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299
300. 업(業) (5)
***
델은 며칠째 한자리를 지키고 있다. 모왕을 비추는 마법 영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육신은 상당 부분 본래의 청동색으로 돌아온 상태. 경이로운 회복 속도였다.
하지만 몸의 상처와는 달리 부서진 정신은 쉽게 다시 맞물리지 못했다.
“어머니.”
등 뒤의 목소리.
인기척을 진작 눈치챈 델은 답했다.
“그가 돌아왔어?”
“아직입니다.”
아시프-1은 다가와 델과 나란히 섰다.
“모성에서 구출된 엔델리온 중, 몸갈이용으로 키워진 이들의 선별 및 치료가 끝났습니다. 폭력적인 암시는 완전히 지웠고, 먼저 구조된 아이들이 적응을 돕고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왔습니다.”
“그래, 고마워.”
시선은 여전히 화면에 고정된 채다.
아시프-1은 델의 심정을 헤아리기가 힘들었다.
“후회하십니까?”
왕의 최후에 델도 기여했다. 그녀는 엔델리온이라는 종족의 구원자인 동시에 배역자이기도 했다.
만약 민준에게 ‘소원’이라며 자비를 청했다면 결과가 약간이나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델은 이렇게 답했다.
“아니, 후회하지 않아.”
목소리가 투명하게 울린다.
“원해서 한 일이고, 필요한 일이었어.”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
“그저, 슬픔과 연민을 느낄 뿐이야. 내가 초래한 상황에 슬퍼하는 모습이 위선적이라고 해도 좋고 모순이라고 비난해도 좋아. 어쩔 수 없어.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니까.”
아시프-1은 조심스레 물었다.
“아시프-500에게 이름을 지어주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죄인이 아니니까. 계속 수형자 번호로 불릴 필요가 없지.”
아시프-1은 둘 사이 오간 대화 내용을 용에게 따로 들었다. 데이터 기지에서 돌아온 델은 한동안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논할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태어났다는 이유로 짊어질 죄는 없다는 말씀을 하셨다고요.”
“그랬어.”
아시프-1은 고민을 털어놓는다.
“선택할 수 없었던 것이 죄가 아니라면, 선택할 수 없었던 책임은 어떨까요?”
델은 그제서야 고개를 돌렸다.
“제가 다스리는 자들 교리에 따르면 죄는 부채입니다. 그리고 부채는 책임과 비슷한 부분이 많지요. 저는 아버지에게 영을 받고 어머니로부터 육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두 분께 부채감을 가지고 있었던 듯합니다. 존재의 무게에 비례하는 빚 말입니다. 두 분이 원하고 명령하는 바를 무조건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감. 창조주에게 거역할 수 없다는 사명이 제 생의 이정표였습니다.”
아시프-1은 묻는다.
“이런 책임에 대해 어찌 생각하십니까?”
델은 다시 영상으로 시선을 던지며 답했다.
자조 섞인 목소리.
“저 너머 풍경이 대답이 될 것 같은데.”
“네, 짐작했습니다. 어머니는 당신의 창조자를 거역했지요.”
심지어 가족보다 넓은 공동체의 대의를 부정했다.
그녀는 ‘우리’라는 울타리를 뛰쳐나와 그 밖의 사람들 손을 잡고, 기존의 공동체를 파괴하여 재구축했으니까.
“어머니는 제게 뭔가 명하실 것이 있습니까?”
“글쎄, 나중에 부탁이라면 모를까.”
“그런 가벼운 것 말고 제 삶에 대해 말입니다.”
델은 가볍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시프-1은 그것이 정말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웃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난 네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길을 정해 줄 생각이 없어.”
“그럴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카인은 의견이 다를 것 같기도 한데.”
델은 아시프-1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니?”
“제 삶의 목적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의 대리인이 되는 것? 그게 하기 싫은 거야?”
“솔직히 말씀드리면, 잘 모르겠습니다. 일단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믿음은 변함없습니다. 그리고 오직 저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압니다. 그러니, 하게 될 겁니다.”
“희생한다는 뜻이구나.”
“네?”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하니까 한다는 뜻이잖아.”
“글쎄요.”
아시프-1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왕노릇을 희생이라 하기엔 어폐가 있지요.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백이면 백 아니꼽게 바라볼 겁니다. 또, 막상 해 보면 제가 우주의 관리자 자리에 만족할지도 모르잖습니까? 사람을 ‘다스리는 일’이 제 천직일 수도 있고 말입니다. 하하!”
마지막 말은 아시프-1의 능력을 생각하면 농담으로 치부하기 힘들었다.
가벼운 웃음으로 분위기를 환기하려던 그는 다시 깊어진 눈으로 말했다.
“네, 저는 사람의 왕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선택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가 그 길을 택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무엇으로 태어났는지까지 제가 고를 수는 없었습니다. 삶은 부조리하고 불공평하지요.”
오히려 누군가는 아시프-1을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각자에게 삶이라는 요리를 완성하라고 주어진 재료가 다르니까요. 누군가의 눈에는 제것이 훨씬 좋아 보일 수도 있지만 그건 제가 정한 것이 아니죠. 다만, 재료를 조합하고 조리하는 방식은 직접 선택하고 싶습니다. 네, 지금 제 고민은 일 자체보다는 그 방식과 절차에 대한 문제입니다.”
“무슨?”
“아버지께서 일부러 잡힌 이유를 아십니까?”
갑자기 화제를 바꾼다.
민준이 수형자가 된 과정에 민준의 의도가 개입되었음을 델도 짐작하고 있었다.
“변방에서 위원회의 방해 없이 파편을 모으기 위해서가 아니었어?”
민준의 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아시프-1의 영혼 파편이 필수적이었다. 그리고 위원회도 그를 통해 파편을 모으려는 계획을 세웠다.
상대의 목적을 달성할 도구가 되어주면서 자신의 뜻 역시 관철시키려는 계획.
기억을 지웠으니 스스로마저 속인 셈이 되었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붙잡은 카바이트들이 그 몸으로 실험을 하여, 진술 내용을 사실로 믿게 만들기 위해서였죠. 태초의 종족과 용혈의 상관관계를 말입니다.”
“자, 잠깐만. 용혈? 카바이트? 그게 다 무슨 말이야?”
델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고.
아시프-1은 그제서야 본론을 꺼낸다.
사람의 왕이 되는 길목에서 벌어질 일.
하지만 그의 생각에는 해야 하는 일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되는 일.
“누군가로 태어난 것이 죄가 될 수 없다는 말씀에 저는 동의합니다.”
자유 의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스스로 옮고 그름을 구분하여 말한다.
“지금 건설 중인 카바이트 수용소에 대해, 어머니께서 아셔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
피곤에 찌든 젠킨슨은 생각한다.
대체 이 아수라장과 혼란은 언제까지 계속될까?
이것은 시작의 끝인가, 아니면 끝의 시작인가?
전대 로드의 꿈에서 깬 뒤 마지막으로 잠을 잔 게 언제인지 모르겠다. 스트레스성 폭식 때문에 체중은 몇 톤이나 늘었다.
그는 뇌내 인격에게 말을 걸었다.
“민준··· 그 친구, 지금쯤이면 찾았을까요?”
– 글쎄. 애초에 뭘 찾으러 온 건지 알 수 없으니, 원.
젠킨슨은 한숨을 푹 쉬더니 밖으로 텔레파시를 보냈다. 바로 대답이 돌아온다.
“우주 모함은 아직 태평양에 떠 있다는군요. 한 자리에 이렇게 오래 머문 것은 처음입니다. 그럼 혹시···.”
– 이미 찾았다면 곧 떠날 준비를 하겠지. 하지만 예언이 걸리는군.
젠킨슨은 창 밖을 보았다. 어제 온 눈이 아직 녹지 않고 거리 곳곳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예언의 언급된 그날까지는 지구에 머물 확률이 높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연말은 코앞이기도 하구요.”
– 예언자에게 뭔가 바뀐 게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안타깝군.
민준은 젠킨슨 타워를 방문했을 때 최선아와 그녀의 오크 부친을 데리고 가 버렸다.
전대 로드의 인격은 그날 일을 언급한다.
– 다른 소원을 빌 걸 그랬네.
***
며칠 전.
도심 한복판에 나타난 우주선 때문에 벌어진 난리를 급하게 수습한 뒤.
민준이 있던 방으로 돌아온 레드 드래곤은 묘한 분위기 때문에 당황했다.
그런 그를 향해 벗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젠킨슨, 너도. 소원이 있다면 하나 말해 보겠어?”
뜬금 없는 소리에 당황했지만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자리에 있던 엘프, 인간, 고블린, 오크를 밖으로 내보낸 뒤 다시 민준과 독대하며 호소했다.
다름아니라 방금 전까지 자신이 늘어놓았던 이야기가 소원이라고.
하지만 민준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그의 능력으로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과 함께.
민준은 이미 태초의 종족에 대해 아는 젠킨슨에게, 나머지 네 명은 듣지 못한 비밀을 알려주었다.
그것은 먼 미래까지 우주를 존속시키는 계획에 관한 것이었다.
“···맙소사!”
젠킨슨은 말 그대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드래곤 입장에서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스케일의 계획이었기에.
그리고 민준은 말했다.
향후 생을 얻은 우주의 양분으로 용이 필요하다고.
“오직 너희들에게만 가능한 일이야.”
“정녕, 대안은 없나?!”
“그럼 긴 시간을 들여 또 다른 생물을 개량해야겠지. 결국 너희 말고 다른 누군가 희생될 뿐이고. 이젠 그럴 시간과 에너지가 남아있지 않아.”
민준은 다른 소원을 고를 것을 권했고, 젠킨슨은 고뇌했다. 회의에서 칼리에테르가 한 말이 머릿속을 떠다녔다.
여기에서 지구의 드래곤만이라도 먹지 말아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혹은, 범위를 좀 더 넓혀서 자신의 친인척까지 포함해 달라고 애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젠킨슨은 이렇게 말했다.
“전대 드래곤 로드의 유산··· 그 큐브 형태의 아이템. 아직 가지고 있나?”
***
다시 시점은 현재.
로드의 인격이 묻는다.
– 사실대로 말한 게 정말 잘한 일이었을까?
“그는 이미 기억과 능력을 되찾았습니다. 어설픈 거짓말은 간파당하고 신의까지 깨졌을 겁니다.”
젠킨슨의 소원은 다가올 그날에 민준이 그 큐브를 꺼내 열어보는 것이었다.
그는 아티팩트의 정체를 속이지 않았다. 전대 드래곤 로드의 기억이 저장된 사실을 솔직하게 고백했다.
민준은 약간 놀란 표정이었고 이어진 설명에는 침묵했다.
젠킨슨의 두 인격은 피가 타는 심정으로 그의 대꾸를 기다렸고.
결국 민준은 승락했다.
– 굳이 소원으로 그걸 고르지 않아도 됐잖아?
“로드, 생전의 당신 마법 실력을 자신하는 건 알겠지만 그건 과거의 민준을 상정하고 만들었잖습니까. 지금 민준의 능력이면 12월 31일 마법이 발동할 때 이상을 감지하고 아예 큐브를 파괴해버릴 수 있습니다. 스펠은 허망하게 캔슬되겠죠. 그러니 솔직히 말하는 게 낫습니다. 그 속의 기억을 제발 봐 달라고요. 그리고 로드가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를 확인해 달라고.”
젠킨슨이 아직 그의 벗이라면, 전대 로드도 마찬가지다.
민준은 골드 드래곤이 ‘삶’으로 쓴 유서를 읽어 줄 것이다.
“그게 마지막 희망입니다.”
젠킨슨에게 약속을 한 뒤 민준은 예언자 부녀를 데리고 떠났다.
드래곤, 엘프, 인간, 고블린, 오크가 말한 소원을 하나씩 가슴 속에 품은 채.
“자, 그럼 다시 일을 시작하지요. 저기 쌓인 서류 좀 보십시오.”
– ···아니, 근데 난 이미 죽었는데 왜 자꾸 이런 시시콜콜한 행정에까지 부려먹는 거야?
“당신의 경험은 유용하니까요.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죽은 게 아니라 내 다른 인격이잖습니까. 자, 이것 좀 봐주세요. 이건 당신이 로드로 있을 때 승인한 건인데···.”
뇌내 인격과 대화를 나누던 그때.
— !
젠킨슨은 무언가를 느낀 듯 얼어붙었다.
그리고 직후.
쿠쿠우우우웅!
젠킨슨 타워가 격하게 흔들렸다. 전조 없는 대규모의 지진.
하지만 용의 감각은 근원의 방향을 파악한다. 요동치는 사무실을 어려움 없이 가로질러 창 앞에 섰다.
그리고 너머를 응시했다.
“저건?”
여섯 번째 뇌는 보이는 것 이상의 현상을 파악했다.
“거리는 대략 5천 킬로미터! 태평양 공해입니다!”
– 태평양? 아니, 잠깐만. 방금 전에 분명···.
“젠장, 이 좌표는···!”
고룡의 피가 식을 정도로 엄청난 마력 파동.
그 근원지는 민준의 우주 모함이 머무르던 장소였다.
젠킨슨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이게 찾아야 할 것을 찾았기에 뒤따르는 당연한 현상인지. 아니면···.
“직접 확인해 보지요.”
그가 있을 장소에 텔레파시를 보낸다.
=민준! 무슨 일인가? =
용의 표정이 다시 한번 얼어붙는다.
그가 보낸 정신파가 도중에 굴절되어 튕겨 나가는 걸 느낀 것이다.
그리고.
“······!”
그는 허공의 한곳을 노려보며 지독한 살의를 뿜었다.
“이 탐욕스럽고, 우둔하며··· 대책없는 것들!”
목소리에는 분노와 좌절감이 섞여 있었다.
그런 젠킨슨의 귓가에.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군. 지구의 드래곤 로드, 만나서 반가워.”
누군가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