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201
달도 없는 깊은 밤이었다.
가게 뒷방의 침상에 누운 한제는 이따금씩 곁에 있는 과일주를 마셨다. 이제 자신의 마음이 신선계의 생활에서 벗어나 일반인과 같아지고 있음을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앉아서 호흡을 하는 시간도 줄었다. 이전이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난 4백 년간 도망자와 살인자의 삶을 살아오면서 그는 틈만 나면 체내의 영력을 다스리고 발동시켰으며, 그를 통해 최대한 빨리 경지를 높이려 애썼다. 약육강식의 삶에서 조금이라도 마음을 다잡지 못하면 곧장 죽음이었다.
지금처럼 누워서 잠을 청한 일도 거의 없었다. 밤은 대부분 앉아서 보냈다. 평화가 결여된 삶이었다.
하지만 지금 한제의 삶에는 어떤 고난도 없었다. 조용하고 단조롭긴 하지만 영혼이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느낌에 어색함을 느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지금과 같은 안정을 이루었고 일반인들의 생활에 녹아들어갔다.
과일주를 한 모금 들이킨 한제가 미간을 살짝 구겼다. 가게 밖에 두 명의 수련자가 나타난 것이다.
마치 유령처럼 하늘을 가르며 도착한 그들 중 한 명이 손을 휘두르자 가게의 대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그들은 순식간에 가게 안으로 들어섰고 뒤이어 가게의 문은 바람에 밀려 소리 없이 닫혔다.
두 사람은 눈을 빛내며 사방의 나무 조각들을 살폈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허나 곧 그 놀라움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끝없는 탐욕이 대신했다.
“법보가 이렇게나 많다니!”
그중 한 수련자가 찬 숨을 들이마시며 감탄하더니 조각상 하나를 집어 들고 응시했다. 그러다가 순간 몸을 부르르 떨며 조각상을 떨어뜨렸다. 눈빛이 더욱 탐욕스럽게 변한 그는 소매를 휘둘러 선반에 진열된 조각상들을 하나하나 저물대에 담기 시작했다.
다른 수련자는 쪼그려 앉아 나무 상자를 뒤지다가 깜짝 놀란 듯 숨을 들이켰다. 그는 반쯤 완성된 사람의 조각상을 들고 잠시 쳐다보다가 얼굴이 붉게 변하더니 엄청난 양의 피를 토해냈다. 그 조각상을 멀리 내던진 그는 마치 원고 시대의 흉악한 괴수라도 본 듯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사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미완의 그 나무 조각은 육욕마군을 본딴 것이었다. 완성되지 않은 물건이라고는 하나 그 나무 조각이 품고 있는 원영기 절정에 해당하는 영기를 겨우 결단기에 불과한 그가 감당할 수는 없었다. 만약 손을 떼는 게 조금만 늦었더라면 결과는 끔찍했을 것이다.
한데 허공에서 거대한 손이 나타나더니 막 바닥에 떨어지려던 육욕마군의 조각을 쥐었고 어느새 나타난 한제의 손에 쥐어주었다. 한제는 그 조각상을 옆에 내려놓고 오른손으로 술주전자를 들어 과일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합해서 금 4520냥.”
두 수련자는 꼼짝도 못하고 놀란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특히 방금 피를 토한 수련자는 창백한 얼굴로 식은땀까지 흘렸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그들은 분명 신식으로 이 근방을 살폈다. 뒷방에 한 사람이 누워 있긴 했으나 일반인에 불과했다.
한데 그 일반인은 자신들이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사이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두 사람은 정신이 없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가게 안에 가득한 이 나무 조각 법보의 출처를 바로 눈치챘다. 저자는 두 사람이 감히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될, 까막득한 경지의 선배임이 분명했다.
두 사람은 얼른 허리를 숙이며 공손하게 말했다.
“선배님을 뵈옵니다. 저희는 백운종(白雲宗)의 제자들입니다. 오늘 일은 실례가 많았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금 4520냥, 있나?”
한제는 덤덤한 목소리로 물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수련자인 그들에게 영석이라면 몇 개 있지만 일반인들의 화폐를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물론 돌아가서 가져오라고 한다면 4천 냥이 아니라 4만 냥이라도 가져올 수 있지만 말이다.
두 사람의 생각을 꿰뚫어 본 한제는 가볍게 오른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수련자들의 허리춤에 달려 있던 저물대가 둥둥 떠서 한제의 손으로 들어갔다. 한제는 그 저물대에 걸려 있는 신식을 가볍게 지워버렸다. 순간 수련자는 얼굴이 붉게 변해 몇 걸음 물러서더니 한 움큼 피를 토해냈다.
손짓 한 번에 자신의 저물대에 걸려 있던 신식이 완벽하게 지워지다니, 그 수련자의 눈빛에 담긴 공경심이 한층 더 짙어졌다.
저물대가 덜덜 떨린다 싶더니 그 안에 들어 있던 모든 나무 조각들이 떠올라 조금의 오차도 없이 각각 제자리로 돌아갔다. 마치 처음부터 건드리지 않았던 것 같았다.
“돌아가라. 다음에 올 때는 돈 좀 챙겨오고.”
말을 마친 한제가 오른손을 휙 휘두르자 저물대가 수련자에게로 돌아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의 몸은 엄청난 힘에 저도 모르게 밀려났다. 그들의 몸이 부딪히려는 찰나에 대문이 활짝 열렸고 두 사람을 밖으로 몰아낸 뒤 다시 닫혔다.
그 후로도 장장 10여 리를 더 밀려난 뒤에야 두 수련자의 몸은 겨우 멈추었다. 그들의 눈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놀라움과 공포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들은 그 가게에 있던 자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목숨이 붙어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한 두 사람은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이 두 사람은 물론 왕궁에 있던 그 두 수련자였다. 서도에게 조각상을 어디에서 구했는지 물어 몰래 잠입했으나, 방금 전에 벌어진 상황은 공포 그 자체였기에 다시는 그 가게에 대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자신들의 몸에 이미 한제의 신식이 심어져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만약 그들이 한제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그들은 즉시 목숨을 잃을 것이다.
1년 전이었다면 이들의 목숨을 살려주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한제가 또다시 과일주를 한 모금 들이켠 후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살인을 하지 않은 지 1년⋯⋯.”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은 뒤 뒷방으로 돌아가 침상에 누워 잠들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2년이 지났다. 한제가 수도에서 생활한 지 벌써 3년째였다.
대우는 갈수록 체격이 커지고 단단해졌다. 그의 부모 얼굴에도 가는 주름이 몇 개 더 늘어나 있었다. 그들은 아직 어렸지만 세월의 흐름을 마냥 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난 2년 동안 이웃 중 적지 않은 사람이 한제를 찾아와 혼담을 꺼내놓았다. 한제는 그럴 때마다 모완을 언급하며 모두 거절했다.
서 씨의 둘째 아들도 결혼을 해 포동포동한 아이를 낳았다. 서도는 집에 돌아올 때마다 한제를 찾아와 공손하게 금 2백 냥을 내놓고 세자 마마의 뜻이라고 전했다. 사실 그동안 명절마다 서도는 많은 금을 보내왔고 한제는 거절하지 않고 모두 받아두었다.
2년이 지나는 동안 한제는 삶과 죽음에 대해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그 기간동안, 그가 자리에 앉아 호흡을 한 것은 두 번뿐이었다.
심지어 경지를 올리는 데에도 거의 신경 쓰지 않았고 자신의 체내를 살피는 일도 거의 하지 않았다.
체외의 붉은 안개는 이미 얇은 하나의 층만 남아 있었고 나머지는 모두 세 개의 붉은 구슬로 응결되어 한제의 저물대에 들어가 있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네 번째 붉은 구슬을 응결할 때 붉은 안개는 모조리 흩어질 것 같았다.
당시 그의 가게에 난입했던 두 수련자는 그 후로 한 번 방문해 엄청난 양의 금과 은을 놓고 세 개의 나무 조각을 구매했다.
한제의 가게는 성 서쪽에서 점점 인기를 얻고 있었다. 손님이 많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첫 1년에 비하면 여러모로 나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한제의 가게를 방문하는 사람들은 열에 여섯은 수련자였다. 이들은 모두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화폐를 내고 나무 조각을 사갔는데 이런 식으로 지난 2년 동안 팔린 나무 조각이 적지 않아 한제의 가게 한쪽에 놓인 커다란 궤짝은 이미 금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제의 마음은 시종일관 평화로웠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일반인의 마음 상태로 그들의 인생을 깨달아 천도의 윤회를 느끼는 것뿐이었다. 가게나 조각은 그저 이를 위한 도구일 뿐이었다.
새해가 다가오고 있었다. 수도의 성 안은 다가올 새해를 맞이하느라 기쁜 기색으로 가득 찼다.
한제는 대문 앞에 앉아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깊은 추억에 잠긴 눈빛이었다.
수도에 오고 나서 세 번째로 맞는 새해였다. 매번 새해가 될 때마다 받는 느낌은 달랐지만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는 것만큼은 같았다.
가게 맞은편의 대장간에서 대우가 달려 나왔다. 그는 폭죽을 가지고 나와 흥분한 얼굴로 가지고 놀았다. 한제는 대견한 눈빛으로 대우를 바라보았다. 처음 봤을 때는 11살짜리 꼬마였는데 어느덧 14살 소년으로 자라나 있었다.
대우는 결국 아버지의 잔소리를 이겨내지 못하고 작년부터 대장간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쉬는 시간만 되면 한제의 가게로 들어와 조각하는 것을 구경했다. 이전처럼 가게에 자주 들르지는 못했지만 과일주만큼은 잊지 않고 매일 한 주전자씩 가져왔다.
추위
폭죽을 터뜨린 대우는 소리를 지르며 한제 곁으로 다가왔다. 녀석은 춥지도 않은 듯 찬 의자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삼촌, 며칠 전에 아버지한테 들었는데 동쪽에 사는 여 씨 아저씨가 자기 딸을 삼촌한테 시집보낸다고 했대. 몰래 몇 번 본 적 있는데 진짜 예쁘거든.”
한제는 빙그레 웃으며 대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난 아내가 있는데…”
“어? 정말? 왜 여태 한 번도 본 적이 없지?”
대우는 깜짝 놀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었다.
“아주 먼 곳에서 날 기다리고 있거든. 언젠가 그녀를 찾아갈 거야.”
모완을 떠올린 한제의 눈빛이 부드러워졌다.
“아, 그럼 삼촌은 돈 많이 벌어서 그분과 결혼하려고 수도에 온 거구나?”
대우는 히히 웃으며 말했다.
한제는 실소를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돈 많이 벌어서 결혼하려고…”
대우가 막 뭔가 말을 하려던 때, 그의 아버지가 대장간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대답을 한 대우는 입을 삐쭉였다.
“아, 또 쇠나 두드려야겠네.”
그러더니 마지못해 대장간으로 돌아갔다. 곧 대우 아버지의 고함이 흘러나왔다.
한제는 과일주를 마시며 묵묵히 대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때,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송이는 점점 더 커졌다. 올해의 첫눈이었다. 기온도 갑자기 뚝 떨어진 것 같았다.
한제의 얼굴에 닿은 눈은 곧장 녹아 물이 되었다. 한제는 고개를 들어 먹먹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한참 뒤 그는 오른손을 뻗어 꽉 쥐었다. 순간 사방의 눈이 모여들었다.
한제는 깊은 숨을 내쉬며 움켜쥐었던 오른손을 풀었다. 그러자 모여들었던 눈이 흩어져 다시 사방으로 날렸다. 너무나 빨리 지나간 상황에 한제의 곁에서 일어난 일을 알아차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고개를 숙인 채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행인도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 거리는 텅 비었다. 가게들도 갑자기 내린 큰 눈에 일찍 문을 닫았다. 가족끼리 화로 앞에 모여 앉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가족끼리 둥그렇게 모여 앉으면 그 따뜻함은 몸뿐만 아니라 영혼까지 데워 주게 마련이다.
한제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눈이 내리는 거리는 추웠지만 그에게 이 정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 어두운 거리에 오직 자신만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에 그는 마음 한구석이 시려왔다.
이런 추위는 화기(火氣)로 몰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어떤 신통술로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또한 이 추위는 천도를 깨달은 대가였으며 인생을 체험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화신이 되려면 먼저 일반인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는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한제는 지금 고독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앞으로 평생 그 고독을 느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고독은 사실 고독이라 할 것도 아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곁의 사람들이 하나하나 숨을 거둔 뒤 세상에 혼자 남은 것 같은 감정,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고독이었다.
한제는 한참 뒤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순간 약간 늙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천천히 문 옆에 놓인 의자를 치우고 가게 안으로 들어간 후 문을 닫았다.
한참 뒤, 가게 안이 밝아졌고 주위의 다른 가게들과 다를 것 없는 모습이었지만 사실 이 불빛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 안에 숨은 것은 깊은 고독이었다.
한제는 문득 저물대에서 나무 조각 하나를 꺼내 곁에 두었다. 아버지의 조각상이었다. 그 조각상을 바라보자 마음속의 냉기가 조금은 가신 듯했다.
한제는 어머니의 조각상도 꺼냈다. 그리고 뒤이어 저물대에 들어 있는 조각상들을 하나하나 꺼내 화롯가 주위에 빙 둘러두었다. 400년 전, 평범한 소년이었던 당시의 그가 살았던 마을의 이웃들이었다.
그 조각상들을 바라보며 한제는 빙긋 웃었다. 하지만 누군가 그의 미소를 보았다면 웃음이 아니라 소리 없는 울음이라고 여겼을 법한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