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1445
“좋아. 의식과 심신은 한 줄기도 남지 않았군. 허나 수준이 너무 약해. 조금 더 배양해야 녹마님의 강림을 감당할 수 있을 터. 또한 이자에게는 흙의 본원이 없어. 녹마님을 성공적으로 부활시키려면 흙의 본원도 필요하겠군.
아홉 개의 본원을 하나로 합치면 본원의 몸이 되어 녹마님의 강림에 더없이 적합한 상태가 되겠지. 그렇게 되면 가문의 사명을 완수한 나는 중주로 돌아갈 수 있을 테고 후손들은 대대로 복을 누리겠지.”
노인은 콜록거리며 천천히 한제로부터 멀어져갔다.
제사장과 두 녹마사자가 떠난 뒤에도 한제는 여전히 가부좌를 튼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적막이 찾아왔다. 녹색 빛이 소리 없이 반짝였고 각 빛줄기에 담긴 녹색 전갈 허상이 빽빽하게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 세 달이 지났다. 그동안에도 한제는 미동조차 없었는데 그에게서는 조금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녹색 빛으로 뒤덮인 그의 몸 위를 녹색 전갈들이 이리저리 기어 다녔다.
체내에서 천역주로 보호받고 있는 원신 또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다행히 한제는 인내심이라면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았다.
제사장은 매우 기이하고 수상한 자였다. 한제는 그가 자신의 현재 상태를 쉬이 믿지 않으리라 여겼다.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시험하고 떠봄으로써 완벽한 확신을 얻은 뒤에야 행동에 나설 터였다.
‘대체 어떤 술수로 시험을 하려 들 것인가? 뭐가 됐건 나는 준비됐다.’
상황을 관망하면서 닥쳐올 변화에 적절히 대처하는 것. 그게 한제의 계획이었다. 몸 곳곳을 기어 다니는 녹색 전갈에 대해서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개중 몇 마리가 입과 코 등을 파고들어도 반응하지 않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제사장이 떠나간 지도 1년이 됐다. 이 공간은 마치 지하 감옥처럼 음산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한데 한제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수많은 전갈로 뒤덮인 인간 모양의 둔덕이 있었을 뿐이다. 한제 정도 되는 수련자의 몸은 수만 년이 흘러도 썩지 않을 테니 전혀 손상되지 않았으나, 그의 몸을 뒤덮은 녹색 전갈은 점점 늘어났다. 전갈들은 마치 한제를 자신들의 일부로 여기고 있는 듯했다.
한제의 원신은 미동조차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그간 제사장은커녕 누구도 찾아오지 않았다. 마치 한제의 존재를 완전히 잊기라도 한 것처럼.
★ ★ ★
무겁고 싸늘한 적막 아래 또다시 세월은 흘렀다.
1년, 2년, 3년⋯⋯.
그렇게 네 번째 해에 접어든 어느 날, 한제의 원신이 돌연 경련을 일으켰다. 지난 4년 동안 녹색 전갈에 완전히 뒤덮여 있던 한제의 몸에는 기이한 변화가 일어난 상태로 경련 또한 그 변화에서 기인했다.
전신의 10만 8천여 개 땀구멍에서는 알과 같은 미세한 녹색 빛이 나타나 있었다. 2년 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이 빛들은 자잘하게 부서져 체내로 흡수돼 한 마리의 어린 전갈로 변했다.
이렇게 태어난 전갈들은 한제의 몸을 소굴과 양분으로 삼았고 덕분에 4년 만에 이 공간의 녹색 전갈은 그 수가 배로 늘어나 있었다. 이 전갈들은 한제의 몸만이 아니라 사방의 지면까지 두껍게 뒤덮어 보기에도 끔찍했다.
이에 따라 본래대로라면 수만 년이 지나도 멀쩡했을 한제의 몸에 천천히 주름이 지기 시작했다. 전갈들의 양분이 되어 점차 시들기 시작한 것이다.
한제는 만약 지금 원신을 발산시켜 육체를 통제해 빠져나가지 않는다면 영원히 이곳을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또한 제사장이 지난 수년간 찾아오거나 어떤 행동을 취하지도 않은 것은 세월이야말로 자신의 의식과 심신이 완전히 사라졌는지 확인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 여기기 때문임을 깨달았다.
‘이게 그자의 마지막 시험이었군. 오랜 세월에 걸친 잔혹한 시험이야. 이 시험마저 완벽하게 통과해야만 그는 진정한 행동에 나설 터. 이런 상황에서 의지와 심신을 드러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약 상황이 이렇게 되지만 않았더라면 한제는 백 년이고 천 년이고 기다릴 수도 있었다. 허나 이제 몸이 말라가기 시작했고 한제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굳건한 신념 역시 동요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추측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만약 내 판단이 틀렸다면? 이대로 버티다가는 결국 죽어버릴 수도 있다. 큰 행운이고 뭐고 죽은 후에는 소용없을 터!’
한제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다. 그리고 이 갈등은 1년을 더 이어졌다.
5년째로 접어들었을 때, 한제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복잡한 생각들을 과감히 끊어낸 채 자신의 감을 믿기로 한 것이다.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무심하게 흐르는 시간만큼 어린 전갈의 수는 늘어만 갔고 그에 따라 한제의 몸은 점차 말라갔다. 그리고 이곳에 들어온 지 10년째 되던 해, 한제의 몸에는 더 이상 조금의 양분도 남지 않았다.
지난 10년,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한제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천우주와 녹마주의 전쟁이 계속 되고 있는지 아닌지도 알지 못했다.
또한 이 10년 동안 한제의 원신은 천역주의 보호 아래 완전히 응집해 단 한 번 찾아올 절호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신념의 근거는 오로지 자신의 판단과 분석뿐이었다.
‘제사장의 육신은 분명 일반인이다. 허나 그에게서는 무시무시한 기운이 느껴졌어. 도마종 종주마저 허리를 숙일 정도였지. 이런 상황에서 경거망동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 터!’
마갈 사당에는 그가 알지 못하는 비밀이 많았다. 게다가 일반인인 제사장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 노인 역시 인내심이 얼마 남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역시 한제의 추측일 뿐이었다.
지금 한제는 제사장이 거대한 전갈 형태 건물 중 머리 부분의 동굴에서 가부좌를 튼 채 녹색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거울 안에는 한제가 있는 녹색 공간의 전경이 담겨 있었다.
한제의 추측대로 10년이라는 세월을 그 또한 인내심을 가지고 견뎌왔다. 또한 그의 수명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비술을 통해 보통의 일반인보다는 더 오래 살 수 있지만 대대로 제사장이었던 그의 가문에서도 가장 오래 산 선조조차 3천 년을 넘게 살지는 못했다. 게다가 자신은 이미 2천 8백여 년을 살아온 상태로 죽음과 점점 가까워지는 중이었다.
“녹마님의 강림에 완전을 기하기 위해서라면 더 기다릴 수도 있다.”
노인의 인내심은 대단했다. 이곳에서만 2천 년을 넘게 살아온 그에게 시간의 흐름을 견디는 것은 이미 삶 그 자체였다.
또 다시 10년이 지났다. 한 사람은 미동조차 없이 앉아 있고 다른 한 사람은 거울을 통해 이를 지켜보는 지루한 싸움이었지만 어지간한 수련자들끼리의 혈투보다도 훨씬 잔혹했다. 세월의 투쟁에는 소리도 없고 연기나 폭발도 없지만 위험하기로는 그보다 더했다.
제사장으로서는 가문 대대로 수만 년을 준비해온 이 싸움에서 절대 질 수 없었다.
허나 한제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그의 몸은 뼈까지 약해지기 시작한 상태로 도고의 육신이 아니었다면 진즉 스러졌을 터였다.
20여 년간 몇 차례나 심적인 흔들림을 겪었지만 여전히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 평생 최대의 도박이라 할 수 있었다.
‘절대 질 수 없어.’
한제는 근 20년간 마음속으로 이 한 마디만을 되뇌었다.
때때로 세월은 매우 느리게 흐르지만 때로는 가을날 나뭇가지에서 땅으로 떨어져 내리는 낙엽처럼 눈 깜짝할 사이 지나버리기도 한다.
한제에게는 그 이후 20년이 그랬다. 한제로서는 한 공간에서 40년을 머문 것으로 심지어 육신을 포기한 채 원신 역시 거의 죽은 듯한 채로 지낸 세월이었다. 40년이 지나던 때, 이제 고신의 육신조차 죽음에 접어들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제사장 역시 힘겹게 기다림을 이어갔다. 그는 지난 40년간 꼭 필요한 때가 아니면 모든 시간은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또 다시 40년이 흘렀다.
한제가 이곳에 붙잡혀 온 지도 80년이 되던 해의 어느 날, 제사장의 도포 안 깊은 곳에서 두 눈이 흔들렸다.
‘심신이 깨어 있는 상황에서 무려 80년을 꼼짝도 않고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터. 더구나 내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
이제 그의 앞에는 단 하나의 선택지만이 남았다.
‘더 기다릴 것인가 말 것인가!’
아홉 번째 본원
한제는 기다리기로 했다. 단지 더 기다리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대대손손 이어온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에게는 아직 60년 정도의 수명이 남아 있었다.
80년은 일반인에게는 평생에 달하는 세월이다. 그런 80년 동안 한제는 그저 천역주의 보호 아래 묵묵히 기다려왔다. 이제 마치 노인이 된 듯 기억조차 흐릿해지고 있었다. 마치 희미한 안개에 휩싸인 것처럼.
그는 많은 것들을 잊은 상태였다. 동부계도 천우주도 심지어는 자신이 지금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도 천천히 옅어져 갔다. 그는 마치 이 세상의 일부가 됐지만 축지성촌을 발휘할 수는 없는, 그런 상태에 이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만 그의 마음속에는 절대 잊을 수 없을 동시에 잊고 싶지 않은 몇몇 사람이 남아 있었다. 그중에는 부모님도 있었고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악기를 연주하던 말 없는 여인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바쁘게 살아가면서 자신이 환생을 한 목적조차 잊어버렸다.
어떤 이들은 평범하게 살다가 죽기 전 우주를 보고 나서야 자신이 목적을 잊은 채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또 어떤 사람은 한 사람의 인영을 찾고자 온 세상을 정복하기도 했다. 설령 그 인영이 그저 어딘가에 비친 허상이라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또다시 30년이 흘렀다. 두 사람의 조용하지만 위태로운 싸움이 무려 110년째 이어져온 것이다.
그리고 그해의 어느 날, 제사장은 결정을 내렸다.
“내게 남은 수명은 30년이 채 되지 않는다. 게다가 더 이상의 시험은 무의미해. 저자는 의식도 심신도 원신도 남아 있지 않은 게 분명하니까.”
노인은 이미 완전히 피폐해진 한제의 육신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만약 미리 대비해두지 않았더라면 이미 저자는 수많은 녹색 전갈들로 인해 완전히 흩어져 사라졌을 것이다.
“원신이 남아 있었다면 육신이 무너진 순간 전갈들의 양분이 됐겠지.”
자리에서 일어난 노인은 한층 허약해진 기침을 내뱉으며 두 녹마사자의 부축을 받아 한제가 있는 공간으로 향했다.
녹색 공간에 파문이 일더니 그 안에서 제사장의 허약한 모습이 나타났다. 그는 잠시 말없이 수많은 전갈에 뒤덮여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한제를 바라보았다.
“네가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듣고 있다면 네 인내심에 찬사를 보내마. 이런 환경에서 1백 년이 넘도록 기다리다니. 나로서도 해낼 수 없는 일이야. 천우주와 녹마주의 교전도 곧 끝날 듯하구나.”
제사장은 말을 잇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네가 듣고 있다면 정말로 그 세월을 참고 버텨낸 것이라면 행운을 얻고 난 뒤라도 부디 녹마주를 적대하지는 말거라. 그리고 네가 그리 해주겠다면 네 의지가 아직 남아 있더라도 네게 행운을 줄 것이다!”
중얼거리는 노인의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내 삶은 이미 거의 끝자락에 이르렀다. 너무도 힘들고 피곤한 시간이었어. 우리 가문은 이곳을 지켜야 할 사명이 있지. 부탁하건대, 내가 죽은 뒤 이 마갈 사당 아래에 묻힌 내 선조들의 뼛가루를 중주로 보내다오. 우리 집이 있는 그곳으로⋯⋯.”
유언을 남기는 듯한 노인의 허약한 목소리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한데 소맷자락 안에 숨겨진 노인의 오른손에는 옥패가 하나 들려 있었다. 녹색 빛을 띤 옥패는 오직 제사장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으로 무언가를 파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신의 파동을 감지하기도 했다.
그는 한제의 심신이 조금의 파동이라도 보인다면 이 옥패를 이용해 곧장 죽일 생각이었다. 노인은 결코 부드럽고 온화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시험이다.’
허나 옥패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제사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옥패를 거두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한제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돌연 혀끝을 깨물어 한 움큼의 피를 뿜어냈다.
그 피가 뿌려지자 녹색 빛으로 가득찬 이 공간의 모든 전갈은 일제히 쉭 소리를 내며 물러났고 한제의 비쩍 마른 육신이 드러났다.
“여덟 개의 본원⋯⋯ 하나가 모자라.”
중얼거리던 노인이 오른손을 들어 소매 바깥으로 뻗었다. 녹색 털이 북슬북슬한, 비쩍 마른 팔에서는 썩은 내가 풍겼다.
그 순간, 팔을 뒤덮은 녹색 털이 전부 떨어져나가더니 노란 빛이 그 팔을 뒤덮고는 천천히 녹이기 시작했다. 이내 녹아내린 노인의 팔에서는 세 개의 황토색 구슬이 튀어나왔다.
“이 세 개의 맹토(孟土) 구슬이라면 흙의 본원을 응집해낼 수 있을 터!”
노인은 약하게 숨을 헐떡이며 왼손을 앞으로 휘둘렀다. 그러자 세 개의 구슬이 곧장 한제의 육신을 향해 날아가 각각 미간과 가슴, 단전에 녹아들었다.
세 개의 구슬이 체내로 완전히 녹아든 순간, 한제의 육신이 바르르 떨리더니 눈부신 황토색 빛을 발산했다.
밝은 빛이 뿜어져 나가자 사방의 전갈들은 쉭 소리를 내며 뒤로 물러났다. 이 빛은 수 시진 동안 번득이면서 한제의 몸을 완전히 감쌌다. 동시에 흙으로 뒤덮여 마치 진흙 인간처럼 변한 한제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무심히 흐르는 동안 제사장은 떠나지 않고 한쪽에 가부좌를 튼 채 한제를 지켜보았다. 그의 표정은 매우 진중했다. 수만 년, 가문 대대로 이어져온 꿈이 마침내 실현될 순간을 눈앞에 두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한데 사흘이 지났음에도 한제의 몸을 뒤덮은 얇은 황토색 흙은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았다.
“맹토 구슬 세 개로는 부족하다는 건가? 체내에 흙의 본원을 아주 약간 응집해내는 데 그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