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64
64. 21세기 로빈 후드 (18) >
***
고룡 간의 싸움은 육탄전과 마법전이 융합된 형태였다.
젠킨슨과 창천은 지구에 사는 생명체 중 가장 단단하며 누구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육신을 충분히 활용했다.
레드 드래곤의 공격은 이빨과 두 팔, 다리 및 동체, 박치기까지 동원한 다채로운 형태였으며 창천은 길다란 육신을 채찍처럼 활용했다. 국가 경제를 움직이는 두 축의 싸움이라기엔 지나치게 야수적이고 본능적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말이다.
하지만 둘은 몸으로 공격을 주고받는 사이에도 치열한 주문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용의 여섯 개의 뇌 중 하나는 오로지 마법 연산을 위해 할애된다. 인간 등 다른 종족은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바쁜 연산과 함께 일 초에도 수십 개의 주문이 구성되었다 취소되고, 변형되기를 반복했다.
치열한 수싸움.
그러는 사이 성공적으로 발동된 마법은 정교한 타격점을 찾고 술사를 절묘하게 피해 상대에게 직격했다. 젠킨슨이 박치기를 날리는 동시에 액화질소가 창천의 비늘을 얼리고, 그녀가 얼음을 털어내며 젠킨슨 날개에 이빨질을 하는 찰나 뒤틀린 중력이 그의 뒷통수를 두들기는 식이었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머리 아픈 몸싸움을 벌이는 중에도 창천은 무언가를 관찰하고 있었다.
‘저 외계인은 안 끼어 들잖아?’
민준은 그들과 거리를 두고 정신을 집중하여 하나의 주문을 만들고 있었다.
주변에는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꿀렁댄다. 그녀를 공격할 결정타를 준비하나 싶었지만 곧 그런 게 아님을 깨달았다. 외계인의 주문은 창천이 그들을 통째로 레어 밖으로 집어 던질 때 쓴 마법진과 비슷했다.
‘텔레포트?’
술사를 포함한 주변 다수 개체를 한꺼번에 이동시키는 주문.
‘하지만 왜 지금?’
답을 금방 추측할 수 있었다.
그들이 지금 싸우는 곳은 레어 위, 남산 상공이다. 혹시라도 레어에 피해가 갈 것을 우려한 그녀가 일부러 고도를 조종했기에 아직 싸움의 여파가 지상까지 미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길어진다면?
‘그렇군. 도심이 파괴될까 두려워하는 거군. 그래서 전장을 강제로 옮기려는 거야.’
실소가 나오려고 했다.
창천도 서울 곳곳에 부동산 및 기업체를 보유했다. 그러나 이미 류호를 데리고 이 땅을 뜨기로 결심한 마당에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손실이 나든 말든.
하지만 젠킨슨 입장은 다를 것이다. 재산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최대한 막으려는 것.
‘저게 약점이군!’
창천은 생각한다.
그렇다면, 자신의 약점은?
발 아래의 레어, 류호가 갇힌 마법진이었다.
그걸 뻔히 아는 외계인은 레어를 붕괴하겠다고 협박하고 남산 상업지구에 마법을 떨어뜨리며 으름장 놓는 대신 싸우는 장소를 바꾸려고 하고 있다.
‘머저리들.’
창천은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젠킨슨과 치고 박고 싸우는 중에도 레어의 대결계를 부활시켰다. 그 탓에 탈출하던 고용인들이 입구를 지나다가 갑자기 닫힌 문 때문에 압사당하거나 몸이 절단되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흐느낌과 절규가 이어졌지만 그녀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가 레어 내부의 안전을 확보하자, 젠킨슨에게 쏟아지던 연쇄적인 주문이 잠시 멈춘다. 레드 드래곤은 그 기세를 타서 창천을 제압하려고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창천이 마법 공격을 잠시 중단한 이유는 간단했다. 짧은 공백을 더 강력한 주문을 위해 할애한 것이다.
그 결과, 젠킨슨과 민준 앞에 본 적이 없는 별자리가 나타났다.
=?!=
그 광경을 멀리서 목격한 시민들은 남산 위에 소리 없는 폭발이 일어난 것인가 의심했다.
태양 아래에서도 위세를 잃지 않는, 선명하고도 거대한 섬광. 거리를 두고 관찰하면 하나의 거대한 광구(光球)처럼 보였다. 마치 또 한 개의 태양이 뜬 것처럼.
하지만 충분히 접근한 자들, 예를 들면 대피 중이던 남산 인근 시민들은 알 수 있었다. 실상은 거대한 하나의 광원(光源)이 소환된 게 아니라, 사람 머리통 만한 빛 덩어리 수백 개가 창천 주변에 나타난 것이었다. 그것들이 뿜어내는 빛이 서로 합쳐서 무지막지한 조명 기능을 한 것.
그것을 본 젠킨슨이 경악했다.
=창천! 네가 정말, 미쳐버렸나?!=
창천은 조소했다.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서로를 광인으로 치부하는 두 용의 시선이 교차했다.
수백 여개의 작은 구형(球形) 결계 속에 담긴 것은 고정된 형태가 없는 열과 파괴력이었다. 젠킨슨은 그것이 자연상태에서 존재할 수 없는 초소형 항성(恒星)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저 투명 결계는 끓는 점이 가장 높은 텅스텐도 견딜 수 없는 초고온 플라즈마를 담고 있다. 한 마디로 저 하나 하나의 구체가 모두 핵융합을 하는 중이다.
그리고 창천이 몸을 뒤튼 순간.
팟!
폭죽이 터지듯 창천을 중심으로 빛의 모래가 사방에 퍼진다. 발 아래 레어를 제외한, 서울시의 요지 곳곳을 노리는 미사일이 뿌려졌다. 강판 재질의 외피 대신 결계를 껍데기로 삼은 탄환이었다.
젠킨슨은 더 이상 창천과의 몸싸움에 집중할 수 없었다.
=젠장!=
고룡은 민준이 움직이기 전에 다급히 외친다.
=민준! 내가!=
생략된 문장의 의미를 동료는 이해했다. 민준이 계속 자신의 주문에 집중한 사이 젠킨슨은 급속히 마력을 끌어올리며 인력(引力)을 발생시켰다.
창천의 유도대로 자유롭게 사방으로 퍼지던 구체들이 멈칫거리며 속도를 늦춘다. 젠킨슨은 안간힘을 다하여 그것의 방향을 전환시키고, 저 높은 상공으로 집어 던졌다.
“커억!”
무리한 마력의 운용 때문에 내부 장기가 뒤틀리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아픔에 집중할 여유를 상대는 주지 않는다.
주문을 빗겨내는 데 힘쓰는 틈을 노리고 창천이 달려들었다. 몸싸움이 벌어지고 크고 작은 주문이 폭격처럼 쏟아지진다. 그 와중에도 젠킨슨은 마법탄환의 유도를 멈추지 않았다.
높이!
더 높이!
—–!
그리고 마침내 저 멀리서, 묵직한 폭음과 섬광이 퍼져 나갔다.
눈부신 빛이 까마득한 상공에서 작렬한다.
대참사를 겨우 피한 젠킨슨이 분노에 타오르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 백 번 쳐죽여도 시원치 않을 사이코패스 년이!=
민준의 주문이 완성된 것은 그때였다.
팟!
주변 풍경이 또 한 번 바뀌었다.
창천은 민준이 자신들 모두를 서해 바다 위로 전이시켰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멀리? 고룡 둘까지 포함해서? ···저 외계인 정체가 뭐지?’
민준이 조용한 분노를 담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고룡은 생각했다.
‘숨긴 재주가 제법 여럿 있는 것 같지만, 그래봤자 상황이 뒤집힌 건 아니야.’
결국 상대가 주문을 완성시키도록 허락했지만 얻은 것도 있었다. 젠킨슨에게 상당한 피해를 준 것이다. 일단 저 고룡만 먼저 처치한다면 외계인은 어렵지 않으리라.
그 뒤로는 위원회를 피해서 차원 밀항을 거듭하며 도주생활을 시작해야겠지만··· 최악의 사태가 와도 목숨 정도는 부지할 자신이 있었다.
화르르!
민준의 몸이 그림자로 휩싸인 순간 2차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창천은 자신이 저 외계인에 대해서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건, 힘을 숨긴 정도가 아니잖아!’
창천도 외계인 수형자에 대해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다. 각종 끔찍한 짓을 저지르다가 위원회에 체포되어 몸으로 죄값을 갚는 자들. 드래곤들이 그들을 굳이 건드리지 않는 것은 뒤에서 버티고 있는 위원회와 갈등을 빚는 것이 꺼려지기 때문이지, 수형자가 무섭기 때문은 아니다.
제 아무리 날고 기는 자들이라고 해도 엘더 드래곤을 따라잡을 수는 없다. 체포되기 전 정체가 용이라고 해도, 위원회가 그들에게 새 몸으로 용체(龍體)를 주지 않는 이상 고룡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그런데 저건···!’
젠킨슨과 민준의 공격이 연계되는 흐름은 기묘할 정도로 유려하고 부드러웠다. 둘이 한 두 번 합을 맞춰 본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고룡에게 저주가 통할 리 없기에 민준은 좀 더 노골적인 방식의 공격에 집중했다. 젠킨슨의 동선과, 그가 만드는 마법의 궤도가 얽히지 않도록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며 마법을 쑤셔 박는다.
두 고룡의 육신과 비교하면 그는 작은 날파리에 불과했으나, 방심한 순간 치명타를 날릴 수 있는 날파리였다. 그가 그림자로 감싼 칼날이 비늘의 틈을 스치고 지나갔을 때 창천은 그 작은 한 뼘 때문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가 소환한 그림자는 용의 몸을 둘러싼 결계와 비늘마저 관통하는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용의 공격 사이 공백을 민준이 파고든다. 칼을 휘두를 때 마다 비늘이 쪼개지고, 살점과 핏덩이가 바다 위로 떨어져 파문을 만들었다. 겉으로 보이는 상처는 미약했으나 몸 속으로 파고드는 충격은 적지 않았다. 젠킨슨 역시 방금 전의 일 때문에 데미지를 입은 기색이 역력했으나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말살하겠다는 의지에 불타서 지독하게 달려들었다.
창천은 점차 자신이 지쳐가는 것을 느꼈다.
젠킨슨이 기습적으로 주문을 발동한 것은 그때였다.
화앗!
용의 몸을 가리는 거대한 마법진.
원을 중심으로 백색의 빛줄기가 거미줄처럼 뻗어 나갔다.
그것은 드래곤이 레어를 보호하기 위해 만드는 대결계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었다. 본래는 방대한 구역을 덮어야 할 저항력, 또는 공간을 ‘단절’하는 속성을 폭 0.2밀리미터 선에 응축. 그대로 수백 가닥을 뽑아 거칠게 풀어놓는다. 엄청난 탄성과 강도를 지닌 그 채찍을 버텨낼 물질은 드물다.
용의 비늘조차도.
캬아아아악!
젠킨슨이 만든 백색의 실은 창천의 몸을 휘감아 묶었다. 그가 정신을 집중하자 비늘을 베고 살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한다. 그녀가 길죽한 몸을 요동칠수록 절단면이 깊어지고 주륵, 핏방울이 흘렀다.
고룡은 웃는다.
=흥! 밧줄에 걸린 뱀장어 같은 꼴이군!=
그리고 다음 순간, 젠킨슨은 자신이 하필이면 그 단어를 언급한 것을 후회하였다.
파지지직!
사슴의 그것을 닮은 창천의 두 뿔 사이에 스파크가 일어난다.
작은 불씨가 대화재로 번지는 것처럼, 아주 작은 섬광이 웅장한 벼락으로 변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런!=
빛나는 그물에 묶인 창천이 온 몸으로 번개를 뿜었다.
=크으윽!=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가, 다시 검은 얼룩이 광열 속에 물방울처럼 튀었다. 1초에도 수십 번씩 형태를 바꾸는 벼락에 따라 셋의 그림자도 미친듯이 춤췄다. 금속에 비견되는 질량을 가진 것이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묵직하게, 벼락은 젠킨슨의 몸을 때렸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시리고 아팠다.
이 벼락 속에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창천뿐이었다. 그녀가 만든 마법이, 그녀가 만든 결계에 더욱 우호적으로 작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대로 젠킨슨을 구워 버리려는 의도로 전력의 출력을 높이던 그 때.
쉬이잉!
창천이 잠시 잊고 있었던 존재가 그녀의 뒤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
그녀가 잠시 눈길을 돌린 사이 민준을 감싼 그림자는 모습을 바꾼 상태였다. 인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던 형태를 무너뜨리고 두 팔을 서로 엮어 드릴처럼 만들었다.
몸 일부를 일그러뜨린 구조물을 전방으로 겨눈 채 민준은 용의 뒷덜미를 향해 날아들었다.
콰아아아아!
창천은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따라서 검은 색 드릴이 된 민준은 노렸던 뒷덜미 대신 조금 아래에 위치한··· 인간으로 치면 가슴에 해당할 높이에 파고들었다.
공기를 찢으며 박히는 그림자 원뿔.
푹!
파파팍!
역동하는 회전체에 밀려 비늘이 쪼개지고 점막이 갈라진다. 그렇게 살점 깊숙이 드릴을 박아 넣자 솟구치는 용의 피가 전류와 만났다. 상당량은 바로 끓어서 증발했지만 폭포처럼 쏟아진 터라 일부는 민준의 입가까지 튀었다.
“······!”
아릿한 향. 생소한 동시에 익숙한 느낌. 치열한 전투에 어울리지 않는 감각이 민준을 감싼다. 기분 좋은 바람 같기도 하고, 따스한 파도 같기도 한 기묘한 고동. 기억을 잃은 수형자는 오묘한 감회에 사로잡혔다.
엘더 드래곤의 피를 마셔 보는 게 얼마 만이더라?
왠지 모르게 기분이 고조되는 것을 느끼며, 민준은 그대로 자신을 보호하던 저항력을 조금 낮췄다.
물론, 그 순간에도 창천은 뿜어내던 전류를 멈추지 않은 상태.
파지지지직!
용의 비늘을 타고 달리던 고압의 전류가 민준의 그림자를 전도체로 삼아, 창천의 몸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
젠킨슨과 민준이 창천과 싸우고 있던 그때, 하은성은 여전히 창천의 레어 안에 있었다.
그는 이제 자유로운 영체상태로 돌아온 뒤였다. 이 안에 얼마나 많은 퇴마진이 설치되어 있든 그의 자유를 구속할 수는 없으니 이대로 날아서 도망치면 그만이다.
하지만 하은성은 그러지 않았다.
한편, 내부에서는 창천에게 고용된 이들 사이에서 큰 혼란이 벌어진 상태였다. 유령은 조용히 관찰한다.
“아아! 엘리베이터가 꼼짝도 안 해!”
“젠장, 어떻게 좀 해 봐!”
“지, 지금 대결계가 다시 작동을 시작했어!”
“뭐라고?”
“거기에 문까지 닫혀 버렸어! 우린 여기 갇힌 거라고!”
하은성은 여전히 지하 30층에 있었다.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목격한 고용인들은 심상치 않은 일이 발생했음을 직감하고 어떻게 해서든 도망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아 보였다.
유령이 지금까지 이곳에 남아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그는 창천이라는 이름의 고룡이 한 말을 들었다.
– 이번주 광화문 광장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유령 집회가 열린다더군.
– 가장 적절한 타이밍은 집회가 끝난 직후겠지? 거기에 네가 망령을 풀어서 최대한 많은 유령을 잡아왔으면 좋겠어.
인간의 육신에서 벗어나자 마자 용에 대한 공포는 너무도 쉽게 사라져버렸다. 대신에 분노가 그 자리를 채웠다.
‘유령들을 붙잡아서··· 갈아버리겠다고? 그리고, 저 망령의 먹이로 주겠다고?!’
다행히 민준은 그 제안에 응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고 둘은 사생결단을 내기 위해 레어 밖으로 나간 것으로 보였다.
하은성은 생각했다. 그러면 나는?
난 이대로 도망치면 되나?
‘아니, 그럴 수 없어.’
하은성은 고용인들을 관찰하며 누군가를 찾았다. 망령을 가둬놓은 시설이니 당연히 이 중에 영체감응력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발견했다. 무당 체질인 엘프를.
“헉?! 너는···!”
그를 발견하고 놀라는 엘프에게 유령은 거칠게 뛰어들었다.
“헙! 안 돼! 하지 마!”
하은성은 엘프의 몸을 억지로 빼앗으려고 시도했다. 이번에는 지선경 때처럼 상대의 영혼을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고, 몸 밖으로 쫓아 내려는 것도 아니라 잠시 몸을 같이 쓰려는 것이었다.
=에잇! 엄청 끈질기네! 잠시만 있어 봐요. 잠깐만 쓰고 줄 테니까!=
“으아아악! 안 돼! 나가! 하지마!”
그런데, 그런 의도와 상관없이 발버둥과 몸부림이 길어지다 보니 저도 모르게 어떤 생각과 감정을 느낀 듯했다.
화앗!
그의 영혼 속에서 달란트가 반응하여 빛을 내자 하은성은 기겁했다.
=야! 안 돼! 안 돼! 그러지 마! 그런 거 아니야!=
하은성은 달란트가 그의 의도 이상의 짓을 벌여서 사고가 날까 걱정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휴우, 됐다.”
엘프의 혼을 해하지 않고서도 몸을 빼앗은 하은성은 팔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가뿐했다. 이제는 신기하지도 않았다.
‘이것도··· 달란트의 힘인가?’
하은성은 고개를 돌려서 자신이 가야할 곳을 바라보았다.
여자의 몸에 갇혀 있을 때 갑자기 나타나서 자기 팔 하나를 뜯어 버리고, 납치하고, 애꿎은 사람들의 영혼을 소멸시키는 데에 써먹으려고 하고, 거기에도 모자라 자신의 유령 친구들을 영원히 ‘소멸’시키려고 한 창천에게 원한이 쌓이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민준이 따라붙은 것 같긴 하지만 상대는 고룡이다.
혹시라도 그 요원이 패하고, 창천이 계획을 실행한다면?
망령을 조종하는 독특한 능력을 가진 자가 세상에 또 없으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막아야 해!’
유령은 법률로 보호받지 못한다.
만약 그 고룡이 정말 광화문에 모이는 고스트들을 모조리 납치해도 나라는 나서지 않을 것이다.
유령의 권리는, 유령이 보호해야 한다.
‘어떻게 그런 일을 꾸미고, 또 실행하려는 마음을 먹을 수 있지?’
하은성은 창천에 대해 생각한다.
가장 무서운 부분은 그런 터무니없는 계획을 실행에 옮길 힘을 그녀가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건 뭔가 잘못 되었어.’
그것도 많이 잘못되었다.
그런 힘을 손에 쥔 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이 세상에 섞여서 살아가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어쨌든 지금 하은성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성공한다면, 창천이 그 계획을 더 이상 추진할 필요가 없도록 만들기에 충분한 일.
‘창천인지 뭔지, 엿이나 먹으라지!’
오늘부로 세상의 모든 종족 중에 용을 가장 혐오하게 된 유령은, 결연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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