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04
205. 마음의 발명(The Invention of Heart) (2)
***
“이 큐브가 엔델리온의 발명품인 건 본 순간 바로 알았어.”
민준이 뉴욕의 사설 금고에서 손에 넣은 아티팩트.
드래곤 로드가 남긴 이 큐브를 노리고 로드의 자식들이 습격해 오기도 했다. 그런 귀찮음과 번거로움까지 겪었던 게 무색하게도, 민준은 아직 이 안에 든 게 무엇인지도 모른다.
왜냐면.
“구조를 보니 로드가 죽고 100일 후 저절로 열리게 설계되었더군. 억지로 개봉하려고 하면 내용물이 흔적도 없이 소멸하게 되어 있어. 안을 투시하려고 해도 관찰 행위 자체가 내용물에 영향을 끼치는 구조라 불가능해. 이런 교묘한 장치를 만들 수 있는 건 ‘너희들’ 중에는 엔델리온 밖에 없지. 드래곤은 못 해.”
민준이 마지막 문장에서 말한 ‘너희들’은 고대 종족보다는 넓은 의미 같았다.
델은 추측한다. 아마 태초의 종족을 제외한 모두를 지칭하여 ‘너희들’로 부른 게 아닐까?
그만큼, 민준이 그 단어에 담은 거리감은 깊었다.
“다른 드래곤이면 몰라도 로드니까 이상할 건 없었지. 애초에 엔델리온의 발명품에 관심이 지극했으니. 이런 거 하나쯤 소장하고 있을 법도 해. 그냥 그렇게 넘겼어. 그런데, 내가 기억을 되찾고 나니 안 보이던 게 보이더군. 이 큐브의 설계에서 익숙한 흔적이 느껴졌어. 네가 준 그 ‘오리할콘 후라이팬’과 매우 흡사한 설계자의 지문이.”
그녀는 순순히 시인했다.
“그 큐브는 내가 만들어서 로드에게 준 거야.”
민준의 짐작이 맞았다.
드래곤 로드와 델 사이에는 짧은 시간이나마 남들 예상 이상의 교류가 오간 것이 분명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유언장에서 하필 너를 시신 관리인으로 지정한 것도 이상했어. 로드는 위원회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려는 강경파였지. 그런데 엔델리온에게 자기 몸을 맡긴다? 뭘 믿고?”
“로드는 날 신뢰한다고 했어.”
“어째서?”
델은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그는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내가 왜 한때 수형자가 되었는지. 내가 200년 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민준은 눈썹을 꿈틀거렸다.
델이 노동교화형에 처해졌던 200년 전은 민준이 한창 수형자로 구르던 시기다. 당연히 고대 종족들 사이 벌어지는 일을 파악할 정보력 같은 것은 없었고, 델의 죄목도 여태 모른다. 퇴직금이 50만 달란트 넘게 책정되었으니 꽤나 큰 중죄라고 짐작할 뿐.
“네 죄가 뭔지 알기에 믿을 수 있다고?”
“그래, 그렇게 말했어.”
델은 얼마 전 지구에서의 일을 떠올린다.
***
델의 부임을 기리는 축하연이 열린 날이었다.
엔델리온의 공주는 지구에 도착하자마자 민준부터 찾아가 인사를 하고, 그에게 후라이팬을 무기로 쓰는 독특한 취향이 생긴 것을 확인한 뒤, 그에게 줄 선물을 머릿속으로 설계하며 뉴욕으로 돌아왔다.
연회장에 모인 이들 중 절반가량은 고룡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드래곤 로드가 단독 비공식 면담을 요청했다. 델은 당연히 수락했다. 어차피 위원회가 그녀를 일종의 외교관 자리에 앉히며 맡긴 임무가 이런 것이었으니까. 각오를 단단히 한 채 그를 맞았다.
그런데, 듣는 귀가 없는 곳에서 치열한 기싸움이 벌어질 것이라고 으레 짐작한 것과 달리 로드의 태도는 매우 부드럽고 신사적이었다. 위원회를 증오하는 강경파라는 소문과는 영 딴판으로.
심지어 그 자리에서, 로드는 뜬금없이 사적인 거래를 제안하기까지 했다.
“엔델리온은 뭐든 만들어 낼 수 있다지요. 당신들 발명품이 얼마나 대단한지 압니다. 다른 드래곤들은 필사적으로 외면하며 부인하지만, 나는 아니에요. 그래서 말인데, 나와 거래 하나 하지 않겠습니까? 제작을 의뢰하고 싶은 물건이 있습니다.”
델은 당황했다.
“정말 이런 이야기 하자고 부른 거예요? 사적인 거래?”
“네. 각각 지구의 드래곤 로드직과 위원회 대표소 수장직을 내려놓고, 개인 대 개인으로 거래하자는 겁니다.”
이렇게 되묻는 것이 바보같이 들릴 걸 알면서도, 델은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날 어떻게 믿고요? 당신은 위원회를···.”
언젠가 싸워야 할 잠재적 적군으로 생각한다.
생략한 문장을 짐작한 듯, 촉수 앞에서 드래곤은 미소지었다.
“맞습니다. 위원회는 평화 속에서 위장 동거 중인 드래곤의 적이지요. 나의 신념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위원회는 언젠가 우리에게 다시 칼날을 들이밀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정치 조직과 체계에 속한 모든 개인에게 증오를 불태울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내겐 그럴 여유도 에너지도 부족합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일은 무척 많은 힘을 필요로 하니까요.”
개인과 집단을 분리하여 판단하고, 분노와 증오를 주의 깊게 분배하겠다는 이상론적인 소리였지만, 이상주의자인 델조차 선뜻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이어진 말을 통해 상대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당신이 2백 년 전 한 일을 짐작하고 있습니다.”
“······.”
그 문장을 달리 곡해하여 이해할 여지는 없었다.
엔델리온의 공주가 어떤 죄를 범하고 노동교화형에 처해졌는지 짐작한다는 이야기였다.
한 차원의 드래곤 로드가 되면 차원계 중심부를 오갈 일이 많다. 그 과정에서 소문을 들었으리라.
다른 드래곤 같으면 일절 관심을 두지 않을 일인데, 저 드래곤은 깊은 흥미를 가지고 정보를 수집한 것이다.
“당신의 죄목은.”
드래곤이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50만 달란트.
민준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거금이 책정된 그녀의 범죄는···.
“주거 침입 및 기물 파손.”
“······.”
“맞습니까?”
사실 저 죄목은 한 종족의 공주가 저지르기에는 지나치게 품위 없는 동시에, 50만 달란트가 산정되기에는 지나치게 가벼운 죄로 들렸다.
그럼에도 델은 침묵으로 긍정했다.
주거 침입 및 기물 파손. 그 간단한 설명 뒤 숨겨진 진실을 드래곤은 파악했다.
“고대 종족들 수명이 지금처럼 연장된 비결이 보관된 장소. 그곳에 침입해서 설비를 부수다 들켰다지요?”
델은 자신이 했던 일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단지, 그 행동이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한 부분이 부끄러웠다. 그리고 형기를 끝낸 지금, 과거를 뉘우치고 반성하는 듯 연기하여 위원회의 자리를 따낸 현실이 부끄러웠다.
그렇기에, 그녀는 촉수 더미 중앙에 위치한 눈동자를 살짝 돌려 시선을 빗겨 냈다.
동시에 속으로 중얼거린다.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었어. 더이상 이런 추악한 방식으로 영생을 이어 나가서는 안 된다고. 이렇게까지 해서 영원에 가깝게 살아가는 것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애초에 그녀 혼자 힘으로 그 ‘육신 공장’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대신에 알리고 싶었다.
대다수 고대 종족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상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관념적으로 이해한다.
그 이해 속에서, 몸을 갈아탈 타이밍이 오면 공장에서는 미리 시뮬레이션한 대로 최적의 시기에 최적의 상태로 ‘새 몸’을 출하한다. 거기서 그 몸이 어떤 식으로 태어나 어떻게 자라는지, 노인들이 몸을 빼앗은 뒤 본래 존재하던 젊은이의 영혼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어쨌거나 새 몸은 이미 영혼이 소거된 채, 잘 손질되고 포장된 채 그들 앞에 배달되기 때문이다.
델은 그 안의 실상을 알리고 싶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적지 않게 놀랐습니다. 사실, 드래곤과 엔델리온에게는 닮은 점이 있지요.”
한 차원의 용족을 대표하는 남자는, 양쪽 종족 모두가 미친 듯이 분개할 이야기를 서슴없이 꺼냈다.
“둘 다 답이 안 나오는 지독한 자기애, 종족애에 매몰되어 있어요. 자신들의 것을 지키기 위해서 뭐든 합니다. 용의 경우에는 권력과 재산을, 엔델리온은 생명과 안전을 위해. 그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다른 존재를 크게 신경쓰지 않지요. 당신이 파괴를 시도한 시설 안 사람들은 고대 종족에게 사람 취급을 못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은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점이 나와 닮았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며 드래곤은 웃었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비록 대표하는 진영은 다르지만 말입니다.”
***
“길게 알지는 못했지만, 정말 특이한 드래곤이었지. 그 사람은.”
민준은 묵묵히 동의한다. 둘은 잠시 고인이 된 드래곤에 대한 추억에 잠겼다.
“로드가 내게 그 큐브를 만들어 달라고 했어. 사실, 그 휴대용 결계에는 당신이 파악한 것 말고도 기능이 하나 더 있어. 그게 뭐냐면···.”
이어진 설명을 들은 민준은, 그제서야 큐브의 기능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상반된 가능성을 중첩 상태로 유지한다고?”
“그래. 이 큐브를 어떤 물건에 겨냥해서 가동한 순간 표적은 2개의 복제로 분열돼.”
플라나리아 같은 생물의 분열과는 다르다. 완벽히 동일하게 보이는 두 개의 복제품이 생기는 것이다.
쉽게 설명하면 그렇지만, 사실은 하나의 개체가 상반된 두 장소에 존재하는 확률을 중첩시키는 것이라고 델은 설명했다.
“그렇게 분열된 두 개 중 하나는 큐브 밖의 원래 있던 장소에 남고, 나머지 하나는 큐브 안에 봉인되지.”
1개의 원본과 1개의 복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원본은 사라지고, 2개의 복제만 남는다.
그런데 복제는 둘 다 진짜이기도 하고, 동시에 둘 다 가짜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둘 다 존재와 부재(不在) 사이 경계에 있다.
그리고 이런 애매한 상태는 누군가 개입하기 전까지 유지된다.
드래곤 로드가 제시한 그 개입의 조건은 ‘파괴’였다.
“큐브 밖에 있는 것과, 큐브 안에 있는 것 중 어떤 게 진짜인지는 누군가 개입하기 전까지 확정되지 않아. 예를 들어 큐브 밖에 있는 것이 누군가에 의해 파손되거나 손실되면 비로소 그게 진짜가 돼. 비록 형태가 변하거나 줄어들었더라도 일단 실존 상태를 획득하는 거야. 반면 큐브 안에 있던 것은 실존성을 상실하고 사라지지. 반대로 큐브 안에 있는 것이 파손되거나 손실되면 그게 진짜가 돼. 그리고 큐브 밖에 있는 것은 사라져.”
망가뜨려야 진짜가 된다.
혹은, 망가져야 진짜가 된다.
민준은 생각에 잠겼다.
“왜 이런 복잡한 물건을 만들어 달라고 한 거지?”
“나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어. 하지만 드래곤 로드가 죽고 난 뒤 사건들을 관찰하니 짐작이 가더라고. ‘대상이 파손되거나 손실되는 순간 진짜가 된다.’ 그 물건이 부서지거나 일부를 상실해도 가치가 남는 물건이니 그런 조건을 달았겠지.”
델이 이미 짐작했던 것을 민준이 따라잡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큐브는 로드가 죽고 100일 후 자동으로 열리게 설정되어 있었어. 유언에도 비슷한 것이 언급되어 있지. 그가 죽고 나서 100일 후 소유권자가 결정되는 ‘그것’ 말이야.”
그런 것은, 하나밖에 생각해 낼 수 없었다.
“드래곤 하트.”
용의 심장.
정확히는 그 내부에 결착된 고농축, 고밀도의 결정.
기계 장치와는 달리 그것이 쪼개지거나 누군가에게 흡수된 상태로 실존성을 얻는다고 해도, 그 본연의 가치가 훼손되지는 않을 터.
“로드의 시신을 검사한 드래곤은 드래곤 하트가 고스란히 안에 남아 있다고 장담했지.”
만약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면 엄청난 난리가 벌어졌을 것이다.
“추측이 사실이라면, 드래곤 로드는 자신의 심장을 용이 아니라 당신에게 넘기고 싶었던 것 같아. 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죽은 직후가 아니라, 100일이 흐른 뒤에 넘기고 싶어 했어.”
100일이 지날 때까지, 시신 안에 있는 복제품도 큐브 안에 있는 복제품도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안배를 남긴 것이다.
하지만 이 안에 있는 것이 드래곤 하트가 맞다고 해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물론, 그렇게까지 해야 할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민준은 머릿속에 혼란스러운 상념이 들끓는 것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마치 미래를 내다본 한 수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의도를 모르는 상태에서도 그렇게 느껴졌다.
‘하지만 로드에게는 예지 능력이 없는데. 그런 능력이 있었으면 전쟁 때 마음껏 써먹느라 숨기지도 못했을 터고.’
예언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민준은 유언장 내용을 되뇌었다.
-드래곤 하트의 소유권은 차기 드래곤 로드에게 이전된다.
또한, 최선아가 마지막으로 전달한 예언의 내용 또한 떠올렸다.
-나를 인도하소서. 바른길로 나아가게 하소서. 나의 주인이여, 영원히 찬송받으소서. 아득한 시간을 초월하여 이곳에 돌아오신 나의 주(主, Lord)여!
그녀의 예언 속 민준은 분명, 용은 아니되 드래곤 로드였다.
그런데 죽은 로드는, 민준이 차기 로드가 된다는 예언에 대해 알 턱이 없었다. 모순이다.
다시 한번 그의 귓가에, 환청처럼 유언의 내용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걸 심술이라고 생각하지 말게나. 일단 안에 든 것부터 확인하는 게 좋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