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229
허신천존은 멍하니 서 있는 두 명의 선비와 백의의 사내를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작성이 바르르 진동하더니 그대로 터져버렸다.
꽈르릉!
격렬한 진동, 우렁찬 소리와 함께 주작성은 산산조각이 났고 강력한 충격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그 안에서 튀어나온 한 줄기 검은 폭풍이 세상을 뒤덮었다.
“흠!”
허신천존은 뒤를 돌아보더니 표정이 급변했다.
그가 뒤로 물러나기도 전에 검은 폭풍이 달려들었다. 마치 그의 체내에서 무언가가 부르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검은 폭풍은 순식간에 한제의 것이자 허신천존의 것이기도 한 육신으로 뚫고 들어가기 시작해 눈 깜짝할 사이 모두 스며들어 사라졌다.
잠시 후, 바르르 떨리던 한제의 몸이 다시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이번 붕괴의 여파는 무려 수만 척 너머까지 퍼져 나갔다. 수많은 유혼의 도움을 받아 한제는 무너져 내린 육신에서 허신천존을 내쫓는 데 성공했다.
다시 나타난 안개는 수많은 유혼들의 협공 아래 결국 허공으로 떠올랐고 이내 허신천존의 흐릿한 인영으로 변해갔다.
“이 미천한 것들이!”
그는 포효하며 다시 한 번 한제의 육신을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거의 동시에 선비들과 백의의 사내 역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바로 그때, 수많은 유혼의 도움 아래 응집된 몸을 잠시나마 유지할 수 있게 된 한제가 금빛으로 물든 두 눈으로 허신천존을 노려보았다.
“죽으려고 환장을 하는구나!”
방금 전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던 한제는 더 이상 장존이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결단을 내린 그는 왼손을 앞으로 뻗어 움켜쥐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금빛으로 번쩍이는 활이 나타났다.
한제는 곧바로 오른손을 들어 시위를 당겼다. 웅 하는 소리와 함께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온몸의 근육이 응축했고 두 눈에서는 서늘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촉이 둥근 화살 하나가 시위에 걸렸다. 복잡한 문양이 새겨진 화살에서는 남조상인과 천조상인의 혼이 내지르는 어렴풋한 포효가 흘러나왔다.
허신천존은 온몸을 바르르 떨며 크게 변한 표정을 드러냈다.
“이광의 활! 네, 네가 어떻게…?”
노인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외치더니 뒤로 물러났다.
“젠장! 장존이 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가 했더니… 장존! 아직 너와 나 사이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이광의 활과 그 화살의 위력을 잘 알고 있는 허신천존은 거의 혼비백산한 상태였다.
“난 이만 발을 빼겠다!”
뒤로 물러나던 허신천존은 옥패를 꺼내 움켜쥐어 부수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백의의 사내 역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는 중이었지만 사실 그 활과 화살의 등장에 가장 놀란 것은 두 선비였다. 그녀들도 한제가 활을 소환한 순간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 곧장 물러나 옥패를 꺼내 부수었지만 역시 반응은 없었다.
그때, 하늘과 땅의 기색이 변하고 바람과 구름이 몰아쳤다.
화살 하나의 위엄
한제는 싸늘한 눈으로 저 멀리 도망치는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네 사람 모두 한제보다 훨씬 수준이 높았지만 본신이 아니었기에 공령기 중기 이상의 위력까지 발휘할 수는 없었다.
네 사람을 응시하는 한제의 눈에 짙은 살기가 어려 있었다. 그는 오직 한 발의 화살만 쏠 수 있을 뿐이고 그나마도 생기를 바쳐야만 가능한데 지금 남은 생기는 많지 않았다.
본래의 계획은 장존을 포함해 적들을 모두 끌어낸 뒤 한 발의 화살로 장존을 죽여 다른 이들이 두려움에 떨며 물러나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틀어졌고 만약 지금 활과 화살을 들지 않았다면 장존이고 뭐고 당장 육신을 빼앗기고 죽음에 이를 상황이었다.
“죽어라!”
한제는 낮게 외치며 팽팽하게 당겼던 시위를 놓았다. 순간 시위가 웅 하고 울렸고 이 소리는 세상 모든 소리를 제압했다.
시위가 튕겨나감에 따라 화살은 막대한 힘을 싣고 쏘아져 나갔다.
온 세상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화살은 한 줄기 죽음의 빛처럼 허공을 갈랐다. 이 화살에는 도고의 힘과 혈맥의 힘 등 한제의 영혼과 원신, 그리고 체내에 존재하는 모든 힘이 실려 있었다.
화살을 날려 보낸 한제의 몸은 다시 무너져 내릴 조짐을 보였다. 수백 척을 밀려난 후에도 화실의 반동을 흩어버리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수면에 처박혔다.
하지만 그의 시선만은 전방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그는 허공을 가르는 화살을 응시했다.
하늘에는 거대한 균열이 일어났다. 이 균열은 끊임없이 퍼져 나가며 태고 성신에서 한제를 잡기 위해 설치해놓은 진마저 파괴하려 했다.
“피해!”
가장 앞서 도망치던 허신천존이 기겁하며 외쳤다. 바로 뒤를 따르던 두 선비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한편 수준도 지위도 이들 중 가장 낮은 백의의 청년은 셋보다 확연히 느려 화살과 가장 가까운 상태였다.
쐐애액!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른 화살은 수많은 파문을 일으키며 짙은 살기를 담은 채 쏘아져 나갔다. 화살대에서는 위에 새겨진 문양이 어스름한 빛을 발했다.
화살은 세상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존재처럼 어마어마한 위력을 자랑하며 백의의 사내에게 다가갔다.
“헛! 크억!”
백의의 사내는 미간에서 찌르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피를 토해냈다. 이어서 어차피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몸을 홱 틀어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하지만 신통술을 발휘할 틈도 없이 날아든 화살이 미간에 닿았다.
꽝!
우렁찬 소리와 함께 사내의 머리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튀었고 육신도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사내가 심지어 비명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자 앞서 도망치던 세 사람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빠른 속도로 날아든 화살은 다음으로 달빛에 온몸이 뒤덮인 선비의 미간을 노렸다. 여인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몸을 홱 틀더니 오른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그러자 수많은 빛의 장막이 허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장막들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고 단숨에 뚫려버렸다.
“캬앗!”
선비는 다급히 피를 토해냈고 이 피는 곧장 혈인(血人)으로 변했다. 하지만 혈인 역시 곧장 화살에 꿰뚫려버렸다.
선비는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칠현금을 꺼냈다. 이 악기는 당시 선존이 그녀에게 선물한 극강의 법보였다.
하지만 칠현금조차 화살에 닿기도 전에 산산조각이 나 흩어졌다.
“꺄아악!”
선비는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물러나려 했지만 어느새 다가온 화살에 그대로 미간을 꿰뚫리고 말았다. 백의의 사내처럼 그녀의 머리도 붕괴했고 낭창한 육신도 순식간에 와해돼 피와 살점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어마어마한 화살은 두 사람을 연달아 죽이고도 전혀 기세가 약해지지 않은 채 점술을 이용해 신통술을 발휘했던 선비를 노렸다.
백의의 사내와 언니의 죽음을 목격한 그녀는 참혹한 심정이었다. 지금 자신을 노리는 저 화살은 이 계(界)의 물건이 아니었다. 저것은 그녀의 고향에서 유명했던 이가의 법보였다.
더 이상 도망쳐봐야 소용없음을 깨달은 그녀는 돌아서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위기를 마주했다. 그러다 화살이 코앞에 이르자 그녀는 두 눈을 꼭 감았다.
화살은 순식간에 여인의 미간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가슴팍에서 돌연 일곱 가지 색채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그녀의 목걸이에 달린 검은 돌에서 발산되고 있었다.
검은 돌은 허공에 둥둥 떠오르더니 일곱 가지 색채의 빛으로 여인의 온몸을 감쌌다.
콰쾅!
화살이 여인의 미간을 그대로 관통했다. 허나 화살이 지나쳐간 후 여인은 두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목걸이에 달린 검은 돌에 쩌적 하고 한 줄기 균열이 일어났다.
“내가 가장 귀애하는 네게 이 돌을 주마. 너를 보호해줄 것이다. 내가 네 곁에 없을 때라도⋯⋯.”
선존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듯했다.
한편, 여인을 관통한 화살은 가장 앞서 도망가던 허신천존에게로 향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개 속을 파고들었다.
콰르릉!
안개는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가 빠르게 응집돼 흑의의 노인이 되었다.
노인은 창백한 얼굴로 다시 도망치기 위해 몸을 날렸으나 곧장 또 한 번 무너져 내렸다.
“끄아아악!”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짧은 순간 이어진 수차례의 붕괴는 허신천존의 미간이 찢어지고 화살이 그의 체내를 관통하면서 끝나버렸다.
태고 오존의 하나인 허신천존은 순식간에 피 안개로 흩어져서는 사라져 버렸다.
“장존! 내 너를 대신해 이 화살을 맞았다! 이에 대한 변명을 준비해야 할 것이다!”
죽음을 맞기 직전 내지른 비명만이 그가 사라진 자리에서 울려 퍼졌다.
단지 화살 하나였으나 그 결과는 경악할 만했다.
연달아 세 명을 죽인 화살은 위력이 많이 약해졌지만 그럼에도 하늘을 찢고 이 세상을 감싸고 있는 봉인을 뚫기 위해 날아갔다.
한데 그때, 하늘에서 번득이던 파란색 빛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얼굴은 검은 도포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체내에서 발산되는 위압감은 어마어마했다. 진으로 인해 모든 이들의 수준이 공령기 중기로 제한되었으나 저 위력은 절대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비쩍 마른 오른손을 쭉 뻗어 화살을 움켜쥐었다. 그러고는 몸을 바르르 떨다가 고개를 들어 한제를 응시하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오래된 무덤에서 빌려온 고함의 힘으로 운해성역에서 진행된 첫 번째 전쟁에서 우리 태고 성신의 대군을 막았지. 이한제, 이렇게 다시 만나는구나. 내가 바로 장존이다.”
고개를 든 한제는 하늘에서 걸어 나온 검은 도포 차림의 상대를 바라보았다. 한제로서도 절대 잊을 수 없는 그는 장존이었다.
태고 오존의 우두머리. 교활하리만치 지혜로우며 세상의 흐름까지 예측한 자.
그는 당시 선대 봉계 지존을 죽이고 4대 선계를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청림 선제를 암해했고 부문족을 보내 이광의 활을 찾게 했다. 수도자의 배반과 사묵자의 항복, 전가 노인의 죽음 등 수많은 사건의 배후이기도 했다. 심지어 태고 성신에 있을 때 한제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 통제된 적도 있다.
또한 화작족의 거처에서 보았던 장존의 분신인 듯한 자는 한제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신통술인 정중로월을 발휘하기도 했다. 지금 있는 세상의 지면이 수면과도 같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이곳이 어쩌면 장존의 정중로월로 구현된 곳일 수도 있겠다고 짐작한 것도 그때의 경험 덕이었다.
한제는 덤덤한 얼굴로 상대를 응시했다.
유일하게 화살을 피한 선비는 두 사람 사이에 멍하니 서 있다가 몇 걸음 물러났다.
“만약 남몽이 너를 불쌍히 여기지 않았더라면 태고 성신에 있었을 때 넌 이미 내 손에 들어왔을 것이다.”
장존은 미소를 지으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뒤이어 그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손에 쥐어져 있던 화살은 바르르 떨리다가 흩어져 사라졌다.
화살은 이미 한제의 체내에 존재하는 활과 연계되어 있었기에 장존의 손에서 흩어진 순간 한제의 영혼에 다시 나타났다. 만약 당시 이광이 죽지 않았더라면 한제가 아니라 이광의 체내에 나타났을 것이었다.
“선인의 혈맥은 어디에서 얻은 것이냐?”
장존은 뒷짐을 진 채 한제를 향해 다가왔다. 여유로워 보이는 걸음이었지만 그가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한제는 사방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심신이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