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34
34. Princess Run (9)
“흐음.”
민준은 턱을 긁적였다. 또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녀협동조합에서 오만식의 며느리와 담당 변호사가 민준에게 무언가 부탁하려고 했다는 점.
그는 곧 머릿속에서 가설을 완성했다.
‘나를 통해 이민국 상층부에게 로비해 볼 생각이었을까?’
여차하면 외계인에게 회사가 넘어가게 생겼다는 식으로 온정에 호소하면 통할 것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 우직한 양반 성미에 쉽지 않은 일이었겠지. 그래서 그때 며느리 말을 중간에 끊고 만류했던 것이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것밖에 없었다. 설마 채권자인 베르미 공주를 살해해 달라고 청부를 넣을 작정도 아니었을 테니 말이다.
민준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주저했다. ‘지금 내가 여기서 오지랖을 부리며 끼어들 타이밍인가?’
그는 원래 민간 의뢰를 받지 않는다. 하물며, 자신에게 공식적으로 의뢰를 맡기지도 않은 상대를 위해 제멋대로 일을 시작하는 것은 그의 원칙에 맞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도 겹치면 필연이라고 했지.’
이것은 ‘일’이 아니라 ‘개인적인 선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오만식과 짧은 시간 내 두 번이나 마주친 일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을 터라고 여기면서.
그 결심에는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서 오만식이라는 ‘청년’이 몹시도 좋은 이미지로 남아 있는 사실도 한몫 했다. 선명하게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그가 민준을 몹시 잘 따랐다는 인식은 남아 있었다. 낮에는 선생 행세를 하고 밤에는 외계인 때려잡느라 좀비처럼 살았던 자신을, 그렇게 된 이유도 모르면서 이래저래 잘 챙겨줬던 기억도 난다.
‘쳇.’
그는 결국 마음을 바꿨다. 이런 종류의 일은 모르고 지나가는 편이 낫다는 신념은 여전했지만, 이번 일만큼은 예외로 두고 조금만 알아보기로.
아주 조금만 말이다.
생각을 정리한 민준은 캐시에게 짧은 문자를 한 통 보냈다.
‘고려정밀연금, 정부 쪽에 이야기 좀 흘리고 반응을 알려 줘.’
캐시에게 구구절절한 설명은 필요 없었다. 이렇게 말해 놓으면 회사의 현 상황과 채무 관계 및 액수 같은 정보는 알아서 조사하고 정부에 무엇을 흘려야 하는지 역시 빠르게 파악할 것이다.
수십년 전 학교에서 연금술을 가르치던 청년이 지금은 내로라하는 연금술업체 대표이사가 되었듯 민준 역시 지구에서 세월을 허투로 보낸 것이 아니었다.
젠킨슨을 꼭 경유하지 않더라도 그는 고위 관료 몇 명 정도는 알고 있으며, 그 중 일부에게는 큰 빚을 지워 놓기도 했다.
‘경호 대상을 배신하는 행위 같기는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호위 이상의 충성을 그녀에게 바칠 이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채권을 날리거나 박탈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정부가 조건부로 대신 갚아준다는 그림이면 문제될 일 없었다. 상대가 외계 자본이니 당위성도 충분.
한 가지 문제라면 지구 회사를 꿀꺽하려는 그녀의 야망이 무너진다는 것인데, 안타깝게도 민준이 공주에게 품은 의리는 그걸 걱정할 만큼 크지 않았다.
‘전송.’
캐시에게 문자를 보낸 뒤 민준은 여유롭게 미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
오만식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를 ‘소금 안 친 곰탕 국물 같은 사람’이라고 평하곤 한다. 사람의 성격을 맛으로 표현하자면 그에게는 자극적이고 톡 쏘는 면모는 없지만 대신에 우직하고 진한 풍미가 느껴진다고들 말했다.
그런 그에게는 순수하고도 깊은 신념이 있었다. 진심과 실력이 있다면 고객들이 찾아온다는 것. 그 믿음이 회사를 키우고 풍랑을 이겨낼 체력을 길러줬지만, 해외 큰손들이 황금 가격을 가지고 장난치는 쓰나미에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화로는 멈추지 말고, 계속 생산을 진행하게.’
국내 업체들이 생산을 중단하는 와중에도 그는 연성을 쉬지 말도록 지시했다. 연성화로의 불이 꺼지는 순간 회사의 기반이자 국가의 동량인 연금술사들이 해외로 이탈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손해를 보는 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고, 고민할 것은 그 손해를 어느 정도 수준으로 줄이느냐의 문제였다.
그의 회사에 각종 마법 촉매를 납품하던 무역상사가 갑자기 제안을 해 온 타이밍은, 더 이상 원가 절감이 불가능하다고 판단을 내린 무렵이었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저희가 정말 파격적인 조건으로 오퍼드리려고 하니까요!’
연성의 필수품 중 MSF(마나 민감성 필터, Mana-sensitive filter)라는 것이 있다. 재사용이 불가능한 소모재로 전량 외계 수입에 의존한다.
그들은 그것을 놀랄 만큼 싸게 공급하겠다고 제안했고 거래 시작 후에는 연금술업체 사정을 잘 안다며 대금지급 기간도 몇 번이나 늘려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 사정은 계속 악화되었고 그 후 채권 만기가 돌아올 때 마다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다.
‘괜찮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가 하루 이틀 거래하는 것도 아닌데요, 이번에도 연장해 드리겠습니다!’
아무리 봐도 수상했지만 오만식은 거래를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를 살리려면 화로를 계속 돌려야 했으니까.
그리고 또 한 번의 만기가 돌아온 어느 날, 무역상사는 고려정밀연금에 통보했다. 그들이 쥐고 있던 매출채권을 제3자에게 매각하여 양도했다는 것이었다.
그들로부터 채권을 사들인 주인공, 오만식의 회사가 빚을 갚을 대상이 될 새로운 채권자의 이름은 베르미 공주였다.
“공주님을 뵙습니다.”
경호원들이 물러난 뒤 오만식은 정식으로 예를 차리고 인사를 올렸다.
그는 지구에서 통용되는 예법에 따라 무릎꿇고 공주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슈탄인 예절에 따라 있지도 않은 비늘을 떨며 길 수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감정기 없는 베르미의 화답을 올가가 통역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지.”
마주 보고 앉은 지구인들 표정은 창백했다. 갑자기 쳐들어온 채권자 앞에서 그들은 성심성의를 다해 상환계획을 보고했다. 묵묵히 10분가량 듣고 있던 공주가 입을 열었다. 날카로운 이빨 사이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내 평생···.”
파쇄음이 슈탄 언어의 음운학적 특성임은 그들도 알고 있었지만 그걸 감안해도 유난히 소름 끼치는 소리였다. 공주는 상대를 위협하기 위해 평소보다 힘을 줘서 또박또박 발음했다.
“내 평생 이처럼 엉망인 상환 계획은 처음 들어보는군. 온통 거짓된 숫자로 점철되어 있어. 신뢰할 수 있는 문장 역시 하나도 없다.”
“저희는 최선을 다해서···.”
변명하는 오만식의 말을 끊으며 공주는 엄포를 놓았다.
“나는 그 계획을 믿을 수 없다. 당장 이 자리에서 부채를 전액 상환하든지, 그게 불가능하면 우리의 제안을 수락하도록.”
상대가 조심스럽게 묻는다.
“···제안이라고 하시면?”
공주의 수행원들이 지구 언어로 번역된 서류를 한 부씩 돌렸다. 그곳에 모인 인간들의 안색은 더 이상 창백해질 수 없다고 여겨질 정도로 엉망이었지만, 그 서류에 적힌 문자는 그들 얼굴을 더 악화시키는 기적을 선보였다.
“이건 결국··· 부채 탕감을 대가로 회사 지분을 넘기라는 것 아닙니까?”
오만식의 눈동자에 분노와 절망이 번갈아 가면서 일렁였다.
그 표정을 보며 공주는 조용히 미소지었다. 그들도 예상한 시나리오겠지만 현실로 닥치니 감정적 동요를 숨기기 쉽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노인은 깊은 한숨을 내쉰다. 슬슬 포기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였다. 악어는 속으로 미소지었다. 거의 다 넘어왔군.
“보면 알겠지만 지분을 넘길 대상은 지구에 합법적으로 설립된 법인이다. 법률적 문제는 없음을 양쪽 차원 변호사를 통해 확인 끝냈지.”
오만식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대체 슈탄인이 왜 마법연성금 만드는 회사를···?”
“그것까지는 그대들이 알 바 아니다.”
날카롭게 말을 싹둑 잘라버린 뒤 공주는 물었다. 메마르고도 냉혹한 목소리였다.
“어떻게 하겠는가? 파산인가, 지분양도인가? 후자를 택한다면 고용은 완벽하게 보장하겠다. 하지만 이대로 파산시킨다면 우리는 위원회에 파산관리인 배정 신청을 할 것이다. 그들은 당연히도 범차원 법률을 적용할 것이고 지구인들 사이에 이루어진 모든 종류의 자잘한 거래와 양도행위에 몽땅 부인권(否認權)을 적용하겠지. 어차피 그대들에게 도망칠 구석은 없어.”
이대로 파산한다고 해도 뼛조각 하나 안 넘기고 돈이 될 만한 것을 모두 집어 삼킬 것임을 예고하고 있었다.
공주는 생각했다. 오만식은 선택해야 할 것이다. 자신이 평생 일궈온 회사가 어떤 방식으로 종말을 맞이하게 만들 것인지.
오만식은 입술을 파르르 떨면서 간신히 목소리를 냈다.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겠다.”
공주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허기가 지는군.”
공주가 그 말을 꺼낸 것은 오만식의 회사에서 용무를 마친 뒤 회사 두 군데를 추가로 들러 비슷한 미팅을 마치고 차량을 막 출발시킨 시점이었다.
민준이 궁금해할까 싶었는지 올가는 그 말까지 통역해 주었고, 그는 브래들리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하루에 여섯 번, 날고기를 몇 십 킬로그램 먹는다고 했던가?
“네, 공주님. 약소하지만 도시락을 준비했습니다.”
올가가 시트 옆 박스에서 꺼낸 ‘약소한’ 도시락은 라면 박스 정도 되는 크기였다. 뚜껑을 열자 피비린내가 차 안에 가득 퍼졌다. 공주는 젓가락과 클램프(Clamp)의 특징을 섞어 놓은 듯한 도구로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콰직! 우드득!
어떤 동물의 것인지 모를 생육에는 굵은 뼈가 발골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었다. 공주는 박력있는 저작운동으로 고기와 뼈를 한꺼번에 씹어 삼켰다. 턱에 힘을 줄 때마다 비늘 밑에서 꿈틀거리는 교근(咬筋)의 움직임은 위협적이었다.
민준은 어느 쪽이냐고 하면, 피비린내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흑마법사는 피와 살육을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먹고 살려고 하는 짓이고 뱀파이어 특성자가 아닌 이상 피비린내는 역겨울 뿐이었다. 후각이 민감한 민준의 경우는 더욱 그랬다.
‘음?’
인상을 찌푸리던 그가 무언가를 포착했다.
‘이건 또 무슨 냄새야?’
그것은 처음에는 거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희미했다. 짙은 피비린내에 가려서 더 알아차리기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명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맡아 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이것이 삭제된 인격의 기억인지 수형자로서의 기억인지도 헷갈릴 정도로.
그만큼 정체를 특정하기 까다로웠다는 뜻.
‘음?!’
마침내 기억을 끄집어낸 실마리가 된 것은 향이 변화하면서 나타낸 특징이었다.
냄새는 시간이 지날수록 짙어지며 근원지를 뚜렷하게 그려냈다.
공주의 몸이었다.
민준의 머릿속에 생각이 빠르게 교차했다.
‘이건 슈탄인의 페로몬이 아니다! 파충류보다는··· 곤충? 그래. 작은 벌레들이 의사소통 수단으로 사용하는 화학물질에 가까워. 그런데 왜 이게 슈탄인의 몸에서?’
머릿속에서 추측이 그려졌다.
‘······그렇군. 화학물질을 아주 정교하게 다루는 자들의 짓이다! 처음에는 무취의 액체였겠지. 시간이 지나면서 성질이 변한거야. 이유는 공기와 접촉했기 때문에?’
그 추측을 스스로 부정한다.
‘아니, 산화만으로는 이런 극적인 변화가 불가능해. 아마도 공주가 흡입하거나 접촉한 순간 몸에 스며들고··· 체내 물질과 섞이면서 전혀 다른 성분으로 변한 거야!’
원래 없던 냄새가 점점 짙어지는 이유였다. 이제 민준의 코에는 피비린내 대신 그 독특한 화학물질 향만 진동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공주가 숨을 내쉴 때마다, 그녀가 입을 벌릴 때마다 더 진하게 느껴졌다.
“공주님!”
민준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맞은 편에 앉아 고기를 질겅거리던 그녀의 턱을 양손으로 잡았다.
“콱퀙턉퉆렉!”
공주는 기겁했고 올가도 화들짝 놀랐다. 통역은 없었지만 민준은 그것이 ‘어이구머니나!’ 정도에 해당할 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민준은 그녀의 주둥이 가까이로 자신의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댄 채 외쳤다.
“입 벌려 보십시오!”
그러자 공주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잠시 바라보더니.
“······!”
그대로 지긋이 두 눈을 감아버렸다.
민준은 두통을 느꼈다. 아니, 이 년이?!
“입 벌리라구요! 입! 올가, 통역해요!”
성분을 추출하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체액을 채취하는 것. 그래도 공주인데 상처 내고 피 뽑을 수 없으니 차선책을 고려한 것이다.
올가가 영문도 모르고 그의 말을 옮기고 있는데.
우우우웅!
“저, 저게 뭐야!”
운전사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가 바라보는 전방을 향해 민준과 올가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때 민준의 귀에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우웅! 위이이잉!
앞에서 다가오는 것을 본 민준은 당장은 공주의 체액이 필요 없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아주 큰 엿을 먹었다는 사실도.
“이런 젠장!”
정부 통제 때문에 텅 비어서 차량은 물론 행인 하나 없는 8차선 도로 전면에 검은 안개가 몰려오고 있었다.
얼핏 보면 저 현상은 지평선 너머로 범람한 밤하늘의 밀물처럼 보였다. 시간을 착각한 어둠의 침범.
그리고 민준의 귀에 들리는 것은 공기를 진동시키는 날개짓 소리였다.
“꺄아악!”
그제서야 올가도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무수한 벌레 떼였다. 시야를 완전히 가려 버릴 정도로 물려 오는, 검고 작은 것들의 폭풍.
운전사와 드워프가 경악한 것은 그것이 ‘너무 많은 벌레’이기 때문이었지만 민준이 놀란 이유는 그것이 ‘너무 강한 벌레’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저거, 매노바 말벌이잖아!’
외피가 금속으로 만들어진 생물.
성충 크기는 인간의 엄지손가락 정도이지만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피해는 누구도 무시하지 못할 만큼 거대하다.
괜히 위원회가 지정한 1급 재해 생물이 아니다.
지금은 얇은 날개를 움직여서 날고 있지만, 적이 나타나면 날개를 접고 몸에서 자기장을 발생시켜 후방에 분사하여 추진력으로 삼는다.
그 순간에는 사실상 플라즈마 엔진을 장착한 우주선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놈들 외피를 구성한 금속이 실제로 우주전함 동체에 쓰일 정도로 단단하고 강력한 물질이라는 점!
우우웅! 우우···.
날개짓 소리가 점차 줄어들었다. 민준은 등줄기에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젠장, 온다!’
민준의 몸에서 검은 그림자가 폭발했다.
운전사가 비명을 지르며 핸들을 꺾었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던 악어는 영문도 모른 채 쓰러지며 경호원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통역사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휘청거리던 그 순간.
콰콰콰콰콰쾅!
무수한 벌레 떼는 산탄(散彈)이 되어, 그들이 탄 자동차의 차체와 전면유리를 관통하며 쏟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