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1
여인은 웃으며 저물대에서 옥패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전봉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은 제 스승님 것이었는데 어찌 제가 가져서는 안 될 물건입니까? 선배님, 마궁(魔宮)에는 이 물건의 사본이 있으니 제가 가지고 간다고 해도 아무런 영향이 없을 겁니다.”
옥패에 닿은 전봉의 눈빛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눈앞의 여인을 죽이고 저 옥패를 가져오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 옥패에는 마궁의 봉인이 걸려 있었다. 또한 전봉은 자신이 그 옥패를 손에 넣더라도 그것을 자신이 살피거나 볼 수는 없으며 그대로 상납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한편 운비라는 여인은 애매한 신분으로 그 옥패를 살피고 조사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그 옥패를 훔쳐 달아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그는 여태까지 그녀를 죽이지 않고 그저 뒤만 쫓았다.
전봉이 음산하게 말했다.
“나는 그런 것은 모른다. 하지만 그 물건이 내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는 것만은 알고 있지.”
여인은 결심한 듯한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하시지요. 제가 이 물건의 탁본을 하나 떠서 드리리까?”
전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에서는 희색이 드러났다. 그는 그녀가 수마해 안에서 유명한 기황문(岐黃門)의 계승자임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기황문은 결국 신비로운 힘에 의해 하룻밤 만에 파괴되어 버렸지만 이 여인은 그 난리속에서 빠져나왔다. 그 후 그녀는 기황문에서도 가장 진귀한 단약의 제조 방법이 기록된 옥패를 지닌 채 마궁의 사람에게 생포됐다.
치욕을 참아가며 마궁의 주인인 궁주(宮主)의 첩 중 하나가 된 그녀는 오랜 세월 기다리며 기회를 찾다가 마침내 그 옥패를 갖고 도망쳤다.
이미 결단기 중기에 이른 전봉은 후기에 이르기에는 아주 조금 부족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의 자질에는 한계가 있었고 공법도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생이 다할 때까지 후기에 진입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만약 그 옥패를 손에 넣어 그 안에 기록된 단약을 만들어 복용한다면 결단기 후기에 이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인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빈 옥패 하나를 꺼내 탁본을 뜬 뒤 전봉을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님, 이미 탁본을 완료했습니다. 만약 저를 놓아주신다면 이 옥패는 선배님의 것이 됩니다.”
전봉은 하하 웃으며 말했다.
“좋다. 그 옥패를 넘겨라. 문제가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 곧바로 풀어주겠다.”
말을 마친 그가 앞으로 다가오려 하자 여인이 다급히 외쳤다.
“잠깐!”
동시에 그녀는 한손에 옥패를 쥐고 뒤로 20보 물러섰다. 손에 영력을 조금 불어넣기만 해도 탁본을 뜬 그 옥패는 당장 부서질 것이다.
“저로서는 선배님이 이 옥패를 손에 넣은 뒤 약속을 지키지 않을까 우려가 됩니다.”
전봉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는 서늘한 눈빛으로 여인의 손에 들린 옥패를 주시한 채 걸음을 멈추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어찌하겠다는 것이냐?”
여인, 운비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선배님께서 1만 척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저는 이곳에 옥패를 놓아두겠습니다. 제가 이곳을 떠난 후에 오셔서 가져가시면 되겠지요. 이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저는 당장 이 옥패를 부수고 자결하겠습니다. 그리되면 선배님께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겠지요.”
전봉은 냉소했다.
“헛소리! 그 옥패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어떻게 확신한단 말이냐? 만약 네가 날 속이는 거라면 그때에는 어떻게 하겠느냐?”
그들은 서로 기 싸움을 하느라, 깨진 돌조각으로 만들어진 고리 안쪽에서 공간의 균열이 나타나고 그 안에서 검은 빛이 발산되고 있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운비가 막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전봉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너와 입씨름할 시간 따위는 없다. 그 옥패를 내놓는다면 놓아주겠다. 허나 고집을 부린다면 내게 무정하다고 욕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그 옥패는 이 전봉에게 없어도 그만인 물건이다.”
말을 마친 그가 몸을 앞으로 날렸다. 둘 사이의 거리는 순식간에 닿을 수 있는 정도였으나 전봉은 다소 속도를 늦췄다. 운비가 무의식적으로 옥패를 부술까봐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리되면 그녀의 말대로 그가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된다.
운비는 이를 악물고 손에 쥔 옥패를 옆으로 내던진 후 뒤쪽으로 내달렸다.
전봉은 멈칫하다가 방향을 틀어 옥패를 쫓았다. 재빨리 옥패를 손에 쥔 그는 신식을 통해 그것을 살폈다. 곧 전봉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그는 미친 듯 웃음을 터뜨리며 도망치고 있는 운비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향한 그의 눈에 음흉한 빛이 맴돌았다.
이윽고 그는 몸을 훌쩍 날려 그녀를 다시 뒤쫓기 시작했다. 이번에 그의 속도는 이전보다 몇 배는 더 빨랐다.
쉬- 익!
운비는 절망했다. 예상대로 전봉은 옥패를 손에 넣자 약속을 어기고 다시 자신을 뒤쫓기 시작했다.
“전봉! 내가 죽고 나서 그 옥패에 기록된 대로 단약을 만들어 먹는다면 너 역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다.”
운비는 저주를 퍼부은 후 그 자리에 우뚝 멈춰 눈을 감은 채, 스스로의 맥을 끊어 자결할 준비를 했다.
전봉은 제자리에 멈춰 선 운비를 보며 하하 웃었다.
“눈치는 있구나! 주인을 매료시킨 네 몸이 대체 뭐가 그리 대단한지 어디 좀 보자. 내 시중을 잘 들면 널 놓아줄 마음이 생길지도 모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전봉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쇄성란 쪽을 주시하며 경악했다. 전봉의 반응에 운비는 감았던 눈을 살짝 떴다가 쇄성란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이한 일을 목격하고 그녀 역시 경악했다.
쇄성란의 고리 안에는 어느새 공간의 균열 하나가 나타나 빠른 속도로 확장되더니 순식간에 5백 척까지 늘어났다. 호를 그리고 있는 균열은 마치 허공에 나타난 마수의 입처럼 보기만 해도 몸에 한기가 들었다.
수마해 안의 중앙과 외곽 지역 사이도 붉은 안개와 공간의 균열로 가로 막혀 있지만 그곳의 균열과 달리 지금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거대했다.
그 균열을 본 순간 전봉은 머리가 저릿했다. 그는 곧장 운비의 추격을 포기하고 이곳을 빨리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부서진 돌조각으로 이루어진 고리를 본 그는 약간 안심이 됐다.
그 고리로 가로막혀 있으니 저 균열 안에서 어떤 위험한 것이 나와도 직접 부딪히지는 않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 그 공간의 균열은 확장을 멈추었고 곧이어 검은 옷을 입은 청년 하나가 그 안에서 평온한 얼굴로 걸어 나왔다. 그의 새하얀 머리는 바람이 불지도 않는데 뒤쪽으로 나부껴 탈속적인 느낌을 풍겼으나, 눈빛은 무정했다.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그자의 미간에 있는 반점으로 보라색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의 뒤에 있는 공간의 균열에서 번득이는 시커먼 빛 때문인지, 그의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걸어 나온 악마 같았다.
그 남자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른손을 흔들자 거대한 균열이 빠르게 다물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자취를 감춰버렸다.
남자는 허공에 서서 감개무량한 눈빛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내 그의 눈은 돌조각으로 구성된 고리 너머에 있는 전봉과 운비에게 닿았다.
전봉은 그 하얀 머리의 청년이 공간의 균열 밖으로 나오는 순간 심장이 쿵쾅거렸다. 사이를 가로막은 부서진 돌들 때문에 신식으로 상대를 살필 수도 상대의 수준도 파악할 수 없었지만 사실 그런 이유가 아니었더라도 전봉은 감히 신식으로 상대를 훑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가 보기에 거대한 공간의 균열에서 걸어 나올 수 있는 정도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경지에 닿아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원영기, 어쩌면 이미 화신기에 이른 상태일지도 몰랐다.
또한 어디선가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장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다만 어디서 들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백발 청년의 눈빛이 자신을 훑자 전봉은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의식적으로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땅에 못 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더구나 지금 도망쳤다가 상대가 쇄성란 밖으로 나오기라도 하면 따라잡히는 것은 한순간에 불과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면 도망치는 것은 소용없다.
오히려 상대를 자극할지도 모른다. 반대로 만약 상대가 쇄성란 밖으로 나오지 못한다면 도망치지 않아도 안전할 것이다.
결론을 내린 전봉은 자리에 멈춰 포권을 하며 공손하게 말했다.
“독마궁(毒魔宮)의 5대 제자 전봉, 선배님을 뵈옵니다.”
한편 운비는 만약 지금 도망친다면 어차피 전봉에게 쫓겨 죽게 되겠지만 이곳에 남아 있으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어쨌든 그녀 역시 도망치지 않기로 결정한 만큼 얼른 공손하게 말했다.
“기황문에서 살아남은 운비, 선배님을 뵈옵니다.”
백발의 청년은 냉랭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훑더니 돌조각으로 이루어진 고리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오른손으로 허리춤에 매인 저물대를 두드리자 손바닥만 한 마수가 튀어나왔다. 그 마수의 등에는 세 쌍의 날개가 달려 있었고 두 눈은 맑아서 꽤나 신비로웠다.
그 마수는 곧장 날아올라 돌조각으로 만들어진 고리로 향했다. 곧이어 고리 안의 돌조각 하나가 눈부신 빛을 발했다.
그 빛이 사라진 후로는 두 마리의 마수가 서로를 마주한 채 날카로운 음파를 내뱉으며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백발의 청년은 그 모습을 잠깐 보다가 오른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마수는 몸을 바르르 떨며 작은 회오리바람이 되어 쇄성란 안쪽으로 돌아가더니 그 청년의 어깨에 내려앉았고 곧 자취를 감추었다.
백발의 청년은 한제였다. 그는 기억의 유산을 통해 통로를 여는 데 성공했고 그 통로는 쇄성란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고리를 통과해야 했다. 당시 단목극 등의 이야기를 통해 한제는 쇄성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2백 년
한제는 잠시 고민하다가 결심한 듯 부서진 돌조각으로 이루어진 고리 안으로 진입했다. 그가 고리 안으로 진입한 순간, 전봉은 공손한 표정과 달리 내심 바짝 긴장했다.
사실 그는 몇 년 전 일찍이 마궁의 원영기 수준 수련자가 그 고리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고리 안에서 죽었고 원영조차 도망치지 못하고 고리 안의 신비로운 힘에 흡수되고 말았다.
그리고 오늘, 또 한 번 그 고리 안으로 들어서는 누군가의 모습에 그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운비는 그보다 더 긴장했다. 그녀는 살아남을 가능성을 저 백발의 청년에게서 찾고 있었다. 만약 상대가 그 고리에서 벗어난다면 전봉은 결코 경거망동하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저 청년에게 옥패를 바치는 대가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능성이야 어쨌건 일단 모험을 한번 걸어볼 작정이었다.
몇 개의 돌조각이 모여들더니 하얀 빛을 발했고 곧 한제와 똑같이 생긴 분신 하나를 만들어냈다. 그 분신은 나타나자마자 냉소를 지으며 저물대를 두드려 검은색 비검을 꺼냈다.
굉장히 기이한 모습의 비검에는 가시가 가득 돋아있었다. 분명 한제가 독왕정으로 만들어낸 독 비검이었다.
단순히 비슷하게 법보를 만드는 정도가 아니라 맹타자의 공격을 받으면서 비검에 생겨난 약간의 흠집까지도 완벽하게 복제해낸 모습에 한제는 감탄했다. 첫 번째 분신이니만큼 한제는 전력을 다하기보다는 탐색을 위주로 할 생각이었다.
분신의 비검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들었다. 한제는 입꼬리를 살짝 움직이며 저물대를 두드려 똑같이 생긴 검은색 독검을 뽑아냈다. 순간, 두 자루의 검은 서로를 향해 달려들며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슈 -욱!
이어 한제는 극의 신식을 이용해 붉은색 번개를 만들어냈다. 그와 동시에 분신의 두 눈에서도 붉은 빛이 번쩍했다. 하지만 이내 분신의 몸은 붉은 빛의 위력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폭발해버렸다.
…
한제는 잠시 고민했다. 그는 방금 극의 신식을 움직이긴 했지만 공격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 돌조각으로 이루어진 분신이 극의 신식까지 복제해낼 수 있을지 시험해봤을 뿐이다. 그리고 결과를 확인했다.
한제는 이전에 단목극으로부터 이 돌조각으로 이루어진 고리의 길이는 총 1백 리로 하나의 분신을 처리할 때마다 50리를 움직일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50리를 넘어가면 두 번째 분신이 나타나며 그 분신을 처리한 뒤에는 그 다음 50리를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전봉의 마음은 분신이 죽는 그 순간,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듯했다. 그는 쇄성란 안의 신비로운 힘으로 가득한 분신이 그렇게 기이하게 자폭을 하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는 그 고리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반면 운비의 두 눈은 희망으로 빛났다. 그녀는 저 백발의 청년에게 어떻게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한제는 여유롭게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그가 막 10리를 움직였을 때 갑자기 사방의 돌조각들이 농밀한 흰색 빛을 발하며 그와 똑같이 생긴 두 개의 분신을 만들어냈다. 이 두 개의 분신 중 하나는 비검을 다른 하나는 족자를 꺼내들었다.
한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속으로는 다소 당황했다. 단목극이 거짓말을 한 걸까? 아니면 이곳의 작동에 변화가 생긴 걸까?
한제는 여전히 냉정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극의 신식을 가동시켰다. 이번에 두 분신은 그를 따라 극의 신식을 펼치지 않고 다른 법보를 꺼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