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61
61. 21세기 로빈 후드 (15) >
민준은 조용히 등을 돌렸다.
상대는 버기카를 몰고 다가온 늙수레한 트롤이었다. 짜증이 담긴 눈초리로 그를 훑어본다. 사전에 암기한 내용 덕에 민준은 그가 관리팀에 속한 자라는 걸 눈치챘다.
“너, 조리팀이지? 지금 여기서 뭘 해?”
젠킨슨이 포섭한 스파이는 창천의 식사를 책임지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가 자리를 비우면 당연히 알게 되는 팀 말이다.
민준은 준비한 대답을 했다.
“몸이 좀 안 좋아서요.”
답하는 목소리는 잔뜩 쉬고 갈라져 있었다. 일부러 목을 이렇게 만든 것이다. 팔이 잘려도 시간이 지나면 재생하는 트롤이지만 질병에도 완전 면역인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같은 부위가 오랫동안 손상되면 결국 재생력이 떨어지고 이상이 생긴다.
음성의 결이 워낙 흉측했기에 직원은 그의 억양이나 발음이 평소와 다른 걸 눈치 못 챘다.
“그래서?”
눈에 불을 켜고 노려본다.
“의무실에 가서 좀 쉬다 오겠습니다.”
그러자 트롤은 끔찍한 망언을 들은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뭐? 미쳐 돌아가시겠네. 너, 지금 조리팀이 얼마나 바쁜지 몰라?”
“······왜요?”
창천은 자리에 없을 텐데.
“주인님이 식사도 거르시고 새벽녘에 출타하셨어. 돌아오면 반동으로 평소 몇 배를 드실 텐데 그만한 양을 한꺼번에 준비해야 하잖아! 코끼리 쉰 마리 가죽 벗기고 발골하는 게 보통 일이냐고. 이런 마당에 여기서 뺑끼치고 있으면 다른 팀원 다 엿 먹으라는 거야?”
조리실은 그의 목적지와 거리가 있다.
민준은 이대로 의무실에 가는 척하면서 투명화 마법을 쓰고 증발해버릴 작정이었다.
변명하듯 웅얼거린다.
“제가 도저히 지금 몸에 힘이 안 들어가는데··· 의무실에 몇 시간만 누워있다 가면 안 될까요?”
그러자 늙은 트롤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받아쳤다.
“아무튼 요즘 젊은 것들은··· 힘들어도 좀 참고 버티는 연습을 해야지. 몸 좀 안 좋다고 쪼르르 의무실 다 달려가면 일은 누가 하나? 나중 가면 결핵만 걸려도 병가 내겠네. 네 일 대신할 팀원들 생각은 안 해? 민폐라는 생각 안 드냐고!”
다른 종족 기준으로는 중병인 결핵도 트롤 관점에서는 감기와 비슷한 질병이다.
“그리고, 목소리만 좀 안 좋지 멀쩡하게 잘만 걸어다니잖아! 걸을 힘이 있으면 코끼리 모가지 딸 힘도 있겠지. 당장 조리실로 돌아가!”
민준은 여기서 실랑이를 더 이어 나갈 생각이 없었다.
‘잠깐 재워 놓을까? 아니, 그건 안 되겠군.’
트롤에게 저주를 걸어서 기절시키는 것은 쉽다. 문제는 이 장면을 통제실에서 CCTV로 보고 있다는 거다.
이 종족은 아무리 아파도 기절하는 일이 극히 드물다. 더군다나 멀쩡하던 트롤이 갑자기 정신을 잃으면 관리팀은 독극물 중독을 의심하고 레어 전체에 비상을 걸 것이다. 절대 민준이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지.’
민준은 지구로 이주한 트롤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을 곧 기억해 냈다.
그의 입술이 살짝 움직이자.
“으읍!”
운전대를 잡은 트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대로 몸을 옆으로 한 채 조수석에 털썩 쓰러진다.
“으윽··· 으아아아악!”
그는 아랫배를 붙잡고 뒹굴었다.
“아파! 아파아아아! 으아아악! 누구··· 누구 좀 불러!”
민준의 저주가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혹자는 출산의 고통에 버금간다고 평하는 통증을, 지금 저 트롤은 남성의 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병명은 요로결석이다.
아랫배에 칼을 꽂고 좌우로 돌리는 통증 속에서 트롤은 거품을 물었다. 초월적인 재생력은 상처를 아물게 하는 데에는 효과가 있지만, 그걸로 요관에 틀어박힌 단단한 돌을 제거할 수는 없는 법이다.
“헉! 흐어억!”
숨도 제대로 못 쉬는 그를 붙잡고 상태를 확인하는 척하다가, 민준은 버기카의 무전기를 잡았다. 자신의 위장신분을 밝힌 뒤 통제실에 상황을 보고한다.
“응급 환자 발생. 극심한 복통 호소. AC-19 구역입니다. 제가 의무실로 데리고 이동하겠습니다.”
“카피(Copy.)”
허가는 쉽게 떨어졌다. 그는 의무실에 발작하는 트롤을 던져 놓은 뒤 자신도 몸이 안 좋아서 쉬다 가겠다고 말했다. 의료진은 모두 그 트롤에게 집중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코드 블루! 코드 블루!’ 쇼크가 왔는지 CPR 카트를 끌고 달리는 간호사가 보였다.
‘아무리 트롤이라도 직경 1센티짜리 결석은 좀 심했나?’
아수라장이 된 치료실을 떠나 병상으로 향하던 민준은 CCTV의 사각지대에서 투명화 주문을 발동했다. 그대로 의무실 밖으로 나온 뒤 엘리베이터 홀로 향한다.
아직 많은 직원들이 출근하는 중이었다. 지하 30층으로 이어지는 승강기 앞에서 잠시 기다린다.
그러자 직원 대다수를 차지하는 트롤의 행렬 속에서 눈에 띄는 두 사람이 다가왔다.
엘프와 인간.
굳이 저 종족을 고용했다는 것은 그럴 만한 특별한 기술을 보유했다는 뜻.
띡!
그들이 목에 건 아이디를 패드에 가져다 대자 비로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다른 구역과는 달리 아무나 탈 수도 없는 것이다.
투명한 상태의 민준은 공중에 둥실 떠서 그들을 따라 탔다. 보이지 않는 침입자를 잡아내기 위한 초음파 센서나 무게 센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지하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침묵만 지키던 두 사람이 그제서야 입을 열었다. 그들 말을 다른 고용인들이 듣는 걸 경계하는 태도였다.
“창천 님은 새벽에 나가셨다면서?”
“그래, 오늘 입고는 취소야. 프렙(prep)해 놓은 추출관은 돌아오실 때까지 닫아 놓고 기존 실험체 모니터링만 하면 돼.”
“휴, 간만에 숨 좀 돌리겠군.”
그들 뒤에 부유한 채 숨은 민준은 하은성이 침입했을 때와는 다른 경로로 내려가고 있었다.
당시 자유로운 영체 상태였던 하은성은 정신파를 듣고는 있던 위치에서 바로 수직으로 관통하여 접근했지만, 민준은 승강기로 이동하므로 그 유령이 보지 못했던 30층의 다른 구역으로 향하는 중이다.
띵!
지하 30층.
둘을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민준의 눈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보였다.
‘뭐야, 이건!’
거대한 지하 공동(空洞)에는 높이 2미터 남짓의 원통형 유리관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대부분 안이 빈 상태였지만 직원들이 걸어가는 방향에 배치된 것들에는 내용물이 차 있었다.
‘!’
유리벽 너머, 희미한 빛을 발하는 액체 속에 사람들이 잠겨 있다.
가장 많은 것은 고블린이고 인간과 오크도 간간이 보인다. 모두의 공통점이라면 뼈마디가 도드라질 정도로 앙상하게 말랐다는 것.
어디에서 온 자들인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이미 레이크필드에게 들은 말이 있다.
‘의료원에서 보호하던 빈민이군. 이런 미친···.’
아마도 그 전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얼핏 봐도 적지 않은 수가 그곳에서 치료받고 보살핌을 받는 대신 이곳에 갇혀 있다.
‘죽었나?’
가까이 가서 살핀다. 그들 몸 속에서 미약하게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흑마법사인 민준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생명유지장치군. 고의적으로 가사 상태에 빠뜨린 거야.’
직원들이 말한 추출관이 바로 이 유리관으로 짐작된다. 민준은 기기 외부에 새겨진 마법진을 관찰했다.
‘퇴마진?’
산 사람들을 가둔 용기를 퇴마진으로 봉인했다. 동일한 결계는 유리관 상부에 연결된 일종의 ‘파이프’에도 새겨져 있었다. 각 추출관에 연결된 파이프는 천장에서 모이고 옆 방으로 이어진다.
추출관 하나 하나를 살피는 직원들 옆을 스쳐 지나가며, 민준은 그 파이프가 이어지는 장소로 향했다. 하은성이 목격한 용의 망령이 아마 이곳에 있을 것이라 예상하면서.
하지만 그가 안에서 보게 된 것은 죽은 용이 아니었다.
“······!”
민준은 입을 쩍 벌렸다.
그의 떨리는 눈동자는 지금까지 본 것보다 훨씬 거대한 유리관을 담고 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투명한 유리벽 너머에는 온 몸이 비늘로 덮인 생명체가 눈을 감은 채 봉인되어 있다.
익숙한 종족이었다.
‘용?!’
욕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몸 크기가 에델리네스와 비슷한 용이 액체로 채운 유리관 속에 잠들어 있었다. 역시나 살아있다. 사이즈를 감안할 때 아직 백 살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미친년이 진짜!’
이걸로 분명해졌다. 만의 하나 하은성이 본 망령이 용이 아니더라도 젠킨슨이 창천을 응징하는 일에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살아있는 용이 죽은 용보다 존귀하지 못할 이유는 없으므로.
한편 그를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이 또 하나 있었다.
‘심지어, 내가 모르는 용이다.’
뿔이 기묘한 모양으로 휜 것이, 다른 용과 착각할 리 없는 특이한 용모였다.
그리고, 정식으로 지구시민권을 땄거나 체류자격을 인정받은 용 중에 민준이 모르는 개체는 없다.
‘불법 체류? 아니면···.’
머릿속에 젠킨슨의 말이 스친다.
– 전남편 죽고 나서도 꼭 천 살 넘게 차이나는 연하만 골라 만난다니까? 지구에는 소문이 쫙 퍼져서 안 넘어가니까 외계까지 남자 사냥 다니는 걸로 유명해!
– 그렇게 만난 남자 중에도 실종된 애가 몇 있어! 물론 증거가 없어서 다 무혐의로 처리되었지만.
한 가지 가정이 떠올랐다.
‘외계에서 꼬신 다음 납치해서··· 지구에 가둬 놓고 있었다?’
젠킨슨이 단언한 말이 머릿속을 채운다.
– 그 여자 정신적으로 좀 문제가 있어. 사이코패스야!
저절로 표정이 일그러졌다.
‘젠킨슨 말이 맞았군.’
일단 창천이 정상적인 용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알겠다.
그렇다면 대체, 여기에서 뭘 하려는 것인가?
민준은 방의 구조와 곳곳의 결계, 마법진의 구성을 살폈다.
용이 갇힌 유리관 상부에도 예의 그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었다. 파이프는 비어 있는 또 하나의 유리관과 연결된다. 빈 용기 속 결계를 살피던 민준이 눈썹을 찡그렸다.
‘달란트를 안정화할 때 쓰는 결계잖아?’
지금은 비어 있지만 본래 달란트를 넣는 용도라는 뜻이다. 그 위에는 다시 파이프가 연결되어 일부는 빈민들이 봉인된 방으로 이어지고, 또 일부는 이 너머에 있는 또 하나의 방··· 아직 민준이 확인하지 않은 구역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민준은 세 번째 방에 뭐가 있을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까부터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운 절규가 그곳에서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다.
산 채 갇혀 있는 용을 지나 그곳으로 향하자.
“······!”
그곳에는 죽은 채 갇힌 용이 있었다.
화르륵!
평범한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 영적 열기가 사방에 가득했다.
=살려줘! 내가 잘못했어··· 창천! 제발··· 아아! 뜨거워. 여긴 너무 뜨거워!=
영적인 불꽃 속에서 몸을 뒤트는 망령. 절규하며 미친 듯이 발버둥친다. 아니, 실제로 이미 미쳐 있는 것으로 보였다.
민준은 이를 악문 채 바라보았다. 특히 머리 위에 돋은 뿔을 유심히 관찰했다. 기묘한 모양으로 휘어 있는 골질 결정체. 그는 방금 저것과 거의 똑같이 생긴 뿔을 배양액 속에서 보았다.
자연스레 비교하게 된다. 유리관 속에 갇힌 용을 태워버린다면 저 망령과 비슷한 모습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외계의 용과 달리 민준은 저 망령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확실하다. 중국에서 죽어버린 창천의 전남편이야. 무슨 짓을 꾸미고 있었는지 이제 대충 알겠군.’
민준은 유령을 가둬 놓은 결계와 마법진 역시 유심히 살폈다.
‘하지만, 대체 누가 가르쳐 준 거지?’
이곳에 구축된 마법진에는 민준도 모르는 원리가 숨어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의구심 속에서도 일단 모두 기억해 둔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젠킨슨이 창천을 칠 증거를 잡았고, 달란트를 활용하는 걸로 보이는 마법진 구성도 암기했다.
의료원 빈민들을 납치한 범죄 역시 밝혀냈다.
관찰을 끝내고 민준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렸다. 이곳의 누군가 지상으로 올라가는 틈을 노리면서.
– 삐빅!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무전을 받은 연구진 하나가 그것에 응하며 상층부로 돌아가려는 낌새를 보인 것이다. 민준은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가 냉큼 안으로 몸을 날렸다.
그렇게 지하 30층에 머물러 있던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으로 올라간 순간.
문이 열리고.
“!”
민준은 이곳에서만큼은 절대 볼 일 없기를 바랐던 이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쏟아지는 시선.
‘이런!’
그와 함께 올라온 연구원은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이, 이게 뭐···.”
많은 이들이 흉악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 홀에 모여 있었다. 탑승을 위한 대기줄은 물론 아니다. 연구원을 기다리고 있던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시선은 민준의 정확한 위치를 찾지 못하고 살짝 어긋났지만 단 한 명만큼은 정확하게, 또렷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비웃음이 담긴 목소리.
“그래··· 구경은 잘 하고 오셨나?”
툭!
거리를 정확하게 잰 것이 분명하다. 상대가 그를 향해 묵직한 것을 던졌다. 공중에 뜬 민준의 발 밑에 무언가 데구루루 구른다.
민준이 알고 있는 자의 잘린 목이었다.
***
민준을 레어에 침입시킨 뒤, 젠킨슨은 약속 장소에서 창천을 기다리고 있었다.
비서에게 투덜거린다.
“아니 그 할망구는 왜 새벽 세 시부터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그녀가 약속 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출발하여 서울 시내를 순회한다는 첩보가 곳곳에 심어 놓은 스파이를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오랜만에 외출한 김에 회사들을 둘러보는 중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일찍 가도 어차피 출근한 사람이 없을 것 아니냐는 질문은 창천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이다.
그녀가 움직인다는 소식은 부하 직원들에게 미리 전달되었을 것이고, 그들은 기업 총수의 왕림을 맞이하기 위해 새벽 세시든 네시든 집에서 뛰쳐나와 의복을 단정히 갖추고 공손하게 대기타고 있었을 터.
“아무튼, 지독한 여자라니까.”
그렇게 중얼거리는 도중 블레어가 또 한 번 업데이트를 전했다.
“방금 창천종합보험 본사 건물에서 텔레포트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다음 목적지는?”
“아직은 잘···.”
젠킨슨은 시계를 봤다. 약속 시간이 20분 밖에 남지 않았다.
“아마 여기로 오겠지. 시간 약속을 어기는 할망구는 아니니까.”
이제 곧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생각하며 젠킨슨은 이야기할 내용을 점검했다. 어디까지나 민준이 무사히 돌아올 때까지 시간을 끄는 것이 목적이었다.
“!”
그런 드래곤의 상념은 중간에 난폭한 방식으로 끊길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자 블레어가 당황하며 물었다.
“회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젠킨슨은 방금 자신이 구축한 결계 하나가 외력에 의해 무너졌다는 걸 감지했다.
그는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소리쳤다.
“대체 어떤 놈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순간.
띠리리리!
젠킨슨과 블레어의 전화기가 동시에 울린다.
“!”
두 사람은 딱딱한 시선을 교환한 뒤 즉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들은 두 사람에게 같은 내용을 전달했다.
젠킨슨이 공을 들인 안전가옥에서 보호하던 ‘증인’이 방금 정체불명의 존재에게 납치당했다는 보고였다.
***
민준은 바닥을 잠시 노려보았다.
상대가 발치에 던진 머리는 난폭한 방식으로 뜯겨 나간 것이 분명했다. 빛이 사라진 동공을 바라보다가 민준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이미 투명화 마법은 간파당했을 터다. 이를 악문 채 상대를 노려본다. 엘리베이터 홀에서 자신을 기다리던 자. 시선이 얽혔다.
민준은 지금 시간이면 분명 젠킨슨을 만나고 있어야 할 드래곤의 이름을 말했다.
“창천!”
잠시 후 약속시간이 되어도 고룡 간 회담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애초부터 오늘 젠킨슨을 만날 생각이 없었다.
새벽 일찍 나선 것도 다른 목적 때문이었다.
“속았군. 젠킨슨도, 나도.”
고블린 노파의 모습을 한 채 고룡은 여유롭게 웃는다.
“그래. 맞아.”
빈정거리듯 말했다.
두 고룡이 만나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 자신의 레어 밖으로 나와야 한다.
창천이 자리를 비우게 된다면 젠킨슨도 마찬가지였다.
“레어에 심어 둔 스파이라고? 젠킨슨도 머리가 굳었군. 그에게 가능한 일이 왜 내게는 불가능하다고 어림짐작을 하는 거지? 내가 용언으로 맹세한 것은 어디까지나 군사조직을 형성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어. 그리고··· 알겠지만 정보조직이라는 것은 항상 애매한 카테고리에 속하지.”
레어 표면의 대결계 때문에, 이 안에서 창천의 허가 없이 외부와 마법 통신은 불가능했다.
젠킨슨은 지금쯤 알아차렸을까?
그의 발치에 뒹구는 목은 트롤의 것이었다. 레드 드래곤이 배치한 스파이이자 민준이 모습을 흉내 낸 원본. 조리부에서 일하던 진짜 직원이다.
지금쯤 위조 여권을 가지고 필리핀의 따뜻한 섬으로 떠났어야 할 그는 목이 뜯긴 채 끔찍한 모습으로 죽었다. 터져버린 한쪽 눈과 갈기갈기 찢긴 피부, 화상 자국과 으깨진 귀가 그가 겪은 고초를 나타냈다.
아마도··· 더 이상 재생력을 발휘할 수 없을 때까지 괴롭힘 당하다가 절명했으리라.
“······.”
민준의 시선이 이번에는 창천의 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팔 하나가 없어진 여자가 몸을 옅게 경련하며 서 있었다. 뒤통수에는 창천의 부하가 겨눈 총구.
안전가옥에서 보호하고 있어야 할 하은성이 그곳에 서 있었다.
동공이 반쯤 풀린 눈으로, 공포에 질린 채.
살아있는 여자 몸에 갇힌 유령이 고룡에게 납치당해 이곳으로 끌려왔다.
창천은 젠킨슨을 만나러 나가는 척하면서 그 짧은 시간 내에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고 온 것이다.
‘어떻게? 정보가 어디서 샌 거지?’
고룡이 느긋하게 말한다.
“그럼, 젠킨슨이 없는 이곳에서 우리끼리 대화를 좀 해 볼까? 외계인.”
민준은 등 뒤에서 부글거리는 그림자를 소환하는 것으로 창천의 제안에 답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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