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367
그때, 또 다른 누군가의 인영이 영산 아래쪽에서 훌쩍 뛰어올라 산꼭대기에 이르렀다. 그의 등장에 이미 꼭대기에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변했다.
건풍은 맹렬히 두 눈을 떠 서늘하게 그 인영을 노려보았고 자심은 얼른 고개를 숙이더니 황급히 운작의 뒤로 가서 섰다.
운작은 눈을 번득이며 마침내 기다린 사람을 맞은 듯 미소를 지었다.
무태는 내심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한제를 뒤쫓았던 것은 알릴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데 도중에 갑자기 운작이 나타나는 바람에 곧장 이곳으로 오느라 이야기를 전하지 못했다.
막 도착한 자는 바로 한제였다.
어깨에 원숭이를 얹은 노인은 한제를 보더니 붉은 눈을 기이하게 번득이며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어깨 위의 원숭이는 한제가 나타나자마자 흉악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푸른 가면을 쓴 자 역시 고개를 살짝 틀어 한제를 멍하니 바라보더니 이내 그에게 고개를 살짝 까딱인 뒤 시선을 거두었다.
옷 곳곳이 찢겨져 나가 한제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영산의 중턱쯤 올랐을 때 갑자기 두 번째 붕괴가 시작되면서 나타난 차원의 경계들에 화를 입은 것이다. 결국 그 균열들을 피해 동굴 하나를 파고 들어간 한제는 그 안에 숨어 있다가 붕괴가 다 끝난 뒤에야 겨우 나와 마저 산을 올랐다.
“이 형⋯⋯.”
“천우!”
“이한제!”
한제가 도착한 순간, 세 개의 서로 다른 호칭이 세 사람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순서대로 무태와 건풍, 운작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제는 평온한 얼굴로 사람들을 슥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머문 사람은 운작이었다. 지난번 헤어진 이후 첫 만남이기도 했다.
운작에게서 이전의 그 비천하고 졸렬한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금의 주작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한제와 운작은 마주본 채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윽고 한제는 쓴웃음을 지으며 포권을 했다.
“선배님을 뵈옵니다.”
운작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말했다.
“너도 왔구나.”
한제가 오른손으로 저물대를 두드리자 몇 줄기의 검은 빛이 튀어나오더니 한제의 지휘에 따라 운작을 향해 달려들었다. 운작의 곁에 이른 그 검은 빛들은 하나하나 나무 조각상으로 변했다.
그 나무 조각들은 모두 똑같은 모양으로 잘생긴 청년이 새겨져 있었다.
“선배님께서 당시 분부하신 일, 모두 완수했습니다.”
한제는 말을 마친 뒤 한쪽 구석으로 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운작이 오른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순간 모든 나무 조각상이 사라졌다. 그는 한제를 한 번 훑어보더니 다시 허공의 거대한 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운작이 어떻게 이곳에 들어온 것인지에 한제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선유족은 수만 년 동안 대를 이어왔고 그들에게는 기이한 신통력이 있었다. 게다가 한제는 여러 가지 일에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그에게는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으니 더더욱 그랬다.
이미 그는 수성의 결정을 얻는 것은 포기했다. 그저 자신의 명혼이나 되찾을 생각이었다.
그는 두 눈을 번득이며 건풍을 훑어보았다. 마침 건풍도 그를 쳐다보았고 두 사람의 시선이 중간에서 마주쳤다.
한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거둔 뒤, 이번에는 가면을 쓴 자를 살폈다. 낯선 자였다.
한제는 그에게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주작산 입구에서 기이한 웃음을 남겼던 그 노인을 바라보았다.
‘저자는 대체 누구지?’
그 노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은 운작에게서 느껴지는 것보다도 몇 배는 더 강했다. 한제는 생각에 잠긴 채 노인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눈치챈 노인이 한제를 마주보더니 음산하게 웃었다. 그 미소는 무척 익숙했으나, 분명 저 노인은 처음 보는 자였다.
그때, 저쪽 하늘 끄트머리에서 한 줄기 무지개가 하늘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무지개는 방향을 휙 틀어 차원의 균열을 피한 뒤 영산 위에 착지했다.
무지개의 주인공은 류미였다.
한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힐끗 쳐다본 후 시선을 거두었다. 반면 건풍은 류미를 보자 기쁜 듯 씩 웃었다.
‘사매가 왔으니 내가 명혼을 되찾을 가능성은 두 배로 높아졌군.’
류미는 어딘가 슬퍼 보이는 눈으로 한제를 바라보다가 그에게 다가왔다.
한제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는 그녀에게 조금의 호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내게 볼일이 있는가? 아니, 있다 해도 듣고 싶지 않다.”
그의 차가운 목소리에 류미는 우뚝 멈춰 서서 한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정말 목석같은 사람이군.”
한제의 싸늘한 표정에는 전혀 변화가 없었다. 류미는 그런 한제를 바라보다가 돌연 웃더니 조용히 말했다.
“그 이모완이라는 여인은 여전히 마음속에 잘 있나?”
한제의 눈에 살기가 어렸다.
“정말로 죽고 싶은 건가?”
류미의 그 말은 사실 한제의 도심을 해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모완이 한제에게 있어 역린과 같은 존재임을 모르고 있었다. 만약 지금이 싸움을 벌이기에 곤란한 상황만 아니었다면 그는 곧장 존혼번을 꺼내 들었을 것이다.
한제는 자신이 입은 은혜는 어떻게든 갚지만 자신과 무관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냉정했다. 그러니 목석같은 사람이라는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류미는 빙긋 웃더니 자리를 떠나 건풍에게로 향했다.
한제의 눈에서 서서히 살기가 사라졌다. 그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아까의 그 노인이 여전히 음산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다른 자의 육신을 빼앗은 자인가?’
한제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들 리가 없었다. 영변기 수련자 특유의 신통한 감지력으로 한제는 저 노인이 누군가의 몸을 차지한 존재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러자 곧바로 떠오르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어언 6백 년간 수련을 해오는 동안 수많은 적을 만났으나 웃는 얼굴만으로 나를 두렵게 한 자는 단 한 명뿐.’
그의 얼굴은 평온했으나 마음속에서는 거친 파도가 몰아쳤다.
‘탁삼!’
주작성에서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주작이 아니라 바로 마신(魔神)과도 같은 사내, 탁삼이었다.
고대 신 서사의 유산은 기억의 유산과 힘의 유산 둘로 나뉘었다. 그중 한제가 차지한 기억의 유산에는 서사가 일생동안 가졌던 기억이 담겨 있었는데 거기에는 고신결의 수련 방법과 고대 신이 되는 방법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서사가 별과 별 사이를 노닐던 기억으로 인해 거대한 성도(星圖)까지 남아 있었다.
이러한 기억의 유산 덕분에 한제의 본체는 3성급 고대 신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억은 기억일 뿐 실질적인 힘은 갖지 못했다. 고대 신 서사의 기억에는 수십 종류의 신통술이 기록되어 있었고 그중에는 손짓 한 번으로 수련성 하나를 파멸시켜 버릴 만한 것도 있었다. 그 신통력을 사용하는 주문과 발현하는 방법을 한제는 낱낱이 알고 있었다. 허나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것들은 최소한 7성급 고대 신은 되어야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한제로서는 본체를 최대한 빨리 성장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힘의 유산을 전승받은 탁삼도 반쪽짜리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는 8성급 고대 신에 해당하는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으나, 그 힘만으로는 신통술을 발휘할 수 없었다. 체내에 경맥은 없이 힘만 세다고 해서 법술을 발현해낼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탁삼이 지금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서사가 죽은 뒤 남은 원한과 사악한 사념, 즉 서사의 마념(魔念)으로부터 그가 태어난 이래 스스로 깨달은 술법뿐이었다.
그 술법들만으로도 어느 정도 힘의 유산을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그래봐야 발휘할 수 있는 기껏해야 5성급 고대 신 수준에 해당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물론 5성급 고대 신만 해도 문정기 수준을 완전히 능가하는 존재였으나, 8성급 고대 신의 힘의 유산을 차지한 그의 입장에서는 만족스러울 리가 없었다.
금갑(金甲)의 사내
탁삼의 가장 큰 갈망은 기억의 유산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그 유산만 차지하여 흡수하고 신체를 단련하면 진정한 8성급 고대 신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수련 연맹조차 탁삼의 존재에 겁을 먹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한제가 먼저 차지하지 않았다면 탁삼은 기억의 유산을 흡수한 뒤 진즉 고대 신의 체내에서 빠져나왔을 터였다.
사실 그는 서사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다. 서사로부터 태어났으나, 당시 서사가 한눈 파는 사이 몰래 떨어져나간 마념으로 이루어진 존재일 뿐이었다.
한제는 다시 한 번 그 노인을 살폈다. 이번에는 노인보다는 그 어깨에 올라 있는 작은 원숭이에게 눈이 갔다.
원숭이의 두 눈에서는 수시로 붉은 빛이 번득였다. 당시 피바다로 끌려갔던 맹타자 등이 보였던 눈빛과 똑같았다. 아마도 맹타자와 고왕, 육욕마군 등은 지금쯤 죽었거나 피바다 안의 수련자가 되어 있을 터였다.
문득 몇몇 상고 시대의 수련자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주작성이 자리 잡기 이전부터 존재했던 이들로 그 수준은 비할 데 없이 강대했다.
허나 이후 수많은 경험을 쌓은 한제는 그 상고 시대 수련자들의 수준이 문정기를 넘지 않았을 것이라 확신했다. 서사의 체내에서 기이한 힘에 의해 제한을 받고 있었으니 그 정도에서 더 올라가지도 못하고 머물러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후대 수련자들이 알지 못하는 신통한 법술들이 있었다. 그 법술들을 발휘한다면 그들의 전투력은 엄청날 것이라고 한제는 생각했다.
‘탁삼은 분명 아직 봉인에서 완전히 풀려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풀려났다면 이렇게 다른 이의 몸을 빼앗을 필요 없이 곧장 나를 찾아왔을 거야. 한데 탁삼은 왜 저자를 통해 날 공격하게 하지 않는 거지? 설마… 그 역시 수성의 결정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인가?’
한제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째서일까? 아니, 잠깐. 지금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게 뭐지? 당연히 봉인에서 풀려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혹시 그 수성의 결정이 그를 고대 신의 봉인에서 완전히 풀려나게 할 수 있는 존재인가?’
한제가 막 의문을 품은 그때, 영산 위에서 갑자기 또 한 번의 진동이 시작됐다.
우르릉!
콰과과광!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소리가 도처에서 들려왔다. 세 번째 붕괴가 시작된 것이다.
주작묘 내부는 또다시 대대적으로 무너져 내리면서 곳곳이 허무로 돌아갔다. 아직 영산을 찾지 못한 사람들은 이 피할 수 없는 재난 속에서 하나하나 소멸되었고 심지어 명혼들로 이루어진 영물들까지도 사라져갔다.
영물들의 죽음은 일련의 연쇄반응을 일으켰다. 그 영물을 이루고 있던 명혼들까지 소멸되면서 그 명혼의 주인인 주작성의 일반인, 수련자 혹은 마수들까지도 모두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는 피할 수 없는 재난이었다.
다행히 그렇게 사라진 존재가 많지는 않았으나, 수성의 결정이 더 붕괴되면 결국 주작성은 지옥이 될 것이 분명했다.
주작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주작산에 울려 퍼졌다. 주작성 안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그는 잔혹한 미소를 지은 채 중얼거렸다.
“사제여, 이 내기의 끝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이 내기는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나의 제자 건풍아, 난 기대하고 있다. 내가 네게 준 그 보물을 사용하기를 말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이 내기는 절정을 맞게 될 것이다.”
★ ★ ★
이번 붕괴는 두 번째보다도 오래 지속됐다. 또한 그 와중에 허공의 거대한 문에 생겨난 균열도 점점 크고 많아졌다.
운작이 몸을 훌쩍 날려 그 거대한 문 옆으로 다가갔다. 그가 손에 든 밀짚모자를 내려치자 밀짚모자는 흩어져 하나하나의 문양이 되더니 한데 교차되면서 유성처럼 거대한 문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콰르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