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82
283. 나의 가장 소중한 (18)
***
촉수왕은 자문해 본다.
위원회 분위기가 이처럼 침울했던 때가 있던가?
“······.”
가상현실로 구현된 회의실의 참석자들은 한동안 몇 분째 침묵을 지켰다. 오늘 여러 번 반복된 일이다.
왕은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들 신경삭이든 뇌든 충분히 식혔으면 말들 좀 해 보세요. 그럴싸한 방안이 없단 말입니까? 잃을 것이 없는 자들과 정면으로 부딪쳐 봤자 우리만 손해입니다. 저들의 발목을 더 오래 묶고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전략이 필요하단 말입니다.”
그녀는 화면에 촉수짓을 하며 말했다.
“보세요. 157척의 적함이 이미 차원 방벽 한 겹 너머까지 와 있습니다.”
누군가 말했다.
“정확히는 두 겹이지요.”
의미 없는 말꼬리 잡기.
전형적인 카바이트 식 화법이다.
촉수왕은 지극한 짜증을 느꼈다. 그걸 누가 모르는가? 현재의 차원 방벽은 먼 옛날부터 존재하던 벽에 위원회가 한 겹 벽을 덧댄 이중벽의 구조라는 것을 말이다.
다시 말해 위원회는 차원을 나누는 골조를 무(無)에서 창조할 기술력이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왕은 살의를 억누르며 발언을 정정했다.
“어쨌든 차원 도약 한번이면 넘어올 거리라는 점은 변함 없습니다.”
“그래도 그걸 쉽게 뚫지는 못할 거잖습니까? 설사 그 몸갈이 재료들을 사용해도요.”
위원회는 근래 차원 #00-001의 모든 터미널을 폐쇄하는 것을 넘어 아예 장비를 해체해버렸다. 설사 아시프-1이 긴 시간 공들여 오퍼레이터들을 세뇌해도 시설을 사용할 수 없도록.
물론, 그것만으로는 촉수들의 차원 도약 마법까지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위원회는 한 가지의 수를 더 썼다.
왕이 긍정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 세계는··· 차원 #00-001은 완전히 폐쇄된 상태나 마찬가지입니다. 도약 마법을 쓰든 도약선에 타든 평소의 몇십 배에 달하는 저항이 가해질 겁니다.”
그 저항은 도약선을 먼지로 만들기에 충분했으며, 엔델리온이나 고룡조차 객사시킬 정도의 압력이었다.
위원회는 비록 옛날부터 존재한 차원벽은 건드릴 수 없었으나, 대신 그들이 만든 두 번째 벽을 한계 가까이 강화한 것이다.
“하지만, 아시프-1이나 아시프-666 같은 괴물들은 단신으로라도 넘을지도 모릅니다.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됩니다.”
“수형자들을 소모하는 작전까지 실패한 마당에 남은 수는···.”
회의가 이어지던 그때.
– 삐이이이익!
촉수왕은 돌기를 움찔거렸다. 어디선가 익숙한 경고음이 들렸기에. 그것은 얼마 전 끔찍한 테러를 겪은 날의 알람과 매우 비슷했다.
다만 이번에는 소리가 약간 둔탁하고도 멀었다. 환청이 아닌가 의심했을 정도로.
촉수왕은 곧 그 경고음이 근원지가 다른 참석자들의 아바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확히는 새로 선출된 카바이트 대위원이었다. 그가 머무는 현실 공간의 소음이 가상의 회의장까지 들린 것이다.
“아니 이게 무슨?!”
카바이트가 다른 회선을 통해 보고를 받는 듯했다.
잠시 후, 촉수왕은 자신이 지렁이들 표정을 읽을 만큼 저 종족에 익숙해졌다는 사실을 한탄했다. 그녀는 카바이트의 얼굴에 서린 경악과 공포의 감정을 선명하게 식별할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절대 기껍지 않은 일이었다.
“크··· 큰일!”
카바이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 삐이이익!
– 위이이이잉!
다른 참석자들이 머무는 현실 공간에도 비슷한 경고음들이 연달아 이어지기 시작했다.
***
“저게 뭐야!”
위원회의 채굴기지.
별의 지하 가장 깊숙한 곳. 행성핵(行星核) 대신 놓인 거대한 문 앞에 정예 전사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구성을 살피면 토드와 카바이트가 섞여 있고 엔델리온이 보낸 (그들 기준으로) 초소형 골렘도 적게나마 보인다. 조폐국을 장악한 카바이트가 다른 종족의 지원을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의 시선은 한곳에 집중되어 있었다.
쿵! 쿵쿵!
그곳은 한때 활발하게 달란트를 빨아들이던 현장이다. 전쟁 전까지는 물리적, 영적 에너지와 강렬한 소음이 쉴 새 없이 울려퍼지던 장소였으나 근래에는 차가운 고요만 내려앉았던 공간.
그런 곳에 참으로 오랜만에 격렬한 굉음이 들렸다.
예상치 못했고 반갑지도 않은 변화였다.
쾅! 콰쾅! 쿵!
삼중 결계를 겹친 벽 곳곳이 일그러지고 튀어나온다. 벽 너머에서 누군가 필사적으로 뚫고 나오려 시도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대체 누가?
“···아니?!”
허겁지겁 그곳에 도착하여 벽이 찌그러지는 형태를 본 고대 종족들은 기겁했다.
금속 벽에 부글거리며 솟아오르는 거품은, 얼굴을 도장처럼 찍어서 형태를 굳힌 안면 석고틀처럼 보였다. 그것이 강철보다 단단한 마금속임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치는 광경이었다.
그 얼굴의 형태를 전사들은 쉽게 식별할 수 있었다. 지금 모인 사람들의 종족 구성과 별 다를 바 없었기에.
대부분 카바이트와 토드였다는 뜻이다.
차디찬 금속 표면에 꽃처럼 피는 망령의 얼굴. 둥근 입을 한계까지 벌리고 비명을 지르는 카바이트의 두부(頭部)가 보였다. 고통에 일그러진 토드의 표정이 섬뜩하다.
“안 돼. 이대로면, 이제 곧!”
긴급 호출을 받은 전사들은 채굴 기지 곳곳에서 텔레포트 등으로 이동 중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전부 집합하기도 전에.
쩌어어억!
결계 한가운데 금이 가더니.
“막아랏!”
지휘관의 외마디 외침이 들린 순간.
파아아악!
갈라진 벽의 틈에서 검은 폭풍이 솟구쳤다.
그리고 수문 너머 긴 시간 고인 물이 터져 나오듯, 망령의 격류가 사방을 휩쓸었다.
“버텨!”
최정예 전사들이기에 한 번에 쓸려나가지는 않았다. 비록 침입자의 정체를 짐작하지 못했고, 그렇기에 더 경악했지만 이미 각종 방어 능력과 아티팩트를 동원하여 단단히 준비를 한 상태였다. 그런 그들 앞에 귀신들이 달려들었다.
망령의 홍수.
영체로 구현된 두개골이 쪼개지고 뇌수를 질질 흘리며, 꺽인 사지를 휘적거리면서 밀려 온다. 망자는 산자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밀었다. 갈구하듯 잡아당기듯 손톱을 세우며 끌어당겼다.
끔찍한 사념이 계속해서 울렸다. 밉다. 괴롭다. 살아있는 자들이 혐오스럽다. 이런 고통을 아직 모르는 자가 존재함은 부조리하다. 죽이고 싶다. 죽어라. 죽여라. 망령의 정신에는 오직 미움이 가득했다. 그들은 살육의 갈망과 함께 질주했다. 섬뜩하고도 강렬한 기세는 어떤 장애물에 부딪쳐도 꺾일 줄을 몰랐다.
그 검회색 급류와 충돌하고도 버티던 전사들이 무너진 건, 그들 영혼을 깊게 파고든 공격 때문이었다.
“으아악!”
누군가의 비명을 시작으로 끔직한 고성이 돌림노래가 되어 퍼졌다.
영체와 물체, 양쪽에 간섭할 수 있는 귀신들은 전사들의 영(靈)을 노렸다.
망령들은 산 자의 영혼을 영구히 쪼개거나 갈기갈기 찢어버릴 수는 없었다. 몸의 통제권을 빼앗아오는 것도 불가능.
다만, 그들은 서로를 괴롭히듯 산자에게도 비슷한 고통을 전해줄 수 있었다. 신체의 통증이 아니라 혼에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영적 고문이었다.
그것에 직격당한 전사들이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귀신들은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리고 견디다 못한 토드족 한 명이 무릎을 꿇은 찰나.
“······!”
짐승 같은 절규가 터져 나왔다.
망령들은 영체를 긴 밧줄처럼, 혹은 송곳처럼, 아니면 꼬챙이처럼 바꿔 그의 등껍질 사이로 파고들었다. 단단한 갑각 아래에 감춰진 연약한 점막이 유린당했다. 전사는 살면서 겪은 적 없는 고통에 눈이 뒤집혔다. 망령들은 거북이를 닮은 껍질 아래 등근육을 뚫고 내장을 쥐어짰다. 갈고리처럼 걸리는 것을 꿰어 집어 당겼다.
잠시 후, 토드의 배가 부글거렸다. 그 형상은 방금 전까지 금속 벽에 찍혔던 것과 비슷했다. 비늘 덮인 가죽이 진로를 방해한다는 듯, 흉포한 얼굴로 곳곳을 찌르던 망령들은.
퍽!
토드의 배를 뚫고 밖으로 산개했다. 그의 몸을 연료로 검은 폭죽이 터진다. 불티와 연기 대신 육편과 선혈이 후두둑, 사방에 떨어졌다.
그 장면을 본 후방의 카바이트가 경악했다. 그는 오러를 불태우며 망령의 급류를 막으려 했다. 물질계에 간섭할 수 있다면 물리 공격에 타격을 입을 터였다.
공격하려던 순간.
쉬익!
전사는 하늘과 땅이 뒤집힌 것을 보았다.
넘어진 것인가?
안간힘을 다해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곧, 엄청난 고통이 그를 엄습했다. 구륵, 눈동자를 굴리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하반신이 저만치 떨어진 곳에 뒹구는 것을 보았다.
그의 몸을 반 토막 낸 것은 어딘가에서 날아온 둥글고 납작한 갑각이었다. 망령이 토드 몸에서 뜯어낸 등껍질은 무시무시한 날붙이가 되었다.
흉기의 정체를 끝내 모른 채, 카바이트의 상반신은 공중으로 둥실 들렸다. 망령들이 떼를 지어 전사의 둥근 입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리곤 고무줄 링을 넓게 펼치듯 모든 방향으로 잡아 당겼다.
찌익! 쩌어억! 한계까지 당겨진 입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곧 투명한 액체와 섞여 가슴 아래까지 물들였다.
그리고 결국은.
촤악!
카바이트는 일곱 하고도 반 갈래로 찢겨서 흩뿌려졌다. 반 갈래가 더해진 까닭은 한 줄기가 완벽하게 분리되지 않고, 신경과 근육이 연결되어 덜렁거렸기 때문이다.
“안돼에에에!”
동족의 시신 앞에서 절규하던 마법사가 다음 타깃이었다. 그는 주문을 외우기도 전에 망령들에게 붙들렸다. 그는 공중에 높이 들려서 거칠게 굴려졌다.
마법사를 낚아 올린 귀신들은 먹잇감을 낚아챈 독수리처럼 허공에서 몇 바퀴를 돌다가, 방향을 바꿔 급격한 하강비행을 했다.
전면 하방으로 떨어지는 속도는 바닥에 접촉하기 직전까지 줄지 않았다. 그대로 땅을 뚫고 내려갈 것 같던 귀신들은, 바닥에 충돌하는 동시에 비행각을 수평에 가깝게 바꾸었다. 그 상태로도 비행을 멈추지 않았다.
촤아아아악!
그 결과는 돌진 경로를 따라 그대로 바닥에 갈려 버린 카바이트의 몸이었다. 스키드 마크처럼, 검보라 체액과 연분홍 찌꺼기가 섞인 흔적이 길게 이어졌다. 걸쭉한 물감으로 거침없이 그은 직선의 붓 자국 같았다.
마법사의 시신 위로 망령들은 거칠게 부풀며 공간을 채웠다. 죽은 자들이 뿜는 정신파는 멈출 줄을 몰랐다.
=꺄아아아! 캬아아아아!=
전사들은 목덜미를 갉아먹는 망령들을 떼어내려 몸부림을 쳤다. 척추부터 뜯어 먹힌 까닭에 사지가 마비된 토드는 육신이 산 채로 회 떠지는 광경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다가 미쳐 갔다.
고대 종족이 육성으로 지르는 비명 속에, 망령들의 정신적 절규가 섞여들었다.
=괴로워, 아파, 구해줘, 괴로워!=
=꺄아아아아!=
=그만··· 이제 제발, 그만!=
전사들이 망령에 묶인 사이, 다른 귀신들은 기지의 각종 결계를 무효화하며 곳곳을 헤집었다.
그들의 뇌리에는 명령이 선명하게 새겨진 상태. 산 자를 상대로 증오를 표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문’을 보호하던 전사들을 따돌리고 기지 안을 탐방하던 망령들은, 마침내 그들의 진정한 목적지를 찾아냈다. 침입 경로가 된 제로 포인트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지지 않은 지하 거점이었다.
거기엔 그들이 이미 뚫은 것과는 다른 또 하나의 결계가 있었다.
“막아라!”
그곳 역시 고대 종족 전사들이 대형을 짜고 지키는 중이었다.
기지 전체에 비상이 걸리고 가용 병력 대부분이 제로 포인트로 소집된 지금도, 이동 없이 현재 위치를 지키라는 특별 명령을 받은 자들.
결국 그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크아아아악!”
찢고, 짓이기고, 부러뜨리고, 저미고, 물어뜯는다.
망령의 껍질을 입은 재앙은 그곳의 전사들도 순식간에 고깃덩어리로 탈바꿈해 놓았다.
마침내 살아 움직이는 이들이 사라진 뒤.
=꺄아아··· 꺄아아아아!=
망령들은 이곳으로 칩입할 때 문을 뚫었던 것처럼, 다시 서로의 영체를 엮어 검은 회오리를 만들었다.
방금 그 전사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지 끝내 알지도 못하고 죽었다. 그 이유가 저 결계 안에 있었다.
드르르르르!
격렬한 굉음과 파찰음이 울린 뒤.
콰장창!
결계가 산산조각나며 터졌다.
그 너머로 망령들이 달려들었다.
=꺄아아! 꺄아아아악!=
사람들은 채굴 기지라는 이름 때문에 이 인공 행성의 기능을 한 가지로 제한하여 상상하는 경향이 있다.
말 그대로 제로 포인트에서 달란트를 뽑아내는 게 기지의 존재 목적이라고 판단한다. 그것만으로도 너무나 중요한 기능이기에.
하지만 망령들이 발견한 그곳엔, 이 인공 행성이 최우선 보호 대상이 된 또 하나의 이유가 숨어 있었다.
꼭 우주의 최중심부에 설치해야할 시설이 한 가지 더 존재하기 때문이다.
=꺄아아아악!=
그곳에는 망령들이 처음 침입했던 그곳만큼이나 광활한 공간이 펼쳐졌다.
바닥에서 조금 튀어 나온 하단부로부터 은색 빛줄기가 힘차게 하늘로 솟구쳤다. 그 빛기둥이 닿는 천장에는 수정처럼 반짝이는 구체가 은색 광선을 흡수한다.
우우우웅!
저 구체가 위원회가 심혈을 기울여 (흉내내고) 개발한 공간접이체라는 사실을 망령들은 몰랐다.
구체로 이어지는 빛기둥이 위원회가 만들어서 덧댄, 또 한 겹의 차원 방벽 재료이자 동력원이 된다는 사실도 망령들은 몰랐다.
저 빛이 공간접이체를 통과해서 닿고, 또 덮을 그곳은 고대 이전부터 존재하던 차원벽 표면부라는 것도.
만약 저 빛의 송출이 중단되면 위원회가 만든 방벽의 에너지 공급이 끊긴다는 사실도.
그리하여 이곳에서 가까운 방벽부터 사라질 거라는 지식도 망령들은 몰랐다.
그들은 그저 신의 명령을 기억할 뿐이다.
=꺄아아아악!=
저 빛기둥을 없애라.
그것이 뿜어져 나오는 제단을 파괴하라.
=꺄아악! 캬아아아아!=
망령들은 그 지시에 충실하여 전방을 향해 달려들었다.
***
“······!”
엘라후-프라가 교단 지휘선 내 함교.
민준은 미소지었다.
“됐다.”
“네?!”
민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세포벽에 기생하던 곰팡이··· 아니, 암세포 같은 그것들이 드디어 깨끗하게 정화되었어!”
아시프-1은 그 말을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세포벽’이 아마도 차원 방벽을 뜻하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왜 그런 용어를 쓰는가?
그 의문에 답할 여유는 없다는 듯 민준은 바로 함교에서 사라졌다.
팟!
텔레포트를 한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지휘선 밖의 우주공간이었다.
세계의 끝이 민준의 앞에 있었다.
차원 방벽. 모든 빛을 흡수하는 검은 허무. 별의 반짝임 따위는 보이지 않는 캄캄한 장막.
민준은 벽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함부로 시도할 수 없는 일을 시작했다.
신의 손이 차원 장벽에 닿았다.
선원들의 생사여탈권을 지닌 그 어떤 선장도 저 벽 표면에 접촉하라는 지시를 내리지 않는다. 그 즉시 격렬하게 튕겨내며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도약선이라는 특수한 탈 것과 터미널이라는 시설의 힘을 빌려 공간을 접은 뒤 뛰어넘는 우회로를 택한다.
하지만 지금 민준은 망설임 없이 그것에 손을 댔다.
그리고 거부 반응은.
없었다.
‘그래.’
근처에 열을 발산하는 항성은 존재치 않는다.
따라서 한 점의 온기도 남지 못할 게 당연한, 이 냉혹한 공간에서.
민준은 따스함을 느꼈다.
손가락 끝에 전해지는 감각에 집중하며 민준은 과거를 떠올린다.
먼 옛날을 기억하는 고대 종족조차 차원 방벽을 본래부터 존재하던 것으로 여긴다.
촉수왕 정도가 되어야 그게 갑작스레 시작된 우주의 파편화 때문임을 알 터다. 하지만 그 왕도 ‘차원 분열’을 아직 규명되지 못한 자연 현상의 일부로 생각한다.
신은 속으로 중얼거린다.
‘아니, 이건 절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지.’
모두가 익숙해져서 자연스러운 것으로 착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이 물컹하고도 따스한 벽은 본래 태초의 종족이 남긴 유산 중 하나다. 먼 훗날 그들이 정상적으로 잠을 깨고 난 이후의 시대를 위한.
다시 말해 저 방벽의 통제권은 태초의 종족에게 있다.
그리고 벽 표면에 이끼처럼 번식하여 기생하던 그 이물질, 위원회가 덧댄 그것이 힘을 잃고 시들어 사라지고 있다는 걸 민준은 느꼈다. 시작은 차원 #00-001을 직접 감싸고 보호하는 벽부터였다.
그의 앞에 있는 벽이 본래의 ‘순수한 형태’를 되찾았다는 것을 확신한 민준은, 그것을 향해 의지를 불어넣었다.
‘내가 왔다.’
잠깐의 침묵 후.
‘······!’
손끝으로 메아리처럼 어떤 의지가 굴절하여 돌아왔다.
벽이 답한 것이다.
검은 우주의 한 점이 된 남자는 옅게 미소 짓는다.
그리고 다시금 정신을 울렸다.
‘문을 열어라.’
벽은 왕의 명령에 응했다.
***
“맙소사, 저건···!”
함교의 아시프-1은 상상도 못한 광경 앞에 경악하고 있었다.
세계의 끝이 물결치며 움직이더니 그 가운데 구멍이 뚫리는 중이었다.
비록 어둡고 캄캄한 벽에 뚫렸지만 둥근 윤곽을 선명하게 구분 가능했다. 스스로 빛을 내는 물질이라고는 전무하며 외부에서 발산하는 빛마저 전부 흡수하여 차단하던 그곳에, 난데없이 별이 가득한 원형의 바다가 새로 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시프-1은 저것이 동그란 터널 너머의 풍경임을 알았다. 칠흑의 벽 밖에 존재하는 공간, 차원 #00-001의 우주가 원형의 창(窓)을 통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구멍이 전함도 통과할 정도로 부풀고 확장된 순간.
팟!
비어있던 신좌(神座)에 다시 나타난 민준이 앉았다.
방금의 기적에 압도당한 주교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 눈길을 묵묵하게 받아내며 신은 간결한 언어로 명했다.
“전 함대, 전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