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46
46. 탈세와 절세 사이 (3) >
***
적의 습격은 언제나 그렇듯 기습적이었다.
세무조사 통지서에는 분명 일주일 후 개시하는 것으로 고지해 놓고는 정작 민준이 호출된 것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핑계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았다. 사령부 내부 사정으로 인한 스케쥴 변경.
속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수 때문에 민준은 공주와의 면담을 연기하고 사령부의 부름에 먼저 응했다.
‘법 대로 사전 통보는 해야 하니 고지서를 날렸지만 준비 시간을 주지 않고 덮치는 흔한 수법이군.’
그는 아침 일찍 보라매 공원으로 향했다. 몇 주 전 의사와 면담할 때처럼 비품창고 문을 연다.
끼이익!
CCTV와 주변 행인들 시선을 모두 피하며 인지왜곡 결계 속으로 발을 디뎠다.
“반갑습니다.”
안에는 흔한 인상의 인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실제 종족이 뭔지는 모를 일이다. 조사관으로 나온 이들은 종족과 능력 등을 일체 숨기는 것이 보통이니까. 사령부 역외탈세추적대 2중대장을 맡고 있다고 소개한 그는 대뜸 손을 내밀었다.
“지구에 왔으니 지구식으로 인사해야겠지요?”
별 지랄을 다 하네.
마음의 허들을 내리려는 뻔한 속셈. 속으로 투덜거리며 마지 못해 손을 잡고 흔들었다. 물론 내색은 하지 않은 채.
“편하게 앉으시고요. 마지막 세무조사는 500년 전이었더군요? 절차는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네, 이미 모든 기록은 위원회 데이터베이스에 있겠죠.”
따라서 이 조사는 진행되는 방식이 지구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남아있지도 않은 옛 자료를 찾아서 내라거나, 이미 존재하는 데이터를 자기들이 보기 쉬운 양식으로 정리해서 다시 제출하라는 등의 시도 때도 없는 괴롭힘은 없다는 뜻이다.
“네. 1차 검토는 통지서가 날아가기 전 끝났지요. 오늘은 저희가 보고 궁금했던 부분에 대한 질의응답 시간입니다. 성실하고 솔직하게 답해주시면 됩니다. 마음 편하게 가지시고요.”
편한 마음은 개뿔. 건수 잡히면 당장 암살부대를 보낼 거면서.
아무리 민준이 날고 기어도 위원회가 움직이는 군대 앞에서 살아남을 길은 없다. 애초에 그럴 힘이 있었으면 검거되지도 않았겠지. 기억이 남아있지는 않았지만 민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시작할까요?”
남자는 차분한 어조로 묻는다.
“차원 #91-002에 파견되었을 때 제국의 황태자 호위 임무를 맡으셨더군요. 위원회 보상과는 별도로 제국정부로부터 임금을 달란트로 지급받았고요. 그런데 여기 자료를 보면 제국력 198년부터 203년까지 계약된 달란트 보다 입금된 달란트가 훨씬 적습니다. 해명할 수 있습니까?”
“차명계좌로 빼돌린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때 그 개망나니 새끼··· 흠, 흠. 그 천둥벌거숭이 같은 황태자가 제게 흑마법 가르쳐 달라고 생떼 쓰기에 무시했더니 멋대로 임금을 깎아버린 겁니다. 벨베브 족은 여성에 한정하여 장생족이니 그의 어머니와 누이, 재무장관은 아직 살아 있을 겁니다. 직접 인터뷰를 해 보십시오. 저와 똑같이 증언할 테니.”
“차원 #33-411에서는 기업국가의 총수와 무척 가깝게 지내셨군요. 위원회 승인 없이 수형자가 실질적으로 지배력을 행사하는 국가나 단체명 계좌에 달란트를 예치하는 행위는 불법입니다.”
“그 어르신은 절 양자로 삼고 싶다고 말씀하셨을 뿐이지 실제로 입양이 진행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저는 해당 기업국가 주식을 단 한 주도 상속받은 적 없으며 통치에 가담한 적도 없습니다. 관련 내용은 서류 660-19-91811를 참조해 주십시오.”
“여기로 파견되기 전전(前前) 차원에서 교류했던 드래곤이 현재 당신의 고용주로군요?”
“그 과정에서 비리나 탈세는 일절 없었습니다. 그가 하필 지구를 고른 건 제 부탁이나 추천 때문이 아니라 지구의 이민절차가 그만큼 쉽고 허술하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그와 계약하기 전에 위원회의 허가도 득했습니다. 이 서류를 확인해 주십시오.”
“요 근래 귀하의 수형자 계좌내 달란트 잔고가 급속도로 증가했습니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요 근래 지구에··· 특히 제 구역인 한국에 이런 저런 사건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제 고용주의 관할 구역이군요.”
마지막 말을 하면서는 스스로도 살짝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사건이 전부 그 친구 입지를 뒤흔드는 레벨이긴 한데? 묵직한 원투펀치처럼.’
사건 내막이 완전히 은폐되지는 못한 터라 레드 드래곤은 몇백 년 만에 고기를 폭식할 정도로 큰 스트레스를 받는 중이다.
중대장이 바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갔기 때문에 민준의 생각은 그 주제에서 오래 머물지 못했다.
“그럼, 다음은···.”
그렇게 한나절을 꼬박 보낸 뒤.
“오늘 인터뷰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추가 면담이 필요한 경우 연락을 드릴 겁니다. 세무조사가 무혐의로 종료되어도 수형자에게 안내드리지는 않으니 참고하십시오.”
민준은 정신적으로 녹초가 된 채 삐걱거리는 철문을 열고 나온다.
봄철 노을이 유난히 붉었다. 저번에 왔을 때는 벚꽃이 막 피기 시작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지고 푸른 이파리가 빽빽하다. 이게 지구에서 몇 번째로 보는 봄이더라? 하루 하루는 빠르게 스치지만 쌓이는 시간은 무겁고 지겨웠다.
그렇게 잠시 걷다가 오갔던 대화를 떠올린다.
‘대체 뭘 잡아내려고 이 짓을 시작한 거야?’
중대장의 질문은 트집잡기에 가까웠다. 누구라도 내세울 수 있는 의문이지만 전부 쉽게 반박할 수 있는 내용. 시간낭비라고 밖에 볼 수 없었다.
‘내가 걱정한 내용은 질문도 안 하고.’
델과 젠킨슨의 제안을 탈세라고 간주할 수 있는가?
정작 그 부분은 건드리지도 않은 것이다.
‘그냥 위협하러 온 건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집에 도착했더니 예상 못한 잔칫상이 차려져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캐시가 집에서 저녁이나 먹자고 그래서 그러라고 했더니 레이크필드, 동철, 정팔까지 다 와 있었다. 그런데 식탁 위에 펼쳐진 요리 면면이 심상치 않다.
‘명나라 황제도 이렇게 호화롭게 처먹지는 않았겠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양이 많아도 너무 많다.
“민준 씨!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어서 앉아서 드세요, 형님. 이거 다 캐시가 만든 겁니다.”
민준의 동공이 떨렸다.
“캐시가?”
“우웁··· 우우웁···!”
이상한 소리가 들려서 눈길을 돌리니 동철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입에 음식을 가득 넣은 채.
“넌 또 왜 울어?”
“너··· 너무··· 마이써요···. 흑흑.”
화낼까봐 무서워서 억지로 먹는 것으로 보인다. 민준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런 그에게 캐시가 다시 권했다.
“뭐 해요? 얼른 앉아요.”
점잖게 사양했다.
“미안한데 나 오늘은 식욕이 별로 없어서···.”
“이거 다 그 후라이팬으로 만든 거에요.”
민준은 조용히 식탁 앞에 앉았다.
브래들리의 죽음과 세무조사, 베르미 공주 건까지 머릿속이 꽉 차서 후라이팬을 빌려준 것도 잊고 있었다.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등심구이를 한 입 베어 문 그는 후라이팬의 전지전능함에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캐시까지 구원한 신기(神器)의 위력을 다시금 체감한 것이다.
‘저런 명품을 단종시키다니!’
나중에 생존세를 낼 예금이 모자라면··· 소위 말해 ‘빵꾸’가 나면 저걸 팔아서 메꿔도 될 것 같다.
‘어차피 전 우주에 저거 하나 남았다니까 프리미엄도 붙겠지.’
식탁에서 오가는 대화 주제는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캐시는 요즘 이민국 분위기가 묘하게 뒤숭숭하고 다들 날이 서 있다며 투덜거렸고, 레이크필드는 최애 드워프 작가의 신간을 추천했지만 주인공이 옥살이를 한다는 설명에 민준은 (속으로) 치를 떨었다. 감동의 눈물을 그친 동철은 오가는 이야기의 반은 이해하고 반은 이해 못한 듯 배시시 웃고, 먹었다. 한편 정팔은 요즘 고스트(Ghost)들이 집단으로 몰려 다니며, 자원봉사자들 도움을 얻어 나타내는 행태가 심상치 않다고 우려를 표했다.
그 대화를 멍하니 듣다가 민준은 문득 생각했다.
이 관계는 앞으로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지난 800년 간 일곱 개의 세계를 옮겨 다녔고 지구에서도 곧 100년을 채울 것이다. 통계적으로 보면 앞으로 몇십 년 안에 이동 발령을 받는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다. 그때 예민준이라는 신분은 실종 처리가 될 것인가, 아니면 사망 처리가 될 것인가? 그렇게 되었을 때 그를 알던 이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어차피 인간 같은 단생종 사회에서는 수명 때문에 지인을 먼저 떠나보내는 일이 반복되지만,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자신이 떠나는 것은 또 다른 일이었다.
위장된 신분으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언제 단절될지 모르는 관계를 이어간다. 그것이 지난 시간동안 그가 겪어온 삶이었다.
‘어차피 자유를 얻으면 상당 부분 해결될 일이다.’
그의 인연은 일곱 개의 차원에 걸쳐 만들어졌고 알던 이들 중에는 아직 살아있는 경우도 꽤 있었다. 자유를 찾게 되면, 마음대로 차원을 오갈 수 있는 권리를 얻으면 다시 만나고 싶은 이들이 많다.
물론 당장 이루어질 일은 아니다. 만약 오늘 자유가 주어진다고 해도 당분간은 지구에 머물지 않을까? 어렴풋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그가 앉아있는 이곳, 현재에 집중하자고 생각하며 민준은 맥주를 들이켰다.
***
흔히들 말하기를 가장 이상적인 직장상사는 똑똑하고 게으른 유형이라고 한다. 반대로 최악은 멍청하고 부지런한 유형.
위원회 핵심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외계인, ‘도테스’는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자리에 발령된 지 얼마 안되는, 그가 새로 모시게 된 상사는 최고도 최악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똑똑하고 부지런한 유형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도테스가 허공에 띄워 놓은 정기보고 자료를 한 줄도 빠짐없이 꼼꼼하게, 하지만 매우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갔다. 중간 중간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전에 완벽하게 준비하지 않으면 탈탈 털린다는 점을 첫 대면 때 알았기 때문에 도테스는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았다.
“음?”
상사가 한 가지 항목을 짚어냈다.
“이거···.”
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 수형자 ‘아시프-666’에 대한 세무조사 결과 보고.
상사는 위원회 중간 간부다. 대위원에게 올라갈 자료를 사전에 검토하는 일 역시 그의 업무 중 하나였다.
인간이 그의 생김새를 표현하면 갈색 털이 온 몸에 덮인 긴 뱀 정도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단, 머리가 달려 있는 부분은 달팽이관처럼 돌돌 말려 있었다.
그가 중얼거린다.
“아시프-666이 아직도 살아있었다고?”
마지막으로 소식을 들은 것이 약 백 년 전이었다. 그때는 그의 관할이 아니었으니 큰 관심도 없었다. 책정된 생존세와 퇴직금을 감안할 때 곧 처분되겠구나 생각하고 곧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그런데 그 이름이 지금 보고 자료에 올라온 것이다.
“갑자기 세무조사는 왜 한 거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서류를 마저 읽었다. 원하는 답이 바로 다음 장에 있었다.
– ···(생략) 따라서 사령부에서는 소속 군인 중 최고의 정신감응력 능력자를 파견하여 현지 기준으로 14시간동안 대상과 단거리에서 접촉하였음. 수형자 특성상 딥 레벨의 정신분석은 불가능하였으나, 정신파를 정밀 분석한 결과 정체성과 관련된 기억의 복구는 진행되지 않았음을 확인함. 향후 추진계획은 하기와 같음. 첫째··· (생략.)
문서를 쓱쓱 읽어 내려가던 상사가 상황을 이해했다.
“대위원 한 분이 직접 지시한 건이군.”
자신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사령부로 내려간 지시였다. 그럴 법도 했다. 대상이 누군지 생각하면.
자료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해당 수형자가 엔델리온의 공주와 접촉한 사실이 확인되었으며, 갑작스럽게 계좌 잔고가 기존 몇 배 이상 증가한 걸 확인한 어떤 대위원이 우려를 표했다고 한다. 혹시 지워버린 기억이 회복되어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냐는 것이었다.
속독을 끝낸 상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아무리 법이 공평하게 집행되어야 한다지만, 이런 위험분자까지 노동교화형에 처한 것은 실수였어. 자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질문 의도를 파악 못한 도테스는 대답을 주저했다. 그러자 상사는 긴장을 풀라고 권하는 제스처를 보였다.
“자네는 현재 노동교화형 시스템에 찬성하는 쪽인가?”
“저 같은 하급 직원은 뭐, 의견을 낼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이미 존재하는 제도이니 이렇게 만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추측할 뿐이지요.”
애매모호한 답변이었다.
“자네는 잘 모를 만하군. 사실 노동교화형이 지금 형태로 고착된 건 천 년도 되지 않은 일이야. 아직 보완할 부분이 많은 제도라는 뜻이지. 이 시스템은 위원회 중역을 맡은 고대 종족들 논의 과정에서 태어났어. 화두가 된 질문은 이것이었지.”
부하에게 질문하는 투로 말한다.
“악(惡)은 치료될 수 있는가?”
“치료라구요?”
대화는 생각 못한 주제로 넘어갔고 도테스는 흥미롭게 듣기 시작했다.
그의 상사는 고대 종족 중 하나인 ‘카바이트’였고 다른 종족이 모르는 비화를 꽤 많이 알고 있었다.
“영혼의 존재가 입증된 뒤 우리는 알게 되었네. 지성체의 본질을 결정짓는 요소는 두뇌의 화학작용 이상의 것임을. 영혼의 본성과 뇌의 연산패턴, 영의 기록과 뇌의 기억이 종합적으로 상호작용한 결과 자아가 생성되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악인(惡人)이라고 불리는 자들은 왜 나타나는 것일까? 악인은 어떻게 속죄하고 갱생될 수 있나? 자, 우리가 지성체의 악을 지워버릴 수 있는 마법의 알약을 발명했다고 치자. 그걸 먹이면 악인은 선인(善人)이 되고 그동안 저지른 죄를 진심으로 반성하며, 그 뒤로는 선한 일만··· 좀 더 보수적으로 말해서 악한 일은 절대로 저지르지 않는 인격체로 변한다고 가정하자고.”
“그런 약이 있습니까?”
“당연히 없지. 그런 게 있다면 수형자들에게 먹이는 약을 그걸로 바꿔치기했지 않겠나?”
그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간다.
“아무튼 그런 약이 존재해서 악을 치료할 수 있다면. 치료된 범죄자에게 추가로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에 의미가 있겠나? 이미 그는 선한 사람이 되었는데? 죽이거나 가두는 대신 풀어주면 사회의 공익을 위해 기여할 수 있는 존재를 굳이 괴롭힐 이유가 있을까? 징벌에 대한 욕구를 해소하는 것 말고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지 의문이군.”
“······어렵군요.”
“그런 약을 아직 발명하지 못했기에 이 담론은 가정에만 그친 상태지. 하지만, 엔델리온이라는 종족이 비슷한 기술을 발명하기는 했다네. 대략 천 년 전의 일이야. 영과 육의 기억을 일시적으로 봉인해버리는 기술이었다네.”
“아, 그게 지금의 노동교화형에 적용되는 기술이군요!”
“그렇지. 하지만 그 기술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해 의견이 갈렸다네. 엔델리온, 그 이상주의자들은 범죄자 기억을 봉인한 다음 자유인으로 풀어주자고 주장했어.”
“아주 위험하게 들리는데요.”
“나름 논리는 있었지. 풀어 놓은 결과 사회에 해를 끼치지 않으면 기억을 돌려받을지 선택권을 주는 것이고, 또 범죄를 저지른다면 혼에 깃든 본성이 악한 것이니 다른 조치를 취하자는 거야.”
“음, 그렇게 들으니 또 그럴싸하군요.”
“우리 의견은 달랐지. 악의 기준 자체가 애매모호하고 영혼의 본성을 과학적으로 계량할 방법도 없으니 범죄자는 엄벌에 처하자는 거였어. 경제성이 없으면 어비스에 던져 버리고, 경제성이 있으면 기억 소거 후 정신이 마모될 때까지 노예로 굴리다가 폐기처분하자는 주장이었네.”
“그럼 지금의 노동교화형 시스템은 그 두 의견을 절충한 거군요.”
“범죄자는 가차 없이 영혼을 소거해 버리자는 ‘토드’ 족 같은 극단주의자들 의견도 일부 반영되었지. 물론 영혼 소거 때 소모되는 달란트를 고려할 때 좋은 방법은 아니야. 어떤 영혼은 우리의 기술로 완벽하게 소멸시킬 수도 없고, 그런 혼을 억지로 소거하려다 어떤 참사가 발생할 수 있는지 ‘아시프-1’의 사례로 모두 알게 되었지 않나?”
거기까지 설명한 뒤 상사는 이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드디어 말했다.
“아시프-666의 죄목은 나도 몰라. 에반쥴 급 이상의 관리자만 열람할 수 있으니. 내가 아는 것은 이거야. 정기적으로 지불하는 생존세는 2천이고 퇴직금은 5백만 이상이 책정된 흑마법의 종사(宗師)라는 것. 나머지 기록은 전부 삭제되거나 은폐되고 차단되었어.”
도테스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흑마법의 창시자요? 그런 자의 이름이 용케 알려지지 않았군요. 근데 그게 5백만이나 책정될 중죄입니까?”
“무반동추진엔진을 발명한 엔델리온이 처벌받지는 않았잖는가? 그걸 악용한 자들이 문제지. 흑마법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흑마법을 만든 것이 죄가 아니라 그것으로 뭔가 끔찍한 짓을 저지른 것이 죄겠지. 아무튼 퇴직금이 5백만이나 책정될 죄가 얼마나 끔찍한 것인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네. 이런 자를 과연 계속 살려둬야겠는가?”
“······하지만 어쩔 수 없잖습니까. 만약 영혼 소거도 어렵다면요.”
“적어도 지금처럼 ‘자유롭게’ 풀어 놓으면 안 되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어서 말일세.”
잠시 침묵을 두고 말한다.
“그리고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그 자가 정말 퇴직금 5백만을 모은다면 풀어줘야 할까?”
도테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상사는 자신이 부하의 시간을 너무 오랫동안 빼앗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이 길어졌군. 바쁘겠지만 한 가지 더 부탁하겠네. 앞으로 이 수형자에 대한 정보를 정기적으로 내게 보고해줬으면 좋겠군.”
결국 상사와 오래 말을 섞다가 일만 늘어난 셈이 된 도테스는 투덜거리면서 자리를 떠났다. 방에 혼자 남은 뒤 카바이트 족 상사는 잠시 더 생각에 잠겼다.
‘5백만이라···.’
팟!
그의 앞에 희뿌연 빛의 결정이 나타난다. 영체(靈體)와 물체(物體)의 중간에 해당하는 물질.
위원회는 이것이 생성되는 원리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만들어졌다.
제대로 다루는 방법은 오로지 위원회만 알고 있는 우주 공용의 화폐.
달란트.
위원회 직속 은행이 다른 차원에 달란트를 대출해 줄 때 ‘화폐 실물’은 이동하지 않는다. 거래는 위원회와 해당 차원 시스템 속에서 데이터의 이동과 변조로만 구현되었다. 화폐 자체를 빌려주는 대신 해당 가치만큼의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할 권리를 빌려주는 것이다.
따라서 위원회가 지구에 100만 달란트를 빌려준다고 해도 실물은 그들 은행 안에 얌전히 잠자고 있다. 취급하기가 어렵고 까다로우므로 실물 화폐를 출금하겠다는 종족도 거의 없었다.
‘아시프-666이 설마 고대 종족은 아니겠지. 5백만은 그런 자가 보유하기에 너무 큰 금액이다. 만에 하나 그만큼 모은 다음 자유를 위해 쓰지 않고 실물 화폐로 출금을 해 버리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물론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했다.
하지만 오늘 아시프-666에 대한 보고를 받은 뒤 카바이트는 이상하게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종족 회의에서 이야기를 좀 해봐야 겠군.’
위원회 회의체계와는 별도로 운영되는 카바이트 만의 회의에 이 안건을 올릴 생각을 하며, 그는 한동안 홀린 듯이 달란트를 바라보았다.
그가 아는 한 우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채가 그곳에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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