발이. 그리고 그 산 두 개 위에 산보다도 큰 기둥 두 개가 얹어져 있고 그 위에는······, 동체가 있겠지. 다른 악마들처럼 말이다.
거대한 악마왕을 처음 본 건 아니다. 악마왕들보다도 큰 악마대왕들과도 조우했었고. 잡아 죽이기까지 했지. 우주 공간에서이긴 했지만.
하지만 악마 황제는 차원이 달랐다. 저런 크기의 생물이 이족보행을 한다는 게 이해가 안 갈 정도로 말이다. 물리법칙은 저런 거대한 생물이 제대로 숨 쉬고 먹고살 수 없도록 되어 있지만, 악마한테 물리법칙을 적용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다. 하물며 악마는 생물조차 아니다.
악마 황제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 자신보다 1/3 정도 크기의 악마 대왕도 거느리고 있었으며, 그 휘하에 악마왕과 악마군주들이 줄줄이 따라붙었다. 그들에 비하면 다른 악마들은 파리나 개미처럼 보였다. 악마군주 중에도 남작급 정도는 치와와처럼 보일 정도니 당연하지.
크기 감각이 이상해질 것 같았다. 마치 목성과 지구의 크기 비교 그림을 처음 봤을 때처럼 말이다.
“우리, 이길 수 있을까?”
“이건 인류종으로 악마대왕 치기야······!”
‘우리 편’ 악마들 쪽에서 공포가 번지기 시작했다. 그야 그렇다. 전력 차가 지나치게 컸다. 이쪽은 기껏해야 악마왕이 최대 거물인데, 저쪽은 황제께서 친정에 납시셨다. 사기가 떨어질 만도 했다.
“······이대로 두면 안 되겠군.”
이대로 겁을 먹고 흩어졌다간 오합지졸이 되어버릴 위험이 있었다. 아무리 악마들이라지만 지금은 우리 전력이다. 뭔가 수를 쓰긴 써야 했다.
“창천의 용사들이여.”
나는 그렇게 운을 떼었다.
“저기에 황천의 문이 있다.”
내 손가락 끝은 악마 황제, 알렉산드로스를 가리키고 있다.
“저 황천의 문을 닫으면, 창천의 문이 열리리니.”
신기한 경험이었다. 나는 그저 운을 떼었을 뿐인데, 그 뒤에 뭐라고 말해야 할지가 술술 떠오른다. 마치 천재 음악가에게 악상이 저절로 떠오르는 것 같이. 물론 나는 천재 음악가가 아니기에 실제로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내가 천재 혁명가인 건 또 아니지만.
“닫아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
내 입은 우렁차게 그렇게 소리를 질렀다.
“······닫아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
아주 잠깐의 정적 후, 누군가가 그렇게 복창했다.
“닫아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
“닫아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
그리고 그 복창은 어느새 혁명군 전체에 퍼져 나갔다. 바닥까지 떨어졌던 사기는 끓어올라 그 누구도 눈앞의 실체화된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푸른 기운이 혁명군을 뒤덮기 시작했다.
– 혁명가에 의해 혁명군의 세력이 ‘창천’으로 정의되었습니다!
– 앞으로 혁명군은 ‘창천군’이라 불릴 것입니다!
– 사기 보너스 +10, 전투력 보너스 +10%
“······이게 혁명가의 힘인가.”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아니,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다. 아무리 혁명군 버프를 받았다고 한들, 이 정도 버프 수준으로 악마 황제를 압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더욱이 아군에는 대왕 수준도 없다. 결론적으로는 우리가 잘해야 된다는 뜻이다. 정확히는 내가!
게다가 잊어서는 안 된다. 저 황제의 뒤에는 브뤼스만이 서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브뤼스만을 끌어내려면 일단 황제부터 쓰러뜨려야겠지.”
내가 아는 바, 브뤼스만은 흑막놀이를 좋아한다. 표현이 좀 그렇긴 하지만, 직접 나서는 경우가 드물다. 물론 내가 직접 놈과 대면을 해본 건 아니라, 거의 들은 이야기긴 하지만 한때 놈의 측근이었던 카자크에게서 들은 정보를 기반으로 하자면 그런 인상이 강하다.
“또 모르지. 황제를 쓰러뜨리고 나면 다른 곳으로 도망칠지도.”
일어날지 어떨지도 모르는 미래의 일을 미리 거론해 봐야 의미가 없지만, 나는 일행의 사기를 올릴 겸 그렇게 놈을 비웃었다. 일행이란 악마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당연히 안젤라를 비롯한 우리 일행을 가리킨다.
내 농담이 아주 안 먹힌 건 아닌지, 일행 사이에서 잔잔한 웃음이 떠올랐다. 건곤일척의 세계대전 앞에서 지을 표정은 아니지만 긴장하거나 겁을 먹은 것보다야 훨씬 낫다.
혁명군과 제국군, 모두 진군을 멈추지 않았다. 충돌은 피할 수 없고, 피할 생각도 없었다. 우리도 그랬고, 놈들도 그런 모양이다.
“닫아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
“닫아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
창천군의 복창 소리는 더욱 커졌다. 분위기는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랐다. 이제는 슬슬 돌격명령을 내려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전에······. 안젤라, 키르드.”
“네, 선배!”
“알겠습니다, 로드!”
안젤라와 키르드가 날개를 펼치고 하늘로 날아올랐다. 만마전에서 천사의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그들의 모습은 주변의 다른 악마들에게는 사뭇 생경한 광경이겠지만 이것도 세계혁명가의 힘 덕일까, 내 일행인 그들을 공격하거나 적대시하는 ‘우리 편’ 악마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이걸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을 수 있을까?
“[축복받은 대지의 전함].”
인벤토리에서 전함을 꺼내자, 상공에 내 자랑거리 중 하나인 황금 전함이 두 척이나 동시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한 척은 만약을 위해 인벤토리에 대기시켜 놓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지! 모습을 드러낸 황금 전함을 향해 나는 즉각 외쳤다.
“[금신전선 상유십이]!”
기함인 1번함에 장착된 [축복받은 천자총통]의 옵션을 발동시키자, 전함의 숫자가 12척 늘어났다. 아군도 놀랐고, 적들도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아직 놀라기에는 이르다는 사실을 말이다.
= 준비됐어요, 선배!
= 저도 함교에 자리 잡았습니다, 로드.
두 천사에게 맡길 일은 전함들의 조작이다. 굳이 두 척을 꺼내 둘에게 조종을 맡긴 건 어느 쪽이 기함인지 헷갈리게 만들기 위한 꼼수였다. 뭐, 내 생각과 달리 제국군 측이 바로 전함을 공격하지 않아 노파심에서 끝났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다.
“좋아, 그렇다면······.”
내릴 명령은 하나뿐이었다.
“주포 발사!”
***
이진혁의 생각과는 달리, 브뤼스만 라이언폴드는 전장에 나와 있었다. 본 모습을 드러낸, 거대하기 그지없는 악마 황제의 그림자에 녹아든 모습으로 말이다.
“저건······, 저 황금색 전함!”
아무리 그가 그림자에 녹아들었다고 해도 그냥 눈귀 다 가리고 숨어 있는 건 아니었다. 그 또한 상공에 갑자기 떠오른 황금 전함들을 목격했다.
“이진혁이 온 건가······! 만마전에!!”
브뤼스만도 황금 함대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야 그렇다. 그는 크루세이더 함대와 황금 함대가 나누는 통신기록을 가장 먼저 전해들은 인물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계획을 완전히 망쳐 놓았던 그 운명의 날에, 교단의 하늘에 떠 있던 황금 함대의 존재도 기억하고 있었다.
브뤼스만은 잠깐 절망했으나, 곧 현실을 제대로 인식했다.
“놈은 악마들로 이뤄진 혁명군을 이끌고 있다. 즉, 놈은 교단과 함께 온 게 아니야.”
그의 푸른 눈동자가 살의로 인해 번들거렸다.
“그렇다면 죽일 수 있다.”
브뤼스만이 가장 증오하는 건 카자크였고, 그 다음은 교단이었다. 이진혁은 삼 순위쯤 되었다.
순위가 좀 낮다고 해도 증오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진혁은 그의 완벽한 계획을 망쳐 놓은 가장 큰 변수이기도 했다.
브뤼스만은 이진혁에 대해 생각했다. 대체 무슨 수로 자신의 계획을 망쳐 놓은 건지 수많은 가설을 떠올리고 고찰했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결론에 이르렀다.
“놈은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