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0
이 혼잡스러운 느낌에 한제는 다소 불안해졌다. 이미 죽은 서사가 자신의 몸을 빼앗을 수는 없겠지만 만약 기억을 모두 흡수하다가 신식이 혼란스러워지면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을 잊게 될까 우려됐다.
기억의 유산을 흡수하는 속도가 느려지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는 천천히 하나의 얼음 결정을 완벽하게 흡수하고 난 뒤에야 다음 얼음 결정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시간이 지날수록 신식의 혼란스러움은 천천히 사라져갔다. 비록 불쑥불쑥 나타나기도 했지만 한제 자신의 신식에 영향을 미쳐 주체에 혼돈을 느끼는 일은 없었다. 덕분에 비록 느리지만 안정적으로 작업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세월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한제는 매번 고치가 될 때마다 혼돈에 빠지게 되면서 구체적으로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됐는지조차 짐작할 수가 없게 됐다.
한제가 똑똑하게 기억하는 것은 자신이 흡수하고 있는 얼음 결정의 수량뿐이었다. 70번째 얼음 결정부터는 몇 배의 시간을 들여 완벽하게 흡수해나갔다. 갈수록 얼음 결정 안에 함유된 기억은 많아졌다.
매번 고치 밖으로 나올 때마다 한제는 자신의 몸을 관찰했고 그는 자신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미간의 반점은 분명 육체의 재구성 횟수를 나타냈다.
그의 미간에 있는 반점은 얼음 결정을 흡수할 때마다 색이 짙어졌다. 한제는 한 번의 흡수할 때마다 때마다 늘어난 기억에 의해 자신의 몸이 미세하게 변하는 것 역시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70번이 넘는 변화를 거쳤을 때, 그의 몸은 고대 신과 비슷할 정도로 견고해졌다. 겉으로는 별다른 점을 찾을 수 없지만 체내의 모든 것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변화를 겪었다.
한제는 팔을 문지르며 지금 자신의 몸으로 결단기 수련자의 전력을 다한 공격을 견뎌낼 수 있을까 고민하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곳에는 더 이상 얼음 결정이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한가운데 부유하고 있는 짙푸른 거대한 고치만이 있을 뿐이었다. 고치 위에는 세밀한 주름이 빽빽해 언뜻 보면 서사의 몸에 한가득 자리한 주름과 똑같아 보이기도 했다.
또한 이 고치는 이미 이곳에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지만 깨질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 주변의 모든 것은 마치 모종의 신비로운 힘에 의해 정지된 듯 오랜 시간 동안 조금의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한제의 몸은 고치 안에 바로 누워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살짝 감겨 있었고 심장은 이미 오래 전부터 박동을 멈춰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의 신식은 지금 혼란에 빠져 있었다. 마지막 얼음 결정을 흡수하는 데 들인 시간은 이전까지 흡수했던 93개의 얼음 결정을 흡수하는 데 들인 시간을 전부 다 합친 것보다 훨씬 길었다.
한제의 신식은 서사의 기억 속에 잠겨 있었다. 그는 서사의 일생을 보았다. 이 고대 신이 탄생한 순간부터 묵류화신술(墨流化神術)을 수련하기로 결심할 때까지의 모든 일을 마치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듯 꼼꼼히 살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제는 자신이 곧 고대 신이라는 느낌까지 받게 됐다.
이런 혼란한 느낌에 대해 이전까지 줄곧 전력을 다해 피해왔지만 모든 기억이 마침내 조합된 순간 그것은 통제를 벗어나 폭발해버렸다. 그리고 한제의 정신은 휴면 상태에 접어들었다.
쩌저적-
얼마나 지났을까. 그 거대한 고치에서 돌연 쩍 소리가 났다. 그 소리는 계속 이어졌고 고치 위로는 미세한 균열이 나타났다. 이내 고치는 빠른 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거대한 고치 안에서 전라의 남자가 나타났다. 하얀 머리에 검은 눈, 평범한 외모였지만 풍기는 기운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눈을 꼭 감고 있었고 심장조차 뛰지 않아 어떤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한참 뒤, 그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 눈에는 무궁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구름과 연기가 그 동공으로부터 짙게 피어올랐다.
전라의 남자 한제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94번째 얼음 결정을 흡수한 지금 그는 이 몸의 강도를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시험을 해본 적은 없지만 한제는 이 몸 덕에 앞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의 몇 배나 높아졌다고 믿었다.
마지막 얼음 결정을 흡수했을 당시를 떠올리면 아직도 가슴이 뛰었다. 만약 50번 째 얼음 결정 때부터 흡수 속도를 늦춰 기초를 공고히 하지 않았다면 마지막 얼음 결정이 폭발하던 순간 그는 자아를 잃고 자신을 서사라 믿게 됐을 것이다.
그러나 기초를 잘 다져놓은 덕에 그는 마침내 그 난관을 넘고 자신을 찾아 각성할 수 있었다.
이제 주문과 결인, 기억 등은 이미 한제의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정리됐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의아했다. 그에게는 묵류화신술을 준비하던 때까지의 기억만 있을 뿐, 그 술법을 배우고 죽음에 이르게 된 그 부분은 공백이었다.
한제는 고민 끝에 얼음 결정이 본래는 94개가 넘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남은 그 몇 개의 얼음 결정은 왜 여기에 없는 걸까?
한제는 미간을 구기고 한참 고민하다가 답이 나오지 않자 두 손으로 기이한 결인을 그렸다. 그리고 입으로는 고대 신 일족의 말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다가 다시 인간의 언어로 외쳤다.
“열려라!”
순간, 그의 앞에 호 형태의 균열이 나타났다. 그 안에서는 검은색 빛을 내는 돌 세 개가 얌전히 부유하고 있었다.
한제가 손을 뻗자 그 돌들은 그의 손으로 떨어졌다. 잠시 후 한제는 앞으로 몸을 날렸다. 그의 발이 닿는 곳에서는 호수면처럼 물결이 일었다. 한 발, 두 발, 세 발.
세 걸음 나아간 순간, 그의 몸은 기억의 유산이 있던 땅에서 사라졌다.
이 세 개의 돌은 바로 금번을 만드는 데 필수적인 재료인 묵간석이었다.
고대 신의 경맥에는 공간의 균열이 하나 있는데 그 안에는 수많은 금제가 걸려 있었다. 이 금제는 고리 형태를 이루며 위험한 기운을 내뿜었다.
한제는 금제를 한참 보고 있다가 변화가 없음을 확인한 뒤에야 앞으로 나아갔다. 금제는 효과를 잃은 것처럼 아무 공격도 하지 않았다.
마치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금제가 흩어져버리는 것 같았다. 금제가 감싸고 있는 지역의 중심에 이를 때까지 그가 거친 모든 금제는 저절로 사라져버렸다.
이 금제는 사실 당시 한제가 기억의 유산을 얻으러 떠날 때 자신의 육신과 저물대를 보호하기 위해 배치해둔 것들이었다.
고대 신의 기억의 유산을 통해 만든 공간의 균열 내부인 이곳이야말로 그가 보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신중한 한제는 최대한의 보호 조치를 해둔 것이다.
남겨 두었던 자신의 육체와 저물대를 보는 한제의 눈에 감개무량한 빛이 어렸다. 이전의 육체는 이미 썩어서 목내이(木乃伊)처럼 변해 있었는데 그로부터 영력이 피어올랐다. 그 안에 있는 금단 때문인 듯했다.
그 옆에는 저물대가 몇 개 있었다.
한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고대 신의 기억을 전승하여 몸을 재구성하지 못했다면 지금쯤 다시 새로운 육신을 찾으러 돌아다녀야 했을 것이다.
오른손으로 시체의 앞가슴을 살짝 누르자 그 안에서 농밀한 영력이 피어올랐다. 이어 시체의 두 손과 발이 무너져 내리면서 영력의 파동도 점점 커졌다. 결국 시체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고 그와 동시에 주먹만 한 금단 한 알이 떠올랐다.
금단을 본 순간, 한제는 마치 자신의 자식을 보는 듯했다. 이 금단은 그가 만들어낸 것이었기 때문에 시간이 얼마나 흘렀더라도 그 사이의 연결이 단절될 수는 없었다.
한제는 오른손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금단이 곧장 그의 손으로 날아들었고 그의 손가락에 닿은 순간 체내로 녹아들었다. 팔을 타고 흘러든 금단은 단전에서 멈추더니 천천히 회전했다.
한제는 한동안 두 눈을 감고 있다가 떴다. 그리고 눈앞에 놓인 시체를 보며 오른손으로 결인을 그렸다.
“황천의 화염이여, 나타나라!”
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이미 재와 먼지로 무너져 내렸던 시체에서 반짝이는 푸른빛들이 날아올라 한데 모여들더니 천천히 하나의 푸른 화염을 형성했다. 한제가 입을 벌리자 그 화염은 곧장 그의 입으로 날아들어 흡수된 뒤 금단 안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한제는 오른손을 휘둘렀다. 시체의 옆에 놓여 있던 저물대들이 하나하나 그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이어 그의 손에서 하얀 빛이 번쩍이더니 검은색 옷이 나타났다.
그 옷을 입은 한제는 저물대들을 잘 챙긴 뒤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고 그러자 그곳에서 공간의 균열이 나타났다. 한제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 ★ ★
한제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기억의 유산이 놓인 땅이었다. 깊은 숨을 들이마신 그는 사방을 둘러보며 자신이 떠났을 당시와 똑같다는 것을 확인한 뒤 두 손을 뻗어 여러 결인을 그었다. 그의 입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결인이 변화함에 따라 층층의 빛들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의 입에서 생경한 말들이 계속해서 나왔고 그러자 이 빛들은 점점 더 멀리 퍼져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안에서 서사의 환영이 나타났다.
서사는 한제에게 너무도 익숙한 존재였다. 그 모습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이 느껴지는 상대였지만 한제의 마음에는 미동도 없었다.
서사 환영의 미간에 있는 여덟 개의 보라색 반점이 갑자기 돌기 시작하더니 여덟 갈래의 빛을 뿜어냈다. 그리고 빛줄기가 떨어진 자리에서는 여덟 개의 거대한 뿔 모양 소용돌이가 나타났다.
한제는 서사의 환영을 향해 말했다.
“고대 신의 땅이여, 안녕!”
★ ★ ★
수마해 중앙 지역, 쇄성란(碎星亂).
무수히 많은 돌조각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고리형 땅은 신비로운 힘으로 충만했다. 또한 안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나 밖으로 나가려고 할 때 모두 자신의 수준과 비슷한 여러 분신들과 싸워 이겨야만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고리형 땅의 안쪽은 더욱 위험했기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점차 인적은 드물어졌다.
이날, 두 갈래의 검광이 차례대로 먼 곳에서 이곳으로 날아들었다. 먼저 도착한 검광은 약간 어두웠고 그 안에는 묘령의 여인이 있었다.
여인은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고 얼굴은 창백해 핏기가 없었다. 붉은색 바탕에 하늘거리는 푸른 천으로 장식한 옷을 입은 그녀의 허리는 가늘고 얼굴은 매우 아름다웠다.
그녀의 뒤쪽으로 날아든 검광은 중년 남자의 것이었다. 네모진 얼굴에 눈썹이 짙었고 눈은 방울처럼 부리부리했다. 지금 그의 입가에는 냉혹한 미소가 걸려 있었고 두 눈에서는 서늘한 빛이 번득였다.
그 눈빛은 앞에 있는 여자에게 닿아 있었다. 그의 발을 받치고 있는 검이 안정적인 것으로 보아 전력을 다해 추격하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이 두 개의 검광은 매우 빠른 속도로 쇄성란(碎星亂)에 접근했다. 여인은 쇄성란을 바라보자 더욱 씁쓸해졌다.
도망은 한 달가량 이어져오고 있었다. 남자는 그동안 어디로 도망치든 따라붙었고 떨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만약 스승에게서 배운 비법으로 도망치지 않았다면 벌써 붙잡히고도 남았을 터였다.
하지만 그 비법은 영력의 소모가 너무 커,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 당황한 그녀는 마음가는 대로 방향을 바꾸었는데 그러다 보니 하필 쇄성란에 이르게 됐다.
운비라는 여인
그녀는 다시 방향을 바꾸려 했지만 남자가 바짝 쫓아왔기에 어쩔 수 없이 계속해서 앞으로 비행하는 수밖에 없었고 이에 두 사람은 점차 쇄성란과 가까워져갔다.
그녀는 남자가 전력을 다해 추격하는 게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치 무슨 놀이를 하는 것처럼 자신을 끝없이 압박하고 있었다. 상대는 자신이 쇄성란 안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 여기는 듯했다.
전봉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추격했다. 그는 눈앞의 여인이 가지고 있는 물건을 반드시 손에 넣겠다고 결심했다.
만약 그녀가 신기한 술법으로 몇 차례 달아나지 않았다면 벌써 그것을 손에 넣고도 남았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잔뜩 겁에 질린 채 쇄성란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하늘도 나를 돕는군.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한층 더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운비, 앞에 있는 건 쇄성란이야. 수마해 안에서도 악명이 자자한 곳이지. 내가 듣기로는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 중 누구도 무사하지 못했다더군. 그런 곳에 들어갈 텐가?”
전봉은 음침한 말투로 느릿하게 말했다.
여인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쇄성란과의 거리는 이제 50척도 남지 않았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추더니 몸을 돌려 전봉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비참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물고 말했다.
“선배님, 저는 불운한 사람입니다. 겨우 살아나온 저를 어찌 이리 쫓으십니까?”
전봉의 입꼬리가 살짝 움직였다. 그는 1백 척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여인의 뒤에 있는 쇄성란을 힐끗 보더니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 역시 목숨을 건 일이다. 네가 가져서는 안 될 물건을 가진 탓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