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ake a Bath Together, Duke! RAW novel - Chapter 2
2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본 것은 언니인 아르웬이었다. 기사단장답게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언니는 내 머리를 손으로 쓸어 주고 있었다.
‘땀 냄새…….’
이제는 나름대로 익숙해진 언니의 체취에, 나는 조심스럽게 숨을 참았다.
‘가족에게서 나는 냄새에 적응이 됐다 싶으면 또 힘들단 말이야.’
물론 불평할 생각은 없었다. 익숙해지려고 애쓰는 중이기도 했고, 그녀에게서 나는 체취는 매일같이 수련하는 노력의 증거나 마찬가지니까.
여성의 노력은 응원해 마땅한 것이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를 지켜보던 언니가 눈을 뜬 나를 발견하고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깼구나.”
“응.”
“영애들과 다과를 즐기다가 쓰러졌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아, 그게 제가 의도한 건 아니고요. 네펠리 영애의 머리카락에서 보지 않아도 좋을 것을 봐버리는 바람에 그만.
나는 진실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고는 그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숨이 막히니 조심스럽게 숨도 쉬어줘야겠다.
“얼굴이 또 창백해지는 걸 보니 네가 영애들에게 폐를 끼쳤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음…….”
“나디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지금껏 쌓아온 평판도 있고, 영애들도 다 이해했어. 네펠리 영애는 본인이 더 아쉬워하더구나. 오랜만에 집 밖으로 나간 거였는데 또 쓰러져서…….”
그건 맞는 말이다.
도무지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거든. 내가 자발적으로 가는 몇 안 되는 장소는 그동안 생활하며 익숙해진 내 방과 정원, 그리고 유리 온실뿐이었다.
‘거긴 그래도 익숙한 냄새가 나.’
흙냄새라든가, 풀 냄새라든가.
시골 할머니 댁에 놀러 가면 뒷산에서 날 법한 느낌의 냄새들 말이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을 즈음, 머리를 다독이던 언니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다시 외출을…….”
“아니야, 언니. 난 집이 좋아.”
단호하기까지 한 내 목소리에 언니의 푸른 눈동자에 잠시 안타까움이 서렸다.
“…그래, 그렇구나. 그럼 차라리 지금 책을 주는 편이 낫겠다. 황궁의 도서관에서 새로운 책을 받아 왔거든. 네가 원했던 기본서들이다. 읽을 거지?”
나는 언니의 말에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책은 빙의자에게 빛과 소금 같은 거 아닌가요? 여기는 빙의자 버프도 안 준다 이 말입니다. 언어 능력만 띡 주고 나머지는 빈칸이라 내가 적응하기 얼마나 힘들었는데.
나는 언니에게서 책을 건네받은 채 옅게 미소를 지었다.
“늘 고마워, 언니.”
손등에 닿은 언니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고 다시 들이마시는 내 모습이 애써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인 모양이다.
‘그런 거 아닌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
나는 아주 잠시 시무룩해진 기분을 갈무리한 채, 언니에게서 받은 책을 들어 올려 교묘하게 코를 가렸다. 책에서 나는 쿰쿰한 종이 냄새가 아주 흡족했다.
“나디아.”
어딘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를 부른 그녀가 불현듯 내 손을 잡고는 물끄러미 시선을 맞췄다. 바다를 닮은 푸른 눈동자에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눈을 깜박이고 있자, 언니가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준 채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조금 갑작스러운 말이긴 하다만, 내 이번 임무에 함께 가지 않을래?”
“…언니의 임무?”
당황스러움이 두 배가 되었다. 아르웬 언니는 기사단장이니까, 그녀의 임무는 당연히 호위 같은 일일 텐데 그걸 내가 무슨 수로?
내 표정에서 당혹감이 묻어났는지, 언니의 말이 더 자세해졌다.
“곧 ‘부요의 시기’니까. 관례에 따라 우리 가문에도 연락이 왔는데, 이번에는 내가 황후 폐하의 호위를 전담하는 거로 대체하기로 했다. 올해 선정된 지역이 북부라 좀 멀거든.”
“아…….”
나는 그제야 언니가 하고 싶은 말을 이해했다.
부요의 시기는 대충 늦여름에서 초가을을 뜻했다. 계절마다 이런 감성 넘치는 문구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우리가 자주 쓰는 ‘장마 시즌’ 같은 그런 거다.
이 부요의 시기에 치르는 큰 행사 중 하나가 풍요를 기원하는 축제인데, 중요한 건 이 행사의 주최자가 황후 폐하라는 거다.
‘부장님이 주말에 등산 가자고 하면 가야 하는 것처럼 귀부인들도 그래야 한다는 거지.’
정치적으로도 가문의 인상을 좋게 할 수 있어 아주 중요한 기회이기도 하고. 그 가운데서 모범을 보여야 하는 골드게이트 공작가가 빠진다는 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런데도 내 몸이 약하니까 다른 방법을 궁리했구나.’
뒤에서 황후 폐하께 자비를 구했을 가족들을 떠올리니 고마움과 미안함이 목구멍의 끝에서 넘실거렸다.
마음 같아서는 선뜻 그러자고 하고 싶지만, 불쑥 걱정이 치밀었다. 혹시 내가 가면 더 폐를 끼치게 되는 건 아닐까 하고.
내가 고민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그녀가 재빠르게 입을 열었다.
“내가 곁에 항상 있을 거다, 나디아. 황후 폐하께 말씀을 드리면 네 상태가 좋지 않을 때 궁정의에게 진료를 받을 수도 있을 거야.”
“아, 아냐. 내 건강을 걱정했던 게 아니라…….”
“그럼?”
“…그냥, 나 때문에 언니가 너무 고생하는 거 같아서.”
작게 새어 나온 목소리에 아르웬이 그녀답지 않게 잠시 머뭇거렸다.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문 그녀가 단단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나디아. 네가 너의 일상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자꾸 쓰러지는 탓에 가문에 누가 될까 걱정하는 것도 알고, 예전과 달라진 너의 상태가 신경 쓰이는 것도 알아.”
“그…….”
“그렇지만 나는 네가 이렇게 포기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가슴이 너무 아프거든.”
잠시 숨을 고른 언니가 진지하고 단호한 표정으로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바람이 좀 불어서 그렇지, 춥고 건조한 북부도 부요의 시기에는 날이 좋다고 해. 그러니까 이참에 요양하는 셈 치고 함께 가자.”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겠어.
나는 코끝까지 당겼던 책을 내리고는 조심스럽게 서두를 뗐다. 이미 마음을 정했음에도 마지막으로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였다.
“언니, 북부는 광활하겠지? 인구도 수도와 비교하면 적고?”
“그래. 북부는 넓고 험난하다고 들었다. 카르테인 공작가가 자리를 잡기 전까지는 불모지와 다름없었다고.”
“그래, 그렇구나.”
딱 로판 세계의 북부군.
원하던 대답을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이는 거로 그녀의 제안에 긍정했다.
“같이 가자, 북부.”
내 대답에 언니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정말로 보기 좋았다.
그래, 사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집에만 박혀 있을 수는 없지. 로맨스 판타지에 빙의한 사람이 본래의 세상으로 돌아갈 확률은 0.000532%에 가까우니까.
‘게다가 로판식 북부잖아? 운이 좋으면 바람도 많이 불고 그래서 이 지긋지긋한 냄새에서 벗어날지도 모르지!’
* * *
―히유우우웅!
내가 바람이 많이 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건 맞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아르웬 단장님! 전방에 회오리바람이 붑니다!”
“전원 뒤로! 오러를 써서 바람의 궤도를 바꿔! 나와 타릭이 전방에서 대열 전체를 지킬 테니, 너희가 폐하와 귀부인들을 집중적으로 호위해. 말이 돌풍에 놀라지 않게 다독이는 것도 잊지 말고!”
나는 다급해 보이는 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창문 너머로 고개를 쭉 뺐다. 와, 진짜 회오리바람 장난 아니네.
“우욱! 읍!”
그건 내 옆에 계신 황후 폐하의 상태도 마찬가지지만. 나는 빼냈던 고개를 다시 마차 안으로 들인 채, 그녀의 손을 잡았다.
“폐하, 괜찮으세요?”
“…하아, 그래. 나보다는, 웁! 나디아 영애, 그대가 더…….”
아닙니다, 폐하. 제가 냄새에 약한 거지 멀미에 약한 건 아니라서요. 상황이 재난급이라 심히 걱정되기는 하지만, 사실 공기 순환 자체는 오예라고요.
평소보다 훨씬 생기가 도는 나와 달리 폐하의 안색은 점점 더 나빠지기 시작했다. 돌풍에 마차가 흔들릴 때부터 조금씩 창백해지던 그녀의 얼굴이 이제는 그냥 새하얗게 보일 지경이었다.
안 되겠다.
“폐하, 저한테 기대세요. 제가 붙들고 있으면 흔들림이 좀 덜할 거예요.”
“아니,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몸도 안 좋은 그대에게 그럴 수는 없어.”
“하지만 폐하의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걸요. 손도 이렇게 차가우시고. 잠시 실례할게요.”
나는 입 안에 살짝 숨을 머금은 채 폐하의 몸을 잡아당겼다.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지만, 참을 수 있다. 지금의 내게는 바람 버프가 있으니까!
‘그리고 냄새보다는 역시 사람 아픈 게 더 중요한 거 아니겠어?’
당연한 생각을 하며, 나는 폐하를 조금 더 품으로 끌어안았다. 후웅, 하는 커다란 바람 소리와 함께 마차가 크게 휘청거린 탓이다.
“나디아 영애…….”
잔뜩 감동한 듯한 폐하의 눈빛에 내가 남주 못지않은 듬직한 미소를 지어 보이던 찰나였다.
“폐하! 나디아!”
언니의 다급한 목소리와 함께 텅, 하고 마차의 문짝 하나가 저 멀리 날아가는 게 보였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아니, 저게 왜 날아가? 황후 폐하가 계신 마차라 여기에 제일 많은 사람이 달라붙었을 텐데, 대체 왜?
‘그보다 여기가 이러면 다른 사람들은 괜찮은 건가?’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상황이 더 심각한 모양이다. 조금 전보다도 더 거세게 얼굴을 할퀴는 바람에 나는 조심스레 몸을 돌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의 치맛단이 문밖으로 펄럭이는 게 영 심상찮아 보여서였다. 그래도 나이가 지긋한 폐하보다는 내가 바람을 맞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했고.
“영애!”
“안쪽 창틀을 잡으세요, 폐하. 그게 더 안전할 거 같아요.”
“하지만 그럼 그대가 위험해!”
“괜찮아요! 저는 운이 좋아서, 이런 거에는 휩쓸리지 않… 악!”
“영애!”
경악이 담긴 폐하의 모습에 입술을 달싹이기도 잠시, 저항할 수 없는 강한 바람이 일순 내 몸을 휩쓸었다. 무의식적으로 마차의 끝을 잡고 있던 손가락이 툭, 떨어지는 기분도 들었다.
‘대체 왜 슬픈 예감은 빗나가질 않냐.’
운이 좋다고 입을 나불댄 것이 문제였냐? 아니면 바람이 많이 불었으면 좋겠다고 했던 게 문제였어?
‘아, 나 올해까지 삼잰가.’
라디에이터에 머리를 박아 빙의를 하더니, 이제는 바람에 날아가 머리 박고 생까지 마감하게 생겼네.
대충 예상이 되는 미래에 내가 속으로 한탄을 하고 있을 때였다.
“정신 차려!”
날카롭게 귓가를 때리는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붕 떠오른 내 몸을 휙 낚아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찬란한 주황색 눈동자가 선연하게 보였다. 바람이 이렇게 미친 듯이 부는 상황 속에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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