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76
75장. 삼상삼몽(三床三夢)
“대표님, 도대체 뭐 하시는 분이세요?”
오랜만에 정식 출근하자 유 팀장이 깜짝 놀랐다.
회사는 변함없이 날 반겼다.
밖은 영하 10도의 맹추위였지만 따뜻한 기운이 가득 넘쳤다.
내 회사.
과거 직장인 시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편했다.
“저요? 여기 대푠데요?”
널찍한 사무실은 유세라 팀장 홀로 지키고 있다.
중앙 탁자에 붉은 장미와 안개꽃이 화병에 꽂혀있었다.
그리고 내 앞에도 그에 못지않은 미녀가 존재했다.
블라우스와 세미 정장 치마를 입은 오피스룩계의 대모 유세라 팀장의 미모는 여전했다.
10대 소녀들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화장빨도 기가 막혔다.
한 듯 안 한 듯 쌩얼 화장법은 내가 봐도 감탄이 나왔다.
마음이 편한 듯 뽀얀 피부에는 잡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아~ 그러세요~.”
“왜요? 무슨 일 있습니까, 유 팀장님?”
“아무리 회사에 직원이 혼자라지만 대표님 너무한 거 아니에요? 얼굴 잊어버려 남들이 보면 제가 회사 주인인 줄 안단 말이에요!”
방울 같은 유세라 팀장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렸다.
귀엽다.
30대 총각 귀신으로 죽었던 나에게 유세라 팀장은 어렸다.
아직도 내가 고삐리라는 걸 밝히지 않았다.
몸은 10대지만 마음만은 아재라는 걸 밝힐 수 없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유 팀장님은 우리 회사 대표 얼굴입니다. 자부심을 가지세요. 나중에 제가 회장되면 창업 직원 특혜로 사장 자리 하나 떼 주겠습니다.”
“피이, 대표님 말은 너무 잘해요.”
말 몇 마디에 유 팀장님이 활짝 웃는다.
그냥……, 사무실이 환하게 밝아졌다.
사장들이 얼굴 되는 비서들 뽑은 이유가 다 있다.
피로가 싹 가시는 듯 기분이 좋다.
이 맛에 사장하는 것 같다.
“대표님,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지방 일은 다 보셨어요?”
지방 일은…….
저 이번에 고등학교 졸업합니다!
“이제부터 서울에서 근무합니다.”
“정말요? 그럼 매일 출근하시는 거예요?”
유 팀장님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매일 출근은 힘들고 가끔 출근하겠습니다.”
대학생 되면 다시 학생 신분이다.
다시 사는 인생의 두 번째 캠퍼스 라이프는 후회 없이 보내고 싶다.
과거 후회의 점철이었던 고등학교 시절도 잘 마무리돼 가고 있다.
이제 다음 숙제는 낭만 철철 대학 생활이다.
“바쁘신 건 알지만 외롭고 아리따운 직원 너무 방치하지는 마세요.”
“방치가 아니라 방목이죠. 믿으니까.”
“…….”
내가 믿는다고 말하자 유 팀장 얼굴이 살포시 붉어졌다.
“커피 드실래요? 에티오피아 모모라 내추럴 원두를 새로 구입했어요. 부드러운 산미가 괜찮아요.”
유 팀장은 말을 돌렸다.
“좋죠. 한 잔 부탁합니다. 그리고 겨울 휴가는 생각해 봤어요?”
여름휴가도 화끈하게 엄마와 함께 유럽 11박 12일로 보내줬다.
겨울 휴가도 보너스로 준비했다.
앞으로 우리 회사 직원들은 일 년에 두 차례 휴가를 보낼 생각이다.
다른 건 몰라도 회사 직원 복지 하나는 최고다.
“아직…….”
“가족 여행에 한해서 5인까지 호텔비와 비행기 표는 지원합니다. 단, 비즈니스석 빼고요.”
“저, 정말 그래도 돼요?”
좀 더 쏘고 싶었지만 나중에 다른 직원과 형평성을 위해서는 적당한 게 좋았다.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선조들의 격언도 참고했다.
“오늘 저녁 같이 먹읍시다. 선약이 없다면.”
“어, 없어요!”
“가고 싶었던 맛집 있으면 예약해 놔요.”
“!!!”
유 팀장님 얼굴에 감동이 가득 찼다.
“그럼 잠시 후에 뵙겠습니다.”
“네! 대표님. 커피 바로 대령하겠습니다. 충성!”
유 팀장님이 장난스럽게 인사하며 탕비실로 향했다.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
나만 보고 싶을 정도로 아까웠다.
그렇게 그녀를 보내고 굳게 닫힌 대표실 문을 열었다.
‘전쟁터 복귀 완료!’
세 대의 모니터와 넓은 책상이 날 반겼다.
주인과 잠시 떨어져 있던 관우의 청룡언월도 같은 내 비장의 무기다.
주 전투실을 보자 가슴이 달아올랐다.
학교 면접보다 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는 인터넷 세상 너머에 내 주 전장이 존재했다.
그곳에서 나를 불렀다.
어서 와서 싹 쓸어가라고!
어제 면접은 완벽하게 끝냈다.
교수들과 자존심을 걸고 1차전을 끝냈다.
레이스는 그렇게 끝나지 않았다.
내가 만약 2차까지 합격한다면 졸업 때까지 모든 법학과 교수님들의 전공과목에서 A0 점수 이상과 수업 면제를 받기로 약속 받았다.
면접장이 아니라 도박장 같았다.
교수님들도 자존심이 있었다.
어떤 천재도 현역 2학년에 동차 합격한 전례가 없기 때문에 과감한 베팅을 질렀다.
1년의 유예기간을 벌었다.
짜고 치는 고스톱의 무서움을 모르는 교수님들이 순진했다.
“예린 선배, 한 번 지나간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아. 나 그렇게 순진한 놈 아니야.”
면접이 끝나고 그대로 학교를 나왔다.
안타깝게도(?) 예린 선배와 약속은 지킬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예린 선배 전화번호는 바뀌었고, 난 그걸 몰랐다.
없는 번호를 어떻게 찾아 연락을 하겠는가.
쿨내 진동하며 학교를 떠났다.
지나간 미련 따위에 고민할 시간이 아까웠다.
“올해가 최고의 쇼핑 시즌이다. 2008년도와 2009년도 다 쓸어주마.”
지금 곤두박질치고 있는 미국 달러가 연방준비은행의 발권 인쇄기 가동 이후로 반전이 벌어진다.
버냉키 형님이 무지막지하게 하늘에서 돈비를 뿌렸다.
모든 국가들이 미국에 무릎을 꿇었다.
발권국만이 사용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다.
유럽과 일본도 본격적으로 돈을 찍었다.
환율이 미친 듯이 요동을 친다.
요 근래 몇 십 년 동안 이런 폭락과 폭등은 없었다.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핵폭탄이 터질 때 전 세계가 아우성을 질렀다.
기업들 주가는 폭락하고 흑자 도산하는 괜찮은 사업체가 많았다.
때를 기다렸다.
스으윽.
겉옷을 옷걸이에 걸어두고 의자에 앉았다.
창밖으로 눈발이 날렸다.
이 겨울이 가고 나면 찾아올 전 세계적 지독한 한파.
미리 대비하지 않는 자에게는 IMF 이상의 고통이 닥칠 것이다.
***
“조 변호사, 지금 얼마를 투자하겠다고?”
“선배님. 1,000억을 투자하겠다고 들었습니다.”
“1,000억……, 허어.”
삼우의 두 대표들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조윤태 변호사의 제안에 입맛을 다셨다.
큰 투자 금액이었다.
업계 1위 리앤장을 잡기 위해서는 투자가 절실했다.
리앤장에 소속된 변호사, 회계사, 변리사, 세무사, 노무사, 관세사 등의 전문가는 900명을 넘었다.
그들이 일 년에 벌어들이는 개인적 수익이 올해 8억을 넘어갔다.
그에 반해 삼우는 300명 안팎의 전문가들이 4억 원을 겨우 넘겼다.
인원수 문제가 아니라 끗발 날리는 전관들과 능력자들을 영입하지 못해서 벌어진 간극이었다.
투자 없이 로펌 업계도 성장할 수 없다.
이것저것 떼 주고 나면 그렇게 많이 남지 않았다.
전문가들과 보조 직원들 월급을 제하고 나면 겨우 50억이 남을까 말까 했다.
투자에 목말랐지만 쉽게 받을 수는 없었다.
1,000억이라는 돈을 메꾸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투자자가 원하는 지분은 35프로입니다. 적지 않지만 두 분 경영 지분에는 전혀 영향이 없는 금액 수준입니다.”
조윤태 변호사는 슬쩍 장태산 대표가 원하던 30프로에서 5프로를 더 얹었다.
두 대표 변호사가 느끼는 위기감이 요즘 컸다.
총 수임료 아래쪽에 있던 법무법인 강촌이 무섭게 치고 올라왔다.
바로 위쪽에 있는 대서양을 따라잡기는커녕 업계 4위로 내려앉을 판이다.
“조금 많군.”
검찰총장 바로 아래였던 대검찰청 차장검사 봉석 대표가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지금껏 두 대표가 지분 50대 50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만약 여기서 35프로를 빼가면 단일 지분으로는 최고가 된다.
“두 분 우애는 이 바닥에 쭉 퍼져 있습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쉽지 않습니다. 곧 외국 로펌에 법률시장도 개방됩니다. 그전에 좀 더 위로 치고 올라가야 합니다.”
‘호오, 버티시겠다?’
검찰 선배도 있지만 조윤태 변호사는 철저하게 장태산의 조력자였다.
두 대표는 그렇게 인간적이지 않았다.
실적이 적다면 후배고 뭐고 바로 목을 쳤다.
2007년 현재 변호사 수가 8,000명을 넘었다.
앞으로 로스쿨 졸업생이 등장하는 몇 년 후에는 그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 것이다.
그때에는 더욱더 실적 위주로 로펌이 돌아갈 게 뻔했다.
조윤태는 돈보다는 인간적으로 좀 더 따뜻한 변호사가 되고 싶었다.
퇴직 후 집안 경제 사정과 미래를 위해 로펌에 투신했지만 의리는 없었다.
“IMF 이후로 외국 기업의 한국 투자가 늘고 있습니다. 기업 간 대규모 M&A가 활발해지고 있지만 우리 삼우는 이렇다 할 실적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리앤장처럼 국제중재팀 같은 슈퍼 조직 육성이 절실하게 요구됩니다. 앞으로 로펌은 공정거래나 노동, 기업 지주사 전환 같은 민감한 사업에 투자되어야 합니다. 대표님들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조윤태 변호사는 약점을 물고 늘어졌다.
리앤장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맨파워를 길러야 했다.
“로스쿨 애들이 본격적으로 튀어 나오기 전에 시장을 잡아야 합니다. 법률 시장이 포화가 되면 제 살을 깎아 먹는 판이 됩니다. 그전에 리앤장처럼 특화된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투자가 절실합니다!”
조윤태 변호사가 열변을 토했다.
“그 지분권 행사는 누가 할 텐가? 투자자를 한번 보고 싶은데…….”
“지분에 대한 권한을 저에게 위임했습니다. 아직 얼굴을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 분입니다.”
“조 변, 자네가?”
“네. 저에게 일체 권한을 위임한다고 했습니다.”
“하하. 그럼 이야기가 간단하군. 자네가 이사급으로 나선다면 모양새도 나쁘지 않고…….”
변호사 출신 대표 김강우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조윤태 변호사가 의리를 중시하는 인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검찰 출신 중에서도 강골이라 다른 로펌에서는 불러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믿음직스럽지 않았지만, 요즘 제법 성과를 냈다.
그런 조윤태가 이사가 된다면 나쁠 게 없다.
“그래 나도 조 변이라면 믿을 만하지. 우리 조변이 검찰에 있을 때 의리파로 널리 이름을 떨쳤지~.”
봉석 대표도 동의를 표했다.
‘조 이사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면……, 흐흐흐.’
봉석은 입맛을 다셨다.
같은 동업자였지만 요즘 부딪치기만 하던 김강우가 눈에 거슬렸다.
만약 여기서 지분 변화가 있다면 총괄 대표가 될 수 있었다.
“투자금은 확실하지?”
김강우가 조용히 물었다.
‘투자금 회수가 쉬울 줄 아나. 한번 들어오면 다 내 거다. 크크크.’
김강우는 사악한 음모를 꾸몄다.
“물론입니다. 투자자가 돈이 썩어 납니다. 해외 선물 투자로 떼돈을 벌었는데 이쪽에 투자하라고 제가 설득했습니다. 건물이나 중소기업 몇 개를 인수할 생각도 있는 것 같은데 우리 로펌에 투자를 받으면 일거리가 몰릴 것 같습니다.”
“오! 그래!”
“누군지 몰라도 대단한 분이군. 한 번 볼 수는 없나?”
김강우가 욕심을 보였다.
조윤태 말고 자기가 직접 나서고 싶었다.
로펌에 1,000억씩이나 투자하는 멍청이는 만나기 쉽지 않았다.
겉보기에는 화려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기업들 간의 경쟁보다 더 치열한 곳이다.
“비밀서약을 맺었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허어, 누군지 몰라도 똑똑한 친굴세.”
봉석 대표가 아쉬움을 토했다.
“추가 지원도 슬쩍 말해두었습니다. 업계 표준 계약서를 작성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추가 지원도?”
“!!!”
욕심을 드러내는 두 대표.
조윤태는 둘의 욕심을 간파하고 안타까워했다.
‘태산이가 어려 보여도 그 녀석은 괴물이다.’
선견지명 비슷한 능력을 소유한 태산이가 찜한 로펌 인수다.
뭔지 몰라도 큰 판을 위해서 장기판의 말을 구입하는 게 확실했다.
“알겠네. 투자를 받겠네!”
봉석이 먼저 걸렸다.
“나도 받아들이지!”
김강우 변호사도 안경 너머로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명한 결정들이십니다!”
설계자의 협력자가 활짝 웃었다.
“잘 부탁하네. 조 이사~.”
“축하하오, 조 이사!”
“열심히 뛰겠습니다!”
셋은 웃었다.
삼상삼몽(三床三夢)으로 각자의 생각에 빠진 세 사람.
각자 비수를 감추고 서로를 향해 활짝 웃었다.
# 76
회귀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