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141
140장. 천상비애 (1)
내 동기들이다.
점심을 먹기 위해 우르르 법대에서 몰려나온 한 무리 남녀 집단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 그 무리 중심에 한 여인이 보였다.
“태산아. 오늘 어디 갔었어?”
아주 부드럽고 상냥하게 날 부르는 여인.
안면에 철판을 제대로 깔았다.
“아는 분들이세요?”
손유리가 옆에 서서 조용히 물었다.
“법대 선배와 동기들입니다.”
“네…….”
손유리가 대답은 했지만 의심에 찬 눈으로 그녀를 봤다.
“태산아. 뭐해? 밥 먹으러 왔냐? 유리 선배, 안녕하세요!”
오티 때 10조 조원이자 술까지 마셨던 최준식이 아는 체를 했다.
“안녕~. 준식아.”
“넵! 선배님. 흐으.”
손유리가 이름을 기억하고 아는 체를 하자 준식이 입이 벌어졌다.
그에 반해 이예린의 눈빛은 차갑게 빛났다.
나에게 무슨 미련이 있다고 저러는지 모르겠다.
아버지 잘났고 집안도 먹고살 만하며 얼굴도 탑급이다.
공부도 잘하니까 판사 될 인재 하나 물어 시집가도 될 것 같은데 날 보는 시선이 찝찝하다.
나는 1프로도 관심이 없다.
얼굴 예쁜 건 하늘 날라리 여신선 진이 누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예린 선배는 자신의 주제를 파악 못 했다.
연노랑 짧은 스커트에 초록 카디건으로 한껏 멋을 낸 그녀가 다른 수컷들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내 시선을 끌지 못했다.
딱 일벌 부려먹는 여왕벌 같았다.
“태산아, 법대 강의는 안 들어? 왜 얼굴 보기가 힘들지?”
다정한 예린 선배 말투에 마음은 더 차갑게 식었다.
모두 다 가식으로 보였다.
나만 그녀의 진면목을 아는 것 같다.
“선배가 알 필요가 있습니까?”
이건 주제를 넘은 거다.
후배 강의 챙겨주는 살뜰한 선배 놀이에 더 정떨어졌다.
말이 차갑게 나갔다.
“…….”
순간 동기들 얼굴에 당혹함이 보였다.
인생 처음 살아보는 초짜 신입생들은 이 상황이 이해 불가능할 거다.
감히 신입생이 다정하게 걱정하는 선배를 대놓고 까는 장면.
동기들은 서로 얼굴을 보며 눈치를 봤다.
“태, 태산아. 너 진짜 강의 시간에 안 보이더라? 전공 필수도 신청 안 했어?”
준식이 눈치껏 끼어들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도 될 녀석 같다.
“이번 학기는 전공 수업 신청 안 했다고 말했잖아.”
“아! 맞아 그 말 했었지…….”
“밥들 잘 먹어라. 다음에 보자.”
더 이상 예린 선배와 마주 서 있고 싶지 않았다.
밥맛까지는 아니더라도 학교에서 웃으며 인사할 사이는 아니다.
“많이 기다렸죠.”
손유리 선배에게는 생긋 웃었다.
나 차별이 뭔지 아는 남자다.
손유리와 함께 식당으로 올라갔다.
“태산아. 내일 개강 모임에는 올 거지?”
준식이 다시 물어왔다.
개강 모임?
법대 강의도 없고 단톡방도 없는 시대였기에 정보에 느렸다.
“그럼 가야지. 준식아, 장소 문자 부탁해.”
“그래! 내일 보자!”
예린 선배와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옹졸한 보복은 아니고 그냥 싫었다.
괜히 엮여봐야 다음에도 배신당할 일이 생길 뿐이다.
알고도 망하는 멍청이 짓은 지난 생으로도 충분했다.
한번 배신한 자는 언제나 두 번도 배신한다고 성현께서 누누이 말씀하셨다.
그래서 관상에서도 배신자의 상을 살인자 상과 거의 동급으로 여겼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은 왜 그래?
손유리와 이예린이 스파크를 튀겼다.
얼굴에는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빛은 서릿발 같은 칼날을 품고 있었다.
예쁜 여자는…… 역시 만수무강에 해로운 존재인 것 같다.
***
‘손유리! 너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이예린은 손유리를 안다.
예술대와 법대는 바로 옆 건물이다.
친구 따라 법대에 자주 나타나는 손유리 때문에 법대 남학생들이 여럿 상사병에 걸렸다.
워낙 말도 없을 뿐만 아니라 들이댔던 몇몇 남학생들은 대차게 까였다.
미대 손유리를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는 농담이 유행할 정도였다.
손유리는 쟁쟁한 법률가 집안의 자제다.
예린의 아버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법조계에서 유서가 깊었다.
더욱이 우리나라 첫 번째 가는 대형 로펌의 주인이 손유리 집안 것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손유리와 신입생 시절 종종 비교를 당했다.
미대와 법대 얼짱 라이벌 구도였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이예린이 밀렸다.
오동성 때문에 이미지가 엉망이 됐다.
뭣도 모르고 망나니 오동성을 만난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다.
장태산과 고등학교 시절 풋풋한 감정만 교류하다 마주한 성인들의 세계는 신기했다.
말로만 듣던 대기업 자제가 관심을 표하자 예린은 하늘을 다 얻은 기쁨을 맛봤다.
오동성이 그렇게 개차반 바람둥이인 줄 몰랐다.
마약 빨고 나체로 활보한 사건 이후로 헤어진 이예린도 타격을 더 받았다.
좁은 한국대 법대에서 이예린과 오동성의 연애는 유명했다.
요 근래 신입생 중에 가장 예쁘다는 이예린과 바람둥이 오동성의 결합은 소문을 만들기 딱 좋은 재료였다.
그리고 결과는 평생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됐다.
이예린이 고시에 패스하고 판사나 검사가 되어도 과거가 유령처럼 따라다닐 것이다.
그걸 알기에 이미지 세탁이 필요했다.
장태산에게 미련이 있어 접근한 점도 있지만 신입생들에게 좋은 선배로 남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어차피 08학번 이후에는 로스쿨로 인해 학과가 사라진다.
오동성과 그나마 짧게 만났기에 기회는 있었다.
학과 수업에 충실하면서도 후배들에게 밥을 아낌없이 사줬다.
오티 때 따라가기를 잘했다.
이예린은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예린에게 호감을 표하는 남자 후배들이 넘쳤다.
신입생 중에 예린을 미모로 넘어설 여학생이 없었다.
미모와 친절, 미소와 밥은 이예린을 단숨에 법대 여왕으로 만들었다.
08학번은 직접 이예린과 오동성의 연애를 못 봤기에 과거에 연연하지 않았다.
과거 연애 따위는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게 자신감을 회복해가던 이예린은 오늘 타격을 받았다.
완벽하게 친절하던 장태산의 과거 모습은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저 자신을 바라보는 차갑기 그지없는 눈빛.
조롱이나 분노도 없는 무관심의 극치였다.
그것도 경쟁자라 생각했던 손유리와 데이트를 즐기며 말이다.
‘장태산…… 너 반드시 내 앞에 무릎 꿇리고 말겠어! 이제…… 미련 따위는 더 이상 없어!’
손유리와 함께 식당으로 사라지는 장태산을 보며 이예린은 맹세했다.
“선배, 괜찮아요?”
“어? 어…… 괜찮아.”
후배들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한 이예린은 바로 가식적인 미소를 띠었다.
“장태산 저 자식 왜 그런대요? 선배에게 너무하네요.”
“학교에 놀러 왔나. 수업도 빼먹고 연애질이라니…….”
“맞아. 저 자식 은근 잘난 척하는 것 같아. 학생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차나 타고 다니고…….”
“집이 부자지? 아유. 밥맛이야.”
장태산에 대한 감춰졌던 저열한 질투심을 드러냈다.
“태산이 그런 애 아니다. 너무 그러지 마라.”
동기들이 질투에 투덜거리자 최준식이 나섰다.
“그래. 준식이 말처럼 동기끼리 그러면 못써. 내가 과거에 실수한 것 때문에 그래. 그러니까 다들 화 풀어~.”
“와아…… 예린 선배는 보살입니다.”
“전 예린 선배 일에는 앞으로 무조건 찬성입니다!”
“선배님 같이 마음씨 고운 미녀는 학교에 없을 겁니다!”
우르르 무지한 일벌들이 여왕벌을 호위했다.
“정말? 그럼 이 선배는 오늘 맛있는 점심과 앞으로 여러분이 만나야 될 신림동 스터디를 책임지겠습니다.”
“선배님! 사랑합니다!”
“선배님 저희를 이끌어 주십시오!”
찬사가 사방에서 터졌다.
배시시 웃는 이예린.
그녀의 화려한 웃음에 가련한 법학과 신입생들은 영혼을 빼앗겼다.
미녀의 웃음은 의외로 비싸다는 걸 아직 뼈저리게 경험하지 못했다.
***
“뭐야? 저 남자 우리 수업 들어?”
“어머머…… 오전에 바이올린 켜던 그 남자 맞지?”
“법대생이래. 피아노하고 바이올린 3학년 수업 초토화 시켰대.”
“우리 접싯물에 코 박고 죽자.”
“진짜 잘 생겼다…….”
강의실에 들어가자 날 알아보는 팬들이 많았다.
어제는 손유리와 밥 먹고 커피까지 한 잔 마시고 동양화과에 가서 십장생도를 그렸다.
최고의 찬사를 교수에게 받았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 찾아온 화요일 오전 강의.
사방에서 나를 향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이제는 법대보다 예술대가 편했다.
느긋하게 강의실 뒤편에 앉았다.
“진짜 법대생 맞아요?”
옆에 앉아 있던 제법 괜찮은 여대생이 호기심 반짝이는 눈으로 물어왔다.
알면서 왜 물을까?
어제 아침 사건으로 이 좁은 예술대에 소문 쫙 났을 것이다.
“네. 법학과 08학번입니다.”
“0, 08학번이요?”
“파릇파릇하죠?”
“풋!”
수업 전에 이런 토크 타임 좋다.
“완전 영계 후배님이네.”
“지금까지 제가 본 법대생들 중에…… 원탑이에요. 그것도 월등한~.”
“혜지야. 지금 작업 들어가는 거니?”
“지은아. 너 어제 이 후배님에게 시집가고 싶다고 난리쳤잖아.”
“그…… 그거야.”
“이름이 장태산 맞죠?”
몇 마디에 여대생들 말문이 터졌다.
예술대가 좋은 이유는 바로 꽃밭이라는 거다.
남녀 성비가 대부분 2 대 8 정도다.
지금 3학년 작곡과 강의실에도 여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다들 뒤에서 나누는 내 얘기에 등을 돌리며 관심을 표했다.
단체 미팅 분위기도 아니고 참…… 또 좋다.
예술대생들답게 독특한 분위기가 났다.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 냄새라고나 할까?
“어제 아침에 들었던 바이올린 작품들은 미발표곡 맞죠?”
“스승님이 대단하신가 봐요.”
“다시 한 번 들려주실 수 있어요?”
재잘재잘 조잘조잘.
어느새 내 주변으로 여학생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자세히 보니 나에게 만 원짜리 10장이나 투척한 이도 보였다.
은은한 향수와 화장품, 샴푸 냄새가 사방에서 풍겼다.
왜 음악 남신들이 정신 못 차리고 살았는지 알 것 같다.
능력자 주변에는 언제나 호기심 많은 나비들이 몰려드는 법이다.
화선이 형님을 봐도 그렇다.
그림 실력 없다면 딱 깡패 보스급 얼굴이었다.
“미발표곡들입니다.”
“누구 작품이에요? 스승님 작품이죠?”
“어느 학원 나오셨어요? 아니면 부모님이 음악 계통이죠?”
갑작스럽게 설문 조사가 이뤄졌다.
음대생들답게 주제가 모두 음악과 관련됐다.
“모두…… 제 것입니다.”
“그걸 직접 창작했어요? 정말요?”
“네. 모두 제 것 맞습니다.”
거짓말은 아니다.
셀프 창작품은 아니지만 귀한 포인트 주고 몽땅 구입했다.
그러니 저작권을 비롯해 일체 소유권은 내 거다.
어차피 죽어 신이 된 양반들이 이걸로 따질 수 없다.
“헐……, 대박.”
“거, 거짓말이죠? 바이올린 실력도 엄청난데 작곡 실력까지 겸비했다는 게 말이 돼요?”
말 된다.
내가 아는 음악계 신 형님들 모두 대단한 연주자들이자 작곡가들이다.
“궁금하면 증명해 드리겠습니다.”
“네에에!!!”
“한 곡 더 듣고 싶어요!”
“바이올린 말고 피아노도 돼요?”
강의실 한쪽에 피아노가 있었다.
수업용이지만 한국대답게 그랜드 피아노다.
“그럼 짧게 피아노 소나타 보여드리죠.”
잘난 재능 감춰서 뭐 하겠나.
당당하게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어차피 강의시간도 10분 정도 남았다.
가볍게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쇼팽 형님이 하늘에서 작곡한 파이노 소나타를 선택했다.
“작품 제목이 뭐예요?”
“제목은……. 천상비애(天上悲哀)입니다.”
# 141
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