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Chapter 63
67. 21세기 로빈 후드 (17) >
***
고룡은 민준을 데리고 지하 30층으로 내려갔다. 창천이 빈민을 ‘수집’한 이유는 그곳에서 밝혀졌다.
“달란트는 다양한 방법으로 영혼에 간섭할 수 있지. 산 자의 몸에서 혼을 뽑아낼 수도 있고, 반대로 다른 몸에 집어넣을 수도 있어. 아예 영혼을 소멸시킬 수도 있고, 그 강도를 조금 약하게 하면 혼이 붕괴하고 분열토록 만들 수도 있고.”
“분열시킨다고?”
플라나리아처럼 토막 내면 둘로 증식이라도 한다는 소린가?
하지만 창천이 말한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달란트의 힘으로 영혼을 극미세 기초 입자 단위로 붕괴시키는 거지. 존재를 구축하는 가장 순수한 에너지로.”
“그런 다음은?”
예상한 답이 나왔다.
“그걸 류호의 망령에게 흡수시킬 거야.”
“카바이트가 알려준 방법이 그건가?”
“그래. 망령은 결국 불완전한 유령이야. 끔찍한 죽음 때문에 손상되고 금이 간 영혼. 놔둬서 저절로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시간을 앞당기고 싶다면?”
손상되지 않은 온전한 영혼을 갈아서 치료약으로 쓰겠다는 이야기였다.
이미 잡혀온 빈민은 수백에 이른다. 그곳에 놓인 빈 유리관까지 합하면 수천 개였다는 것을 민준은 기억했다.
“류호를 살리기 위해, 다른 용 하나와 수천의 인간, 오크, 고블린을 희생시킨다고?”
“그게 본래 계획이었지.”
그럼 지금은 바뀌었다는 건가?
민준은 시큰둥한 어투로 말했다.
“이제와 계획을 바꾼 건, 아무리 생각해도 가성비가 너무 떨어져서?”
“그런 이유는 아니야. 나는 고룡이잖아? 그 정도쯤은 주장해도 된다는 생각은 변함없어. 내가 원한다면 바쳐야지. 하찮은 종족들 역시 내 덕을 보며 살아가니 그만한 희생은 정당한 요구라고 생각하는데.”
민준은 속으로 생각했다. 저건 무슨 또 개또라이 같은 소리야?
창천은 확신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 나라로 오고 나서 수십년 간 새로 만들어낸 일자리가 200만개가 넘어. 내가 통제하는 기업집단의 매출은 한국 GDP의 20%를 차지하지. 나의 진짜 부(富)는 레어 안에 갇혀서 빛을 못 보는 죽은 재화가 아니야. 대신, 경제망이라는 이름의 혈관을 채우고 산소와 영양 대신 부가가치를 나르는 혈액 역할을 하지. 내가 없었으면 생계를 이어 나가지 못할 자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나?”
“······.”
“생명의 가치는 동등하지 않아. 내가 하등 종족 수천의 희생을 요구한다면 이 사회는 받아들여야 해. 그것도 이 나라 경제에 전혀 기여하지 못하는, 공동체의 사이클에서 낙오된 쓰레기들을 요구할 경우에는 말이야. 그런 자들을 수천, 수만 모아 놓아 봤자 내 가치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지.”
존엄성에 상대평가를 적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드래곤 다운 말이었다.
민준이 넌지시 그 말의 모순을 지적한다.
“하지만 당신은 드래곤도 하나 희생시킬 거잖아?”
“아직 여물지 못한 용이지. 제대로 기여한 적도 없고, 쌓아 놓은 보물도 없는.”
“그건 류호도 마찬가지 아닌가?”
“다르지. 그 애는 내게 선택 받았잖아? 내게 필요하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가치를 지니는 거야. 물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젠킨슨 그 멍청이는 기겁을 하겠지만.”
그러더니 짜증이 섞인 투로 말했다.
“아무튼 내 신념은 변함없지만 계획에 약간의 수정이 필요해.”
용은 민준에게 당당하게 요구했다.
“그 얼간이 때문에 서둘러야 겠어. 의료원 건물을 새로 짓고 더 많은 쓰레기를 수집할 시간이 부족하다는 뜻이지. 기껏 계약까지 해 놨더니···. 네가 입을 다물면 젠킨슨은 결정적인 증거는 찾지 못하겠지만, 그렇다고 쉽게 포기하지도 않을 거야. 의심을 품은 이상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증거를 캐려 하겠지. 그러니 네가 도와줘야겠어.”
“어떻게?”
“갈아버릴 영혼이 많이 필요해. 망령화되지 않은, 제대로 된 영혼이.”
그녀가 비릿하게 웃었다.
“최근에 알았는데 네게 별난 재주가 있더군. 흑마법의 원리에 기댄 사령술이라고 해야 하나?”
근래 민준이 살아있는 자들 앞에서 사령술을 쓴 적이 딱 세 번 있다.
북한산 창고 도난 현장에 갔다가 엘프와 요정 앞에서 한 번.
자폭으로 죽어버린 레드 스타 끄나풀이를 심문하기 위해 창천은행 경비원들 앞에서 한 번.
레드 스타의 이능력자 양성소에서 일반인들을 대피시키기 위해서 한 번.
그 중 어떤 경로일지 모르겠지만 창천의 귀까지 내용이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재료가 될 영혼이 꼭 산 자의 것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미 죽은 자의 영혼도 갈아버리면 다 똑같잖아?”
본래 죽는 순간 영계로 성불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지상에 구속되어 머무는 자들도 존재한다.
“이번주 광화문 광장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유령 집회가 열린다더군.”
창천이 웃었다.
“가장 적절한 타이밍은 집회가 끝난 직후겠지? 거기에 네가 망령을 풀어서 최대한 많은 유령을 잡아왔으면 좋겠어.”
퇴마진이라는 방법도 있긴 하지만, 그토록 많은 귀신들을 한꺼번에 잡아 들이는 일은 사령술사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다시 말해 이 근방에서는 민준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답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군. 하지만 나도 한 가지 조건을 걸지.”
“어떤?”
“이 마법진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내 두 눈으로 봐야겠어.”
설사 카바이트의 기술이라고 해도 실제로 잘 작동하는지 확인하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겠다는 말에 창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운전이 필요하다는 거지? 좋아. 일단 고블린 한 마리 정도 영혼을 뽑아서 분해해 보지. 네 앞에서, 바로.”
“잠깐만.”
민준은 아직도 공포에 질린 채 묶여 있는 하은성을 턱으로 가리켰다.
“쟤를 데려온 걸 보니 이미 사정은 들었겠지만···. 달란트는 저 영혼 속으로 흡수된 상태인데, 상관없나?”
용은 여유롭게 웃었다.
“문제없지. 오히려 잘 됐어. 대체 어쩌다가 융합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취급하기가 쉬워졌으니까. 어떻게 보면 저 몸뚱이는 가장 안정적인 지갑이자 금고잖아?”
그녀가 신호를 주자 수행원들이 하은성을 끌고 움직였다. 연쇄마법진 중 본래 달란트를 넣기 위해 설계된 장소로 데리고 가는 것이었다.
“?!”
그때.
새파랗게 질린 하은성의 머릿속에 민준의 텔레파시가 파고 들었다.
=야! 정신 똑바로 차리고 내 말 들어!=
***
잠시 후, 하은성은 투명한 결계 속에서 연구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있었다.
멍하니 생각한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고룡이 준비한 안전가옥이니 절대 깨질 수 없다고 장담했던 은신처는 너무도 쉽게 뚫렸다. 무표정한 고블린이 손짓을 하자 팔 한쪽이 뜯겨져 나가던 고통이 지금도 생생했다.
상대의 정체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고룡의 결계를 깰 수 있는 자 역시 고룡일 터.
‘젠장, 젠장!’
다시 그때의 공포감이 밀물처럼 올라오려는 찰나.
‘안 돼, 정신 차리자!’
이곳에 끌려오기 직전 민준이 그의 머릿속에 날카롭게 쑤셔 박았던 의미 덩어리에 집중한다.
하은성이 어떤 생각에 몰두하기 시작했을 때, 민준은 고룡과 함께 관제실에서 시운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퍼레이터가 말했다.
“작동합니다!”
고룡의 허가와 함께 마법진에서 빛이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우우웅!
‘흐음.’
민준은 그 광경을 조용히 관찰한다. 마법진이 마력을 어떻게 흡수하고, 어떤 식으로 변환하는지,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 전체적인 흐름을 모두 눈에 담았다.
딱 봐도 아직 본격적인 단계로 접어들지 않았음에도 일부러 감탄하는 듯 말했다.
“인상적이군.”
고룡이 웃었다.
“당연하지. 고대 종족이 직접 설계한 마법진인데.”
창천의 부하가 말했다.
“출력을 좀 더 높이겠습니다.”
우웅!
그들이 기판을 조작하자 하은성을 감싼 공간이 거칠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계 속에 무거운 파동이 휘몰아치는 찰나, 하은성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섬광을 보았다.
‘아··· 역시!’
그의 내면에서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영혼과 결합된 달란트가 마법진과 공명하고 있었다. 달란트에서 흘러나온 섬광이 파동에 섞이고, 결계에 연결된 파이프는 그것을 흡수하려 했다. 민준이 말하길, 옆 방에 갇힌 고블린의 영혼을 강제로 분리하려는 목적이라고 했다.
이대로 방치한다면 그렇게 되고 말 것이다.
하지만 하은성은 민준의 말을 떠올렸다.
‘지선경의 영혼을 쫓아낸 게 아니야. 그걸 소멸시켜 버린 거라고! 그건 그냥 우연이 겹친 사고가 아니었어. 넌 그때 분명 의지를 담아 기원했지? 지선경을 없애버리고 싶다고. 알겠어? 달란트가 네 의도대로 힘을 발휘한 거야!’
위급한 상황에서 무의식적으로 달란트의 힘을 끌어냈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마법진이 그것과 공명하며 속에 품은 에너지를 자극하고 있었다.
또한, 이 결계의 파동은 명확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움직이고 있었다. 산 자의 몸에서 영혼을 뽑아내는 것.
‘이 여자 몸에 계속 갇혀 있으면 저 드래곤이 언제든지 손을 댈 빌미를 주게 돼!’
그 전처럼 영체 상태였으면 이렇게 쉽게 납치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죽은 자에게 부활은 한없이 달콤하고 탐나는 열매일 수도 있으나, 지금 하은성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답은 간단했다. 지선경의 몸에서 탈출해야 한다. 그리고 하은성은 그 방법의 교과서가 되어줄 마법진 속에 있었다.
그는 집중한다.
‘나가고 싶어. 난 여기가 싫어.’
순수한 염원을 담아서 기원했다.
‘난 여기 있기 싫어.’
본래 고블린의 영혼을 뜯어내려는 목적으로 움직이던 파동과, 고블린을 향해야 할 달란트의 힘이 그 방향을 바꾼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여기가 싫어!’
그리고 하은성의 의지에 감응하듯 빛과 파동이 씨실과 날실처럼 엮여서 폭발했다.
***
민준은 유리창 너머로 마법진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었다. 관제실에서 입력한 명령대로 마법진이 영혼을 추출하기 직전의 상황이다. 그렇게 뽑아낸 다음에는 파동의 형태가 바뀔 것이다. 달란트의 힘을 빌려 대상이 된 영혼을 붕괴시키고 분해하는 형태로.
들끓는 마력이 움직이는 방향을 살피던 민준이 말했다.
나지막하게.
“그래, 이런 원리였군. 잘 봤다.”
고룡이 되물었다.
“뭐라고?”
“저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대충 알겠다는 소리야.”
“?”
창천은 그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고룡과 부하들은 카바이트의 기술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지구 문명 대비 몇 단계나 앞선 신비로운 기술이었으므로 당연했다. 그저 지시대로 그리고 재현하는 데에 그친 것이다.
그런데 민준이 잠시 관찰해 놓고 원리를 파악한 양 중얼거리니 그 태도는 허세로 여겨졌다. 눈으로 본 것만으로 모든 걸 알 수 있다면 애초에 창천도 이 고생을 하지 않았을 터다.
하지만 그 직후에 이어진 말은 거짓으로 치부하기 힘든 묘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그것은 민준 자신도 의도치 않았는데 갑자기 툭 튀어나온 문장이었다.
“그 오리좆 새끼들도··· 그새 많이 발전했는데?”
위이이이잉!
그 때 관제실 전체에 사이렌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고룡이 날카롭게 외쳤다.
“뭐야?!”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오퍼레이터가 외쳤다.
“다, 달란트 반응에 이상이···!”
그 순간 결계 안에 있던 지선경의 몸이 실 끊긴 인형처럼 툭 쓰러졌다.
민준은 그 의미를 알았다.
하은성은 달란트와 결합되었지만 마법진의 통제에 따라 무방비하게 추출당하고 통제되는 무생물이 아니었다. 고룡은 그 부분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창천은 하은성의 혼이 지선경의 몸에 안착한 것을 예기치 못한 사고로만 여겼다. 달란트가 제멋대로 힘을 발휘한 것으로.
하지만 사건 당시 달란트와 하은성 사이에는 분명 어떠한 교감이 존재했음을 민준은 확신했다.
그 확신에 판돈을 걸고 도박을 한 것이다.
결국 하은성은 고블린의 영혼을 손상 없이 뽑아내는 마법진 효과를, 지선경의 몸에서 자신의 영혼을 추출하는 것으로 바꿔버렸다.
그리고 민준은 그 모든 과정을 관찰했다.
=됐다!=
하은성은 허공에 떠서 펭귄 날개 모양의 두 손을 보았다. 이어 목덜미를 더듬자 칼손잡이가 만져진다. 이 흉측한 물건이 이렇게 반가워질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민준도 보고 있었다.
캬아아아!
하은성의 탈출을 확인한 순간.
민준이 지하 1층에서는 꺼내 놓기만 하고 공격에 쓰지는 않았던 그림자 괴물이, 순식간에 그의 몸 뒤에서 퍼지며 관제실의 모니터와 계기판, 각종 기기를 부수고 찢기 시작했다.
“지금 뭐 하는 거냐!”
“······!”
단호한 그의 표정을 보며 창천은 직감했다. 저 외계인은, 애초에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는 것을.
“안 돼!”
민준이 내뿜은 그림자가 관제실을 넘어, 류호가 갇힌 방 쪽으로 뻗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창천은 결단을 내렸다.
그러자 레어를 외부로부터 단절시키던 대결계가 기능을 멈추고, 텔레포트를 막기 위해 뒤죽박죽으로 꼬인 공간 속 좌표들이 복구되었다.
팟!
민준은 순식간에 주변 풍경이 바뀐 것을 보았다. 지하 30층 관제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그는 지금 남산 상공에 떠 있었다.
‘긴급탈출 마법진!’
창천이 관제실의 모든 생명체를 순식간에 외부로 이동시킨 것이다.
민준이 의도한 바였다. 류호가 풀려나는 것을 막기 위해 위해요소인 민준 포함 모두를 레어 밖으로 튕겨 낸 것이다.
그가 부유 마법을 급하게 완성시킨 순간.
“으아아악!”
“살려줘어어어!”
함께 전송 당한 창천의 부하들이 비명을 지르며 곳곳에서 추락하고 있었다. 드래곤은 그들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 시선은 오로지 민준을 도려낼 듯이 꽂혔다. 얼굴에는 억누르지 못한 분노가 넘쳐 흘렀다.
“네가··· 네가···!”
팟!
말을 끝내기도 전에 공기가 거칠게 흔들리고 그들을 덮는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민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왔군!’
민준이 레어 밖으로 나왔다는 것은 다른 이들과 자유롭게 통신이 가능해졌다는 뜻.
그의 부름을 받고 도심 한복판을 텔레포트로 가로지른 또 하나의 엘더 드래곤이 정신으로 포효했다.
=창천! 여기까지다!=
창천이 굳이 올려다보지 않아도 상대의 정체는 알 수 있었다.
젠킨슨.
분노와 허탈감 속에서 그녀는 민준을 노려본다.
“대체, 왜?”
고룡은 진정으로 저 외계인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과 손잡으면 몇십만 달란트가 그의 품으로 굴러 들어가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걷어차 버린 것이다.
“왜 이런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선택을 하는 거지?”
창천의 가치관으로는 짐작할 수도 없었다.
인간 흉내를 내고 있지만 상대는 결국 종족도 확실치 않은 외계인이다. 어린 용이나 인간, 고블린 따위를 아무리 많이 희생시켜봤자 수형자 입장에서 상관할 바가 아니다. 더 큰 이익을 성취하기 위해서라면 젠킨슨과 의리를 지킬 필요도 없다.
저런 자들의 목적은 오로지 달란트를 벌어서 자유를 되찾는 것이므로.
“어째서?”
그것이 창천이 지닌 도덕적 상상력의 한계였다.
민준이 배신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민준을 믿어서가 아니다. 그가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의 판단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랬군, 내 실수였군.”
창천은 젠킨슨과 민준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둘 다 정신병자들이다.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예측 불가능한 행동을 보이며, 스스로의 이익에 반하는 자기파괴적 행보를 이어 나가는 자들.
그런 존재를 상식적인 틀로 예단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실수가 낳은 결과는 아찔할 정도였다. 창천은 레어를 내려다보았다. 류호는 아직 저 안에 있으며, 증거를 잡은 젠킨슨은 용의 망령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 창천은 준비해 왔던 것이 산산이 무너져 내리는 위기감을 느꼈다.
굳어버린 그녀의 얼굴 위에 붉은 광선이 미끄러졌다. 난폭했던 새벽이 끝나가고, 해가 완연하게 지평선 위로 떠오르고 있었다.
짙은 음영 속에서 창천은 각오를 굳혔다.
‘죽여 없애야 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래야 류호를 챙겨서 함께 도망갈 수 있다!’
젠킨슨도 고룡이지만, 자신은 그보다 오랜 세월을 산 고룡이다.
파앗!
선명한 아침 햇살마저 죽이고 묻어버릴 강렬한 섬광이 고블린의 몸으로부터 퍼져 나왔다.
그 빛이 사라졌을 때 폴리모프한 고블린 의체는 그곳에 없었다. 날개 달린 네발 동물로 묘사할 수 있는 젠킨슨과 확연히 구분되는, 뱀처럼 몸이 긴 푸른 비늘의 용이 남산의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섬광이 충돌하고, 푸른 용은 적을 향해 격돌했다.
긴 하루가 시작되었다.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