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25
한참이나 고민해보았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한제는 틈의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바깥은 여전히 칠흑처럼 어두웠고 흡인력이 발휘되면서 흘러나오는 귀신 우는 것 같은 소리도 여전했다. 출구에 가까워질수록 그 소리는 더욱 격렬하게 들려왔다.
밖을 내다보던 한제의 머릿속에 순간 번개와 같은 생각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그는 어째서 여태까지 이상한 느낌을 느껴온 것인지 알게 됐다.
“내 육신에 들어오려고 했을 때 느껴졌던 막!”
한제의 얼굴이 구겨졌다. 산마의 혼은 그의 원신에 봉인되어 있었으니 육신을 차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내 원신에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한제는 원신을 정수리 밖으로 내보내려 했다. 그러나…
“원신을⋯⋯ 내보낼 수가 없어⋯⋯.”
한제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더니 한숨을 내쉬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는 몇 번이나 더 시도해보았다.
잠시 후, 두 눈을 뜬 한제의 표정은 냉랭했다.
“그 막이 원신을 육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어. 이게 원신의 변화에 대한 대가인가⋯⋯?”
한제는 숨을 깊이 내쉬었다.
“좋아, 일단 이 일에 대한 생각은 미뤄두자. 그 영패에 대체 어떤 신통력이 깃들어 있기에 그 안개 속에서 실체화됐는지부터 확인해봐겠군.”
한제가 저물대를 두드리자 보라색 영패가 나타났다.
영패는 전체적으로 보라색이었지만 그 안쪽에서는 한 줄기 금빛이 번득였다. 보랏빛과 금빛이 서로 교차되어 언뜻 자금색의 영패처럼 보이기도 했다.
영패를 손에 쥔 한제는 그 영패가 나무로 만들어진 것도 같고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도 같으면서도 또 둘 다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허나 이 넓은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을 그가 알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러니 이 영패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는 깊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영패 표면에는 산산조각 난 문양이 몇 개 있었다.
고민 끝에 영패 안에 신식을 주입한 순간, 한제의 표정이 기이하게 변했다.
“물건 저장 공간인가?”
영패 안에는 어떤 공간이 있었다. 그 공간은 보라색 연기로 가득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저장되어 있는 것을 똑똑히 살필 수 있었다.
그곳에는 한 자루의 검, 바로 검초십이자의 검 중 하나가 있었다.
한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검은 아마도 그 보라색 안개 속에 갇혀 영패를 소환하는 데 제물로 쓰인 그 대나검종 제자의 검일 것이다. 허나 저 검이 어떤 이유로 이 영패에 흡수된 것인지는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한제는 공간을 자세히 살핀 후 신식을 거두고 영패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이 영패는 재질 외에는 별다를 게 없군. 천운자와 능천후등이 이 영패를 찾으려는 이유는 이게 별채를 여는 열쇠이기 때문인가? 그래, 네 개의 가짜 별채를 다 열면 진짜 별채에 진입할 수 있다고 했지. 허나 요석설의 말대로라면 그들 중 혈조만이 그 네 번째 가짜 별채의 존재를 알고 있어. 그리고 내가 이 영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오로지 탐랑만이 알고 있다. 진룡은 아마도 탐랑이 가져갔을 거라 생각할 테니까.”
생각을 정리한 한제는 잠시 영패를 자세히 살피더니 꿀꺽 삼켜버렸다. 그리고는 영패를 전광이 번쩍이는 원신으로 감싸 그 존재를 감추었다.
그는 이내 시선을 돌려 칠흑처럼 어두운 구멍 속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이 영패에 무슨 효력이 있다 해도 여기 갇힌 상태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겠지. 허나 어쩌면 그 별채로 바로 들어갈 수 있을지도 몰라.”
한제는 가능성이 낮은 것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저물대에서 수정을 꺼내 들었고 이내 한숨을 내쉬며 그것을 다시 집어넣었다.
“역시 활성화시킬 수가 없군! 그렇게 쉬울 리가 없지.”
그는 다시 주위를 살폈다. 틈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공간이 한눈에 들어왔다.
잠시 후 한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틈의 입구로 걸어갔다.
깊은 구멍의 흡인력은 끝이 없었고 조금만 다가가도 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심지어 틈에서 완전히 빠져나가지도 않았건만 빨려 들어갈 뻔했다.
회색 옷
한제는 다시 뒤로 몸을 물렸다.
“흡혈 마수는 어디에 있는 거지? 그리고 주일 선배는 어떻게 됐을까? 물론 주일 선배가 탐랑에게 이겼다 해도 내가 여기 있다는 건 알 수 없겠지.”
한제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토둔술을 사용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았다. 하지만 역시 되지 않았다.
해볼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든 시도해봐야 했기에 이번에는 존혼번을 꺼내 혼백 하나를 절벽으로 향하게 했다. 허나 마치 연기처럼 벽 안으로 들어간 그 혼백은 머지않아 참혹한 비명을 질렀다. 그러더니 벽 안에서 갈가리 찢기듯 가루가 되어 그 엄청난 흡인력에 빨려 들어갔다.
“큰일이군.”
한제는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잠시 후, 그는 저물대에서 세 개의 보검을 이어서 잘린 팔과 머리 하나를 꺼냈다.
세 자루의 검은 모두 검초십이자의 것으로 영패 안에 들어 있는 것까지 합하면 각각 사사, 오마, 유계, 술구의 검이었다.
한제는 삼재검진도 한쪽에 꺼내놓았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자 일곱 자루의 검은 순간 날아와 사방을 맴돌았다.
이어서 한제는 원신의 기운 한 갈래를 뱉어내 그 일곱 자루의 검을 감쌌다. 원신 전체는 몸 밖으로 나가지 못해도 한 갈래를 뱉어내는 것은 가능한 모양이었다.
이전과 달리 원신의 기운 안에서 번득이던 전광이 닿자 일곱 자루의 검은 서로 한데 연결되면서 아주 기이한 검진이 되었다.
“일곱 자루의 검이니 칠성검진(七星劍陣)을 이룰 수 있겠군! 게다가 전광까지 더해져 이 검진의 위력은 더욱 강해졌어!”
한제는 원신의 기운으로 검진을 제련한 뒤 이제 잘린 팔과 머리로 시선을 돌렸다.
이 팔과 머리에는 각각 원신이 하나씩 봉인되어 있었고 능천후의 검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제는 원신을 제련하고 검기를 뽑아내는 데 익숙했다.
원신의 기운을 두 번 뿜어낸 한제는 능천후의 검기를 뽑아내 한입에 삼켰다. 경험상 능천후의 검기를 삼킬 때면 원신에서는 통증이 느껴졌으나, 이번에는 연달아 두 개의 검기를 삼켰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욱 편해진 느낌이었다.
뜻밖의 상황에 한제는 쓰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이걸 원신이라고 부를 수 있긴 한 건가?”
한제는 다시 저물대에서 금제로 이루어진 구체를 하나 꺼냈다. 이 구체는 곧장 커지더니 5척 크기로 변해 바닥에 내려섰다. 그 안에서는 수많은 금제의 빛이 번득였다.
한제는 결인을 그린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금제의 구체는 마치 피어나는 꽃처럼 중간에서부터 갈라졌고 그 안에 갇혀 있던 준수한 용모의 사내가 나타났다. 바로 적계의 두건이었다.
두 눈을 굳게 감은 두건의 얼굴에는 핏기가 전혀 없었다. 금제가 제거되자 그는 두 눈을 뜨더니 한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 빛과 총기가 돌아오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그는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자신의 상태를 살폈고 그 결과 원신이 봉인되어 이제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됐음을 알게 됐다.
“두 사형, 스승님의 비밀을 말씀해주시지요!”
한제의 덤덤한 질문에 두건은 씁쓸하게 웃으며 복잡한 눈빛으로 한제를 바라보았다.
“말을 한다 해도 죽음을 면키를 어려울 것인데⋯⋯?”
그때, 한제의 눈에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아주 빠르게 전광이 번득였다. 그 눈을 본 두건은 심장이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자⋯⋯ 자네의 눈⋯⋯?”
“두 사형, 이 사제는 인내심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한제는 덤덤하게 말했으나, 두건은 놀라서 어떤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한제의 눈빛을 보고 받은 충격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그는 일평생 수많은 수련자를 만나왔고 수준 높은 수련자도 여럿 본 적이 있다. 허나 그들 중 두 눈에 전광이 깃든 자는 매우 적었는데 이는 체내의 신통력이 극한에 달했다는 의미였다.
또한 같은 번개라 해도 후천적으로 얻은 것은 하늘에 존재하는 번개의 위엄에 미치지 못한다. 한데 방금 한제의 눈에 언뜻 스쳐간 전광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천둥번개 같았다.
한제는 말없이 허공을 움켜쥐어 두건을 잡아채더니 틈의 입구를 향해 밀어냈다. 틈의 입구에 이른 두건은 엄청난 흡인력에 원신이 뽑혀나갈 것만 같았다.
“끄악! 사… 사제!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겐가?”
놀란 그가 비명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말해!”
한제는 더는 말하기도 귀찮은 듯 짧게 내뱉으며 두건을 틈의 입구 쪽으로 조금 더 밀어냈다. 시시각각 죽음의 그림자가 가까워지면서 두건의 얼굴은 더욱 창백해졌다. 이제 정말로 원신이 뽑혀나갈 것만 같았다.
“마… 말할게! 말한다고!”
두건은 덜덜 떨면서 외쳤고 그제야 한제는 상대를 옆으로 내팽개친 뒤 말없이 노려보았다.
원신이 차차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으나 두건은 여전히 두려운 듯 덜덜 떨며 말했다.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말할 테니, 대신 날 죽이지는 않겠다고 약속하게!”
한제가 덤덤하게 말했다.
“죽이지는 않을 거야. 넌 아직 쓸모가 있으니까.”
두건은 숨을 들이마시며 복잡한 눈빛으로 한제를 바라보더니 중얼거렸다.
“네 도를 걸고 맹세해.”
그 순간, 한제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더니 천천히 한 손을 들어 두건을 잡아채고는 다시 틈의 입구 쪽으로 그를 끌고가려 했다.
두건은 와들와들 떨면서 황급히 외쳤다.
“나는 스승님이 허은을 삼키는 것을 봤어!”
한제는 그 말에 멈칫하더니 두건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직접 본 게 아니라 산정(山精)을 통해 본 것이지만… 난 천운종에 들어온 뒤 수련한 공법으로 기이한 마수로부터 영력을 흡수할 수 있지. 무의식중에 뒷산에서 숨이 거의 끊어지려는 산정을 발견해 영력을 흡수하려다가 녀석의 기억을 추출하게 됐다네. 녀석의 기억 속 아주 오래전, 스승님이 허은을 삼키는 모습이 담겨 있었어!”
한제는 가늘게 뜬 눈으로 계속하라는 듯 두건을 쳐다보았다.
“그 기억 속 허은은 스승님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네. 하지만 결국 스승님이 신통력을 발휘하여 허은을 삼킨 뒤 자리를 떠났지.”
두건은 황급히 말을 쏟아냈다. 이것은 그가 알고 있던 가장 큰 비밀이었다. 당시 그는 산정의 기억을 통해 이 장면을 본 뒤 너무나 큰 충격과 동시에 끔찍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이 비밀을 평생 가슴에 묻어두겠다고 다짐했다. 한데 지금 그 비밀을 처음으로 깬 것이다.
“당시 스승님의 표정은?”
한제가 물었다.
“그게⋯⋯ 안타까워하시는 것 같았네. 분명 안타까워하시는 표정이었지.”
두건은 자세히 기억을 떠올리다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그러다가 뭔가가 떠오른 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산정의 기억 속 스승님은 뭔가 이상했어. 난 한 번도 스승님께서 회색 옷을 입은 것은 본 적이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