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47
47. 21세기 로빈 후드 (1) >
하은성(향년 22세, 사망 6개월차, 사인: 좌측 경동맥 자창에 의한 실혈사)은 광화문에 나와 있었다.
광장에는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 준비하는 중이다. 하은성은 거리를 좀 둔 채 그 광경을 구경하고 있었다.
“저기 봐. 또 무슨 시위 하나 본데?”
“이 시간부터 부지런도 하네.”
그렇게 일침 놓는 통행자도 있었지만 출근 시간이라 대부분의 시민들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영체(靈體)인 하은성을 눈에 담지 못했다. 일반인 눈으로는 그의 몸을 투명하게 관통하여 광장을 흘깃 보고 다시 눈을 돌릴 뿐.
반응이 바뀐 것은 시위대가 광장 바닥에 복잡한 도형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였다.
“저거 마법진 아니야?”
“뭐? 설마··· 테러?!”
“에이, 그럴 리가. 그럼 벌써 난리가 났게? 귀신들 데모하나 보지.”
마지막 짐작은 사실로 확인되었다.
의사소통을 맡은 영체감응력자, 다시 말해 현대판 무당의 확인을 받고 마법사들이 마력을 부어 넣었다. 그러자 마법진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고 아무도 없던 공간에 수백의 영체가 뿌연 연기 같은 몸을 드러냈다. 일반인도 그들을 볼 수 있도록.
=······!=
신호에 맞춰, 우유빛의 유령들이 일제히 정신파를 울리며 시위를 시작했다. 지금부터는 그들의 말 또한 시민들이 들을 수 있었다. 마법진의 효과다.
하은성은 여전히 거기에 섞이지 않고 거리를 유지한 채 바라보고 있었다. 잠시 후, 시위대 반대 방향으로부터 유령이 또 하나 날아오더니 그의 곁에서 멈췄다.
=은성이 너 여기 있었구나?=
=아, 형. 오셨어요?=
고덕환(향년 33세, 사망 15년차, 사인: 뇌동맥류 파열에 의한 지주막하출혈)은 그에게 권유했다.
=좋은 구경거리 생겼다는데 같이 갈래?=
=뭔데요?=
=배우 곽도출 있잖아? 걔가 열 살 어린 하프 엘프 아이돌이랑 바람 피우다가 마누라한테 걸려서 지금 집어 던지고 깨고 뺨 때리고 난리가 났대.=
=그런 부자들 집에는 퇴마 부적 붙어 있겠죠. 우리 같은 애들 못 들어가게.=
=아니야! 둘이 만날 때 쓰려고 따로 얻은 오피스텔인데, 시공업자가 뒤로 슈킹해먹고 싸구려를 써서 영력이 다 닳았다나봐!=
이능력이 없는 일반인에게는 그것을 가늠할 능력이 없다. 관음증 걸린 유령들이 득시글할 현장을 상상하니 하은성은 정신적인 두통을 느꼈다.
=아니, 제발 그런 짓좀 하지 말라니까요? 그런 몰상식한 ‘일부’ 유령들 때문에 저런 시위를 해야 하는 거잖아요!=
그제서야 고덕환은 광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건 왜 하는 건데?=
남의 일 말하는 듯한 무신경한 태도를 보자 하은성은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우리 권리를 지키기 위한 시위요!=
그는 여전히 관심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죽은 지 얼마 안 된 애들은 그런 말에 엄청 민감하더라. 존재권이라느니, 생사차별이라느니, 저항이라느니···.=
마법진 위에 구현된 영체들의 종족은 다양했다. 인간, 엘프, 오크, 트롤, 고블린 등···.
살아 있을 때도 보지 못한 종족대통합이 죽은 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각자 준비해온 표어를 입을 모아 외쳤다.
=정부는 영체에게 생명권과 동일한 존재권을 보장하라!=
=죽은 지성체가 산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나라가 제대로 된 나라냐!=
=우리는··· 마법사들의··· 모르모트가··· 아니에요!=
=또한, 국회는 ‘사생활 피해 방지 법률개정안’을 철회하라!=
=모든 유령을 잠재적인 성범죄자 및 비밀침해죄 가해자로 간주하는 차별과 편견에 입각한 입법행위를 당장 중지할 것을 촉구한다!=
=촉구한다! 촉구한다!=
=정신체 혐오를 멈춰 주세요!=
그들이 외치는 구호 중 하나는, 모든 신축 건물에 퇴마진을 의무적으로 설치하는 법안을 철회하라는 주장이라고 하은성이 설명해 주었다.
=자꾸 선 넘는 유령 때문에 산 사람들이 저런 법 만들려고 하는 거잖아요!=
=에이, 어차피 우리는 음침한 마음 없이 순수한 호기심과 재미로 구경하는건데···.=
=동기야 어떻든 당하는 사람들이 불쾌하다잖아요.=
어깨를 으쓱하던 고덕환이 물었다.
=그렇게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시위면 넌 왜 안 끼고 여기서 이러고 있냐?=
=형이랑 같은 이유죠.=
=난 참여할 생각도 없는데?=
=형이나 저나 자원해도 저기에서 안 받아 줄 거에요.=
그렇게 말하며 고덕환의 몰골을 쓱 보았다.
일부 고스트는 사망 직전 입었던 의복 및 몸 상태를 영체에 그대로 구현하며 나중에 모습을 바꾸는 것이 매우 어렵다.
하은성은 고덕환의 영체가 어떤 모습인지를 지적했다. 그가 위아래 통틀어 입은 것이라고는 ‘쌍방울’이라는 글자가 크게 적힌 낡고 구멍 뚫린 트렁크 한 장 밖에 없었다.
=이런 복장은 시민들한테 혐오감을 줘서 안 된대요. 저도 마찬가지구요.=
고덕환의 경우 몸을 가린 게 너무 없어서 문제라면, 하은성은 목과 그 아래를 가린 것들이 문제였다.
=아··· 그래?=
그가 수긍하며 바라보는 하은성은, 얼굴만 밖으로 드러내고 목덜미 아래로는 놀이공원 아르바이트 생이 입는 펭귄 인형 옷을 입고 있었다.
여기까지라면 사람에 따라 친근감을 느낄 수도 있을 터다. 하지만 화룡점정으로 목덜미 왼 켠에는 날카롭게 벼린 회칼이 깊숙이 박힌 상태였다. 시민들에게 혐오감을 넘어 공포를 주기에 충분한 복장이라 할 수 있다.
=너무 우스워 보여도 안되고 지나치게 잔인한 외양도 안 된다네요.=
하은성은 목에 칼이 꽂힌 반인 반펭귄의 모습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도 전 시위 끝나면 당장 유령 쉼터로 가서 블로그에 후기 올릴 거에요. 이런 건 널리 알려야죠.=
그는 유령의 일상을 주제로 블로그를 운영 중인데 개설 두 달 만에 방문자 수가 10만을 돌파하는 (나름의) 기염을 토하고 있었다. 글 일부가 캡처되어 각종 커뮤니티에 돈 다음부터 클릭 수가 폭발한 것이다.
=너 아직도 그거 하냐? 자원봉사자 좀 그만 괴롭혀.=
=괴롭히다뇨! 배너 광고료 들어오는 거 칼 같이 나눠 먹는데. 삼십 분 타이핑 치는 값으로는 쏠쏠하다니까요?=
=뭐야, 돈도 분배한다고? 그럼 자원봉사도 뭣도 아니네.=
=돈 한 푼 안 들어오는 트윗질 할 때도 도와주니까 자원봉사죠. 그리고, 걔 엄청 착해요. 자기가 초기 자금 부담할 테니 같이 유튜브 하자고 제안도 해 줬는데요?=
=찍히지도 않고 녹음도 안 되는데 유튜브를 어떻게 해?=
=영체감응력자니까 제가 걔 몸에 들어가서 썰 푸는 거죠. 영상 시작할 때마다 빙의 인증하고.=
고덕환은 혀를 찼다.
=세상 진짜 요지경이다. 그렇게 돈 벌어서 뭐하게? 다 동생들한테 송금해 주게?=
=당연하죠. 유령이 돈 가져 봤자 어디에 쓰겠어요?=
감응력자의 몸을 차지해서 각종 향락을 즐기는 선택지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쪽의 욕구가 거의 사라진 하은성에게는 의미 없는 일이며, 빙의한 채 격렬하게 움직이거나 시간이 길어지면 양쪽 모두에게 부담이 되므로 위험했다.
따라서 몸을 많이 쓰지 않고 미리 짠 대본대로 몇십 분 노가리나 까는 것이 한계다.
‘아이디어 자체는 나쁘지는 않아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덕환은 하은성이 짠하게 느껴졌다. 죽은 후에도 동생들을 위해 돈벌이에 열심인 소년가장이라니.
=그래, 알았다. 너는 실컷 이 시위 구경이나 해라.=
결국 포기하고 혼자라도 불륜 적발 현장 구경을 가려는 참이었다.
=어? 저기 왜 저러지?=
시위대 사이에서 동요하는 정신파가 격렬하게 번졌다. 경찰이 온 것이다. 살아있는 자원자들도 거칠게 항의했다.
=어? 싸우냐? 싸우나 보다!=
고덕환이 흥분하며 다시 자리를 잡고 버텼다. 패싸움만큼 자극적인 장면도 드무니까.
“아니,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들어보니 시에서 그들에게 내줬던 시위허가를 갑작스럽게 취소했다는 것 같았다. 흔한 일이다.
하은성이 투덜거렸다.
=차라리 처음부터 허가를 내주질 말지 왜 이랬다 저랬다하지? 썩을 새끼들.=
그 이유를 자원봉사자들은 짐작하고 있었다.
“분명히 사전에 이만큼 모일 거라고 신고를 했는데 정작 모이고 나니까 무섭습니까?”
유령들이 시위를 위해 수백이나 결집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 규모가 점점 더 커지다 보니 시에서는 이쯤에서 싹을 잘라야겠다고 판단한 듯하다.
고스트들 역시 항의했다.
=수백명 모인 게 무서워요? 겨우 이게? 앞으로 우리는 더 많이 모여서 연대할 겁니다!=
분위기는 점차 험악해졌고 자리를 피하자는 고덕환의 말에도 불구하고 하은성은 싸늘한 표정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실랑이가 이어지고 유령들이 해산 명령에 응하지 않자 경찰들이 뭔가를 지시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누군가 바퀴 달린 대포 같은 것을 끌고 왔다. 그걸 본 고덕환 얼굴이 핼쑥해졌다.
=저거! 퇴마충격파 발생기다! 야, 야! 여기 있으면 안 돼. 빨리 도망 쳐!=
사망력이 짧은 하은성에게는 낯선 무기였다. 하지만 악명은 귀가 아프도록 들었기에 그의 표정도 공포로 물들었다.
죽은 자들에게도 고통을 줄 수 있는 무기.
생전에도 아픈 것은 질색이었던 그는 죽은 후에도 퇴마진이 설치된 건물을 선배들에게 상세하게 듣고 암기하여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건··· 그 몇십 배나 되는 위력을 지닌 마도구다!
“안 돼!”
시위대는 도망치지 않겠다는 듯 굳건하게 버티고 섰고 고덕환은 자기라도 먼저 달아나야겠다고 판단한 듯 재빨리 몸을 위로 튕겼다. 공포로 굳은 하은성의 움직임은 아주 조금 늦었다.
그러나 경찰들은 오래 기다리지 않았다.
쾅!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들을 수 있는 굉음이 울렸다.
거의 동시에 우유빛 빗줄기가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충격파 발생기로부터 시작된 진동은 주변을 휩쓸었다. 살아있는 자들은 한 점의 바람조차 느끼지 못했으나 영체들은 태풍에 휘말린 종이조각처럼 하릴없이 튕겨져 나갔다.
마법진에서 시위하던 수백의 귀신도, 먼저 도망쳐서 날아오르던 고덕환도 충격파에 휘말려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대체 어디까지 떠밀릴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빠른 속도로 튕겨 나갔다.
그 모든 장면을 하은성은 보고 있었다.
=······?!=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며.
=······어?=
굳어버린 목을 천천히 움직이며 모든 장면을 눈에 담았다.
=이게, 뭐야?=
그는 여전히 복권 판매대 지붕 위에 둥실 떠 있었다.
=말도 못하게 아프다더니?=
충격파와 닿은 것은 인지했지만 그것은 그저 물처럼 스치고 지나갈 뿐이었다. 그는 휘말려서 날아가지도 않았다. 다른 유령들은 처참하게 당해 버린 충격을 오롯이 버틴 귀신은 어안이 벙벙하게 떠 있었다.
이미 주변에 그 외의 고스트는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어?”
시위대에서 마법사와 유령 사이 의사소통을 맡은 영체감응력자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둘은 눈을 마주쳤다.
하은성을 본 그녀는 경악을 감추지 못한 표정이었다. 입술이 천천히 움직인다.
“당신은··· 어떻게?”
하은성은 뭐라고 대답할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
“예민준 요원입니다. 오늘 베르미 공주와 면회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아··· 앗! 넵! 예요원님! 안녕하십니까! 면회 준비는 완료되었습니다!”
정체를 밝히자 이민국 요원은 바짝 얼어붙었다. 이등병처럼 경례하는 그를 지나쳐서 민준은 젠킨슨 컴퍼니 본사 지하로 들어섰다. 베르미 공주는 정치범이나 고위층이 구속되는 드문 경우에만 쓰이는 VIP 구치소에 감금되어 있었다. 민준은 세무조사 때문에 예정된 일정 보다 하루 늦게 그녀와 재회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공주는 정신병동에서 폭력적인 환자에게 입히는 구속복 비슷한 것을 입고 있었다.
인간 등 종족이 입는 종류와 달리 저것은 마금속으로 제조되었다. 입도 함부로 벌리지 못하도록 주문이 걸린 쇠사슬로 칭칭 감아 놓고, 배식 및 급수를 위해 이빨 사이에 빨대 하나를 꽂아 놓은 상태.
철컹! 차르르!
요원이 주문을 외워 입을 감았던 쇠사슬만 풀어주었다. 공주는 퉷 하고 빨대를 뱉어냈다. 침에는 피가 섞여 있었다. 요원들이 가혹행위를 하지는 않았을 테고, 혼자 어지간히 이를 갈고 입 안의 연한 살을 씹어댄 모양이다.
“저를 보자고 하셨다고요?”
악어의 두 눈에는 회한, 수치심, 분노, 절망감 등 각종 감정이 번갈아 일렁였다. 즉답 없이 그렇게 민준을 바라보다가 말을 꺼냈다.
“지금부터 오갈 이 대화를 둘 말고 그 누구도 듣지 못했으면 좋겠다.”
놀랄 정도로 유창한 영어 발음이었다.
‘역시, 오래 전부터 지구 이민을 준비한 거군. 관심 없다는 말은 거짓이었어.’
민준은 그녀의 요청이 덧없는 것임을 지적하려 했다.
“저는 배후에 대한 자백을 들으러 온 겁니다. 법률이 정한 바에 따라 당연히 상부에 보고를···.”
“나중에 그들에게 내 말을 전부 옮길지 선별하여 전할지는 당신 선택이야. 그러니 지금은 그냥 내 요청대로 해 줬으면 좋겠는데.”
감정에 치우쳤다거나 비이성적인 정신상태로 치부하기에는 눈빛이 너무나 또렷했다. 그 의도를 추측하던 민준은 결국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주기로 했다.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공주는 대기의 질감이 달라진 것을 느꼈다. 주변의 소음이 차단된 것이 맞는지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그녀는 분명 ‘경고’를 했으니까.
베르미 공주는 말했다.
“당신은 수형자다. 맞지?”
민준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터미널에서 델과 자신이 외계어로 말싸움을 하는 장면을 보고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는 차분한 시선으로 악어를 응시한다. 밖에 소리가 흘러가지 않도록 막아 달라는 요청이, 그녀 자신만이 아니라 민준의 입장 또한 고려한 것임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수형자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내 죄는 결국 위원회에서 다루게 될 건데, 난 그들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어. 내 질문에 최대한 자세히 답해주겠다고 약속하면 나도 당신에게 자백하겠다.”
이어지는 그녀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이 정도의 죄목이라면, 나는 어떤 형벌을 받게 될 것 같은가?”
눈동자가 옅은 두려움으로 떨렸다.
“노동교화형이라면 형량은 몇 년 정도? 가차 없이 어비스로 던져 버릴 때도 있다고 들었다. 기준은 무엇이지?”
사실 민준이 진실을 답해줄 것이라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주는 왠지 이 문제에 있어서는 상대를 신뢰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근거는 없지만 그랬다.
물끄러미 바라보던 민준이 말했다.
“······답을 드리기 전에, 일단 공주님이 누구와 접촉해서 이런 짓을 저지르게 된 건지 배경을 알아야 할 것 같군요. 먼저 답해 주시면 저도 아는 데까지 말씀드리겠습니다.”
결국 민준도 자신의 정체를 털어놓으며 수긍한다.
천대받는 종족이라곤 하지만 상대 신분은 공주였다. 위원회의 노동교화형 시스템 정도는 알고 있는 것이다.
“좋다.”
그러자 베르미 공주는 자신이 이민 브로커 요구에 따라 움직였다는 사실을 모두 고백했고, 그걸 끝까지 듣고 난 뒤에 민준이 말했다.
“공주님은 이능력이 없으시지요?”
“그렇다.”
“경제성이 없는 범죄자는 말씀하신 대로 어비스에 던져 버리는 것이 보통이긴 합니다만.”
“?!”
“공주님 신분을 생각할 때 그런 극적인 상황은 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그제서야 약간의 안도가 스쳐 지나간다.
“대신에 위법행위를 종용한 그 브로커를 위원회에서 추적해 검거할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진술하셔야 합니다. 또한, 정황을 볼 때 공주님은 그들에게 사기를 당한 것 같으니 그 부분을 강조하면···.”
공주가 화들짝 놀랐다.
“사기라니?!”
민준은 담담하게 설명해 주었다.
“젠킨슨의 화물을 넘기는 대가로 그 브로커가 위원회에 로비를 하겠다고 약속했다고요? 그건 있을 법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그 로비 내용이··· GDP의 15%를 차지하는 슈탄을 놓아주도록 왕국에 압력을 넣는 거라니요.”
“그게 어째서?”
“아무리 위원회가 각 차원과 불공정 조약을 맺어 놓았다지만 이건 도가 지나칩니다.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위원회 내에서도 머리 역할에 해당하는 대위원들이나···.”
“그래, 그들은 대위원에게 직접 로비 할 수 있는 자들이다.”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능력이 있는 자들이 브로커나 하고 있을 리가 없죠.”
“난 가능하다고 판단한다. 같은 종족이니까.”
민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 브로커가, 대위원 중 누군가와 같은 종족이라고요?”
공주가 단호한 말투로 답했다.
“그래, 내가 직접 만나 봤으니 확신할 수 있다.”
“하지만, 대위원 자리에 오르려는 자는 고대 종족이어야 합니다.”
“그렇더군.”
“?!”
민준의 눈매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지금 공주는, 이민 브로커라고 자신을 소개한 자가 위원회를 만들고 운영하고 있는 종족 중 하나였다고 말하고 있었다.
“어떤 종족이었습니까?”
그러자 공주는 민준이 예상하지 못한 종족의 이름을 읊었다.
“카바이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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