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ake a Bath Together, Duke! RAW novel - Chapter 109
109화
클로드 카르테인이 건넨 질문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직관적이고 또 예리했다.
‘분명 어젯밤의 일을 물어볼 줄 알았는데.’
왜 그가 아닌 아이작 달튼을 찾은 건지, 무슨 일이었길래 그토록 심각했는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사실 이런 질문들도 제법 곤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다니.’
나는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게 나를 더 수상하게 보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것 말고는 선택지가 없었다.
침묵과 떨림. 긍정이라고 봐도 무방한 행동들을 물끄러미 보던 클로드의 얼굴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나디아.”
“…….”
“세 번입니다.”
짧게 강조하듯 말한 그가 이어서 말했다.
“창고에서의 한 번은 우연일 수 있습니다. 약 때문에 진료를 했던 두 번 또한 우연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세 번은? 그것 또한 우연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건…….”
“이런 일에는 솔직하게 묻고 답을 듣는 게 중요할 것 같아 물어보는 겁니다. 제 생각부터 말씀드릴까요?”
클로드의 주황색 눈동자가 오늘따라 짙게만 느껴졌다.
평소와 다르게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할 때쯤, 그가 조금 더 세게 내 손을 잡으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대와 아이작 달튼 사이에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냥 일반적인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 말고, 힘들었던 시기에 곁을 지켜 줬다는 그런 관계 이상의 무언가요.”
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의 말을 부정했다.
“공작님, 달튼 자작과 저는 정말로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내가 그대의 마음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는 건 나디아, 그대가 더 잘 알지 않습니까. 저는 당신과 아이작의 연결고리가 신경이 쓰이는 겁니다. 그게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그대에게 중요한 무언가인 듯해서.”
“…….”
“그래서 물어보는 겁니다. 나디아, 내게서 숨기고 있는 게 뭡니까.”
클로드 카르테인은 말은 호소에 더 가까웠다. 일전 약 사건 때의 모습과도 사뭇 다른 태도였다. 오늘의 그는 그때보다 더 진지하고 또 고요했다.
나는 그제야 왜 오늘따라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어려웠는지를 깨달았다. 그건 클로드의 눈이 마탑주나 꿈에서 봤던 루핀의 눈과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눈이 내 영혼을 꿰뚫고 핵심을 파악한 사람처럼 보여서.
“……공작님, 저는, 그러니까…….”
목이 잔뜩 막혀 와 나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는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내 얼굴도 머릿속만큼 새하얗게 질렸을 것이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나는 이유 없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울음을 억누른 채 고개를 내저었다.
‘아, 진짜 바보 같아.’
나도 안다. 이상적인 방법은 그가 말한 것처럼 클로드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을 하는 것이라는 걸. 내가 지금껏 봐 왔던 그라면 분명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테니까.
‘그게 오해나 갈등 없이 깔끔하게 관계를 이어 나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겠지.’
솔직하게 왜 내가 겁을 내고 있는지, 공작님이 아니라 아이작 달튼에게 간 이유가 무엇인지,달튼 자작은 다른 사람과 어떤 면이 다른지 말하는 게 말이다.
유명한 소설 속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들은 이렇게 생각한 순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용기 있게 진실을 말하고 이해를 받고 또 해피엔딩을 맞이했겠지.
‘하지만 나는?’
나는 그들과 달리 지독하게 겁이 많은 사람이었다. 이렇게 명확한 답을 내려 놓고도 선뜻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정도로.
괜찮을 게 분명하니 말이라도 해 보자는 마음과 절대 안 된다고, 상식적으로 그런 걸 이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는 마음이 공존했다.
소설 속 남주인공들이라서 이해할 거라는 생각과 때로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다는 생각이 1초에 수십 번씩 왔다 갔다 했다.
‘이제는 이대로 답을 하지 않으면 지금의 관계라도 이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드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이, 그가 반대편 손으로 내 볼을 잡고는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제 내 심정이 어땠는지 궁금하지는 않으십니까?”
“…….”
“그날, 그대의 모습을 보고 난 밤새 훈련장에서 검을 휘둘렀습니다. 우리의 관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서. 우리는 서로에게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유일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그대에게는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아서.”
“그건 아니에요! 공작님은, 공작님은 저한테……!”
“정말 아닙니까?”
드물게 내 말을 끊은 그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럼 답해 주십시오. 전장에서 보낸 시간이 적지 않아서인지, 저는 좋지 않은 상황에서 희망적인 상상을 하기보다 최악의 결과를 먼저 떠올리니까.”
나를 향하는 그의 시선은 곧고 또 강렬했다. 아주 오랜만에 처음 만났던 그때의 말투로 클로드가 내게 물었다.
“나디아 골드게이트, 마지막으로 묻지.”
“…….”
“정말로 내게 숨기고 있는 걸 말해 줄 생각이 없나?”
그건 회피하기 급급한 내게 그가 준 답이었다. 지금 여기에서 도망친다 해도 지금의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을 거라고. 정말로 지금 이 순간이 세이브 따위 없는, 엔딩 분기점이라고.
상상이 아니라 눈앞에 닥친 상황에 머리가 뿌예질 정도로 숨이 막혔다. 그런데도 나는 한 점의 숨조차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졸린 목으로 수십 번이고 입술을 달싹이는 것뿐이었다.
“클로드, 그러니까, 그게…….”
나는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아니에요.
눈을 떠보니 이 몸이었고, 돌아갈 방법을 찾아 헤맸지만 찾을 수 없었어요.
그때의 내 모습을 보면 놀랄걸요? 진짜로 미친 사람 같았으니까.
클로드, 난, 나는 이곳에…….
“……말해 줄 생각이 없군. 알겠다.”
입 안에서 터질 듯이 맴돌던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직전, 클로드의 입에서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허탈일까 실망일까 그도 아니면 괴로움일까.
찰나의 순간 일그러졌던 얼굴 위로 다시 무표정의 가면을 쓴 그가 내게서 손을 뗐다. 한순간 사라진 온기 대신 손과 뺨 위로 시린 공기가 내려앉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뜬 그가 담담하게 인사를 건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쉬십시오.”
“잠깐…….”
“줄리엔에게 필요한 걸 말해 주면 준비해 줄 겁니다. 그럼.”
그 말이 끝이었다. 미련 없이 등을 돌린 그가 문밖으로 나서는 것을 잔뜩 굳은 채 바라보던 나는 문이 탁, 하고 닫히고 나서야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잠깐, 잠깐만……!”
눈가가 뜨거워졌다. 나는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손으로 이불을 걷고는 다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왔다.
갑작스럽게 호흡이 몰아쳐 가슴이 아프게 아려왔지만, 지금은 그런 고통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지금 이대로, 클로드를 보내서는 안 됐다.
다급하게 문을 연 내가 사라진 클로드를 따라 달려가려던 순간, 누군가가 내 팔목을 잡아챘다. 문 앞에 서 있겠다던 아이작 달튼이었다.
“공녀님, 안색이…….”
“놔요, 아이작, 허억, 지금 이럴 때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십니까! 문장 하나도 제대로 잇고 계시지 못하는데!”
“놓으라고요!”
“나디아 님!”
벌컥 소리를 지른 아이작 달튼이 어깨를 붙잡고는 내 몸을 돌렸다. 그의 초록색 눈동자가 분노로 일렁이고 있었다.
“정신 차리십시오! 지금 공녀님의 상태를 좀 보세요! 각하의 말이라면 죽기라도 할 것처럼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만큼 저 사람이 내게 중요해졌으니까요! 그리고 그가 나만큼이나 힘들어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처음으로 언성을 높이며 아이작의 손을 뿌리쳤다.
“대체 무슨……!”
울컥하는 목소리와 눈빛으로 말을 뱉던 그가 질끈 눈을 감았다. 평소보다 거칠어진 그의 호흡과 덩달아 조금 더 강해진 아릿한 향이 아이작 달튼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격렬한 그의 행동에 도리어 내가 당황할 때쯤, 그가 옅게 한숨을 내쉬고는 억눌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치의로서 지금의 발언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공녀님은 건강에만 신경을 써주십시오.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입니다.”
지금 아픈 게 뭐가 어때서? 어차피 때를 놓쳐서 그를 잃고 나면, 그때는 ‘내’가 아닌 ‘나디아 골드게이트’로밖에 살 수 없을 텐데? 그게 죽음이 아니면 무엇이 죽음이지?
게다가 내게는 아이작 달튼, 그가 ‘건강’을 운운하는 것이 더는 있는 그대로의 의미로 들리지 않았다.
“건강? 정말 그게 이유라고요? 사심이 아니고?”
“공녀님!”
날카로운 목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일그러진 아이작의 표정을 바라보며 나는 담담히 안녕을 고했다.
“…지금까지 애써주신 것 잘 압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알겠군요. 환자에게 마음이 있는 이를 주치의로 둘 수는 없겠어요. 감정이 섞이는 것은 물론 저 역시 진단을 그대로 믿기가 어렵군요. 그간 고생하셨습니다. 이만 돌아가 주세요.”
더 일찍 해야 했던 일이었다. 나는 작게 한숨을 쉬며 아이작 달튼에게서 단호하게 등을 돌렸다.
오랜 기간 봐 왔던 사이라 그런지, 그는 내가 마음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잘 아는 듯했다. 그때였다. 굳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던 그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공녀님. 일전 제게 주었던 소원권 말입니다. 그거, 지금 쓰도록 하겠습니다.”
“뭐? 그게 무슨…….”
“제가 공녀님의 주치의로 있게 해 주십시오. 내 손으로 당신의 건강을 챙겨야겠습니다.”
저게 무슨…….
나는 경악이 담긴 눈으로 아이작 달튼을 응시했다. 평소와 다르게 미소 한 점 없는 표정과 굳은 의지가 담긴 초록색 눈이 저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내 손으로 당신의 건강을 챙겨야겠다니…….’
사심?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붙잡는 거라고? 아니, 이건 집착이나 다름없는 말이 아닌가. 주체가 ‘내’가 아니라 ‘내 건강’이라서 그렇지.
기이하기 짝이 없는 그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던 찰나, 언젠가 흘리듯이 말했던 기억이 반짝하고 머릿속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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