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ne Station RAW novel - chapter 531
한제의 마음을 느낀 보라색 흡혈 마수는 묵직한 위엄이 어린 날카로운 소리를 길게 내질렀다. 그러자 흡혈 마수들은 천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때, 한제가 저물대를 살짝 열었다. 그러자 흡혈 마수들이 일순 제자리에 조용히 멈춰 섰다.
한참 뒤, 그중 한 마리가 날아와 회색 빛줄기가 되어 한제의 저물대 안으로 날아들었다. 뒤이어 몇 마리가 그 흡혈 마수를 따라 저물대 안으로 향했다.
그렇게 전체의 3분의 1 정도 되는 흡혈 마수가 한제의 저물대로 들어왔고 나머지는 조용히 그 자리에 서서 한제와 그들의 왕이 하늘 끄트머리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키야아아아!”
“캬오오오!”
한참 뒤, 남아 있던 흡혈 마수들은 길게 울부짖었다. 그 소리에는 슬픔이 배어 있었다. 그러더니 녀석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하나하나 조석의 심연 입구로 떨어져 내렸다.
멀리서 이를 느낀 한제의 흡혈 마수는 몸을 부르르 떨며 천천히 뒤쪽의 조석의 심연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한제는 한숨을 내쉬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한제는 이 흡혈 마수들이 유년기를 지나 성년기에 접어들면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저물대에 들어간 녀석들은 모두 유년기였고 자결을 택한 녀석들은 성년의 흡혈 마수들이었다. 흡혈 마수들의 세상에서는 왕에게 버림을 받는다면 자결을 하거나 새로운 왕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흡혈 마수의 풀 죽은 모습을 두고볼 수 없던 한제는 녀석을 저물대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수백 년간 함께했던 동료인 뇌와도 저물대에 넣어 주었다. 뇌와와 함께라면 흡혈 마수도 슬픔을 어느 정도 추스를 수 있을 터였다.
한제는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과 흰 구름을 바라보았다. 이런 하늘을 본 게 얼마 만인지 알 수 없었다.
잠시 그렇게 하늘을 올려다보던 한제는 저물대에서 수정 하나를 꺼내 그 안에 신식을 주입했다. 그러자 수정이 번쩍였고 잠시 후 한제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 ★ ★
한제가 다시 나타난 곳은 그의 별채 안이었다.
아직 풀지 못한 수많은 금제들을 바라보던 한제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음에 돌아올 때는 이 별채의 모든 금제를 풀고 모든 비밀을 알아내겠다.”
그러더니 그는 두 손으로 결인을 그려 별채를 봉인한 뒤 전송진을 파괴했다. 봉인 후에 전송진까지 파괴했으니 이제 제아무리 혈조라 해도 이곳에 들어올 수는 없을 터였다.
작업을 마친 한제는 고개를 돌려 별채를 둘러보았다. 문에서 이 별채의 혼이 나타났지만 그는 말없이 한제를 바라보기만 했다.
한제는 몸을 돌려 수정을 쥔 채 별채를 떠났다.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곳은 천요군의 연혼 부락 밖이었다.
그가 부락 안으로 들어서자 모든 부족원들은 크게 기뻐하며 바닥에 엎드려 절을 했다.
한제는 부족원들이 모아준 혼백을 가지고 가는 대신 십삼과 구양화를 보탑 안으로 불러 분부를 내리고 술법 몇 가지를 알려 주었다. 심지어 십삼에게는 거마족의 후속 공법까지 알려준 후에야 그곳을 떠났다.
그가 연혼 부족을 떠난 순간, 십삼은 바닥에 엎드려서 한제를 향해 머리를 여러 차례 찧어가며 절을 했다. 구양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눈에는 슬픔이 배어 있었다. 한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번 생에 한제를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것임을 직감했다.
떠나다
천요군 안의 요장 저택.
석소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고 곁에는 진도가 앉아 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의 수준은 약물과 다년간의 치료를 통해 회복된 상태였으며, 이제 문정기 중기에 이르러 있었다. 심지어는 이전보다 조금 더 성장하여 문정기 후기가 멀지 않았다.
잠시 후, 석소가 두 눈을 번쩍 떴다. 그의 눈에서 밝은 빛이 번득였다.
진도 역시 심오한 빛이 담긴 두 눈을 떴다.
“진도 나는 내일 요제 폐하를 뵙고 자네를 요장으로 추천할 거야. 그리고 자네를 용담으로 보내 깨달음을 얻게 할 생각이네. 비록 진정한 유산을 전수받을 수는 없더라도 그곳에서 얻은 깨달음은 자네에게 많은 이득이 될 걸세.”
석소가 덤덤하게 말했다.
진도는 고마운 마음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일부터는 자네를 부수라고 불러야겠군!”
석소는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자리는 1백 년 전부터 내 자리였어야 해! 운려해가 비열한 수단으로 빼앗아갔을 뿐! 그 졸렬한 이한제가 아니었다면 운려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었겠나?”
진도는 석소를 힐끔거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한제는 내 사제라네!”
석소는 눈썹을 치켜 올리며 냉소했다.
“우리 천요군이 화요군과 전쟁 중이었을 때 자네의 그 사제는 어디 있었나? 화요군이 텅 빈 전쟁 후기를 틈타 그자는 나와 동료들의 공로를 앗아갔지! 그것은 나와 동료들에 대한 모욕이었네! 게다가 그자가 실종된 게 벌써 몇 년인가? 어쩌면 지금은 이미 한 줌 흙으로 스러졌을지도 모르지. 자네는 그자를 사제로 기억한다 해도 그자는 자네가 사형이라는 사실조차 진즉 잊었을 걸세.”
진도는 대꾸하지 않았고 석소는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그자를 비열하다 칭한 것도 무리는 아니지. 만약 그자가 아직 살아 있다면 내 손으로 죽이고야 말 걸세. 그리고 그자에게 이 요령의 땅에서 수련자인 자신이 대체 어떤 존재인지 깨닫게 해주겠네!”
그때, 어디선가 냉랭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런가?”
석소는 흠칫 놀랐으나 이내 분노한 표정으로 외쳤다.
“웬 놈이냐? 썩 나오지 못할까?”
그때, 진도가 눈을 번득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새 검은 인영 하나가 하늘에 나타나 있었다. 그는 밝은 달을 등지고 있었기 때문에 윤곽이 흐릿했고 온몸에 전광이 흐르는 모습이 놀라웠다.
“너⋯⋯ 너는… 이한제!”
진도가 그 검은 인영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겁도 없군! 감히 내 저택에 난입하다니. 셋 샐 때까지 꺼지지 않는다면 참할 것이다.”
석소는 냉랭하게 검은 인영을 바라보면서 살기를 번득였다. 그의 수준은 최근 미친 듯이 증폭하여 이미 문정기 초기 수준에 상당한 상태였으며 체내의 요력도 진했다.
한제는 땅에 내려서더니 덤덤한 눈으로 석소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말했다.
“일전에 누군가한테 네놈을 죽여주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다. 오늘, 그 약속을 지키러 왔지.”
석소는 살기등등한 모습으로 잔영을 남기며 달려들었다. 한데 막 결인을 그린 그가 신통력을 발휘하려던 순간, 한제 뒤로 늘어진 그림자에서 무언가가 쑥 빠져나오더니 검은 인영으로 변해 석소를 막아섰다.
진도는 안색이 크게 변해 앞으로 나서려 했다. 허나 그 순간, 석소를 막아선 검은 인영의 날카로운 눈빛을 마주하고는 움찔 멈추었다. 심지어 체내의 원신도 졸아들었다. 걸음을 우뚝 멈춘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음양이의⋯⋯.”
진도는 놀라움을 넘어 충격을 받았다.
그 무렵, 석소는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살기가 남아 있었지만 그의 생기는 이미 모두 파괴된 상태였다.
한제는 몸을 돌려 석소의 저택에서 떠나갔다.
흐드러진 달빛이 바닥에 드리워 마치 걸음걸음 달빛 위를 거니는 듯했고 옷과 머리카락은 춤추듯 나풀거렸다. 그렇게 한제는 천천히 멀어져 갔다.
“스승님을 조심해!”
진도의 귓가에 한제의 목소리가 울렸다. 진도는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한참 동안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요령의 땅에서 처리해야 할 번잡한 일들을 정리한 한제는 조석의 심연 입구에 나타났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보던 한제의 시선이 하늘에 닿았다. 그의 시야는 끝없이 나아가더니 하늘의 경계를 뚫고 동해에 이르렀다.
★ ★ ★
동해 요령의 문 밖에는 이미 천운자와 능천후, 혈조를 비롯한 일고여덟 명의 노인들이 나타난 상태였다.
이들은 능천후가 요령의 문을 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낮게 혀를 찬 천운자는 요령의 문을 바라보면서 미간을 살짝 구겼다.
그들은 요령의 문으로 들어서기로 한 약속을 수십 년 앞당겼는데 그것은 천운자가 10년 넘게 좌선을 하는 도중 심장이 뛰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수만 년 동안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증상이었다.
그 느낌은 요령의 땅 안, 그가 제자로 받아들인 한제의 몸에 남긴 낙인에서 발생했다. 낙인이 억지로 제거되면서 천운자의 심장이 빠르게 뛴 것이다.
제자가 낙인을 제거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주 오래 전, 허은이라는 이름의 제자도 그랬던 적이 있었다.
불안함을 느낀 것은 천운자뿐만이 아니었다. 혈조 역시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의 딸인 요석설로부터 느끼는 불안감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짙어졌다. 이 정도 수준의 수련자가 느끼는 불안함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천운자가 약속을 앞당길 것을 제안했을 때, 가장 먼저 동의한 것 역시 혈조였다. 요석설은 그의 유일한 딸이자 유일한 가족이었다. 딸을 위해서라면 그는 어떤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사실 능천후 역시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검초십이자의 목숨과 연결해둔 등(燈) 중 아홉 개가 이미 꺼진 상태였기 때문이다. 능천후는 내내 분노를 참고 있었다. 요령의 땅에 들어가면 탐랑을 찾아 이 상황에 대해 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세 사람은 자신들을 분노하고 불안하게 만든 것이 모두 한 사람의 소행이라고는 전혀 예상조차 못 하고 있었다.
능천후는 손바닥을 대 요령의 문을 열고 소매를 휘두르며 안으로 들어섰다.
능천후의 손이 닿은 곳은 요령의 회오리였지만 그 영향은 온 요령의 땅으로 퍼져나갔다. 순간, 요령의 땅에 존재하는 아홉 개의 군 모두가 진동했다.
온 요령의 땅에서는 사람들의 비명이 들려왔고 하늘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구름 또한 요동치면서 거대한 회오리를 생성했다.
이 회오리는 굉장히 커서 온 하늘에 끝도 없이 확산돼 나갔고 회오리가 회전함에 따라 줄기줄기 검기가 그 안에서 발산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굉장히 사나운 기세가 그 회오리 안에서 미친 듯이 흘러나왔고 동시에 무지개 같은 일곱 갈래의 빛도 그 회오리 안에서 나타나 사방으로 퍼졌다.
이 순간, 요령의 땅 안에 있던 모든 고요들이 각자의 성지에서 실체화되어 나타나더니 긴장한 얼굴로 하늘을 뒤덮은 회오리를 바라보았다.
배이라 또한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 뒤 소매를 휙 휘둘러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하늘의 회오리 안에서는 이윽고 여러 사람이 걸어 나왔다.
그중 푸른 옷을 입은 능천후가 허공에서 땅을 내려다보더니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