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ake a Bath Together, Duke! RAW novel - Chapter 108
108화
“아, 눈뜨셨군요. 다행입니다.”
최악이다.
나는 곁에서 들리는 의사 선생의 목소리에 길게 숨을 내쉬었다.
지나치게 긴장했던 탓에 빳빳했던 목이 뒤늦게 통증을 호소했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진짜 미쳐가는 기분이네.’
나는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는 슬쩍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기억이라도 없었으면 괴롭지는 않았을 거다.
어젯밤, 나는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아이작 달튼에게 가서 매달렸다. 문장조차 제대로 이어지지 않아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말을 지껄이면서. 낯설지 않은 경험이었다.
신전에서 울다 쓰러졌을 때의 상태와 별반 다르지 않았으니까.
‘분명 괜찮았잖아. 왜 또 시작이지? 왜 갑자기 이래?’
오랜만에 부모님을 뵈어서? 그도 아니면, 네펠리 영애가 모르는 과거의 이야기를 해서?
둘 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자꾸만 속이 울렁거리고 괴로웠으니 분명 영향을 미쳤겠지.
하지만 이상하지.
‘이런 거 과거에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던 부분인데.’
믿을 수도 없고 괴롭지만 이게 현실이라고. 이건 이곳에서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내가 감당해야 할 부분이라고. 이제부터라도 조금씩, 가족이 되어가 보자고.
내가 천천히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건 그렇게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사람 마음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격렬하게 마음이 흔들릴 일인가? 그것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나는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재차 숨을 내쉬었다.
‘…정말 그때로 돌아간 것 같네.’
아니, 솔직히 상황으로만 따지면 그때보다 더 심각하지.
여기는 골드게이트 공작가가 아니라 카르테인 공작가 아닌가. 나는 더는 병약한 공작 영애가 아니라 카르테인 공작의 약혼자고.
“그……. 큼큼.”
“나디아 님, 많이 안 좋으십니까?”
나는 손을 들어 아이작 달튼을 멈추고는 가볍게 목을 가다듬었다. 목이 칼칼하게 저릿한 것이 어젯밤 일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알려주었다.
아직도 질척한 기분이 발끝을 타고 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누군가가 쫓아오는 듯한 기분 나쁜 초조함과 함께.
그저 기분 나쁜 꿈에 불과했던 이전과 달리, 어제는 꿈이 현실이 되었다. 내 곁에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서 있는 게 보였다는 말이다. 꼭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착각이었겠지.’
지금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건 그냥, 내가 불안한 마음에 만들어 낸 일종의 환상이라고.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헛것을 본 거라고.
하지만 어제는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울릴 정도였다. 통증과 어지러움 탓에 제대로 된 판단이 서지 않아서 도망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내 자리를 꿰차니까 좋니?’
‘그렇게 쉽게 나를 떨쳐낼 수 있을 줄 알았어?’
도망을 치는 내내 ‘나디아’는 몇 번이고 비슷한 말로 나를 괴롭혔고 나는 그때마다 화를 내기도 하고 울기도, 애원하기도 했다. 솔직히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억울한 면도 있었다.
갑작스럽게 빙의를 당한 나 역시 곤란했던 건 마찬가지였다. 나도 봉변을 당한 거나 다름없는 처지라고. 게다가 빙의만 한 거면 다행이게? 내 상황은 유행에서도 동떨어져 있었다.
‘요즘 로맨스 판타지는 빙의 문제가 다 해결이 된 상태로 시작한단 말이야. 나처럼 이렇게 고생하는 게 아니라.’
아무튼, 그게 현실이었는지 아니면 전부 머릿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랬다는 기억만큼은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카르테인 공작의 침실로 가는 갈림길에서 뒷걸음질 친 기억과 함께 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하마터면 카르테인 공작을 찾아갈 뻔했다. 만약 그를 봤다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내 입으로 털어놓았을 게 뻔한데도.
‘그래서는 안 돼.’
그에게 모든 것을 들키는 것만큼은 솔직히 무서웠다.
아무리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의 모든 걸 이해한다는 클리셰가 있어도, 사랑에는 신뢰라는 것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명제가 있다 해도 쉽지 않았다.
특히나 그 내용이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말들이라면 더욱이.
‘카르테인 공작이 내 말을 믿지 않으면 어떻게 하려고? 만약 그가 나를 이상한 사람처럼 보면?’
아니, 설령 믿는다 해도 환상 속 나디아가 그랬던 것처럼 그가 나를 비난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
“아, 젠장…….”
“공녀님!”
“괜찮, 괜찮아요.”
아이작이 급하게 내 상체를 당겨 등을 두드렸다. 다급하기 짝이 없는 그의 손길에 몸을 맡기며 나는 손으로 가슴을 꾹 쥐었다.
상상만으로도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안온감을 손에 쥐자마자 홀로 내동댕이쳐지는 것만큼은 버틸 수 없었다. 그런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는 한, 나는 또다시 겁을 냈을 거다.
‘다른 사람도 아닌 클로드 카르테인이니까.’
카르테인 공작은 내가 이 괴상한 로맨스 판타지 세상에서 유일하게 욕심내는, 그래서 실은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은 단 하나의 존재였다.
‘나디아’의 것도, ‘골드게이트’의 것도 아닌 내 거.
나는 손을 뻗어 의사 선생의 팔을 잡고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제 그만해도 된다는 의미였다.
“자작님, 저 이제 괜찮아요. 밤새 계셨던 거죠? 저 계속 이랬었나요? 줄리엔은요?”
“정신이 혼미해 보이긴 하셨습니다만, 밤새 그러진 않으셨습니다. 시녀장은 어젯밤 공녀님을 방으로 모실 때 연락을 했고요. 마음이 편치 않았는지 내내 함께 자리해 있다가 조금 전에 나갔습니다. 혹시 모르니 식사 준비를 하겠다더군요.”
“아…….”
다행이네. 그래도 혼자 있었던 것은 아니었구나.
작게 안도의 숨을 내쉬던 것도 잠시, 나는 아이작 달튼이 이어서 꺼낸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어젯밤에 카르테인 공작님이 계셨습니다.”
“네?!”
누가, 언제, 어디에 있었다고?
경악하는 나와 달리 담담하게 나를 본 달튼 자작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어제 공녀님께서 제 처소로 찾아오셨을 때 말입니다. 각하께서도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왜 공작님이…….”
“글쎄요, 왜 각하께서 그 자리에 계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곤란해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은 그가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시녀장이 아침에 보고를 드리러 간다 했으니, 곧 오실 것 같군요.”
“그걸 왜……!”
나는 그걸 왜 이제야 말하냐고 말하려다 입을 꾹 다물었다.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고, 그 말을 꺼내던 순간 방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아주 타이밍 좋게.
표정 없이 방으로 걸어 들어오는 카르테인 공작의 옆에서 줄리엔이 잔뜩 안심한 표정으로 내게 달려왔다.
“나디아 님! 정신이 드셨군요. 몸은요? 좀 어떠신가요? 밤새 앓으셨는데 괜찮으신가요?”
“줄리엔……. 으응, 괜찮아.”
“아침에 확인해 본 바로는 목이 좀 부으시고 지치신 것 말고는 크게 이상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내 말에 이어 줄리엔에게 자세하게 말한 아이작이 시선을 돌려 클로드를 바라봤다. 클로드를 마주한 아이작의 얼굴에는 평소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옅은 미소가 서려 있었다.
“감사합니다, 각하.”
“감사?”
“지난밤, 전부 보시지 않았습니까. 공녀님이 제게 한 행동들을. 비록 공녀님도 별다른 뜻이 있으셨던 게 아니고, 저 역시 공녀님을 달래기 위해 한 행동이었습니다만……. 지켜보는 각하께서는 썩 기분이 좋지 않으셨을 듯해서 말입니다.”
표정과 다르게 그가 내뱉은 말은 평소보다 훨씬 날이 서 있었지만 말이다.
싸움을 거는 거나 다름없는 달튼 자작의 말에 클로드의 얼굴에선 더더욱 표정이 사라졌다. 일전, 피부를 따갑게 할 정도로 위압적이었던 기운 역시 일절 없었다.
그저 주황색 눈으로 고요히 아이작 달튼을 지켜보던 그가 딱 한 단어를 내뱉었다.
“나가라.”
짧고도 굵은 주인의 축객령에 아이작의 미소가 살짝 사그라들었다. 초록색 눈으로 가만히 그를 바라보던 의사 선생이 내 쪽으로 몸을 돌린 채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공녀님, 저는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문 앞에 서 있을 테니, 언제든 상태가 안 좋다든가 힘이 들면 불러주세요.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
내 대답이 중요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아이작은 살짝 눈꼬리를 접어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방을 나섰다. 탁, 하고 닫힌 문 사이로 익숙한 적막이 흘렀다.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로 지난번과 비슷한 상황을 보며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나도 모르게 입 사이로 희미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대로는 안 돼.’
나는 이불을 손으로 꼭 쥐고는 우선 그에게 사과했다. 더 정확하게는 그에게 사과하려고 했다.
“공작님, 제가 미안…….”
“사과는 받지 않겠습니다.”
“…….”
“제대로 기억나지도 않는 상황에서 일어난 일까지 탓할 생각은 없어서.”
그러나 클로드 카르테인이 먼저 내 사과를 거절하고 나섰다. 담담하게 말을 내뱉은 카르테인 공작의 표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다.
아무런 말 없이 다가온 그가 침대에 걸터앉았다. 갑작스러운 성인 남성의 무게에 침대가 끽 소리를 내며 작게 출렁였다.
가만히 손을 뻗어 이불을 쥐어뜯고 있는 내 손등을 덮은 그가 지그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다만, 나디아. 제 질문에 하나만 답해주십시오.”
“…네.”
“제게 숨기고 있는 게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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