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ake a Bath Together, Duke! RAW novel - Chapter 123
123화
큰 결심을 한 보람이 있었다.
[누나, 우선은 마탑에서 보낼 수 있는 건 보냈어. 탑주님과 연구 중인 게 있어서 그게 정리되는 대로 움직일게.]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 나디아.]
나는 몇 번이고 읽었던 답신을 부적처럼 품에 집어넣고는 깊게 심호흡을 했다.
“후!”
이렇게 기합을 넣어야만 하는 날이었다. 왜냐하면, 오늘이 아이작 달튼과 보기로 한 날이니까. 나는 야무지게 루핀이 준 물건들을 몸에 지니고는 방을 나섰다.
대외적으로는 외출이라고 알린 탓에 공작저의 현관에는 헤르잔과 줄리엔, 그리고 에이포드가 나와 있었다.
내 일이라면 모든 걸 제치고 나왔을 타냐는 에이포드가 그럴 줄 알고 관리 감독이나 하러 가라며 레티시아로 보냈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자리에 있으면 소란을 피워 모두가 알게 될 것 같다나?
“물론 계속해서 지켜보고 또 호위할 테지만, 나디아 님.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네, 맞아요. 자작이 무엇을 들이밀든 나디아 님을 가장 우선으로 두셔야 합니다.”
“그, 보여주기식으로 사람 붙여놓은 거 아니니까 필요하면 주저 말고 사람도 쓰십시오. 일단 묶어만 오면 때리는 건 제가 해드릴 테니까, 괜히 주먹 휘두르다 손 다쳐서 오지도 마시고요.”
퉁명스럽게 말을 거는 에이포드의 옆에서 줄리엔이 조금은 신경 쓰인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이런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인 건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이 자리에 각하께서 계시지 않는다는 게 마음 쓰이는군요.”
“음…….”
“아,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디아 님.”
나는 줄리엔의 말을 들으며 슬쩍 눈을 굴렸다. 그러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
나라고 아쉽지 않은 건 아니니까. 클로드는 며칠 전 사람들의 대대적인 배웅을 받으며 먼저 마수 토벌에 나섰다. 그는 최대한 오래 내 근처에 붙어 있으려고 했지만, 내 쪽에서 먼저 거절했다.
물론, 제일 큰 이유는 일전에 논의했던 방어선 문제지만 부차적으로는 그가 먼저 움직여야 아이작 달튼의 행동이 조금은 더 느슨해질 것 같아서였다.
눈이 있다면 클로드가 내 곁에 없다는 것도, 그래서 내가 당장은 혼자 움직일 수밖에 없다는 것도 알 테니까. 특히 소피아 일라리아가 곁에 붙어 있다면 더욱이.
‘마도구에 대한 건 대비할지도 모르겠네.’
나는 재차 숨을 들이마시고는 담담하게 세 사람에게 인사했다.
“다녀올게.”
편안한 옷차림과 곁을 지키는 호위 한 명. 다른 사람들이 봤을 때는 그냥 외출하는 나를 배웅하는 것처럼 보였을 거다. 에이포드가 잊지 않고 건네준 영양제도 한몫했을 거고.
시장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여기저기를 들르던 나는 가게의 시계가 약속된 시간을 향하는 것을 보며 호위와 가볍게 시선을 마주쳤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조용히 사람들 사이로 몸을 숨겼다. 쪽지에 적힌 약속대로, 드러낸 모습은 하나.
―짤랑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여관의 문을 열려던 찰나, 누군가가 뒤에서 내 소매를 붙잡았다. 생각보다 낮은 높이를 깨닫고 반사적으로 눈을 돌리자, 갈색 머리의 천진난만해 보이는 아이가 나를 보며 생긋 웃었다.
“금발 머리에 파란 눈!”
“응?”
“누가 저한테 금발 머리에 파란 눈을 한 언니가 여관을 들어가려고 하면 이걸 건네 달라고 해서요! 여기 있어요!”
덕분에 심부름값을 받았다며 활짝 웃은 아이가 바람처럼 거리로 뛰어갔다. 나는 졸지에 건네받은 쪽지를 내려다보고는 슬쩍 눈을 가늘게 떴다. 조심스럽게 펼쳐본 쪽지에는 단 한 줄만이 쓰여 있었다.
[여관에 들어가면 이름을 밝히고 달튼과 약속이 되어 있다고 말하세요.]
누가 봐도 꿍꿍이가 폴폴 풍기는 문장이다.
‘이게 무슨 방 탈출도 아니고!’
나는 쪽지를 구기고 싶은 충동을 내리누르고는 재차 마음을 가라앉혔다. 진정해야지. 나도 이렇게 준비를 많이 했는데, 아이작 달튼이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어.
문고리를 잡은 손에 힘이 꽉 들어간 탓에 짤랑, 하는 종소리가 재차 경쾌하게 울렸다.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을 하며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 번 봐서 익숙한 여관의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대낮부터 음식과 술을 시키는 사람들과 분주한 점원, 왁자지껄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몇 술고래들까지. ‘신의 분노’ 때와도 크게 다르지 않은 광경을 눈으로 훑고 있을 때쯤, 가게의 점원이 친절한 목소리로 내게 말을 걸었다.
“어서 오세요! 어떻게 오셨을까요? 식사? 숙박? 따로 일행은 있으신지요?”
“달튼과 약속이 되어 있어서. 나디아 골드게이트라고 하면 알 텐데.”
쪽지에서 요구한 대로 이름을 꺼냄과 동시에 여관 안의 분위기가 오묘해졌다.
“아…….”
탄식을 내뱉으며 난처한 듯 눈을 굴리는 점원을 보고 있자니 딱 한 마디가 생각났다.
‘역시, 그럼 그렇지.’
드라마틱한 변화가 있는 건 아니었다. 여관 안에 흐르는 노래는 여전히 흥겨웠고, 사람들도 각자의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행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지 않나. 그 미묘하게 흐르는 불편하고 호의적이지 않은 분위기. 날이 선 분위기를 눈으로 훑으며 느릿하게 왼팔에 찬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아직 아이작 달튼을 만난 게 아니라서 기다리고는 있지만, 여차하면 대기하고 있는 호위들을 써먹을 생각이었다.
나는 태연한 척 목을 가다듬고는 머뭇거리고 있는 점원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확인하는 과정이 생각보다 긴데……. 무슨 문제라도?”
“아, 아뇨. 죄송합니다. 그런 게 아니고 그, 안쪽으로.”
“무슨 문제가 있겠어. 그냥 대단한 나디아 골드게이트가 이렇게 누추한 여관에 왔다니까 얼어붙은 거지. 안 그래?”
빈정거림이 가득 담긴 말이 날카롭게 점원의 말을 잘랐다. 슬쩍 고개를 돌려 확인한 곳에는 술에 취한 남자 한 명이 짜증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혼자라서 그런지, 아니면 술을 마셔서 그런지 남자는 내가 자신을 발견했다는 걸 알아챘음에도 물러날 기색이 없었다.
‘아니, 아니다.’
벌겋게 술에 취한 상태에서도 또렷한 눈을 확인한 나는 남몰래 숨을 죽였다. 저건 아이작 달튼이 심어둔 수였다. 마치 ‘신의 분노’ 때 분위기를 주도했던 그 남자처럼.
아니나 다를까, 남자가 시비를 건 것과 동시에 여관의 분위기가 조금 더 가라앉았다. 잦아든 소음 속에서 일어난 그가 휘청이는 척 내게 걸어와 더 강하게 말을 뱉었다.
“신의 축복을 받아 치유의 물을 하사하고 비누까지 개발해 새 시대를 알렸다는 귀하신 몸이 호위도 없이 이런 곳은 어쩐 일이실까? 아니, 무려 공작 영애이신데 이런 위험하기 짝이 없는 바깥세상에서 험한 꼴이라도 보면 어쩌시려고. 카르테인이랑 골드게이트는 뭘 하고 있는 거야?”
“내가 공작 영애라는 건 알아서 다행이군.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다는 아니지.”
“아, 아무 준비도 없이 오지는 않았다는 말이군.”
잘 알겠다는 듯 과장되게 코웃음을 친 남자가 살짝 몸을 낮추며 내게 작게 속삭였다.
“그러면 안 되지요, 공녀님. 약속과 어긋나지 않습니까.”
아이작 달튼이 심어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어도 소름이 끼치는 말이었다.
반사적으로 팔찌를 누를 뻔한 손을 겨우 거두고 있을 때쯤, 남자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시비를 걸었다.
“그럼 왜 오셨나? 그쪽 때문에 개새끼들이 된 우리 의사들을 비웃기라도 하러 오셨나?”
“…의사라고.”
“아, 하필 이렇게 마련한 자리에 딱 찾아오고는 몰랐다고 우연이라고 잡아떼는 건 말이 안 되지! 이렇게 된 김에 한마디 하시죠!”
킬킬거리며 웃은 그가 소개라도 할 것처럼 사람들을 향해 팔을 벌렸다.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들이 남자의 팔 움직임을 따라 나를 주목했다.
“왜요? 하실 말이 없습니까? 아, 뭐 우리가 그동안 사람을 죽이고 다녔다고 못을 박으신 분인데 살인자들이랑 말을 섞기 싫을 수도 있지!”
“…….”
“그래도 위로의 건배사 하나 정도.”
“당,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졌어! 그렇게 보호층을 없애버리면 위험하다고 만류하니까 사람들이 날 거짓말쟁이로 몰아붙이고 있다고!!”
시작됐다. 나는 기이하게 들끓기 시작한 여관의 상황을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지켜보았다.
“맞아, 내가 의사로 활동한 게 몇 년인지 알아? 의학이라고는 쥐뿔도 모르는 영애가 돈 때문에 사람을 살리는 귀한 일을 방해하다니!”
“똑똑히 기억해. 나중에 역사는 그쪽을 살인자라고 부를걸! 최근 레티시아에서 일어난 사고로 바른말을 하던 의사 하나가 그대로 내쫓겼다지? 그것도 저 여자가 꾸민 짓인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지! 입 하나 벙긋 못 하게 막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못 꾸미겠어!”
자신들이 핍박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단결력은 생각보다 훨씬 강하고 또 집착적이다. 아이작 달튼이 심어 놓은 남자가 깔아 둔 판 위로 피해를 방패로 삼은 손가락질이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입구를 막네.’
슬쩍 눈을 굴려 살펴본 입구에는 이미 두 명 정도의 남자가 서 있었다. 애초에 내가 혼자 올 거라고 믿지 않은 모양이었다. 당연히 그럴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울분을 내게 미친 듯이 쏟아내는 사람들 속에서, 아이작 달튼이 심어 놓은 남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흐름을 틀었다.
“이봐, 공녀를 인질로 잡는 건 어때? 아무리 말을 전하려고 해도 전부 차단을 하지 않았나. 황실도, 신전도, 그리고 카르테인 공작가도. 그런데 공녀를 인질로 잡으면 우리 목소리를 들어는 주지 않겠어?”
“이봐, 아무리 그래도 그건…….”
“잘 생각해. 어차피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모두 같은 배를 탔어. 이미 공녀에게 해서는 안 될 말들을 지껄였잖아. 이 여자가 호위를 부르고 돌아가 입을 연 순간, 우리는 모두 끝이라고. 그렇다면 목소리라도 높이고 뒈지는 편이 낫지.”
낮은 목소리로 사람들을 협박한 남자가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찬성하는 사람 손들어.”
논리는 술과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자취를 감췄다. 나는 뒤바뀐 사람들의 눈빛을 보며 조용히 팔찌의 안쪽을 꾹 눌렀다. 호출이 아닌, 추적 기능이었다.
이 모든 게 소란을 틈타 자리를 마련하려는 아이작 달튼의 수작이라는 강한 예측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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