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gend of the Regression RAW novel - Chapter 818
819장. 르네상스(2).
저벅저벅저벅.
“오늘 날씨가 좋군요.”
“겨울도 지났으니 봄이 왔다는 소식이겠지요.”
“오는 길에 만난 풍차들도 그런 소리를 하더군요. 스프리이이잉~ 스프리이이잉~.”
“오! 그래요? 저는 처음 들어보는 얘기군요. 퇴근 후에 저도 풍차를 만나러 가봐야겠습니다. 하하하하.”
네덜란드 벨트호벤에 위치한 TSML 본사.
일단의 미국인들이 본사 임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회의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분위기는 좋았다.
자산 200억 달러, 시가총액 600억 달러.
연 매출 90억 달러와 순이익 20억 달러의 탄탄한 재무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업체.
전 세계에 흩어져 근무하는 직원이 2만 명이 넘었다.
뿐만 아니라 유사 업종의 경쟁업체들과도 차별화된 기술력을 소유했다.
노광 장치 업계의 갑.
출발은 필립스와 합작 회사로 작은 목재 건물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트윈 스캔 방식의 노광 장치 덕분에 짧은 기간에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 대당 8억 달러가 넘는 고가장비가 대박 신화를 일으켰다.
세계적 반도체 호황에 편승하며 시세를 확장했다.
그러나 투자에는 언제나 목말랐다.
압도적인 격차로 경쟁 업체인 캐논과 니콘을 찍어 누르기 위해 새로운 프로젝트에 들어갔다.
연구 개발비가 상당했다.
대당 가격도 꽤 높아 소비할 수 있는 업체가 한정됐다.
단가가 높아 소비 업체의 한계에 부딪혀 투자를 망설이고 있던 순간.
운 좋게 미국인 투자자가 찾아왔다.
그것도 분위기 타는 평범한 투기꾼이 아닌 월가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투자자였다.
‘투자의 귀재라더니 정말이었어.’
TSML의 대표 로빈 판데이크는 바로 옆에서 걷고 있는 남자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비밀에 붙여진 투자 정보를 정확히 알고 찾아왔다.
“로빈. 그런 사랑스런 눈길은 부담스럽습니다.”
“하하. 미안합니다. 로버트 같은 거물을 이렇게 직접 마주하니 제 마음이 저도 모르게 흥분했나 봅니다. 들어가시죠.”
로빈 판데이크는 회의실 문을 직접 열었다.
별 장식 없는 유백색의 심플하고 기다란 대형 탁자와 20여 개의 의자가 쭉 늘어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로버트 라이언과 그를 수행하는 비서, 변호사들이 한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맞은편에 자연스럽게 착석한 TSML 임직원들.
테이블 자리마다 생수 한 병씩이 놓여 있었다.
실리를 추구하는 네덜란드식 회의.
“샴페인은 회의 끝나고 저녁 만찬 때 마시도록 하죠. 로빈, 우리 측 조건에 대해 임원들과 협의해 봤습니까?”
필립스로부터 독립해 독자적인 회사로 굴러가고 있는 TSML.
아직 앞에 내세울 만한 대주주는 없다.
대신 임원들 모두가 주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직원들 상당수가 스톡옵션을 소유한 주주인 셈이다.
그만큼 회사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
“투자금 100억 달러는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모전환사채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투자금이 적나요?”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던 정확한 액수입니다. 문제는 5년 뒤인데 전환사채 주식 전환 후에 경영권에 대한 위험 문제를 미리 예방했으면 합니다.”
사모펀드를 통한 사모전환사채.
로버트 라이언은 이자가 거의 없는 사모전환사채를 디밀었다.
지금으로부터 5년 뒤에 주식이나 원금으로 교환할 수 있는 전환사채.
주식이 목적이라는 것 정도는 로빈 판데이크와 TSML 임원들도 알 수 있었다.
“경영권 위험이라…….”
로버트 라이언이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정보가 노출됐어. 차세대 EUV 장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게 확실해.’
TSML연구팀에서 비밀리에 개발 중인 EUV 노광공정.
지금까지 반도체 업체에서 사용하던 193nm 파장의 불화아르곤 공정은 10나노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공정 단계가 늘어나면서 생산성이 급격하게 떨어졌다.
그래서 개발된 EUV 공정.
극자외선 파장을 광원으로 이용해 미세 공정 구현이 가능했다.
다만 진공상태 패터닝, 특별 미러링 시스템 등 초고가 제품 비용이 발목을 잡았다.
좀 더 단가를 낮추기 위해서는 연구비가 계속 투자되어야만 했다.
지속적인 투자에 회사의 미래가 달려 있었다.
공정의 집적도가 곧 반도체 업계의 생사를 결정지을 정도다.
피 말리는 상황에서 투자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자금이 수혈되면 기술 개발은 빠르게 진척을 보일 터.
문제는 투자금이 월가 사모펀드 자금이라는 거다.
회사가 결실을 맺은 뒤 주식으로 사채가 전환되면 대주주 지위가 바뀔 수 있다.
“로빈. 100억 달러의 의미를 모르시겠습니까?”
“네?”
로버트 라이언이 웃으며 물었다.
“시장에 풀린 TSML 주식 중 상당수를 이미 확보했습니다. 거기에 100억 달러를 더 투자한다면…….”
“!!!”
로빈과 임원들이 로버트의 말에 당황했다.
그 말은 이미 경영권을 확보했다는 소리였다.
“경영권에는 관심 없습니다. 제 투자자들은 TSML의 장기 성장에 관심이 많습니다. 미래 반도체 시장에서 EUV 공정 가치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분들입니다. 전 그분들의 대리자로 왔습니다.”
담담한 로버트 라이언의 방문 고백.
‘그럼 진짜 순수한 기술자금?’
네덜란드는 유럽 어떤 국가보다 기업 회계와 경영에 투명했다.
대주주라고 회사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순수한 기술자금이라면 순순히 받아들여야만 했다.
“반도체 시장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조할 르네상스를 열어가 주기를 투자자분들은 고대하고 있습니다. 로빈과 TSML 임직원분들은 그 점만 잊지 않으면 됩니다. 경영권 부분은 최소 10년 이상 개입하지 않을 겁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공증 문서도 작성해 드릴 겁니다.”
로버트가 옆에 앉아 있던 변호사들을 돌아봤다.
의미를 안 듯 고개를 끄덕이는 변호사들.
‘기회다!’
로빈과 임원들은 확신이 들었다.
로버트 라이언의 자금을 받으면 확실히 경쟁 업체들을 누를 수 있을 것이다.
오른손을 내미는 로빈 판데이크.
“투자를 환영합니다.”
그 손을 덥석 마주잡는 로버트 라이언.
“TSML에 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기를.”
뜨겁게 맞잡은 두 사람의 손.
‘보스. 오늘도 당신의 종은 신실했습니다.’
로버트 라이언은 진심을 다해 보스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최근 들어 기술회사에 투자를 늘려가고 있는 보스.
로버트 라이언은 그런 보스의 충실한 말이 열심히 뛰었다.
***
입을 열었지만 임준형은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장태산은 르네상스의 갈림길이라고 말했지만 그 말이 아직 피부에 와 닿지 않았다.
아버지가 쓰러진 지 얼마 안 됐다.
그 전까지 웬만큼 중요한 보고는 전부 임성철 회장이 처리했다.
몇 달 동안 쉴 틈 없이 업무를 파악했지만 명확하게 색다른 노선은 없었다.
현장에서 확인한 오정은 생각보다 더 거대한 집단이었다.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창조에 힘쓰는 직원들의 열정은 임준형을 몇 번이나 뜨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장태산의 요구에 결정이 쉽지 않았다.
대대적 물갈이가 감행되면서 이제 손발이 되어 가고 있는 수족들은 아직 능력이 받쳐주지 못했다.
장태산의 물음에 확신 있게 답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자네 생각을 듣고 싶군.”
꿀꺽 입 밖으로 나오려던 대답을 삼키고 대신 귀를 열기로 했다.
옛 일을 털어버리고 새로이 출발 할 때는 귀를 먼저 열라는 임성철 회장의 조언이 떠올랐다.
“형님. 성공하시겠습니다.”
장태산의 대답은 생각지 못한 의외의 대답이었다.
‘지금 인정받은 건가?’
처음 대면 때와 달리 오늘은 후하게 점수를 주고 있는 장태산.
왠지 기분이 흡족했다.
“고맙다고 말해야겠지?”
“물론입니다. 임성철 회장님도 못 들었던 칭찬입니다.”
임준형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장태산의 평가는 진솔했다.
“비행기 태우지 말고 다음 스토리 진행해줘. 내가 뭘 하면 되나?”
흥미가 생겼다.
장태산의 칭찬과 자연스럽게 연결될 그 무엇.
오정그룹 경영에 도움이 될 게 확실했다.
“르네상스는 혁명을 의미합니다. 오정의 초격차 기술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정확한 목표 없이 전진하지 못하면 좌초당하게 됩니다. 경쟁자들은 덩치를 더 키우고 독해질 겁니다. 특히 대만의 TS는 오정의 막강한 경쟁자가 될 겁니다.”
“NK가 아니라?”
“사이즈가 다릅니다. 추구하는 이상도 현격하게 차이가 납니다.”
“TS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보다는 파운드리가 강점인 반도체 업체야. 그들과 경쟁자가 되라는 것은…….”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AI 반도체는 4차와 5차 산업 혁명의 주역입니다. 아실런지 모르겠지만 AI 반도체는 뉴럴 프로세싱 유닛, 뉴로모픽 반도체, 지능형 반도체 같은 인간 두뇌와 비슷한 용어가 활용됩니다. 즉, AI 반도체는 신경세포와 시냅스처럼 칩 안에서 자신들끼리 수 만, 수십, 수백, 수천만 등등의 연산을 동시 처리할 수 있습니다.”
“!!!”
‘도대체 장태산! 네 정체가 뭐야!’
인적 없는 한적한 실내 낚시터.
고작 라면을 안주 삼아 소주를 나눠 마시며 미래 기술에 대해 진중한 대화를 나눴다.
관련 분야 학자도 아닌 투자자와 오정 후계자와의 만남.
신문 기자들이나 다른 업체 관계자들이 이 상황을 본다면 눈이 뒤집혔을 것이다.
“본격적인 AI시대가 도래하면 직렬 컴퓨팅 구조인 CPU의 중요성은 현저히 떨어집니다. 반대로 병렬 컴퓨팅 구조인 AI 반도체는 날개를 달 겁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만 이제 겨우 태동하는 시장…….”
“늦었습니다.”
“뭐라고?”
“AI 기술이 탑재된 온칩에 대한 투자는 얼마나 하고 계십니까?”
“…….”
“스마트폰에도 적응 가능한 NPU에 대한 연구는 진행정도를 파악하고 계십니까?”
임준형은 다시 한 번 입을 다물었다.
“미국과 중국은 각각 공룡 업체와 국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관련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과거 오정의 메모리 반도체처럼 얻어 걸릴 만한 사업 영역이 아닙니다.”
뼈가 담긴 장태산의 팩트 공격.
“엔비디아, 퀄컴, 인텔 등도 비밀리에 관련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사용자 용도에 따라 칩 형태를 바꿀 수 있는 프로그래머블 반도체 시장도 태동을 넘어 성장 중입니다. 그런데 오정은…….”
또로로록.
꿀꺽꿀꺽.
장태산의 계속된 추궁에 임준형은 혼자 소주를 따라 마셨다.
무슨 말로든 반격을 하고 싶었지만 관련 분야에 대한 이해도나 지식이 일천했다.
세계 반도체 시장의 강자로 꼽히는 오정의 주인으로서 무척 화가 났다.
“AI 반도체를 르네상스라 칭했던 이유는 과거와 달리 사업 영역이 겹치거나 공존할 수밖에 없어서입니다. IT 공룡들은 자체 데이터 센터를 통해 수집한 정보를 활용해 AI에 대한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냉정하게 말해 오정은 단순한 반도체 생산 공장일 뿐입니다.”
“으음…….”
임준형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애써 외면했던 경쟁 사업체들의 성장.
정보팀과 오정연구소에서도 관련 기업들에 대한 정보와 위험성을 수시로 보고했다.
시간을 갖고 좀 더 살펴보려 했는데 장태산은 이미 늦었다고 말했다.
띠링.
그때 장태산의 스마트폰에서 문자음이 울렸다.
스윽, 스마트폰을 살펴보는 장태산.
“방금 TSML이 제 회사가 되었습니다.”
“뭐라고? TSML이!!!”
임준형은 크게 놀랐다.
오정도 어느 정도 지분을 소유하고 있는 네덜란드 노광 장비 업체.
이렇다 할 대주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대형 반도체 업체들이 주식을 소유하며 서로를 견제했다.
그 회사가 뜬금없이 자신의 소유가 됐다고 말하는 장태산.
“안 믿겨지십니까?”
“아니 언제…….”
“몇 푼 하지도 않는데 저렴할 때 사들여야죠. 미래에 갑질 전문 기업이 될 게 빤한데.”
임준형의 눈에 장태산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기업사냥꾼.
딱 그 모습이었다.
“형님. 그나마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뭐가…… 말인가?”
돌아가는 상황을 종잡을 수 없어 충격에 휩싸여 말까지 더듬는 임준형.
“이런 날을 대비해 제가 저렴하게 관련 특허 기술업체를 매입해 놨습니다. 그러니 형님은 지금처럼 잘하는 거 계속 하시면 됩니다.”
“잘하는 거?”
“초격차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신(新)격차도 중요한 시기가 도래했습니다. 주도권을 잡아야 합니다. 관련 인재나 사업에 투자를 아끼지 말아야 하는 건 당연하구요. 그런 이유 때문에라도 오정은 새로운 공정의 파운드리 업체의 강자가 되어야 합니다. 메모리 반도체처럼……. 반항하는 적의 목은 과감하게 쳐내십시오!”
장태산의 진심이 담긴 주문.
“파운드리…….”
임준형도 과거부터 노리고 있던 사업이었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보다 미래에 더 각광받을 반도체 핵심 사업.
반도체 팹리스 업체로부터 제조를 위탁 받아 반도체를 생산하는 기업이다.
한때는 하청업체라고 놀림을 받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오정 같은 반도체 기업은 세상에 몇 없습니다. 그걸 살려야 합니다.”
오정은 설계부터 최종 완제품까지 자체적으로 수행하는 몇 안 되는 기업이었다.
반면 제조 시설이 부족한 팹리스 업체들은 위탁 생산을 했다.
“요즘 제 취미 생활 아시죠?”
“자네도 취미가 있나?”
“네.”
“뭔데?”
“애국요.”
“뭐라고?”
“돈도 벌고 애국도 할 수 있는 파운드리 사업.”
장태산의 눈빛이 활화산처럼 이글거렸다.
그리고.
“형님, 저랑 깔끔하게 반반 나누죠.”
회귀의 전설 2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