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40
241. 사람의 자격 (6)
***
‘그’는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여기는 어디인지.
모든 것은 강렬한 섬광과 함께 시작되었다. 너무도 압도적이어서 존재를 으스러뜨릴 것 같은 파동.
‘······.’
아니, 곧 생각을 바꾼다. 그게 진짜 처음, 모든 것의 시작이 맞을까? 그전에도 무언가 있지 않았을까? 최소한 나는 그것보다 좀 더 오래 존재한 것 같은데.
어쨌든 현재로서 최초의 기억은 빛 속에 휘말려 소용돌이치는 감각이었다.
그리고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가 생겨났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시력을 회복하듯, 빛에 삼켜진 인지능력이 조금씩 회복한 것이다.
‘나, 혼자가 아니었어.’
전까지는 보지 못했던 풍경. 그를 둘러싼 구체의 벽이 나타난다. 거기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잠들어 있었다.
구체 내부에서 빛의 흐름에 휘말려 하염없이 떠다니는 자신과 달리, 저들은 벽면에 단단하게 고정된 상태로 보였다.
차이점은 하나 더 있다. 사람들은 목에서 쉴 새 없이 빛을 흘리는 중이었다. 실개천이 모여 바다가 되듯 작은 흐름이 합쳐 광해(光海)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이곳은, 사람들이 상실한 막대한 양의 피가 만든 바닷속처럼 보였다.
‘하지만 저건 일방적인 상실이 아니야. 더 이상은.’
더 이상은? 그게 무슨 뜻이지?
본인이 떠올린 개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불완전한 기억이 혼란을 일으켰지만, 이내 의문도 사라졌다.
당연하다는 듯 깨달은 건 이런 내용이었다. 사람들은 출혈하듯 빛을 흘리지만 상실하는 만큼 다시 스스로를 채워가고 있었다.
일종의 순환이다.
모두의 광혈(光血)은 섞여서 다시 각각의 몸속으로 흡수된다. 그들이 거한 공간이 빛으로 가득했기에 가능했다. 찬란한 물결은 인지가 닿는 모든 곳에 넘쳐흘렀다.
‘전부··· 조금씩 섞여가고 있구나.’
처음에는 누군가 사람들 몸에 매우 정교한 물질을 주입했을 것이다. 그것은 영육을 동화시켰다. 그 결과 사람들은 오랜 세월에 영혼을 녹여내고 있다. 암염(巖鹽)의 산맥이 이슬방울에 녹듯, 아주 조금씩. 그것을 몸 밖으로 흘리면 다른 사람의 것과 섞여서 돌아온다.
다시 말해 저들 모두가, 모두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
‘그 과정이 고통스럽지 않을까?’
그는 잠시 걱정했지만.
곧,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모두 행복한 꿈을 꾸고 있구나.’
고통을 잊을 수 있도록.
이 행복한 고난 끝에 기다리는 것이 무엇일지 그는 짐작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모두 연결될 것이다. 종국에는 저들 중 누구도 홀로 오롯이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모두가 모두의 일부를 품고 있기에, 상대를 부정하는 것은 곧 자신을 공격하는 일이 된다.
‘하지만,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융합 과정이 중간에 한 번 중단되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출혈과 재흡수의 과정이 매우 느리다는 것이었다. 사람들 각각이 빛을 품을 수 있는 그릇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와는 달리 말이다.
‘나와는··· 달리?’
관심을 밖에서 안으로 돌린다. 저 사람들에게, 타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알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상태인가?
그러자 자연스레 알 수 있었다. 저들을 규정짓는 한계가, 자신에게는 없었다.
‘내게는 한계도, 출혈도 없어.’
그는 무엇 하나 잃지 않고, 그릇이 넘치는 일도 없이 계속하여 빛을 흡수하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 빠른 속도로.
***
“교황은 가장 낮은 곳에 임하여 자신을 가두었습니다.”
윰투스가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었다.
민준은 그의 안내를 따라 교단 모처에 도착했다. 둘은 계단을 따라 지하로 내려갔다. 끝없이 아래로 이어질 것 같은 통로는 감옥으로 연결되었다.
“본래는 교단의 죄인들을 가두던 장소입니다.”
현재는 여기 가둔 수감자가 전무하다고 한다. 민준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전쟁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럼 죄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민준은 질문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 답 역시 예측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지하 특유의 습하고 퀴퀴한 공기가 코를 찔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통로는 점점 더 건조해지고 열기가 가득찼다. 윰투스는 아까부터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민준은 무심하게 벽면에 시선을 뒀다. 본래 이곳을 서식처로 삼았을 이끼와 곰팡이 따위가 바짝 마른 먼지 형태로 죽어 있었다.
우웅!
더 깊숙이 걸음을 옮기자 윰투스의 몸에서 은은한 섬광이 흘렀다. 본능적으로 회복의 힘을 펼친 것이다. 평범한 사람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기온이 높아졌다는 뜻이다.
민준은 인상을 찌푸린다.
“그 녀석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겠군.”
윰투스는 황송한 듯 고개를 조아렸다.
민준이 예측한 풍경이 잠시 후 둘 앞에 펼쳐졌다.
화르르륵!
태초의 종족은 한숨을 쉬고 싶은 걸 참았다. 열기로 붉게 달아오른 철창살 너머, 긴 장발의 남자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교황의 몸 주변에는 마법적인 화염이 거세게 불타오르며 너울거렸다. 그의 피부와 조직은 열기에 타오르고 오그라들다가 다시 새살이 돋아나기를 반복했다. 아시프-1이 무의식 중에 열기를 억누르고 자신에게 집중시켰기에 망정이지, 통제가 풀리면 이 건물이 다 녹아내릴 것이다.
윰투스가 교황을 대신해 웅얼거렸다.
“스스로를 벌해야 한다면서, 계속 저렇게 몸에 불을 붙인 상태입니다.”
부활의 성당을 날려 먹은 훈육 방법을 기억해 뒀다가 따라한 모양이다.
민준은 차원계를 초월한 진리의 문장을 하나 더 떠올렸다. 이래서 애들 앞에서는 물도 함부로 마시면 안 된다. 저렇게 물불 안 가리고 따라하니까.
산 채로 자신을 불태우는 교황을 보며 윰투스가 말했다.
“보기만 해도 섬뜩해서 만류했습니다만 도저히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저 고통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며 윰투스는 몸을 떤다. 그런데, 정작 민준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깐만, 저 녀석의 대표 인격이 그 후라이팬이라면.’
교황이 소싯적 업으로 삼은 일이 불 위에 몸을 올리고 끓는 기름으로 자신을 지지는 것이었으며, 심지어 그걸 꽤 즐기기도 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대신 민준은 윰투스를 지상으로 돌려보냈다.
지금부터 둘 사이 오갈 대화까지 그가 들을 필요는 없으니까.
“너, 지금 뭘 하는 거냐?”
내면으로 정신을 가라앉힌 아시프-1은 처음에는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이러니 멀리서 부를 때도 답이 없었지.’ 민준은 혀를 차며 강렬한 정신파를 울렸다.
=일어나라!=
번쩍!
그제서야 아시프-1이 눈을 떴다.
“아아, 돌아오셨군요!”
그는 급하게 불꽃을 소멸시켰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 걷더니, 더 가까이 오는 대신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깊이 머리를 조아린다. 민준은 왜인지 그 모습이 몹시 꼴보기 싫었다. 손을 대충 허공에 휘두르자 그들 사이를 가로막던 철창이 없어졌다.
“지금 대체 뭘 하고 있냐고 물었는데.”
“자신을 벌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제 죄를 묻지 않으시기에, 스스로라도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네 몸에 불 붙이는 게 벌이 된다고?”
“······고통은 분명 존재하니까요.”
민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아시프-1이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아직 제대로 된 벌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사실이었다.
부활의 성당을 날려 먹은 뒤, 민준은 아시프-1 안에 그림자 파편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것만 확인하고 바로 자기 볼일을 위해 틀어박혔다.
“당연하지. 애초에 네 죄가 성립하지 않는데 내가 뭐하러?”
아시프-1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창조주이자 채권자는 처음부터 탕감할 부채도 없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전 잘못된 판단을 내렸습니다. 하마터면 아버지의 동족 전원을 소멸시키고, 당신의 계획을 처참하게 망칠 뻔했습니다.”
“속았기 때문이지. 넌 아드키엘에게 이용당한 거다. 불가피한 상황이었어.”
“강요당하고 유인당하였으나, 최종적으로 그 선택을 내린 주체는 접니다. 그에 따른 책임을 부정하면 제 자유의지 또한 부정하게 됩니다.”
그제서야 민준은 그가 고집을 부리는 이유를 알았다.
‘이거였군.’
도구로 존재했던 시간이 긴 아들은 끊임없이 자신이 사람임을 증명하려 하고 있었다. 죄의식을 표출하고, 수치를 느끼고, 벌을 자처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논리 일부는 창조주의 소신과 반대되는 것이었다. 민준은 죄가 강요될 수 없다고 판단한다. 자신이 상실감과 결핍 때문에 저지른 일이 죄가 아닌 것처럼, 불가항력에 구속된 선택까지 벌할 수는 없다.
민준은 이런 생각 차이를 인정하고 용인하기로 한다.
그래서 사람의 자격을 인정받으려는 아시프-1의 욕구를 부정하는 대신에···.
“그렇다면, 용서하겠다.”
“······?!”
납득할 답을 주기로 했다.
어쨌든 아시프-1이 계속 저 상태로 있으면 곤란하니까. 민준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지긋지긋한 죄의식. 그 사슬에 사로잡힌 모습이 영 눈꼴사나웠다.
“애초에 죄가 아니라고 여겼기에 사면하지도 않았지만, 그토록 필요하다면 인정하지. 그리고 용서하겠다.”
아시프-1은 순간 멍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이 바랐던 게 과연 이게 맞는지 자문해 보지만, 민준의 말을 부정할 근거가 없다는 것 역시 깨달았다.
얼떨떨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숙인다.
“······감사합니다.”
뒤통수 위로 민준의 무심한 문장이 쏟아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인다. 내게 저지른 죄는 해결됐지만, 하은성에게 범한 죄가 아직 남아있다고 생각하겠지.”
뜨끔.
“혹여 또 몸에 불 지르고 여기 틀어박히는 계획은 꿈도 꾸지 마. 일단 날 도와서 그 녀석을 구출한 다음에 직접 용서를 받든지 하라고.”
아시프-1의 두 눈이 커졌다.
“구할 방법을 찾으신 겁니까?”
“새로 궁리해서 만들 필요도 없었어. 그냥 우리가 하려던 대로 하면 돼. 어차피 하은성이 소멸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얻었거든.”
이어서 민준은 교황이 상상도 할 수 없던 충격적인 말을 했다.
“아마 그 녀석 역시 내 영혼으로 만들어졌을 거야.”
그는 아드키엘의 기억에서 본 장면을 설명했다. 이야기가 이어짐에 따라 아시프-1은 격노를 금치 못했다. 두 눈동자에 강렬한 빛이 이글거린다.
“아니, 그럼 아버지 당신의 영혼을 강제로?!”
“그래. 본래는 내게도 결계를 무시하는 능력이 있었던 거지. 그걸 절개한 부분이 어떤 과정을 거쳐 하은성이 된 것 같아.”
아시프-1이 하은성에게 동질감을 느낀 것은 근원이 같기 때문이리라.
반대로 민준이 그에게 반감을 느낀 이유에 대해, 스스로는 이렇게 추측한다.
“아마도 증여와 강탈의 차이가 아닐까 싶은데. 너는 내 의지로 창조했지만 하은성은 강제로 빼앗겨서 상실한 부분이니까. 원래 내게 붙어 있어야 할 구성물이 제멋대로 밖을 돌아다니는 꼴이라 거부감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민준은 하은성에게 부채를 채워 구속했다. 도망치지 못하도록 곁에 묶어 두었다. 그것 역시 상실감을 채우려는 무의식적 기제가 아니었을까 민준은 추측했다.
“어쨌든 자아가 붕괴되지만 않으면 구해낼 수 있어. 우리가 엘라후-프라가의 통제권을 되찾으면 가능한 일이다.”
“혹시 그를 다시 흡수하실 겁니까?”
민준은 덤덤한 표정으로 부정했다.
“뭣하러?”
“······.”
이유를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 대답을 통해 아시프-1은 직감했다.
그의 창조주는 달라졌다.
굳이 말로 표현하자면··· 소유에 대한 강박적 집념이 약해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여기까지 설명한 민준은 드디어 본론으로 넘어갔다.
“너, 나랑 같이 어딜 좀 다녀와야겠다.”
잠깐 나들이나 가자는 투였다.
전쟁을 앞둔 지금 시점에? 아시프-1은 이해할 수 없었다.
“어딜 말씀이십니까?”
“내 고향.”
“···고향이요?”
아시프-1의 표정이 더욱 기괴해졌다.
그는 민준이 시설에서 키워졌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행성이 어디인지, 지금 어떤 방식으로 남아있는지는 듣지 못했다.
“고귀한 신분이 될 자들을 키우는 시설이었던가요? 초인이 될 씨앗을 양성하던 행성으로 가실 겁니까?”
민준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기 말고, 내가 진짜 고향으로 인정하는 장소는 따로 있어. 그곳으로 이주하기 전까지의 삶은 내게 별 의미가 없지.”
“아, 그럼!”
“그래. 내가 자란 곳. 내가 소유한 목장이 있던 그곳으로 가자.”
아드키엘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냈고, 그녀가 죽은 후에도 민준이 관리했던 행성.
그곳을 지금 고대 종족은 이런 이름으로 부른다.
“용릉으로.”
아시프-1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럼 차원을 넘어야 할 텐데요. 이번에 확보한 우주 모함에 도약 코드 생성기가 있으니 그건 문제가 아니지만···.”
하지만 우주 모함이 움직이는 순간 은밀한 잠입은 불가능하다.
그럼, 이번에도 델을 데리고 갈 것인가?
‘그건 불가능할 텐데.’
용릉은 차원계의 중심부다. 변방 차원에서 민준이 공주, 사제, 드래곤과 함께 도주할 때와는 상황이 다른 것. 엔델리온 같은 거대 생물이 등장한 순간 바로 발각될 가능성이 크다.
과연,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지 민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아시프-1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엔 델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도약을 버텨낼 수 있을 거야. 난 물론이고, 너도 마찬가지야. 말했던가? 지금 네 몸, 엔델리온과 육탄전을 벌여도 지지 않을 만큼 내구성이 좋다고.”
“······?!”
교황은 순간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벙긋거렸다.
민준의 말이 맞았다. 아시프-1의 새 몸은 원래 델이 전남편을 위해 오랜 시간 준비했던 깜짝 선물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인정하듯, 그녀는 적당히라는 개념을 알지 못하는 여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