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445
445장. 너구리 낚시 (2)
“누구를 만나?”
– 성 회장이 랏데 호텔 집무실에서 장태산과 접촉했습니다.
“이 시간에? 왜?”
– 그것까지는…….
“알았네. 또 다른 움직임이 있으면 바로 연락해.
– 넵!
엘자 그룹 고자룡은 갑자기 전해진 보고에 눈살을 찌푸렸다.
퇴근 후 집에서 저녁을 먹고 서재에서 사업 계획서를 살피던 중이었다.
오랜만에 누리는 여유로운 시간에 느닷없이 반갑지 않게 전해진 보고 내용.
10대 그룹 정도 되면 각자 정보 수집을 위한 조직을 운영한다.
좁은 땅에서 서로 얽히고설켜 사업을 하다 보니 정보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사업 영역이 서로 겹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현재 랏데는 사업 영역을 확장하려고 기지개를 켜는 중이었다.
유통과 관광, 서비스 업종에서 화학과 건설, 제조, 금융까지 손을 뻗었다.
한국의 좁은 시장을 놓고 박 터지는 머리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껌이나 콜라나 팔 것이지…….”
요즘 들어 고자룡은 많이 예민했다.
무시하고 크게 의중에 두지 않았던 스마트폰 시장이 무섭게 성장했다.
아이펀은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많았고 순식간에 무서운 괴물이 됐다.
오정에서 곧 비장의 한 수를 지를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뒤늦게 뛰어든 엘자 전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것저것 보유한 기술과 적용할 만한 소스가 너무 부족했다.
스마트폰이라는 강자에 핸드폰 업계가 고사 직전에 몰리고 있었다.
절대 공룡이라 여겼던 노키아 성장세가 거짓말처럼 멈췄다.
아니 판매가 확실히 꺾였다.
엘자 그룹에도 불똥이 튀었다.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고 싶어 하는 소비자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매일 같이 회의를 하고 연구진을 닦달했지만 스마트폰이라는 놈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구글이 품고 있는 안드레이드라는 스마트폰 운용 프로그램이 풀렸다.
그래도 아이펀을 따라잡기가 쉽지 않았다.
애플의 기술은 예술이었다.
“젠장……. 그놈 말이 맞았어!”
고자룡은 몇 달 전 만났던 장태산의 충고를 뼈저리게 되새겼다.
사공이 너무 많다는 말.
주식이 분산되어 있어 모두의 말을 듣다보니 결정이 늦어졌다.
과거와 달리 IT 시대는 촌각으로 시장의 판세가 바뀌고 있었다.
이럴 때는 오정의 회장처럼 무섭게 밀어붙여야 하는데 엘자는 그렇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태클이 들어왔다.
아직 일반 핸드폰 시장만으로 버틸 만하다는 개소리들을 지껄였다.
만년 2등에 안주해 버린 임직원들의 나태한 사고에서 나오는 행동이었다.
선두가 되고자 하는 뜨거운 사업적 욕망이 턱없이 부족했다.
엘자 반도체를 빼앗길 때도 그랬다.
“LCD도 문제야.”
중국에서 파격적으로 미끼를 던졌다.
LCD 단지를 중국에 건설하면 세금 감면 같은 인센티브를 던지겠다고 은밀히 요청이 왔다.
시장적 측면에서는 현지로 들어가는 게 맞지만 미래가 불투명했다.
지적재산권 탈취에 혈안이 된 중국 정부는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LCD 기술을 확보한 한국 기업과 인재를 빼앗아 가는 중이다.
몇 년 안에 LCD는 레드 오션이 될 거라는 연구 보고가 올라오는 판이다.
이래저래 불편한 고자룡.
야밤에 술 마시다 쫓아낸 장태산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둘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걸까? 늙은 너구리 회장이 만만치 않은데…….”
돌아가신 아버지보다 더 연배가 높은 랏데 성경호 회장.
볼 때마다 섬뜩한 남자다.
속을 알 수 없는 데다 노인네 욕심이 끝이 없었다.
일본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해 어렵게 성공한 사업가답게 사업 확장 욕이 대단했다.
재계서열은 그보다 위인 고자룡 회장도 성경호 회장에게는 고개를 숙였다.
사람을 압도하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카리스마가 있었다.
“휴우…….”
한숨을 내쉬며 답답한 마음을 달래지 못한 고자룡은 거실로 나갔다.
가사 도우미도 퇴근하고 없는 집안은 가족들만 남았다.
“마실 거라도 한 잔 줘요?”
거실에서 책을 읽던 아내가 다가와 고자룡 회장을 챙겼다.
“시원한 물 좀 줘.”
“일이 잘 안 풀려요?”
“사업이 다 그렇지…….”
냉수를 챙겨 나온 진윤정이 물을 남편에게 건넸다.
“힘내세요. 당신은 뭐든 잘하시잖아요.”
다른 재벌가 안주인과 달리 조용하게 내조에 힘쓰는 아내를 고자룡은 다정하게 바라봤다.
지금의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아내 덕분이었다.
띠리리릿.
현관문이 열렸다.
“학교 다녀왔습니다.”
막내 딸 고연지가 들어왔다.
“일찍 다녀.”
진윤정이 먼저 잔소리를 했다.
“개강이라 바빴단 말이야~.”
“신입생도 아니고 뭐가 바빠.”
“취직 준비해야지. 으흐흐.”
고연지가 귀엽게 웃었다.
“밥은 먹었냐?”
“네~. 사랑하는 우리 아빠~.”
막내딸 애교에 고자룡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연지야.”
“네~.”
“너 혹시 그 녀석 만나냐?”
“누구요?”
“장태산 말이다.”
“……가끔 문자만 하는데 왜요?”
“학교에서 만나면 밥 좀 먹고 그래. 집에도 한 번 초대하고.”
“네? 진짜요?”
고연지는 살짝 당황했다.
한동안 장태산 이야기를 입에도 올리지 못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전과 확연히 달라진 아빠의 말투가 느껴졌다.
“왜 싫어?”
“아니요……. 그건 아닌데……,”
방학 때 장태산 얼굴 한 번 못 봤던 고연지의 얼굴에 순간 그리움이 스쳤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주에 한 번 시간을 내 만나보려고 생각했었다.
그와 함께 먹었던 얼큰한 순댓국과 알싸한 소주가 요즘 따라 더 생각났다.
***
“앉지.”
“감사합니다.”
노회장이 자리를 가리켰다.
올해 나이 90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아주 정정했다.
노회장이 가리킨 가죽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집무실은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고 모던했다.
가질 만큼 가져보고 다 누려본 자의 소탈함마저 느껴졌다.
“차는?”
“회장님이 즐겨 드시는 게 있다면 한 잔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녹차로 하지.”
“네.”
“윤 실장. 녹차 준비해.”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나에게 적의를 내비쳤던 윤창호 실장이 노회장 앞에선 유순한 시종처럼 굴었다.
성격 까칠한 회장 밑에서 수십 년 굴러먹었다면 마음 수련이 어지간히 단련됐다는 의미였다.
다만 나를 잘못 판단한 것만은 패착이었다.
“날 보자고 했다고?”
회장이 상석에 가 앉았다.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랏데 그룹 회장 성경호.
하늘이 내린 갑부(甲富)의 관상이었다.
을부(乙富)도 아니고 병부(丙富)도 아닌 최고의 재물상.
넓은 이마는 주변에 사람이 많다는 걸 의미했다.
고집스런 콧날은 안으로 감춰져 복을 담기에 충분했다.
두드러진 양 볼의 광대뼈는 뚝심을 의미했다.
큰 귀는 장수를 의미했으며 가지런한 치아는 재물을 되씹어 먹는 복소 이빨을 닮았다.
다만 하관이 흐릿해 인생 말년이 흔들리는 상이었다.
내가 아는 그의 인생만 떠올려 봐도 파란만장했다.
돈 있는 집안 덕분에 일본에 유학했던 그였다.
국가간 운행이 통제되던 시절 밀항선을 타고 일본에 들어가 껌 사업으로 대박을 쳤다.
전후 배고픈 일본인들에게는 껌이 어울릴 것 같지 않았지만 풍선껌은 공전의 히트를 쳤다.
그리고 랏데를 설립한 후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며 주변을 휩쓸었다.
능력과 운이 결합해 1970년이 되기 전에 일본 10대 재벌이 됐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땅 장사에도 두각을 보였다.
일본의 부동산 버블로 한때 전 세계 부자 순위 5위를 찍기도 했던 랭킹자였다.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일본에서 했던 경영 방식을 재현해 모조리 휩쓸었다.
정권과도 죽이 잘 맞아 엄청나게 돈을 긁어모았다.
오정이나 연대 같은 대형 중공업이나 반도체 사업 없이도 재계 순위 손가락 안에 들었다.
조세포탈이나 기타 등등 범법 행위를 불문하고 그는 대한민국 재계의 거목이었다.
최소한의 예의를 보내는 건 당연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거래를 제안코자 하관우 회장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거래? 허허. 자네와 내가 거래할 게 뭐가 있나?”
말투가 느릿느릿했지만 낱말 하나하나에 담긴 힘이 장난 아니었다.
득도한 절대고수 같았다.
보기에는 다소 평범해 보일 수 있었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감춰진 깊은 눈빛은 세상 모든 걸 희롱하고도 남을 만한 맹수 같았다.
오욕칠정을 떠난 절대자의 고독이 엿보였다.
또 내 눈에는 다른 종류의 것이 한 가지 더 보였다.
……심보 고약한 늙은 너구리.
가지지 못하는 건 아낌없이 파괴해 버리는 비정함이 번뜩였다.
웃고 있지만 검을 뽑는 순간 상대의 목을 냉혹하게 베어버리는 살수의 기가 읽혔다.
거래라는 말에 꿈틀하고 성 회장의 자존심이 움직이는 게 느껴졌다.
노림수가 제대로 먹혔다.
아마 지금껏 나처럼 어린놈이 거래하자고 찾아온 적은 없을 터였다.
대선 후보나 각 대기업 회장, 최소 총리급 인사 정도는 되어야 독대를 했을 것이다.
“손해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너구리에게 호기심이라는 미끼를 듬뿍 던졌다.
“손해? 내가?”
“회장님이 아니라 랏데 그룹입니다.”
“랏데?”
성경호 회장은 랏데를 자신보다 더 애지중지했다.
의 여주인공이었던 샤랏데.
괴테처럼 한때 문학가를 꿈꿨던 성경호 회장이었다.
성회장은 젊은 시절 소설 속 여주인공 샤랏데를 몹시 사랑했었다고 어느 신문에서 고백했었다.
그 사랑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닌 랏데 그룹.
그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이 사람아……. 내 앞에서 허튼 말하면…… 죽을 수도 있어.”
너구리가 심보를 드러냈다.
부풀려진 그의 볼.
그 반대라는 걸 그는 몰랐다.
그래도 끝까지 예의는 지켰다.
대한민국 경제의 산 증인에 대한 깊은(?) 배려였다.
“천일 건설 주식 5%를 시장가로 매입해 드리겠습니다.”
인심 쓰듯 말했다.
“매입?”
어이가 없는 듯 다시 묻는 성 회장.
천일 그룹과 관련된 정보를 얻었을 것이다.
내가 찾아온 이유도 그것에서 찾았음이 뻔했다.
천일 그룹 창업 시기와 연관이 있는 성경호 회장이었기에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일 것이다.
기껏 시장가로 해봐야 몇 백억 수준이었다.
세계 부자들 순위를 찍어봤던 그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숫자다.
애들 코 묻은 돈 정도나 될까?
그런데 감히 자신 앞에서 시장가로 사겠다고 말했으니 내가 미친놈처럼 보일 것이다.
“말이 심하군!”
녹차를 탁자 위에 내려놓는 윤창호 실장이 은근한 분노를 드러냈다.
불편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충견다웠다.
“녹차가 맛있군요~.”
딱 봐도 유기농으로 재배된 최고급 죽로차였다.
연노란 색감과 입안에 가득 맴도는 대나무 향기가 죽였다.
돈 주고도 쉽게 구할 수 없는 명품이었다.
“허허허…….”
성경호 회장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내가 또라이로 보이는 게 그로서는 정상적인 사고였다.
나이도 새파랗게 젊은 놈이 살 만큼 산 노인 앞에서 재롱떠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성경호 회장과 옆에 있는 충견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한국 주식 시장 폭락 때 로버트 라이언을 통해 공매도를 비롯해 치고 빠지는 전술로 랏데 그룹 주식들을 쓸어 담았다.
마음만 먹으면 랏데 그룹 흔드는 건 지금 당장 일도 아니다.
“거래라고 했으니 묻겠네……. 시장가로 천일 건설 주식을 가져가면 나에게 뭘 주겠나?”
역시! 재계의 왕할배 다웠다.
성질만 내는 윤창호 실장과는 전적으로 달랐다.
이제는 승부수를 띄워야 할 타이밍.
딸깍.
녹차 잔을 내려놓았다.
고요한 침묵 속에 울리는 맑은 찻잔 소리.
호기심으로 은은한 분노를 누르고 있는 늙은 너구리 할배를 두 눈 똑바로 뜨고 바라봤다.
싱긋.
일단 웃음 한 발 장전해 던져줬다.
그리고…….
“랏데를 한 번 정도…… 살려드리겠습니다.”
# 446
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