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ake a Bath Together, Duke! RAW novel - Chapter 124
124화
“안녕하세요, 공녀님.”
다시 눈을 떴을 땐 눈앞에 아이작 달튼이 있었다.
‘…그 의사들에게서는 알아서 잘 빼냈나 보지?’
그럴 거라고 예상하기는 했다.
정말로 그들이 나를 붙잡은 채 인질로 써먹으면, 그래서 카르테인과 골드게이트, 더 나아가 황실이 움직이면 곤란했을 테니까. 진짜 목적이 비누나 온천 따위가 아니라 ‘나’인 두 사람에게는 그게 가장 최악의 상황이었겠지.
‘의사들은 그저 써먹을 패였던 걸 거고.’
예측한 것들이 제대로 맞아떨어지긴 했지만, 정신을 차리자마자 아이작의 얼굴을 마주하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서브남의 정석이라며 감탄하던 은색의 머리카락도, 상냥하다고 생각했던 녹색의 눈동자도 전부 재수 없게만 보였다.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는 말을 이렇게 깨달을 줄이야.’
나는 당장이라도 중지를 들어 올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느릿하게 그의 이름을 씹어뱉었다.
“아이작.”
“네, 공녀님.”
평소 진료를 할 때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답을 한 아이작이 슬쩍 손을 뻗어 향초를 피웠다. 직감적으로 향을 맡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스침과 동시에 그제야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치워진 시계와 닫힌 커튼, 그리고 두 개의 침대. 간소하지만 필요한 것은 전부 있는 전형적인 침실의 구조에 자연스럽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뭐야, 그러고 보니까 나 지금 침대에 반쯤 누워있잖아?’
부드럽고 폭신한 이불이 손끝을 간지럽혔다. 슬쩍 눈썹을 밀어 올린 채 아이작을 바라보자,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딘가 불편한 부분이라도 있으신지요?”
“…….”
글쎄, 너무 많아서 입을 열 수가 없네. 눈앞에 의사 선생이 있는 것도 불편하고, 내가 있는 곳이 하필 침실인 것도 불편하고, 빙의가 약점처럼 잡힌 것도 이제는 지긋지긋하다.
“음, 쪽지 전달한 사람이 저라는 건 당연히 아셨을 테니 그 문제는 아닐 것 같고. 지금의 상황이 당황스러우신 모양이군요. 이해합니다.”
이해는 무슨. 본래 비정상인은 정상인을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나는 하도 입을 다물고 있어 건조해진 목을 가다듬으며 그의 말을 받아쳤다.
“내게 내 건강은 자신의 손으로 지킬 거라고 그렇게 말하더니, 정말로 여기 가두고 건강이라도 돌볼 셈이야?”
“아하하! 재밌네요. 공녀님이 제게 말을 높이지 않는 것도 색다르군요. 아직도 공녀님에게서 새로운 모습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말과 달리 아이작의 목소리에서는 즐거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습관처럼 상대방의 말에서 적당히 기분 좋은 말을 뽑아내며, 그는 클로드가 그랬던 것처럼 침대 위에 앉았다.
“건강을 돌본다라……. 실제로 그렇게 할 예정이기는 하지요. 옆에서 작은 것까지 알뜰살뜰하게 살필 겁니다. 어디 하나 부족함 없이.”
“…….”
“단 하나, 공녀님에게서 나디아 님을 돌려받고 나면 말입니다. 공녀님은 나디아 님이 아니시잖아요.”
나는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며 꾹 입을 다물었다.
지척에서 마주친 초록색 눈동자에서는 평소에 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짙게 가라앉은 욕망, 기다림에 대한 갈망, 마주한 이가 바라던 자가 아니라는 것에 대한 실망이나 분노 같은 것들이었다.
내가 크게 동요하지 않아서일까? 아이작이 나와 눈을 마주하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음울함이 담긴 목소리가 질척거리며 우리 둘 사이에 깔렸다.
“부정하지를 않으시는군요.”
“…….”
“당신은 정말로 나디아 님이 아니었어.”
처음으로 타인에게 빙의에 대한 걸 지적받은 탓에 심장이 조이는 기분이 들었지만, 나는 깊게 호흡을 하며 침착함을 유지했다.
‘괜찮아. 쪽지를 받고 얘가 나한테 했던 말을 곱씹을 때부터 이미 생각했던 거잖아. 의심은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했고. 진정해. 그래, 진정하고 여기에 온 목적을 기억해야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을 때는 나뿐만이 아니라 아이작 달튼도 얼추 감정을 갈무리한 상태였다.
“하긴, 그러니 제가 보낸 쪽지를 보고 이렇게 왔겠지요. 나디아 님은 남들이 알면 곤란한 비밀 같은 건 없는 분이셨으니까요.”
“그래, 멋대로 생각해. 내가 여기 온건 확인하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거든.”
“의외로군요. 생각보다 더 당황할 줄 알았는데. 이 정도는 쉽게 넘길 수 있을 정도로 뻔뻔해야 타인의 몸을 갈취한 채 살아갈 수 있는 걸까요?”
아이작 달튼은 내가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완전히 태도를 바꿨다.
‘아, 그래. 잘 보이고 싶은 건 내가 아니라 나디아 님이다, 이거지?’
곰곰이 생각하고 보니 그는 나를 ‘나디아 님’보다 ‘공녀님’이라고 더 많이 불렀던 것 같다. 마치 내가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나는 나를 탓하는 그를 마주한 채 또박또박 말을 내뱉었다.
“빈정거리지 마. 너한테 뻔뻔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이유가 없다?”
“아이작,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내 정체를 밝힐 거라는 말에 겁을 먹었다고 생각해? 그래서 네 요구를 전부 따르면서 여기에 온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진심으로?”
“…….”
“네 말대로 남의 인생을 갈취한 뻔뻔한 사람답게 말해볼까? 네가 사실은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면, 누가 믿기는 해?”
그렇게 순진한 사람은 아니잖아, 너.
희미하게 눈웃음을 짓자 아이작 달튼의 얼굴에서 점점 표정이 사라졌다. 나는 그 표정의 변화를 유심히 지켜보며 느릿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그래, 처음에야 두려웠지. 나도 사람이거든. 괴롭고 힘들고, 나만이 알고 있는 이 상황이 버겁고. 그런데 말이야, 네 쪽지를 받고 찬찬히 생각해 보니까 이상한 거야. 너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응?”
“…….”
“의사라서 내 상태를 진단하다 보니 무언가가 이상해서 알았다? 그건 말이 안 되지. 보통의 사람은 환자의 상태가 피아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하다고 판단하지, 영혼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잖아. 그런데 아이작, 너는 또렷하게 인지하고 있었잖아.”
그래, 그는 인지하고 있었다. ‘나’와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다르다는 걸.
그래서 클로드와 달리 나만이 아이작 달튼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헷갈렸던 거다. 그는 나디아 골드게이트를 사랑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건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내 건강에 그렇게 집착한 거 아니야? 내가 아파서 고통을 받거나 말거나 그건 네 관심거리가 아니지만, ‘나디아 골드게이트’의 몸이 나 때문에 영향을 받는 건 참을 수가 없었던 거잖아. 감히, 나 따위가 멋대로 귀한 몸을 굴리는 것 같아서. 맞지?”
아이작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고요히, 어떠한 감정도 내보이지 않은 채 그는 그저 나를 지그시 바라봤다.
나는 아이작의 무응답에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그를 몰아붙였다.
“아이작, 이번에는 내가 물어볼게. 너, 내가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 그리고 뭘 바라고 날 여기로 부른 거야? 나한테 마지막 기회 같은 걸 주고 싶어서 부르진 않았을 거 같은데.”
“…….”
“설마, 뻔뻔하게 ‘나디아’를 위해서였다고 하지는 않겠지? 의사로서의 신념도 말하지 마. 그따위 신념은 거짓 영양제와 함께 쓰레기 더미에 묻혔으니까.”
“…….”
“나도,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내 머리를 열심히 굴려봤어. 네 관점에서 말이야. 그랬더니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더라고.”
나는 속사포처럼 내뱉던 말을 일순 멈췄다. 그러고는 아이작 달튼이 있는 쪽으로 몸을 당긴 채 슬쩍 입매를 비틀었다.
“너, 나디아에게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안 될 뭔가를 했지? 소피아 일라리아와 너, 너희 둘이 내 빙의의 원인이야.”
속삭임에 가까운 결론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일순 정의하기 어려운 후련함이 가슴속을 꽉 채웠다.
클로드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얻은 게 나라는 존재에 대한 안도였다면, 지금은 조각조각 나 있던 그림을 하나로 짜 맞춘 느낌이 들었다. 앓던 이가 아픈 원인을 드디어 파헤친 듯한 그런 기분 말이다.
‘아, 조심스럽게 말을 고를 필요 없이 쏟아낸 게 처음이라서 그런 것도 있겠다.’
물론, 클로드에게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면 할 수 없었을 행동이었다. 가족들에게 모든 걸 밝힐 결심을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행동이고.
그러니까 이건 내가 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내가, 일궈내어 받을 수 있던 후련함.
이불을 꼭 그러쥔 채 지금의 순간을 기억하고 있을 때쯤, 아이작이 상체를 수그린 채 한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반쯤 침대에 엎어진 그의 몸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하, 하하… 하하하……!”
뭐, 뭐야. 미친놈인가.
흐느끼듯 새어 나오는 웃음을 듣고 있자니 팔에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아이작 달튼의 웃음에는 정상인에게서 나올 수 없는 기괴한 광기가 담겨 있었다.
“흐, 하하, 아하하!”
점점 더 크게 몸을 떨며 웃음을 터트리던 그가 일순 뚝, 몸을 멈췄다. 몸을 따라 고개를 수그렸던 그가 나를 보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초록색 눈동자는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뒤틀린 감정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머리가 좋으시군요.”
“…….”
“그게 아니라면, 제가 너무 조급했던 나머지 공녀님께 너무 많은 것을 흘렸던가요.”
얼굴에서 손을 내린 아이작이 천천히 눈을 반으로 접었다. 평소처럼 곱고 상냥한 표정으로 눈웃음을 지은 그가 내가 그랬던 것처럼 작게 속삭였다.
“네, 제가 손을 썼어요. 나디아 님을 사랑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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