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169
노부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마치고는 소매를 휘두르며 날아갔다.
주진과 영동상인을 천황로 안으로 거둔 한제도 나천성역에서 처리해야 할 마지막 일을 위해 떠나려 했다. 한데 그때, 망설이던 염뇌자가 결심한 듯 한제에게 포권을 하며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는 수련자 연맹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중현자에게 갚아줘야 할 원한도 있지요. 선배님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 한데 나는 아직 할 일이 좀 남았다네.”
“괜찮습니다. 저는 그 근처에 먼저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선배님께서 수련자 연맹 본부에 도착하시면 신식으로 저를 찾아주십시오. 과거의 연을 생각해서라도 제 청을 꼭 들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염뇌자는 평생 부탁이라는 것을 해본 적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한데 불과 수백 년 전만 해도 저 아래로 내려다보던 한제에게 이토록 간절하게 부탁을 하고 있노라니 심경이 다소 복잡했다.
한제는 그런 염뇌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여태까지도 당시 뇌의 선계에서 상대가 부상을 입은 청수와 싸웠던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염뇌자는 한제의 뇌수를 빌린 뒤 강력한 수법으로 뇌의 선계 절반을 제련한 적도 있었다.
“그러지!”
잠시 침묵하던 한제가 답했다.
말을 마친 그는 소매를 휘두르며 한 발 앞으로 나서더니 눈 깜짝할 사이 모습을 감추었다.
둘만 남은 염뇌자와 열운자는 서로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늙었군. 우린 이제 늙었어.”
염뇌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의 계내는 저자의 세상이 될 거야.”
열운자도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한제와 관련된 기억들이 둥둥 떠올랐다.
★ ★ ★
한제는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어마어마한 거리를 뛰어넘었다. 나천성역에 돌아와 해야 할들 중 이제 한 가지만이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 일은 원수를 갚는 것도 인과를 마무리하는 것도 아니었다. 계외와의 전쟁에 대비해 힘을 길러놓는 것이었다.
이미 계획도 있었다.
당시 그는 자신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던 무언가를 찾아 영혼으로 연결된 고신의 흉수를 만들 생각이었다.
사실 6성급 고신이 됐을 때부터 영혼으로 연결된 흉수를 제련할 수 있었지만 적합한 녀석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전에 본 적 있는 길궁은 마음에 들기는 했으나 자신의 힘이 부족해 손에 넣을 수는 없었다. 또한 그 길궁도 그가 염두에 둔 그것에 비하면 한참 부족했다. 운해성역에서 만났던 여러 흉수도 그중 13급에 이른 녀석들도 한제의 눈에는 차지 않았다.
‘녀석과 싸워본 적은 없지만 분명 세 번째 단계의 수련자에 비할 만큼 강한 존재임을 확신할 수 있어! 망월도 녀석의 상대가 되지는 못할 거야! 반드시 손에 넣겠다!’
전의를 번득이며 전진하던 그는 당시 녀석을 봤던 성역으로 달려들던 중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허! 나도 모르게 이곳을 지나치게 됐군.’
두 개의 수련성을 바라보는 한제의 눈빛은 어딘가 슬퍼 보였다.
두 수련성은 천환성과 염운성이었다.
염운성은 1천 년 전 요령의 땅의 균열을 통해 나천성역으로 넘어온 한제가 가장 먼저 발을 들인 수련성이다. 그곳에서 한제는 이평과 함께 일생을 지냈다. 아들과 함께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조각배에 몸을 실은 채 바다를 건너기도 했다. 그는 이평에게 온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 마음을 주었고 평생을 살아갈 부귀영화를 주었으며, 막대한 권력도 주었다. 하지만 딱 하나, 완전한 육신은 줄 수가 없었다.
1백 년간 아들과 부자의 정을 주고받았던 염운성을 본 한제의 마음속에서는 잊은 줄 알았던 고통이 짜르르 울렸다.
멀지 않은 곳의 천환성을 바라보자 화가와 지냈던 날들에 이어 언제나 그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류미가 떠올랐다.
한숨을 내쉰 한제는 다시 염운성을 바라보다가 그 안으로 들어섰다.
염운성은 1천 년 전과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허나 수련성 자체는 달라진 것 없어 보여도 그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모두가 바뀐 후였다.
염운성의 일부 지역은 이미 가을에 접어든 상태였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와 낙엽을 휩쓸었다.
깊은 밤이었다.
염운성의 어느 일반인 도시 내 정원. 어둑한 정원에서 밖으로 통하는 문에는 어스름한 빛을 내는 등 두 개가 걸린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등 안의 불은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면서도 가을바람과 밤의 어둠을 저 멀리 물리치려 애썼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가쁜 기침 소리만이 적막을 깨뜨렸다. 노인의 것으로 보이는 그 소리는 죽음을 앞둔 듯했고 그 소리가 울려 퍼짐에 따라 바람은 더욱 거세어졌다.
을씨년스런 가을바람이 대문 밖의 등을 격렬하게 흔들었다. 마치 저승에서 불어온 기운처럼 거칠게.
마구 흔들리는 등 위에 적힌 ‘손’ 자가 어렴풋이 드러나 보였다. 이곳은 손가의 집인 것이다.
적막을 깨뜨리던 몇 번의 가쁜 기침 소리에 뜰을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수많은 하인이 다급하게 발걸음을 놀려 뜰 깊은 곳의 평범한 가옥으로 향했다.
가옥 앞에는 이미 세 명의 노인이 초조한 얼굴로 서 있었고 그 뒤로는 수많은 손가 사람들이 서 있었다.
“왜들 그렇게 황망해 하느냐? 난 아직 죽지 않는다!”
가옥에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짙은 피로감에 젖어 있는 목소리였다.
“선조님⋯⋯.”
문밖의 세 노인 중 한 명이 애타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때, 돌연 말발굽 소리가 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깊은 밤인 탓에 매우 또렷한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길을 따라 여러 필의 말이 달려왔는데 선두의 말 위에는 갑옷을 입은 한 중년 사내가 앉아 있었다. 위엄이 절로 느껴지는 그의 곁에서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은 산발이 된 머리 위에 떨어진 모자를 쓴 노인이었다. 창백한 노인은 너무 빨리 달리는 말 때문인지 약간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말발굽 소리는 대문 앞에서 멈췄다. 그러자 말에서 내린 중년 사내는 노인과 함께 마치 바람처럼 뜰을 가로질러 가옥에 이르렀다.
“선조님, 손자가 실력이 가장 좋은 어의를 데리고 왔습니다. 치료를 한 번 받아보시지요.”
“허튼소리! 난 1천 년의 세월을 보낸 뒤 죽음 앞에 서 있다. 어찌 일반인 의사 따위가 나를 치료할 수 있겠느냐! 당장 돌려 보… 쿨럭, 쿨럭!”
가옥 안의 거친 목소리는 말을 채 맺기도 전에 다시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쾅!
문밖의 모두가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갑자기 가옥 문이 벌컥 열리더니 머리가 새하얀 한 노부인이 두 계집종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 나왔다.
“오늘 내가 너희 모두를 부른 것은 내게 남은 시간이 7일도 채 되지 않기 때문이다.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나 우리 가문에 나를 제외하면 더 이상 수련자는 없으니 수련계의 잔혹함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기억해라, 앞으로 우리 손가에서는 그 누구도 수련의 길에 올라서는 안 돼. 그저 일반인으로서 부귀를 누리며 살아라. 내 말을 똑똑히 기억해야 할 것이야!”
노부인은 거칠게 기침을 하며 두 눈을 부릅떴다. 그 눈에서 쏘아져 나온 두 갈래의 밝은 빛이 그녀의 후손들을 하나하나 훑었다.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 발산된 묵직한 위압감이 그들 위에 드리웠다.
갑옷 차림의 사내를 포함한 손가 사람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그리 하겠노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내 말을 명심하거라. 자 이제 다들 물러가. 혼자서 조용히 안정을 취하고 싶구나.”
노부인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이미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젊었을 당시 무척 아름다웠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그녀의 말에 꿇어앉아 있던 이들은 분분히 일어나 흩어졌다.
하인들과 노부인을 부축하던 계집종까지 물러났을 때 어둠으로 뒤덮인 가옥은 다시 안정을 찾아갔다.
한숨을 푹 내쉬며 돌 의자에 앉은 노부인은 하늘을 뒤덮은 구름과 그 사이로 흐릿하게 드러난 달을 올려다보며 추억에 잠겼다.
“사람이 늙으면 옛일을 추억하기를 좋아하기 마련이지. 죽음을 앞두고도 누군가를 가르치려 하는 고질병은 고칠 수가 없군. 그러고 보니 난 평생 참 많은 이들을 가르쳤지.”
노부인의 머릿속에 한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수련을 하기에는 너무나 게을렀던 어린 수련자였다. 그녀는 그런 수련자를 몇 번이나 다그치고 화도 냈다.
추억에 젖어 있던 노부인의 얼굴에 한 줄기 미소가 피어났다. 이렇게 기억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지금의 그녀에게 주어진 마지막 낙이었다.
그때, 한제는 뜰 밖 대문에 걸린 등 아래에서 가을바람을 맞으며 서 있었다.
그는 뜰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염운성에 이른 뒤 신식으로 사방을 훑던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을 딱 한 명 찾아낼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남장을 한 채 수련을 했던 여자 수련자였다. 당시 그녀는 자신이 동굴로 돌아갈 때마다 엄하게 꾸짖으며 수련에 전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허나 상대의 말에 담긴 진심을 느낄 수 있었기에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호통은 잔혹한 수련계에서 유독 그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었다. 때문에 그녀는 한제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허나 1천 년이 지난 지금 그 여인이 살아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한제는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신중하고도 여유로운 걸음으로 가옥을 향해 다가갔다.
잠시 후 한제는 홀로 앉아 추억에 빠져 있는 여자 수련자 손릉을 보게 됐다.
한제는 발걸음 소리도 숨기지 않았다. 숨길 것도 숨겨야 할 것도 없었다.
“조용히 있고 싶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노부인은 미간을 팩 찌푸린 채 돌아보지도 않고 호통만 쳤다.
“1천 년 만에 만나는 사람을 보지도 않고 쫓아내려는 건가.”
한제가 웃음을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노부인은 흠칫 놀라더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한제의 모습을 본 순간 그녀의 몸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허목⋯⋯.”
한참이나 한제를 바라보던 노부인의 얼굴에 그제야 미소가 피어났다.
“언제 돌아온 건가?”
노부인은 염뇌자를 비롯한 이들과는 달리 얼른 정신을 차렸다. 그들에 비하면 어리고 수준도 한참 낮은 그녀였지만 삶의 끝자락에서 모든 것을 꿰뚫어볼 수 있는 지금 옛 사람을 다시 만나는 것만큼 큰 즐거움도 없었다.
“방금 막 왔네. 근처를 지나던 참에 들러봤지.”
한제는 노부인 앞에 앉아 벗을 바라보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둘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둘의 목소리가 뜰 안에 울려 퍼졌다. 손릉의 목소리는 매우 거칠고 노쇠해져 있었지만 한제에게는 1천 년 전과 다를 바 없는 은방울 같은 소리로 들렸다.
한제는 매우 즐거웠다. 어찌나 즐거운지 가을바람의 한기마저도 따스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지하마수 사냥 (1)
어느덧 달빛이 점차 스러지고 하늘 끄트머리가 희끄무레하게 밝아오기 시작했다. 하늘이 감았던 눈을 뜨려 하는 것 같았다.
“정말 결정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