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Gaiden 17
외전#1. 수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17)
리야드 공항 인근의 호텔.
객실 문을 열고 들어선 정팔은 입을 쩍 벌렸다.
“세상에, 이게 대체 몇 평이야?”
그가 사는 집 전체 규모가 이 방 하나보다 좁을 것 같다.
정팔이 배정 받은 객실은 그만큼 넓고도 호화로웠다.
다른 나라 대통령이나 장관 급 인사가 와야 내 줄 법한 특별한 스위트 룸.
“형님도 참, 겨우 몇 시간 쉬다 갈 걸··· 이렇게까지 돈 안 쓰셔도 되는데.”
정팔이 사우디 아라비아에 체류하는 시간은 실질적으로 열 두시간 정도였다.
민준에게 ‘물건’을 넘긴 뒤 바로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
그래서 정팔은 당연히 민준을 공항에서 만나 짐가방만 넘기고 바로 다시 출국 절차를 밟을 생각이었다. 피곤해서 딱히 리야드 시내를 둘러 볼 마음도 생기지 않았다.
그런 의향을 밝히니 민준은 몇 시간이라도 편하게 쉬라며 호텔까지 잡아준 것이다.
공항 입국장 밖을 나서자 이미 양복 차림의 기사가 그의 이름이 적힌 팻말을 들고 있었고, 생전 타 본 적 없는 고급 차량의 안락한 뒷자석에 앉아 도착한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이거야, 원. 황송하군.”
정팔은 천연 미노타우르스 가죽으로 만든 게 분명한 8인용 소파가 긁히기라도 할까 조심하며 앉았다.
그리고 보스턴 백에서 민준이 부탁한 화물을 꺼내든다.
우웅-! 우우웅-!
후라이팬이 반갑다는 듯 진동했다.
=오! 형님. 세관은 무사히 통과하셨군요!=
“뭐, 넌 누가 봐도 후라이팬이니까. 마약이나 폭탄을 숨길 구석도 없고.”
본래 짐도 없이 당일치기로 열 두시간을 날아오는 여행객은 집중 감시 대상이 되기 마련이다. 특히 종족이 오크라면.
그나마 민준이 뭔가를 해 준 덕분에 그 이후로는 일사천리였다.
“그나저나 넌 대체 무슨 마법이 걸려 있길래 아티팩트 검사도 쉽게 패스해 버리는 거냐? 기능을 봐도 말하는 걸 봐도 아티팩트가 아닐 리는 없는데 말이야.”
=절 창조하신 분이 워낙 뛰어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말입니다.=
그 말에는 정팔도 동의했다.
후라이팬의 제작자는 필시 엄청난 실력자일 것이다. 이런 범상치 않은 물건을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범상치 않은 변태임도 분명해.’
정팔은 민준이 이걸 가지고 오라고 한 이유를 떠올렸다.
통역이 필요하다고 했던가?
‘이 녀석, 처음 손잡이를 잡았을 때 그랬지. 무슨 언어든 이해할 수 있다고.’
머리를 긁던 정팔은.
“아, 참.”
잠시 잊고 있었던 사건을 떠올렸다.
그는 서에 휴가를 내기 직전 쇼핑몰에서 벌어진 무차별 살인 사건을 목격했다.
범인은 외계인이었고 현장에서 이민국 요원에게 제거당했기 때문에 범행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정팔은 그 외계인이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어떤 단어를 말하던 걸 기억했다.
– Khu··· Szai!
수사는 이민국의 소관으로 넘어갔지만 정팔은 순수한 궁금증을 느꼈다.
그 외계인은 왜 그런 끔찍한 짓을 벌였을까?
그리고 무엇을 그토록 반복하여 말하려고 했던 걸까?
“어이.”
=네, 형님.=
“네가 아는 외계어가 그렇게 많다며?”
=물론입죠!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245개 차원을 대표하는 192만개의 레시피를 탑재한 주부들의 비밀병기, 주방의 마법사입니다! 요리에 곤란을 겪는 사용자를 도와드리기 위해 그 어떤 언어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으니 의사소통은 걱정하실 필요가 없······!=
“아, 알았다. 알았으니까 잠깐 멈춰 봐.”
폭포물처럼 쏟아지는 후라이팬의 수다를 일단 중단시킨 뒤.
“그럼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아냐?”
정팔은 죽은 외계인의 발음을 최대한 흉내내려고 애썼다.
“Khu Szai.”
=흐음.=
후라이팬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답했다.
=그렇게만 말씀하시면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같은 음운이라 해도 어떤 언어를 구사하는 화자가 무슨 상황에서 말했는지에 따라 뜻이 달라지니까요. 지금 그 발음과 겹치는 단어가 존재하는 언어만 해도 대략 50종 정도 된단 말입니다.=
“아, 그럼 내가 상황 설명을 좀 하지.”
정팔은 그날 사건을 설명했다.
외계인의 용모를 묘사하자 후라이팬은 금방 감을 잡은 듯 했다.
=아하! 그녀는 크레이폰 인이군요.=
“크레이폰 인?”
=네. 위원회와 접촉하고 나서도 전통적인 생활 양식을 고집하기로 유명한 종족입니다. 불을 불경시해서 모든 음식을 날 것으로 먹는다나요? 변방 차원에 살아서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지요.=
“그런데, 그녀라고? 여자였단 말이야?”
=그것도 나이가 꽤나 지긋한 여성입니다. 이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던 상태 같은데요?=
정팔은 그 외계인의 번개처럼 빨랐던 움직임을 떠올렸다.
노인이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그 신체능력은 이능력자이기 때문인가?
이야기를 마저 들은 후라이팬이 말했다.
=대충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겠군요. 그 크레이폰 여성은 정신 질환을 앓고 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만난 요원님도 그렇게 추측하더군.”
그런데 후라이팬은 강재덕도 알아내지 못한 병명까지 추측해 냈다.
=치매였던 것 같군요. 안타깝게도.=
“치매?”
=네. 지구에서는 알츠하이머 병이라고도 하죠. 오크는 걸리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발병률이 꽤 높은 편에 속하는···.=
“나도 치매가 뭔지는 알아. 노망 났다는 뜻이잖아?”
=정확합니다. 생리적인 발병 원인은 다르지만 크레이폰 인도 노년기에 이 병에 걸리면 인지 기능이 쇠퇴하고 공격성이 매우 증가합니다. 남자보다 수명이 긴 여자들의 발병률이 높죠. 아무튼, 처음 질문에 답하자면 ‘Khu Szai’는 욕설입니다.=
“욕?”
그녀가 몇 번이고 되풀이하던 말이 욕이었다니.
결국, 치매 노인이 반복해서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는 뜻인가?
=네, 욕이요. 그것도 엄청난 멸칭이죠. 보통 여자가 남자에게 씁니다. 성적 뉘앙스가 들어간 욕 중에서도 가장 모욕적인 말로 뽑히죠. 지구 언어로는 번역이 좀 곤란하네요. 굳이 의미를 치환하자면··· ‘씨흘리개’ 정도가 될까요? 이걸로는 깊은 경멸이 잘 표현되지 않는데, 대안을 못 찾겠네요. 하여튼 그렇습니다. ‘씨흘리개.’=
“씨흘리개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한 마디로 아무데나 씨를 흘리고 다니는 남자라는 뜻이죠.=
후라이팬은 크레이폰의 문화에 대해 좀 더 설명해 주었다.
=그들 사회는 일처다부제이며 남자는 소중하고도 약한 존재로 취급됩니다. 그래서 씨를 뿌릴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부터 집 안에만 가둬 놓습니다. 외출은 불가능하죠.=
“남자가 더 약하다고?”
오크인 정팔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포유류 기준으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크레이폰 인은 알을 낳는 여자 쪽이 훨씬 덩치가 크고 힘도 셉니다. 하지만 남자는 작고 약하죠. 심지어 평생 씨를 뿌릴 수 있는 횟수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너무 빨리 죽거든요. 수십 년간 번식이 가능한 오크 남자와는 달라요.=
“아니, 왜 그렇게 비효율적으로 진화했지?”
=효율성은 환경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문제 같습니다요. 학자들 추측으로는, 크레이폰이 그리 진화할 당시 주변에 강력한 포식자가 존재했을 거라더군요. 그들의 공격을 피해 숨기 위해선 어차피 알도 못 낳는 남자는 몸집을 줄이는 편이 생존에 유리했을 겁니다. 여자 입장에서도 평생 한 남자의 씨를 수백 번 입수하는 것 보다는 여러 남자의 씨를 소량 씩 얻는 게 유전 다양성 확보에 이득이겠죠. 결론적으로 남자는 딱히 오래 살 필요가 없는 겁니다.=
“아니, 근데 욕도 욕이지만 그 노망난 여자가 사람들은 왜 죽이고 다닌 거야?”
=혹시 희생자들의 공통점이 있지 않았습니까?=
“공통점이라면···. 잠깐만! ‘Khu Szai’가 남자들한테만 하는 욕이라고 했지?”
현장에서 발견된 인간, 드워프, 오크 등의 시신을 떠올려 본다.
공통점은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전부··· 남자였군! 나이가 많지 않은 청년들이었어!”
=네. 그 노인은 치매 때문에 현실 인지 능력이 붕괴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곳을 크레이폰 사회로 착각한 거죠. 그 종족은 시력이 그다지 좋지 않기 때문에 냄새로 구별했을 겁니다. 몇몇 남성 호르몬은 갑각류, 조류, 포유류 등 종을 초월해서 동일하게 발현되거든요.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어야 할 남자들이 밖을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녀는 크레이폰의 명예로운 전사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거죠.=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니?”
=정조를 지키지 못한 남자들을 현장에서 살해한 겁니다. 즉각 심판이죠.=
정팔은 이 대화에 점점 더 따라가기 힘들어지는 걸 느꼈다.
“바깥을 돌아다니는 거랑 정조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야?”
=전통과 관습을 항상 이성적으로 평가할 수는 없습죠. 말씀드렸다시피 그 사회에서 남자는 집 안에서 보호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밖을 함부로 돌아다니다간 다른 가문 여인들에게 약탈 당할 수도 있거든요. 씨를 빼앗기는 거죠. 평생 한 남자에게서 얻을 수 있는 횟수가 제한되는 소중한 씨를요.=
“여자보다는 남자 쪽 성윤리를 강조한다는 건가?”
=정확합니다. 한쪽 성별에게 순결과 정조를 불균형적으로 요구하는 건 원시 사회에서 흔히 발견되는 강압 행위입니다. 혈통 개념이 생길 때부터 ‘우리’와 ‘그들’ 사이 경계선을 긋게 되니까요. 피가 섞이면 선이 무너져 내리는 것입죠. 울타리가 사라지는 겁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우리가 막 도착한 이 나라의 경우 순수성을 지키는 제약은 출산을 담당하는 성별에게 가해집니다. 하지만 크레이폰은 반대였던 거죠.=
“그래서 밖을 돌아다니는 남자는 정조를 잃은 남자가 되는 건가?”
=정확히는 언제 잃었을지도 모르는, 혹은 언제 잃을지도 모를 남자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죽이는 겁니다.=
“하지만 남자는 약하고 소중한 존재라며? 그런데도 죽여? 모순이잖아.”
=약하고 소중한 존재라도 단체로 반항하면 사회 시스템 유지가 곤란해지죠. 본보기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공포는 매우 유용한 통제 수단입니다.=
결국 그 치매 환자는 서울 쇼핑몰 안을 돌아다니던 다양한 종족의 남자들을 크레이폰 남자로 착각하고, 분노하여 살해했다는 뜻이었다.
이어지는 말을 들은 정팔은 자경단원 영태와 그녀 앞에서 총을 겨누고 대치했을 때 왜 영태가 먼저 공격당했는지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상대적으로 정팔이 더 위협적으로 보였기 때문이 아니였다.
=테스토스테론 같은 남성호르몬은 인간이나 오크나 사춘기 직후 분비가 빠르게 늘어서 20대 이후 급감소하죠. 안타깝지만 형님도 마찬가지고 말입니다.=
정팔은 인간 기준으로나 오크 기준으로나 중년이다.
“결국 나보다는 영태에게 ‘남자 냄새’가 더 많이 났을 거라는 소리군.”
=네, 그래서 먼저 공격했을 겁니다.=
자신보다 남성 호르몬 분비량이 많아서 죽을 위기를 겪었다니.
오크는 뭐라 한 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 감정은 곧 의문으로 바뀐다.
“야, 그런데 넌 후라이팬이잖아? 250개인지 256개인지 되는 차원의 레시피를 갖고 있는 건, 그만큼 많은 세계의 정보를 안다는 뜻이겠지?”
=네, 그렇습죠!=
“근데 크레이폰은 변방의 종족이라며. 그들의 세계가 네가 말한 250개 안에 들 리도 없을 거고. 모든 음식을 날로 먹으면 후라이팬을 쓰는 레시피도 없을 텐데. 넌 그런 종족에 대해서 어떻게 이렇게 잘 아는 거냐? 이민국 요원도 모르던 정보를 말이야.”
=······.=
후라이팬은 답이 없다.
정팔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애초에, 후라이팬의 인공지능에 이런 방대한 정보를 입력할 이유가 뭐지? 아니, 제작 당시에 입력한 게 아니라면 이 녀석이 스스로 습득을 했나? 어떻게?’
후라이팬에게는 손도 발도 없다.
따라서 혼자서는 책을 읽을 수도, 전자기기를 조작할 수도 없는 게 당연.
‘그럼 결국 사람과 접촉한 다음 그가 말해주는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는 건데, 대체 누가 후라이팬을 들고 이 많은 정보를 일일이 설명해 주지?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말하지 않은 내용도 읽어낸다는 쪽이 더 말이 되는···.’
정팔의 생각이 갑자기 끊겼다.
=뭐, 이런 건 적당히 넘어가는 게 좋겠죠.=
오크가 눈을 몇 번 깜박였다.
“응? 뭐라고?”
=그나저나, 주인님은 언제 오신다고 하셨습니까?=
“민준 형님? 아마 한 시간 안에 도착하실 거다.”
그리 말한 뒤 시계를 보던 정팔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잠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더라?’
뭔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것 같기는 한데.
갑자기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진 듯한 느낌이다.
‘이런, 나이 탓인가? 이렇게 자꾸 깜박깜박한단 말이야.’
정팔은 결국 직전까지 품었던 의문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민준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
“아, 형님!”
“정팔!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다.”
잠시 후, 민준이 도착하고 두 남자는 악수를 주고 받았다.
“어머니께서 걱정 안 하시디? 막내아들이 갑자기 멀리까지 간다니 말이야.”
“일부러 말씀 안 드렸어요.”
“하긴, 내일이면 다시 서울에 있을 테니까. 건강하시지?”
“그럼요. 요즘도 가끔 작은 형님네 가게까지 나가서 주방 일도 보시고 그래요. 형님은 그렇게 만류하시는데도요.”
“그만큼 건강하시단 뜻이네.”
“젊어서 워낙 고생을 많이 하셔서 그런가···. 가만히 집에 못 계시더라구요.”
“그게 오히려 좋을 수도 있지.”
“건강하게 오래만 살아 주시면 좋겠는데 말이죠.”
“그러실 거다.”
정팔은 웃으며 보스턴 백을 넘겼다.
“후라이팬은 여기 있습니다.”
웅-우웅!
반갑다는 듯 안에서 팬이 진동한다.
하지만 민준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굳이 저것을 만지지 않기로 했다.
“아 참, 형님. 혹시 강재덕 요원이라고 아십니까?”
“알지. 마지막으로 얼굴 본 지는 꽤 되었지만. 왜?”
정팔은 그 요원과 만난 이야기를 간략하게 설명했다.
민준이 인상을 찌푸린다.
“하필 내가 없을 때 그런 일이 생기다니.”
살짝 화가 난 표정.
하지만 범인이 이미 죽었기에 화풀이 할 곳도 없었다.
“여튼, 그 요원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나중에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네. 간만에 얼굴도 볼 겸.”
“어, 그건 그쪽이 별로 달갑지 않아 할지도 모르겠는데요.”
“왜?”
“기억 안 나십니까?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형님이 그 분한테 끔찍한 저주를 걸었다면서요. 그래서 아직도 형님을 무서워하는 것 같더라고요.”
“저주? 내가?”
민준은 진심으로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
쿨라파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민준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강재덕이라. 부재중에 내 구역을 커버쳐 줄 정도로 컸나? 하긴 시간이 꽤 지나긴 했지.’
어떤 녀석이었는지 대충 기억이 난다.
쓸데없이 원리 원칙에 고집하는 성격이라 잘 안 맞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내가 저주를 걸었다고?’
뒤늦게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래, 맞군. 저주를 걸었어. 다시는 개기지 못하게, 생활에 큰 불편을 주는 종류로 골랐던 것 같은데.’
그런데 무슨 저주였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뭐였더라. 식분증? 아니야. 몸 안에 뭔가를 집어넣는 종류가 아니였다. 반대로 몸 밖으로 뭐가 나오는 것과 관련된 저주였던 것 같은 느낌이··· 다한증인가? 아니면 콜레라 같은 설사병? 그 무렵에는 표피박리증을 자주 골랐던 것 같기도 한데.’
결국 민준은 쉘터에 돌아갈 때까지 그 저주의 종류를 기억해 내지 못했다.
***
외계인을 감금한 지하실.
“아, 오셨군요!”
돌아온 민준을 사하르를 비롯한 마녀들이 반겼다.
그녀들의 시선은 그가 든 가방에 집중되었다.
저 대단한 요원이 꼬박 하루나 기다려서 받아 온, 외계인의 취조에 필요한 물건이 과연 무엇일까?
부욱!
보스턴 백 지퍼가 열리고.
스윽!
손을 집어 넣은 민준이 그것을 꺼낸 순간.
“······.”
실내에는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마녀들이 자기들끼리 속삭인다. ‘후라이팬?’ 저거 후라이팬 맞지?’ ‘어, 아무리 봐도 맞는 것 같은데···.’ ‘취조하는 데 저걸 왜 가져와? 음식이라도 해 먹여서 외계인 마음을 돌리겠다는 거야?’ ‘아니야. 내 생각엔 진실을 실토할 때까지 저 후라이팬으로 대가리를 두들겨 패겠다는 것 같은데?’ ‘그보다는, 조리 도구를 위장한 아티팩트 아닐까?’ ‘맞아! 저리 보여도 사실은 무시무시한 저주의 매개체겠지.’
그녀들의 열띤 토론은 후라이팬을 저 고양이와 함께 묶어 두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 다시 중단되었다.
묘한 침묵 속에서, 후라이팬만이 약간 즐거운 듯한 어조로 민준에게 말했다.
=아니, 동물을 상대로 본디지(Bondage) 플레이라니요! 아무리 파격적인 걸 즐기는 저라지만 이건 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는 것 같은 느낌이···.=
“닥쳐.”
단호하게 말을 끊어낸 민준은 그림자 채찍으로 외계인과 후라이팬 손잡이를 결박하여 묶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신을 차리고 있었던 고양이는 ‘이 인간이 대체 무슨 미친 짓을 하는 것이냐’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약간 벌린 채 경악하여 민준을 보았다.
모든 준비가 끝난 뒤 민준은 후라이팬의 둥근 테두리를 잡았다. 이제 서로가 하는 말을 후라이팬이 통역해 줄 것이다.
민준이 질문했다.
“너, 누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