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t’s Take a Bath Together, Duke! RAW novel - Chapter 7
7화
그리고 드디어, 무도회 날이 왔다.
“아가씨, 너무 잘 어울리세요.”
“음.”
“진심이에요! 화사한 장미를 보는 기분까지 드는걸요.”
나는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뿜어져 나온 콧김에 가슴에 장식된 꽃잎이 살짝 흔들렸다.
‘정말 괜찮군.’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살짝 속눈썹을 팔랑이며 손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그러고는 수줍게 입술을 벌린 채 작게 속삭였다. 약간의 놀라움과 설렘을 담은 목소리로.
“이게, 정말 나?”
어색하게 머리카락의 끝자락을 만지는 것까지 아주 완벽하다.
‘이것이 바로 클래식 로판 여주의 정석!’
솔직히 한 번쯤은 해보고 싶었다. 그간 정체성 혼란으로 방황하기도 했고, 또 생존에 집중하느라 이런 거 한 번도 못 해봤단 말이야.
나는 내친김에 거울 앞에서 사르르 도는 행동까지 해 보였다. 깔끔하다 못해 좋은 향기까지 나는 페티코트가 겹겹이 물결치는 모습이 아주 예뻤다.
‘이런 걸 보면 카르테인 공작이 말끝마다 시녀장 줄리엔을 달고 사는 이유가 있다니까.’
클로드 카르테인에게 얼마나 닦달을 당했길래 이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줄리엔은 청소의 달인이자 위생의 요정이었다.
처음에는 내 눈치만 보고 있었는데, 두 번째 목욕부터는 내 기분이 괜찮아 보였는지 스크럽도 해주더라. 발과 손을 관리하는 스킬이 얼마나 대단한지, 목욕이 끝나고 나도 모르게 ‘나마스떼’라고 인사를 건넬 뻔했다.
어쨌거나 만족스럽게 거울을 보는 나와 달리, 내 주위에서 차를 마시던 영애들은 다들 학부모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네펠리 영애, 보셨어요? 저는 정말… 이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너무 가슴이 아파요.”
“결국 세 번의 목욕을 다 채우셨죠? 수도의 사교계에서도 늘 이렇게 하고 싶었을 텐데.”
“맞아요, 나디아 영애! 한 떨기 꽃같이 예쁘고 나비처럼 자유로운 그 모습이 진짜 영애의 모습이랍니다! 병약함 따위는 영애를 옭아맬 수 없어요!”
고맙습니다, 여러분…….
이걸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싶어 눈을 굴리고 있을 때쯤 밖에서 똑똑, 하는 소리와 함께 시종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만 내려가실 시간입니다.”
그래, 전투장으로 향할 시간이군.
치마 안의 주머니에 담아 둔 비장의 물건과 머릿속의 계획을 하나하나 정리하던 찰나, 언니가 부드럽게 나의 손을 낚아챘다.
황실 기사단의 정복을 입은 채 머리를 높게 올려 묶은 그녀는 눈이 부시게 멋져 보였다.
“나디아.”
“응, 언니.”
잠시 입술을 달싹이던 언니는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하다 기어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래살래 내저으며 예쁘게 눈웃음을 지었다.
“아니야. 폐하의 곁에서 지켜보고 있을 테니 마음껏 즐기다 오렴.”
“응!”
“그리고 오늘 정말 예쁘다.”
언니의 말에 나는 조금 더 당당하게 가슴을 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근거 있는 자신감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긴장해라, 클로드 카르테인! 우리 언니가 나 예쁘다고 했다!’
게다가 오늘의 나는 목욕 세 번의 힘으로 더 빛이 나지. 이번에는 내가 찰싹 달라붙어도 ‘이렇게 좋은 향기가?’ 같은 생각만 날 거다.
결연한 눈빛을 한 채 내려간 홀은 이미 사람들과 흥겨운 음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화려한 장식과 풍족한 음식, 부요의 축제에 딱 맞는 음악까지.
내 코가 너무 정직해서 그렇지, 무도회는 완벽했다. 그 누구도 이 무도회가 예정에도 없이 열려 급하게 준비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어느 정도 모인 것을 확인한 황후 폐하가 부드러운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손을 슬쩍 들었다.
“축제의 시작을 다른 곳도 아닌 북부의 중심에서 맞이하게 되어 매우 기쁘군. 본격적인 무도회를 시작하기 전, 때 묻지 않은 순수한 풍요를 이 땅의 주인에게 건넬까 하오. 클로드 카르테인, 앞으로 나오게.”
나는 폐하의 앞으로 당당하게 나서는 카르테인 공작을 응시하며, 빠르게 서 있어야 하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카르테인 공작이 축복을 받은 이후 그의 손을 잡고 홀의 중앙으로 움직이는 게 관례였기 때문이다.
옹기종기 밀착한 사람들에게서는 어김없이 퀴퀴한 냄새가 풍겼지만, 오늘의 나는 버틸 수 있었다.
‘평소의 배는 향기롭게 세탁된 옷과 머리에 잔뜩 꽂힌 생화 장식으로 무장한 상태이기 때문이지.’
게다가 여기가 북부라 건조해서 그런가? 보통의 무도회장에서는 간간이 여름날 밀폐된 지하철 냄새가 나곤 하는데,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슬쩍 가슴 쪽에 장식한 꽃 냄새를 맡는 사이, 금색의 드레스를 입은 폐하가 카르테인 공작의 앞에 섰다. 풍요를 상징하는 금색 장신구와 붉은 열매들이 빛에 따라 잘게 반짝였다.
“무릎을 꿇으시게.”
공작에게 명령을 내린 그녀가 우아한 손길로 이삭으로 엮은 관을 들었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은 그의 머리 위로 관을 씌웠다.
“충성을 다해 땅을 가꾸는 주인이여, 하늘이 손을 들어 그대의 땀방울을 받치고 시선을 내려 그대의 노력을 무시하지 않기를. 그리하여 이 드넓은 땅에 풍요가 가득 깃들기를 축복하노라.”
칼 대신 봉처럼 엮은 볏짚이 그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고개를 숙인 채 일련의 축복을 받은 그가 천천히 시선을 들어 폐하를 올려다보았다.
축복의 끝이자, 무도회의 시작을 알리는 대사가 그의 입에서 나지막하게 떨어졌다.
“축복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매해 듣는 진부한 말에도 주위에서는 작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어딘가 여린 한숨이 들린 것도 같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누가 로판 세계의 북부 공작 아니랄까 봐, 대사를 읊조리는 카르테인 공작의 얼굴이 한 폭의 그림 같았거든.
그리고 지금 그 그림 같은 남자를 맞이해야 하는 이가 나다. 약속했던 것처럼 내가 있는 곳으로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긴 그가 손을 내밀어 내게 춤을 청했다.
“풍요의 시작을 함께해 주시겠습니까?”
정중한 그의 말에 나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찬찬히 미소를 그렸다. 그러고는 그의 손바닥 위로 내 손을 얹으며 해야 하는 말을 내뱉었다.
“네, 기꺼이.”
다행히 공작은 이전처럼 손을 빼지 않았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냄새나지 않는 사람이 그와 나뿐인 걸 알고 있는 거지.
여유로운 표정과 가벼운 발걸음. 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과 다르게 내 속은 말이 아니었다. 아니, 솔직히 이건 인정해 줘야지.
‘나 이렇게 많은 사람에게 주목받는 거, 유치원 재롱 잔치 했을 때 빼고 처음이란 말이야.’
유치원에서 재롱 잔치를 할 때야 무섭다면서 무대에서 엉엉 울어도 다들 귀여워 어쩔 줄 모른다지만, 여긴 그게 아니지 않나.
게다가 아무리 죽어라 배웠다고는 해도, 예절이랑 춤을 다시 익힌 게 이곳에 적응하기로 마음먹은 이후였던 걸 생각하면…….
“긴장했나?”
“어, 으, 예에?”
“했군.”
깔끔하게 결론을 내린 그가 내 손을 가볍게 꼭 쥐었다. 살짝 눈동자만 굴려 나를 내려다본 그가 짧게 말을 건넸다.
“심호흡해.”
“후, 후우.”
“그래. 진정이 좀 되나?”
“…조금?”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에 아주 약간 마음이 놓였다. 어쩌면 ‘무도회에서 남자 주인공이 해야 하는 대사 TOP3’ 중 한 개를 들어서일 수도 있고.
내가 살다 살다 심호흡하라는 말을 내 귀로 직접 듣게 될 줄이야. 참고로 1위 대사는 ‘아름답군’이다.
얌전히 남주 역할에 충실하던 그가 나지막하게 폭탄을 터트린 것은, 우리가 홀의 중앙에서 자세를 취한 직후의 일이었다.
“긴장이 풀려서 다행이군. 내가 춤에 재능이 없어서 영애가 날 리드해야 하거든.”
“뭐요?”
너, 이……! 그런 중요한 걸 이제!
내가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내뱉은 그 순간 저 멀리서 빰빠바빰, 하고 현악기 소리가 웅장하게 울렸다.
심장이 다시금 미친 듯이 나대기 시작했다. 조별 과제 프리라이더 같은 공작 때문에 조금 전의 두 배는 더 뛰는 것 같다.
나는 폭주하기 시작하는 조장처럼 이를 악물고 리듬에 집중했다. 머리 위로 공작의 입꼬리가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 것도 같은데, 알 바냐.
‘하나, 둘, 셋. 하나, 하나, 둘, 셋!’
이 동작 다음에 턴이고, 자리바꿈이 다음 박자…….
“잘하는데.”
“씁! 조용히 합니다.”
나는 클로드 카르테인을 꼬셔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인상을 팍 썼다가 빠르게 얼굴을 폈다. 보는 눈이 많다는 걸 깨달아서다. 얼굴에 습관처럼 회사에서 짓는 사무용 미소가 떠올랐다.
‘여기, 여기만 마치면!’
침을 꼴깍 삼킨 채 다음 스텝을 밟던 나는, 그의 팔에 내 허리를 완전히 맡긴 후에야 깨달았다.
‘아, 맞다. 클로드 카르테인, 얘 공작이지.’
내게 춤에 재능이 없다고 했던 클로드 카르테인은 춤을 추는 내내 어떠한 실수도 하지 않았다. 그것도 내게 말까지 걸면서.
‘로판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중에 춤 못 추는 남주가 어디 있어.’
이마를 팍팍 치고 싶은 기분을 억누르며 나는 천천히 몸을 제대로 세웠다. 이, 이…….
“기만자 놈.”
“뭐?”
“아, 내가 입으로 말했어요?”
그거참, 일전에 거절할 거라고 했던 그쪽 같네. 아주 천생연분이다, 그렇죠.
방긋 웃는 표정으로 속은 나의 분통함을 토로하던 찰나, 큰 박수 소리와 함께 주위에서 사람들이 다가왔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춤이었습니다! 하하!”
“세상에, 나디아 영애! 춤 솜씨는 여전하시군요. 두 분 덕에 부요의 축제를 성공적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카르테인 공작께서는 예술에까지 뛰어나시단 말입니까? 허, 거참!”
윽.
향수와 체취가 섞인 냄새가 강하게 코를 찔렀다. 아무래도 방금 춤을 춘 탓에 숨을 몰아쉬고 있어서 그런 것 같은데…….
내 허리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보면 클로드 카르테인 또한 마찬가지인 듯했다.
“각하! 하하하! 오랜만에 보는 얼굴인데, 이런 좋은 모습이라니요! 참 기쁩니다!”
아니, 어째서인지 나보다 더 심한 것 같았다.
양팔을 벌린 채 다가오는 모스키온 후작의 모습에 목의 핏대가 서는 게 보였거든. 머릿속에서 빨간불이 깜박깜박 위험을 알렸다.
‘저건 구역질하기 직전의 상태다.’
모스키온 후작의 겨드랑이가 젖은 것을 본 나는 질끈 눈을 감은 채 빠르게 그의 멱살을 잡아 그를 내 쪽으로 끌어 내렸다.
그러고는 기묘하게 조용해진 공간 속에서, 가슴 쪽에 장식했던 꽃을 뽑아 그의 행커치프 사이에 꽂았다.
‘침, 삼켜.’
벙긋거리는 입술로 작은 조언을 건네는 것도 잊지 않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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