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09
108장. 이 순간만의 사랑
“자! 한 잔 더 마십시오!”
“하오! 하오!”
두 아재는 신나게 술잔을 기울였다.
엄마가 한 솜씨 발휘하셨다.
10인용 식탁 위에 조선시대 임금들도 못 먹던 요리들이 판에 깔렸다.
궁중구절판, 신선로, 마당에서 갓 잡은 싱싱 토종찜닭, 한우 갈비찜, 잡채, 해산물찜에 각종 전 시리즈까지 30여 종의 요리가 꽉 채워졌다.
상을 받고 리장창 아재는 감격하고 말았다.
이렇게 화려한 한식은 처음이라고 했다.
어머니가 특별히 담아 놓은 10년 된 산더덕주와 과일주가 속속 통을 비웠다.
안주가 좋으니 술이 술술 들어갔다.
내일 아침 저 두 분은 안 봐도 준사망이다.
“클라라 언니는 안 본 사이에 더 매력녀가 됐어? 비결이 뭐야? 오빠의 사랑?”
“주아와 주희도 이제 숙녀 티가 확 나는데? 남자 친구 사귀는 거야?”
여자들의 금칠 릴레이는 아직도 이해 불가능이다.
서로 칭찬한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래도 워낙 기본이 된 세 여성은 금칠을 받아도 욕을 먹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그랬으면 좋겠는데……, 우리 집에 계시는 한 남자가 워낙 고지식해서.”
“언니, 남자 잘 만나야 해.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절대 안 돼!”
주아와 주희가 말을 하며 날 봤다.
내가 호랑이 새끼들을 키웠다.
언제 남자 친구 사귀지 말라고 했던가!
다만, 학업에 지장이 발생하면 앞으로 인생에 일체 지원은 없다고 엄포를 놨을 뿐이다.
오빠가 세상의 뜨거운 맛을 확실히 본 입장에서 염려가 되어 했던 충고다.
대한민국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학벌로 시작해 학벌로 끝난다.
공부를 못하면 모를까 잘하는 애들에게 채찍질 좀 가했다.
그런데 쌍둥이들은 나를 연애도 못하게 하는 후안무치 원흉으로 지목했다.
“이 작품은 진한 그리움이 담겨 있는 것 같아요. 모네 작품처럼 빛과 그림자를 이용해 황혼의 색감을 표현하신 것 같은데……, 슬픔이 가슴에 잔잔히 와닿습니다.”
“제 어머니가 좋아하셨던 장면이에요.”
엄마도 엄마가 그리운 것 같았다.
“그렇죠? 그림을 보며 저도 어머니를 떠올렸답니다. 정말 대단한 실력입니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홍콩에서 개인전을 열어도 될 것 같아요. 난 발끝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아요.”
“과찬이십니다.”
엄마와 엠마뉴엘 부인도 친분 쌓기에 바빴다.
거실에 걸려 있는 엄마의 그림을 감상했다.
두 분 취미가 그림이라 그런지 서로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언어의 장벽이 없다 보니 다가감도 빨랐다.
아빠와 리장창 아재는 영어로 대화를 나눴다.
쌍둥이들과 클라라도 영어로 의사소통이 됐다.
이게 바로 글로벌 가족의 클래스다.
“태산 군, 한잔하지.”
“조금 있다 마시겠습니다.”
리장창 아재는 광둥어가 생각나면 날 찾았다.
“다니엘 어머니 그림 실력이 엄청나요. 꼭! 전시회를 열어야 될 것 같아요.”
엠마뉴엘 부인은 엄마 실력을 알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곧 그렇게 만들어 줄 생각이다.
홍인대 여왕의 화려한 귀가 프로젝트는 시작도 안 했다.
“다니엘. 나 좀 걷고 싶어.”
많이 먹고 쌍둥이들과 수다를 떨던 클라라가 날 불렀다.
눈빛이 초롱초롱하다.
저거 딱 신호다.
흐흐. 사인을 보내 시그널 보내~.
2017년에 유행했던 소녀 그룹의 노래 가사가 떠올랐다.
찌릿찌릿 스파크가 튀었다.
“그럴까?”
“응. 너무 배가 불러.”
클라라는 튀어나오지도 않은 배를 두들겼다.
이집 며느리라도 되는 양 행동이 아주 편했다.
“이거 딱 그거지?”
“응. 말로만 듣던 그거 확실해!”
모태솔로 연애 초보자 쌍둥이들은 신호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다.
앞으로 유행할 그린라이트라는 걸 모태솔로들은 짐작만 했다.
“클라라와 산책 좀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다녀와.”
엄마가 싱긋 웃었다.
“그렇게 좋니? 좋을 때지.”
엠마뉴엘 부인이 스스로 묻고 셀프로 답했다.
좋을 때라는 거 나도 안다.
그래서 모든 순간들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아직 겨울이라 패딩점퍼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별이다!”
빛 공해가 거의 없는 시골답게 하늘에는 별이 총총 떴다.
밝지는 않았지만 긴 은하수가 줄을 서서 우리를 반겼다.
“여기 너무 좋은 것 같아.”
클라라가 왼손을 뻗어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았다.
패딩 안쪽으로 마치 뼈가 없는 것 같은 클라라의 길고 부드러운 손을 잡아 이끌었다.
맞잡은 두 손에서 따스함이 밀려왔다.
어스름한 가로등 불 사이로 그렇게 클라라와 걸었다.
굳이 말이 없어도 별빛을 안내자 삼아 걷는 길이 심심하지 않았다.
“다니엘.”
클라라가 손을 잡고 걸으며 날 불렀다.
“응.”
“정말 좋아. 난 한국이 체질인가 봐. 이곳에만 오면 마음이 편해.”
클라라의 말투에 진심이 묻어났다.
“나도 홍콩에 가면 편해.”
“홍콩도 싫지 않아. 그래도 다니엘이 있는 이곳이 좋아.”
뭐지? 쓸쓸한 이 분위기는?
“무슨 일 있어?”
“그냥.”
여자의 그냥은 그냥이 아니라고 누군가 그랬다.
클라라에게 말 못 할 무슨 이유가 있는 것 같다.
“다니엘.”
클라라가 다시 나를 불렀다.
“왜~.”
클라라가 걸음을 멈췄다.
동네 앞의 작은 냇가가 보였다.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자연처럼 얼음장 사이로 졸졸 물이 흘렀다.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 서로 미워하지 말자.”
갑자기 던지는 클라라의 말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별의 말투라고 하기에는 우리 사이가 그렇게 가깝지 않다.
하지만 뭔가 미래를 예측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클라라, 진짜 무슨 일 있어? 회사 일이 힘들어?”
“아니.”
클라라가 강을 보다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가 촉촉해 있었다.
아니라고 말했지만 거짓말을 말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더 이상 묻지 못했다.
클라라에게 말 못 할 고민이 있음은 확실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여러 변수들이 있잖아. 그래서 미리 말하는 거야.”
클라라가 조용히 웃었다.
별빛 사이로 그녀의 시린 미소가 아리게 눈에 들어왔다.
“힘들면 회사 때려치워. 나랑 같이 사업하자.”
“됐어. 아빠도 회사 그만두고 도와달라고 난리야. 다니엘 도와줬다가는 집에서 쫓겨날 거야.”
다시 활달해진 클라라.
그러나 그녀에게서 알 수 없는 슬픔이 전해져 왔다.
살포시 클라라를 안았다.
클라라가 좋았다.
그러나 그녀의 속 깊은 슬픔까지 품지는 못했다.
전생처럼 단박에 푹 빠지는 격정적인 사랑을 할 수가 없었다.
살아왔던 경험과 조심스러움이 육체를 지배했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재력과 스펙을 소유했지만 신중했다.
주변에 엄청난 미녀들과의 인연도 많았다.
오동성처럼 난봉꾼으로 살아 버리기에는 다시 사는 인생이 너무 아까웠다.
그런 조심스러움이 클라라를 답답하게 할 수도 있다.
“다니엘…….”
품에 안긴 클라라가 다시 날 불렀다.
심장을 타고 그녀의 목소리가 전달됐다.
“응~.”
“…… 우리 이 순간만…… 사랑하자.”
어느새 고개를 치켜든 클라라.
그녀의 붉고 뜨거운 입술이 나를 향해 천천히 덮쳐 왔다.
***
“오빠아아아! 우리 만나자! 내가 한턱 쏠게!”
언제나 생기발랄 서련이 통화가 되자마자 기쁨으로 오빠를 불렀다.
“갑자기 한턱은 뭐야?”
“오빠! 세상에 나 오늘 월급 탔어!”
“월급?”
“응! 회사가 이번에 투자자가 바뀌었잖아. 황 실장님이 대표가 된 뒤에 엄청 변했어. 회사에서 건강하고 맛있는 밥도 주고 차도 잘나가는 아이돌이 타는 걸로 바꿔 줬어. 그리고 계약한 연습생들 모두 직원이라고 최저시급에 맞춰 월급도 나와. 사대보험도 들어줬어! 행복해!!!”
전화기 너머로 서련의 폭풍 수다가 이어졌다.
“와아! 회사 대박이네.”
서련의 놀람에 적당하게 대꾸해줬다.
지금까지 한국 연예계에 없던 사건은 맞았다.
밥이야 줄 수도 있지만 계약한 연습생들에게 월급까지 주는 파격은 처음이다.
워낙 성공할 때까지 투자비가 많이 들어갔다.
하지만 난 의문이었다.
회사가 선택했다면 최소한의 비용은 지불함이 맞았다.
하루 종일 연습실에서 피땀 흘리는 그들의 노력은 공짜가 아니다.
선택했다면 기본 의식주는 책임지는 게 회사의 의무다.
비정규직도 최소한의 월급은 받는다.
애들이 버는 푼돈으로 부자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세계적 스타가 되는 걸 보고 싶었다.
눈물 젖은 빵도 좋지만 미래에 대한 꿈을 잊지 않기를 원했다.
그리고 회사가 주는 믿음이 큰 역할을 할 것이다.
“그리고 계약 조건도 정산 5대 5로 변경됐어. 다음 달부터 정산이 가능하대. 완전 짱! 짱이야!”
정산하고 남은 금액도 팍팍 밀어줬다.
황 대표도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후배들 성공을 질시하지 않고 밀어주는 훌륭한 오너다.
“거기 정말 좋은 회사네. 어디 가지 말고 꼭 붙어 있어.”
“그럼~ 이만한 기획사 한국에는 없어. 아마 전 세계에서도 드물 걸?”
서련이 좋다니 나도 만족스러웠다.
“투자자가 누군지 몰라도 마인드가 쿨하네.”
“그렇지? 누군지 몰라도 새 투자자님 오빠처럼 완전 멋질 것 같아.”
이거 눈치 깐 건 아니지?
서련의 촉이 좋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오빠하고 비교는 그렇지 않아?”
“헤에. 그건 그래. 난 오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
보이지 않는 내 그림자와 비교하는 내가 웃겼다.
황 대표에게 비밀을 부탁했다.
이사 자리는 투자금 찬조로 얘기가 됐다.
“그런데 오빠. 요즘 바빠?”
“왜?”
“여자하고 막 데이트하고 그런 건 아니지?”
“응?”
“여자는 남자들에게 없는 육감이 있거든. 딱 촉이 와. 오빠 요즘 엄청 바쁘다는 게.”
서련의 육감은 역시 남달랐다.
클라라와 그 부모님은 2박 3일간 고택에 머물다 갔다.
리장창 아재는 아버지 유기농 농업에 의외로 관심이 많았다.
이것저것 농사일도 도왔다.
엠마뉴엘 부인은 엄마와 함께 그림 그리기에 빠졌다.
수채화 작품 한 점을 뚝딱 완성했다.
클라라는 쌍둥이들과 함께 나를 대동한 채 용인 놀이동산에 갔다.
정신없이 2박 3일의 시간이 흘렀다.
클라라 눈빛이 아직 잊혀지지 않았다.
공항 게이트에 들어가지 전 클라라는 나를 한참을 봤다.
마치 이별하는 연인처럼 그녀의 마지막 모습은 진한 잔상을 남겼다.
그리고 찾아온 설날.
확실하게 잡힌 집안 기강 덕분에 무난하게 설을 보냈다.
무탈하게 서울에 도착한 이후 사업 점검에 들어갔다.
시한폭탄이 터지는 시간을 알고도 가만있을 수 없었다.
프로그램을 짜고 방어프로그램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2008년도에 유행하는 바이러스 따위는 증권가 전산실에 근무할 때 다 마스터했다.
해외 서버를 우회하여 흔적을 지우는 건 일도 아니다.
조심 또 조심했다.
얼마 전 들렸던 경고음을 대충 흘려듣지 않았다.
“오빠 곧 개강이라 바쁘다.”
말을 돌렸다.
“맞아! 오빠 입학 선물 사놨는데……, 우리 언제 봐?”
“여름에 발표할 2집 준비 들어가지 않아?”
“어? 오빠가 어떻게 알아?”
“서련이 일이잖아.”
“헤헤헤. 기분 좋아.”
아직 어린 서련은 몇 마디에 웃음을 날렸다.
황 대표에게 부탁해 좋은 곡과 안무를 부탁했다.
1집으로 조금 알려지기 시작한 김에 쐐기를 박기 원했다.
빠른 감이 있지만 2집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했다.
“2집은 대박 쳐야지. 오빠가 항상 응원하니까 힘들어도 참고 버텨.”
“알았어! 오빠를 생각하며 파이팅 할게!”
서련과 통화를 하며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늦은 저녁 12시.
“늦었다. 어서 자라.”
“우웅. 오빠. 내 꿈꾸고 자.”
서련과 통화가 끝났다.
차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지하주차장 불빛이 오늘따라 밝지 않았다.
괜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어이! 장태산이.”
기둥 옆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건방지게 부르며 나타났다.
# 109
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