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195
196. 막내가 너무 강함 (2)
***
바닷바람이 민준의 얼굴을 간지럽힌다. 그늘 한 점 없는 망망대해에는 강렬한 햇살이 쏟아졌다. 데워진 바닷물 위에 아지랑이가 끓고, 사제와 드래곤의 윤곽이 쉴 새 없이 흔들렸다. 두 사람과 민준의 눈이 마주쳤다.
그 둘을 본 민준은 위화감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명상 비슷한 상태에 빠져 있었고, 의식의 방향을 오로지 내면에 집중하다가 빠져나왔기 때문이다. 현실과 내적세계가 혼동될 만도 했다. 방금 전까지 본 것이 현실이고 지금 주변의 환경이 꿈 같았다.
이런 느낌이 들 정도로 오래 빠져 있던 그 작업의 목적은 아드키엘을 관찰하는 것이었다.
슈탄의 세계에서 도약하기 직전, 그림자 괴물이 그의 정신에 끼친 영향은 가벼이 볼 수 없었다.
‘또 비슷한 일이 없으리라 장담 못 해.’
민준은 자신을 채운 괴물, 개중에서도 가장 오랫동안 존재한 부분이 어떤 상태인지를 파악하려고 했다.
하지만 명확한 자의식을 가지고 행동한 그때와 달리, 지금 아드키엘은 잠잠하기만 했다. 명령에 복종하고, 맹렬한 적의를 민준이 지정하는 대상에게 쉽게 전이시키는 괴물에 불과한 것이다.
결국 작업을 포기하려던 참에 바깥세상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
눈을 뜬 민준은 그게 용의 목소리임을 시간 차를 두고 깨달았다.
하은성이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주변을 쭉 돌고 왔는데 드래곤 레어 같은 건 못 찾았어요.”
“그래?”
오늘 유체이탈이 가능한 시간을 한계까지 써 버렸다는 말을 듣고, 민준은 생각에 빠진다. 그런 채권자를 보는 하은성은 뒤죽박죽 섞인 거리감을 느꼈다.
직전 차원에서 목격한 장면이 눈에 선했다. 말 그대로 신에 필적할 만한 힘. 저 사내는 사람이라기보다 초월적인 존재에 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도약 직후 민준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묘하게 권태롭고, 딱딱하고, 희로애락을 가늠할 수 없는 얼굴.
하은성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저 요원이 웃는 걸 지금까지 한 번도 못 본 것 같다. 지구에서도.
그때 결론을 내린 듯 민준이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앉아 있던 ‘청회색 바닥’에서 무릎을 세우고 일어섰다. 디딘 땅은 고무처럼 신축성 있게 꿈틀거렸다.
“나도 이쪽 차원은 와 본 적 없어서 곤란하군. 여기에 대해 아는 건··· 용이 꽤 많이 산다는 것뿐이야.”
“그럼 회수해야 할 그 파편이나 보물 같은 게 여기는 없다는 말씀이세요?”
“없어.”
“그럼 왜 굳이 여기로···?”
“말했잖아. 용이 꽤 많이 산다니까.”
“······?
여긴 잠깐 ‘찍고 가는’ 차원이라며, 변함없는 무표정으로 대꾸했지만 하은성은 이해할 수 없었다.
오자 마자 드래곤 레어를 찾으라는 지시는 왜 한 걸까?
“지구에서는 레어 위치를 전부 꿰뚫고 있었으니 염탐이 쉬웠지. 하지만 원래 용의 둥지는 외부에서 볼 때 분간이 쉽지 않아. 더군다나 너는 영체 상태로 돌아다녔잖아? 방법을 바꾸자.”
“어떻게요?”
“드래곤은 기본적으로 영역 동물이지. 놈들은 레어에서 제법 먼 곳까지 결계를 쳐 두고 누가 접근하는지 파악해. 너, 이번엔 영체 상태가 아니라, 드래곤 상태로 돌아다녀 봐.”
“미끼가 되라구요?”
“그래. 네가 찾아낼 수 없다면 놈들이 널 찾아내게 하는 게 좋겠지. 낯선 용이 영역 근처를 돌아다니면 놈들도 반응을 보일 거다.”
하은성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사냥개와 자가용(龍)에 이어 이번에는 낚싯바늘에 꼬인 지렁이 신세다. 점차 진화하는 건지 퇴화하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 와중에도 호기심은 버리지 못하고 묻는다.
“그런데 용은 왜 찾으시는 거예요?”
민준은 대답 없이 딛고 선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사제와 드래곤의 시선도 자연스레 따라갔다.
그들은 지금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다. 하지만 선박 따위에 탄 건 아니다. 애초에 챙겨 오지도 않았고.
어젯밤, 이곳 바다에는 반경 6km에 달하는 섬이 새로이 생겨났다. 스물여섯 가닥의 뾰족한 가시가 돋은 형태의, 토양과 암석 대신 살점과 피로 구성된 섬이었다.
델은 그들을 데리고 차원 도약에 성공했고, 이번에는 폴리모프를 시도도 못 한 채 그대로 뻗었다.
그리고 기절한 채 지금까지 바닷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이다.
‘델···.’
민준의 눈이 수심에 물들었다.
전처는 생명력을 급속하게 잃고 있었다. 몸이 회복되기 전 또 한 번 차원을 뛰어넘었고, 그 과정에 가해진 압력은 상태를 악화시켰다.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윰투스의 손을 빌린 회복에는 한계가 있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날것의 생생한 생명력을 공급하는 것.
그리고 민준은 가장 풍부한 생명력을 담은 물질이 뭔지 알았다.
‘용혈.’
하지만 과거의 품종 개량 때문에 용혈은 대다수 종족에게 맹독으로 작용한다. 엔델리온도 마찬가지. 그러므로 델에게 그대로 먹일 수는 없다.
그렇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델을 위해서도 민준 자신을 위해서도, 지금은 용이 필요했다.
‘대답해 주기 싫은 건가?’
하은성은 아직 모른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교하여 민준의 식습관이 바뀐 사실을.
그에게 답해 주는 대신 민준은 윰투스에게 눈짓했다. 사제는 항상 가지고 다니는 관 중 하나를 앞으로 내밀었다. 저것 중에 몇 개가 채워져 있고 몇 개가 비어 있는지도 하은성은 몰랐다. 다만 슈탄들의 차원에서 귤레쉬를 저기에 담아 옮긴 걸 보면 용도는 확실했다. 일종의 생명 유지 장치다.
이어서 윰투스가 관 뚜껑을 연 순간, 하은성은 기겁했다.
“커컥!”
저 사람은!
“레이먼드 웡?!”
저 고룡을 몰라볼 수는 없었다. 홍콩에 있는 그의 저택에 한동안 숨어 살았으니까. 그런데, 듣기로 저 드래곤은 홍콩 정재계를 휘잡은 비선 실세라고 했는데? 홍콩의 실질적 지배자를 지금까지 관짝 속에 구겨 넣은 채 데리고 다녔단 말인가?!
하은성은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저 사람, 실종되면 지구에서 난리 나는 거 아니에요?”
난리가 나 봤자 자신의 탈옥이 남긴 여파만 할까? 차원계 범주에서 판단하면 말이다.
그리 생각하며, 민준은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렸다.
“갑작스러운 동면기 때문에 레어에 틀어박힌 걸로 처리해 뒀다. 모든 의사결정과 선거권, 피선거권까지 젠킨슨에게 위임한 채로.”
인간으로 폴리모프란 레이먼드는 묘하게 혈색이 창백한 얼굴로 눈을 떴다. 민준은 그의 생명력 또한 바닥까지 떨어진 걸 보았다 그동안 영양 보충을 저 고룡에게만 의존한 결과였다.
“육지는 저쪽이라는군. 가서 배 좀 채우고 와. 혹시 다른 용이 나타나면 내게 알리고.”
“알겠습니다.”
그는 뇌룡으로 변신해 날아올랐다. 비행하면서도 힘이 빠진 채 비틀거린다. 고룡의 위엄과 기백이 온데간데없는 뒷모습에서 하은성은 좀처럼 눈을 뗄 수 없었다.
“밥 먹이는 동시에 미끼 짓도 시키는 건가요?”
“그래. 너는 레이먼드랑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 돼.”
하은성은 자포자기한 채 목을 낮춘다. 그리고 기다렸다.
“······?”
어색한 정적이 흐른 후, 민준이 물었다.
“···너 뭐 하냐?”
“···안 타세요?”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왜 타? 난 다른 방향으로 갈 테니까 각자 따로 움직이자고. 동선이 겹치면 비효율적이고, 널 탔다간 비행 속도만 느려지잖아.”
머쓱해진 하은성은 날개를 펴곤 날아올랐다. 그리곤 방금 전 자신이 품은 생각에 의아함을 느꼈다.
왜 낯설고도 먼 땅에 갈 때 혼자 움직이는 대신 주인··· 아니, 채권자를 태우고 가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은성은 미끼 짓에 충실하기 위해 육지를 향해 활공했다.
***
하은성은 방금 전 유령 상태로 움직였던 경로를 용의 몸으로 비행했다.
그렇게 한참을 나아가던 중.
파직!
유령 상태에서는 못 느꼈던 미묘한 감각이 용의 신경을 건드린다. 그는 방금 전 결계를 구성하는 마법적인 ‘선(線)’을 건드렸음을 직감했다.
이것이 민준이 말한, 불청객을 감지하는 더듬이인가?
그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정신파가 들려왔다.
=너!=
하은성은 잔뜩 긴장했다. 외계에서 낯선 용과 처음 조우하는 것이다. 그는 천천히 속도를 늦추면서, 이곳을 근거지로 삼았을 드래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그 순간 바로 민준을 부를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설마, 여기서?=
그를 관찰하듯 짧은 침묵이 흐른 뒤.
=뭐야, 진짜 맞잖아. 야, 너 막내 아니냐?=
‘으잉?’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그제서야 하은성은 뇌리를 두드린 정신파가 항의나 경고와는 좀 다른 결이었음을 깨달았다. 적어도 정체불명의 행인을 불러 세우는 어투는 아니었다.
=잠깐 기다려. 지금 바로 거기로 갈 테니!=
‘······?!’
그는 얼어붙은 채 그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지평선 너머로 한 마리의 드래곤이 날쌔게 날아오는 것이 보였다.
하은성은 처음에는 자신이 거울을 보고 있나 싶었다.
비늘 색과 뿔의 길이, 피막이 그리는 모양, 기묘하게 뒤틀린 뿔의 모양까지.
‘닮았어!’
그가 빙의 중인 이 몸.
창천이라는 고룡이 외계에서 납치해 온 것으로 추정되며, 젠킨슨이 노력했음에도 정체를 알아내지 못한 이름 모를 드래곤.
영혼이 기력을 되찾기는커녕 계속 깊은 잠에 빠져 있어서, 하은성이 아무런 거부 반응 없이 마치 진짜 자기 것처럼 쓰고 있는 육신.
지금 날아오는 드래곤은 이 몸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맙소사, 설마?!’
바람을 찢으며 다가오던 드래곤은 하은성 앞에서 멈춰섰다. 그 몸집을 본 유령은 상대가 몸 주인과 비슷한 백 살 내외의 어린 나이임을 파악했다. 민준이 찾으려는 덩치 큰 고룡 기준의 근처에도 가지 못한다.
하은성이 고민하는 사이 용이 반갑게 외쳤다.
=너, 지금까지 대체 어디 있던 거야?=
용의 타고난 권능에 의존하여 하은성도 정신파로 답했다. 일단 대충 둘러대기로 한다.
=아, 좀, 사정이 있어서.=
드래곤은 이 몸 주인을 아는 게 분명했다. 아니, 그냥 면식이 있는 수준이 아니겠지. 생김새를 보면 가까운 혈족이다. 하은성은 극도의 긴장을 느꼈다. 아니, 하필이면 여기서!
=대체 무슨 사정이길래 레어도 방치하고 사라져 버린 거냐?=
=일이 좀··· 있었어.=
=일은 무슨 일. 외계에는 놀러 갔던 거였잖아. 우리끼리 무슨 이야기를 한 줄 알아? 혹시 고대 종족한테 납치당한 게 아니냐는 가설까지 나왔다. 종전 후 최초의 드래곤 납치 사건이 아닌가 싶었지.=
그렇게 떠들어 대는 정신파에는 흥분과 기대감이 깃들긴 했지만 딱히 걱정했다는 느낌은 없었다.
이런 부분을 보면 확실히 드래곤은 드래곤이다.
=우리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내려가서 이야기하자. 근처에 내 레어가 있으니까.=
그건 안 될 일이다. 꼬리가 길어지면 들통이 날 수밖에 없다. 당장 하은성은 상대를 어떻게 호칭해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내가 지금 좀 바빠서···.=
=무슨 소리야. 아무리 바빠도 몇십 년 만에 만난 형님이랑 잠깐 이야기할 시간도 없냐?!=
형이었군.
한 가지 의문은 해결되었다.
하지만 더더욱 그와 길게 엮여서는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핑계를 찾는 머릿속은 더 복잡해진다. 민준이 찾으라고 한 용의 조건에 맞지는 않았지만 이 사태를 홀로 처리할 자신도 없었다. 그는 조용히 채권자가 준 아티팩트를 발동시켰다.
그 순간.
=······.=
이제 하은성도 드래곤 표정 정도는 읽을 수 있다.
그는 찰나, 눈 앞의 이름 모를 용 얼굴에 스치는 차가운 미소를 보았다.
=아무튼, 눈치는 빨라가지고.=
=······?!=
=오랜만에 만난 형님한테 선물 하나 안겨주고 가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이야? 얼굴 보자 마자 도망칠 궁리나 하고 말이지.=
순식간에 바뀐 분위기.
그 전까지 반갑게 떠들어 대던 태도가 달라졌다. 하은성은 천천히 거리를 벌리며 당장이라도 도망갈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 조심스레 물었다.
=···선물이라니?=
=뭐긴 뭐겠어.=
드래곤은 이제 목적을 숨기지 않는다. 눈빛은 혈육을 바라보는 것이라기보다는 먹잇감을 향한 그것에 가까웠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댄다. 두 눈에는 희열과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번갈아 번뜩였다.
사냥 준비를 마친 용은 단호한 의념을 발산하며 달려들었다.
그걸 들은 순간, 하은성은 위원회가 수형자 외 일반인에게도 특별한 조건을 만족시키면 대가를 지불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오랜 시간 잊었던 드래곤 혐오가 다시 들끓어 오르는 것도 느꼈다.
=당연히, 네 목에 걸린 100만 달란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