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34
235.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4)
***
위원회의 달란트 채굴 기지.
카바이트 두 명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현재 출력은 어떻게 되나?”
“평상시 오퍼레이션 대비 35%까지 낮췄습니다. 혈관 하류는 공백 없이 달란트로 채워진 상태이며, 상류도 수위가 한계 가까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위원 지시에 따라 채굴기 출력을 서서히 낮추고 있었다. 갑자기 멈출 시의 반동을 방지하는 조치였다.
터널형 차원에서 달란트를 뽑아내던 인공행성, 채굴기가 속도를 늦추는 진도에 따라, 채굴량은 줄어들고 차원 내부의 수위는 높아졌다.
“그런데.”
상황을 보고하던 부하가 의문을 표한다.
“조폐국 창설 이래, 채굴기는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지 않습니까? 출혈을 그대로 두고 지금처럼 분출구를 막아버리면··· 혈관이 터져버리지는 않겠습니까? 저 터널형 차원은 모든 차원을 관통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는 엘라후-프라가가 관통한 임의의 차원에 균열이 생기며, 천문학적인 달란트가 온천수처럼 터져 나오는 사태를 염려했다.
“그럼 측량 불가능한 대량의 달란트가 증발해버리는 참사가···.”
그 말을 들은 조폐국장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게드웍이라는 작자와 똑같은 소리를 하는군.’
어찌 보면 당연하게 떠올릴 질문이었다. 조폐국을 총괄하는 카바이트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며 부하를 안심시켰다.
“걱정 말게. 저 차원은 그런 상황까지 감안하여 설계된 것으로 보이네.”
추측하는 말투였지만, 조폐국장은 자신의 말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단지 부하 앞에서 그 확신을 내보일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뿐이다.
부하는 다시 기기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해소되지 못한 의문을 말한다.
“참 희한합니다. 태초의 종족은··· 애초에 저 차원을 왜 저런 기괴한 형태로 설계한 것일까요? 순환하지 않는 순환계라니요. 심장도 있고 그것과 연결된 혈관도 있는데, 그 혈관이 다시 심장으로 이어지지 않고 중간에 끊어지다니 말입니다.”
조폐국장은 기묘한 어감이 남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글쎄, 그 이유는 그걸 설계한 자들만이 알겠지.”
***
알렉스트는 인내심의 한계를 느꼈다.
=이런, 맙소사. 신이시여!=
그는 혈관의 천장까지 영체를 바짝 붙이며 부유했다. 그의 발치에는 닿을락 말락한 단계까지 차오른 달란트가 물살을 넘실거렸다.
빛가루 같은 물보라가 금방이라도 그를 삼킬 듯 위협한다.
=대체 얼마나 높이 차오를 참이냐! 오, 신이시여. 갑자기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어찌하여 이런 재앙이!=
신혈의 강 수위가 높아졌다고 느낀 건 착각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 사실을 알아차린 뒤 변화 속도는 급격하게 빨라졌다. 알렉스트가 신수와 함께 처음 엘라후-프라가에 진입했던 지점은 이미 신혈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알렉스트는 안간힘을 쓰며 터널의 천장, 차원벽을 두드렸다. 혹시라도 이걸 뚫고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에게는 하은성 같은 기괴한 능력이 없었다. 투명한 결계도 뚫지 못하는 그가 차원 경계를 관통하는 건 역시나 불가능했다.
=이대로 있으면 끝장이다.=
하류로 내려갈수록 수위는 높아지고 상류는 벽으로 막혀있다.
그야말로 사면초가.
=저 물살에 휩쓸리면··· 아니, 이젠 물살이라고도 할 수 없군. 그냥 잠겨버리는 거야!=
이어질 상황은 뻔했다.
자아의 붕괴.
=신이시여! 저를 구원하소서. 태초의 종족이여!=
그때, 만물의 섭리가 알렉스트에게 미소를 지은 듯했다.
위잉!
=아앗!=
절망에 일그러졌던 영체의 얼굴이 다시 활짝 피었다.
=오! 신이시여, 감사하나이다. 제가 아직 당신에게 쓸모 있는 존재임을 알려주심에 감복합니다!=
성직자 앞에 나타난 것은 처음 성역에 들어올 때 통과한 검은 균열이었다.
문은 알렉스트의 위치에 맞춘 듯했다. 달란트에 닿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아슬아슬하게, 천장 가까이 열려 있었다.
알렉스트는 다시 투명한 벽 너머를 본다.
=신수여, 미안하오. 나는 더이상 견딜 도리가 없구려. 아마 신께서 당신 역시 구원해 주시겠지. 나는 먼저 돌아가겠소.=
읊조림은 생각의 속도로 이어졌고, 알렉스트의 다음 행동 역시 무척이나 빨랐다.
=······!=
주교는 망설임 없이 몸을 날린다. 검은 구멍이 그의 영체를 삼키더니, 바로 아가리를 다물며 사라졌다.
달란트의 격류가 그 자리를 덮친 것은 직후였다. 터널을 채우며 하류부터 올라오던 신혈의 강은 투명벽을 넘는다. 그리고 그전까지 흐르던 방향을 거슬러 계속 역류했다.
***
하은성은 정신적 비명을 지르고 싶은 기분을 참았다.
그 안에 숨은 목소리는 더이상 정신파라고 부르기도 힘든 기괴한 진동을 사방에 떨치고 있었다. 유령은 그로부터 선명한 광기를 느꼈다.
화르륵!
그의 몸 곳곳에서 미세한 검은 점 같은 것이 두드러졌다. 그것들은 먼지보다 작은 알갱이였지만 검은 불꽃에 휩싸여 타오른 덕분에 겨우 인지할 수 있었다.
하은성은 저 입자들이 자기 안에 숨어 여기까지 따라온 ‘부스러기’의 정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구성하는 근원이, 근본이 되는 소재가 낯설지 않았다.
영체와 물질의 경계에 선 무언가. 하지만 찬란하게 빛나는 달란트와는 달리 모든 빛을 잡아먹는 어둠을 닮았다.
=그림자 괴물!=
그것은 민준이 최근까지도 수족처럼 부리던 괴물의 미세한 파편 같은 것이었다.
=대체 언제 내게 들러붙은 거야?!=
하은성이 알 턱이 없지만, 그의 몸속에 숨은 부스러기는 한때 ‘아드키엘’이라고 불리던 존재의 일부였다. 그림자 괴물에게도 이름이 있었던 것이다.
아드키엘이 자신의 일부를 민준의 몸 밖으로 내보낸 것은, 그의 정신이 아시프-1의 파편을 회수하는 데에 쏠렸을 때였다.
당시 사제들과 하은성의 영체가 몸 밖으로 튀어나와 흔들렸던 것처럼 그림자 괴물의 구속 역시 잠시나마 느슨해졌다. 모든 여력을 아시프-1 소환에 쏟아붓느라 민준의 통제도 약해진 그 틈을, 아드키엘은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오랜 시간에 걸쳐 회복한 이지를 모아, 그림자 자락을 잘라내 물방울처럼 튕겨냈다. 분리된 조각은 민준이 만든 빛기둥 표면을 따라 회전하며 부유했다. 하지만 너무도 불안정한 상태였기에 방치하면 대기 속에서 스러질 위기였다.
그때 아드키엘이 노린 것은 빛기둥을 따라 함께 회전하던 아시프-1의 파편들이었다.
그녀는 그중에서도, 혼자서는 또렷한 자아를 유지하지 못하는 부스러기에 주목했다.
결국 아드키엘의 자기소개에는 진실과 거짓이 섞여 있었던 셈이다. 아시프-1의 부스러기와 결합한 아드키엘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일부는 완벽에 가깝게 재조립된 아시프-1과 합류하여 거짓 기억을 심었고 또 일부는 영체가 몸에서 떨어졌다 붙었다를 반복하던 하은성 속에 숨었다.
이 모든 게 빛기둥이 유지되던 반나절 남짓한 시간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크윽!=
섬뜩한 정신파가 하은성의 정신에 몰아쳤다. 적의와 증오의 폭풍이었다. 목표는 하은성의 자아를 사로잡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유령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영체에 붙은 그림자는 아시프-1처럼 효과적인 세뇌를 펼칠 수 없는 듯했다. 그러니 지금까지 숨어서 목소리로 홀리고 거짓으로 유혹하는 우회적인 방법을 썼을 것이다.
– 참, 너도 질기구나. 의미 없는 고집이야.
목소리는 꺄륵거리며 하은성을 압박했다.
– 자, 내 말을 들어. 저들이 다시는 깨지 못하도록··· 다 망가뜨려 버리자고!
하은성은 악을 썼다.
=내가 왜? 내가 미쳤어?!=
하은성은 생각했다. 돌아가야 한다. 이 미친 그림자한테 속아 여기까지 왔지만, 진실을 안 이상 계속 이용당할 생각은 없었다.
알렉스트와 합류한 뒤 엘라후-프라가에서 탈출하자!
그는 단호하게, 근원과 혈관을 잇는 통로를 향해 뛰어들었다. 둥근 가장자리를 따라 신혈이 흘러내렸지만 영체가 달란트에 닿지 않고 통과할 공간은 남아 있었다.
혈관에 뛰어든 하은성은 지금까지 지나온 통로를 거슬러서 날아갔다. 투명한 결계가 있던 방향으로.
그리고 잠시 후.
=이런, 젠장!=
구멍에서 하은청의 영체가 도로 쑥 튀어 오른다.
유령은 결국 욕을 뱉으며 근원의 입구로 돌아왔다. 속이 텅 빈 행성과도 같은 거대한 공간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영체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는 알렉스트와 헤어진 장소까지 나아가지도 못했다.
영문은 모르겠지만 하류로부터 달란트가 범람하며 차오르고 있었다. 100만 달란트까지도 흡수해 본 경력이 있는 하은성이었으나 터널을 채우며 끓어오르는 파도를 본 순간 직감했다.
저것은 이미 백만이니 천만이니 하는 단위로 표현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자신의 그릇으로는 저걸 다 품을 수 없다. 그런 본능적인 위기감이, 그것과 접촉하는 것을 피하고 여기까지 다시 도망쳐 오게 만들었다.
=젠장, 이렇게 되면···!=
하은성은 시선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셀 수 없이 많은 태초의 종족이 수납된 벽면. 구체의 내벽.
=나아가는 자?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자라고? 그럼··· 저 벽도 뚫을 수 있겠지!=
그렇게 판단한 하은성은 구체의 벽을 향해 돌진했다.
저 너머에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달란트가 저것까지 넘어오지는 못할 테니까!
그는 차원벽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것에 접촉한 찰나 하은성은 아무런 저항감도 느끼지 못했다. 영체가 쑥, 벽을 뚫고 나아갔다.
=됐다!=
그렇게 쾌재를 부르던 것도 잠깐.
=······어라?=
시야가 급변하고.
하은성은 얼어붙은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야, 여긴 또 어디야? 대체 근원이라는 게 몇 개나 있는 거야?=
벽을 통과한 그 앞에서는 다시 근원의 내부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수없이 많은 빛이 모여 만들어낸 공동(空洞)이.
다만, 바라보는 방향이 좀 다르다.
=아까는 분명 앞이 막혀 있었는데···.=
지금은 전방이 빈 채로 트여있다.
=잠깐. 설마 여기에 근원이 또 하나 있는 게 아니라.=
같은 일을 몇 번이나 반복한 뒤 하은성은 확신했다.
=벽을 뚫어도, 다시 여기로 돌아오는 거잖아!=
원리는 알 수 없었다. 몇 번을 시도해봐도, 근원의 벽을 뚫고 나아가면 그 지점과 대칭되는 지점의 구체 내벽을 통해 다시 여기로 진입했다. 공간이 뒤틀린 것처럼.
혹시나 싶어 근원과 이어진 혈관 쪽에서 같은 일을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좀 더 가까운 혈관벽에서 튀어나온다는 차이만 빼면 말이다.
– 봤지? 도망칠 곳은 없어.
목소리는 키득거리며 속삭였다.
– 이대로 혈관이 가득 차고, 근원까지 달란트에 푹 잠기면··· 어떻게 될까? 너도 본능적으로 느꼈지? 네가 더이상 너로서 존재하지 못 할 거야. 그러니···.
그림자는 달콤하게 유혹한다.
– 방법은 하나뿐이야. 물꼬를 터야지. 이 차원을 통째로 무너뜨리자. 코어를··· 갈기갈기 찢어버려!
아시프-1의 왜곡된 기억 속에 남은 단어.
그 정확한 의미를 그림자 괴물은 알려 주었다.
– 근원이 바로 코어야. 저들이 잠든 거대한 구체가 코어라고. 방법은 간단해. 구체의 천장에 동력 장치가 있어. 내벽을 뚫고 지나가는 대신 거기에 네 영체를 겹치면 돼. 다음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영체인 하은성은 사물을 통과하고 겹치는 데에 그치지만, 그림자 괴물은 물리력을 행사할 수 있다. 단지 거기까지 나아갈 ‘발’이 필요할 뿐이다.
하은성은 파리한 시선으로 위를 보았다. 매우 수상해 보이는 장치가 시야에 들어왔다. 복잡한 마법진이 수백 겹으로 중첩되고 각종 아티팩트가 정교하게 연결된 상태.
누군가 강요하지 않는 이상 굳이 영체를 겹치고 싶지 않는, 딱 봐도 함부로 건들면 안 될 것 같은 구조물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아래를 본다. 달란트가 흘러내리는 구멍을. 그는 살아있을 때 매년 장마철마다 겪은 수난을 기억해냈다. 잠시 후 저 구멍에서 그때와 비슷한 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역류하는 하수구처럼 신혈이 범람하며 차오르겠지.
도망칠 방법은 없다.
조바심이 끓어올라 영혼을 뚫고 폭발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너··· 이걸 예상한 거야?=
달란트를 피하려면 공간을 무너뜨리고 잠든 사람들을 몰살시켜야 상황.
그러니 결국 하은성이 자기 말을 따를 수밖에 없으리라 확신했을까?
꺄르륵!
웃음소리가 한 번 더 울리더니.
– 정확히는 그 죄인이 예상했지!
그리고 그 예상을, 괴물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용하기로 했다.
아드키엘은 즐거워 견딜 수가 없다는 듯한 정신파를 흘렸다.
그 반응을 관찰하며 하은성은 생각했다.
‘처음부터 달란트의 범람을 빌미로 협박하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미리 언급하지 않은 이유가 뭐지?’
그러는 대신 그림자 괴물은 처음엔 드래곤을 들먹이며 협박했다.
그 이유는···.
‘달란트가 여기까지 범람하기 전에, 가능하면 그러기 전에 모든 것을 끝내고 싶었던 거야.’
다시 말해서.
‘그림자 괴물도 저만큼 막대한 달란트와 접촉하면 위험한 거다!’
하은성은 조용히 결심한다.
그 속내를 모르고 목소리는 계속 유혹하며 속삭였다.
– 어차피 너와는 상관없는 자들이야. 종족도 다르고, 너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풍족한 삶을 길고 긴 시간 누리다가 잠들어 있는 종족이라고. 저런 자들이 백만, 천만, 혹은 수억이 죽어나간들 네가 무슨 상관이지? 심지어··· 너도 이미 죽은 와중에!
그림자 괴물은 재촉한다.
– 맞잖아? 네가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 수백억 죽어 나간들 원래 신경쓰지 않았잖아? 게다가 이건 불가항력적 상황이야. 네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전혀 관계 없는 타인쯤 어떻게 되든 알 게 뭐야?!
하은성은 몰랐지만, 아드키엘에게 이것은 복수였다. 죄인에게 가장 끔찍한 절망을 안겨주기 위한 반격이었다.
한 명을 산 채로 지옥에 떨어뜨리기 위해 나머지 동족 전원의 몰살을 결심한 망자는 광기에 물든 목소리를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하은성은 바로 대꾸하지 않았다. 급박한 상황임에도 구멍을 지긋이 노려보다가, 가까스로 답했다.
이미 생각을 정리한 투였다.
=저 사람들 다 죽이면 내가 안전할 수 있다는 그 말은 또 어떻게 믿어?=
이어서 말한다.
=그리고, 설사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라도···.=
정신파에 단단한 의지가 맺혔다.
=모르는 사람이니까 몇 명이든 죽일 수 있다고? 이미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으니,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라서 죽일 수 있다고?=
하은성은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아무리 무식하다고 해도··· 뭐가 맞고 뭐가 틀린지도 모르는 그런 머저리로 보여?=
– ······!
그림자 괴물은 당황했다.
– 너, 설마!
아드키엘은 알아차렸다.
하은성은 자신의 말을 따라서 여길 붕괴시키는 대신, 저 범람하는 달란트의 격류에 접촉할 작정이었다.
괴물은 발악하듯 외쳤다.
– 자만하지 마라! 백만 달란트를 견뎌냈다고, 저것까지 네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하은성은 괴물에게 한다는 말이라기보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외쳤다.
=자신 있어!=
거짓말이었다.
자신이 없었다. 겁이 났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도망칠 길은 보이지 않는다. 그 말이 진실이라는 확신도 없으면서 괴물에게 복종할 수도 없다.
‘견디자, 은성아. 한 번 버텨보자. 저게 얼마나 무지막지한 양이든 간에!’
주문을 외듯 몇 번이고 중얼거린다. 그러는 사이 영체가 짜릿거리며 울리는 느낌이 퍼졌다. 근원의 입구 너머, 터널을 가득 채우며 달란트의 파도가 밀어닥치고 있었다. 벌써부터 그의 영혼이 공명했다.
두려움과 오기가 번갈아 오가는 정신으로, 하은성은 생각한다.
‘요원님은 지금까지 여기 있는 사람들을 위해 버텨온 거야.’
아직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해도, 민준이 그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겪은 사실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민준을 버티게 한 존재들이 여기 잠들어 있었다. 하은성이 죽고 나서도 동생들을 위해 애써왔듯이, 이들은 민준에게 그런 존재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전부 죽어버린다면?’
민준에 대한 감정적 동조와 연민 외에도, 하은성이 이런 선택을 내린 이유가 있었다.
‘요원님은 이미 신이나 마찬가지야.’
민준은 새로 다가올 시대에 신으로서 군림할 준비를 마쳤다.
구체적으로는 우주를 지배하는 집단과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수준의 우주 모함을 확보했으며, 사람의 자유의지를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맹목적인 아군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진격할 광신도를 부리고 있다.
‘사람이 신까지 되어 가며 노력해야 했던 이유가 사라진다면.’
오크 커뮤니티에서 자란 하은성은 사람이 파멸하는 과정을 몇 번이고 봐 왔다.
지옥과 같은 환경에서 버티던 자들도 결국은 무너지는 때가 있다. 자신을 지탱하던 버팀목이 처참하게 뽑혀 나갈 때다.
그럴 때 사람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다. 우울에 잠식되어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그 증오를 바깥으로 표출하거나.
‘요원님은 미쳐버릴지도 몰라.’
손에 총 한 자루 없는 무력한 빈민이 미치는 것과, 누구보다 강력한 무기를 쥔 초월자가 미치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일이다.
어쩌면 우주를 지배할 준비를 마친, 광신(狂神)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하은성은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그만! 내 말을 들어라! 넌 이걸 못 견딘다니까!
괴물의 악다구니를 향해, 하은성은 억지로 자신만만한 듯 웃어 보였다.
=요원님이 그렇게 되어서는 안 돼. 아무리, 날 싫어하는 사람이라도··· 그런 꼴을 당해서는 안 돼.=
그리고, 하은성이 저 사람들을 죽일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그리고 내게도···.=
다음으로 중얼거린 정신파는, 통로를 넘어 범람하는 빛의 격류에 휘말린 순간 잊어버렸다.
달란트의 파도에 잠긴 하은성은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내면에 숨은 괴물의 조각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불타올랐다.
지금 하은성을 엄습한 것은 고통이 아니었다. 어떤 선명한 감각이라기보다는 모든 감각을 잃어가는 느낌이었다.
희미해지는 사고의 물결 속에서 하은성은 자문한다. 내가 지금 저 괴물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이제 기억이 나지 않았다. 확실한 건,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 의문마저 흐릿해질 무렵, 하은성은 더이상 어떤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