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Gaiden 18
외전#1. 수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18)
고양이가 두 눈을 부릅떴다. 방금 전과 다른 이유로 놀란 것이다.
입이 열리고 예의 그 낯선 언어가 흘러 나왔다.
후라이팬이 민준에게 텔레파시로 통역해주었다.
“=지금, 설마 이 쇳덩어리가 말을 걸었나? 어떻게?=”
민준은 건조한 목소리로 응수한다.
“질문은 내가 한다. 너는 누구지?”
“=말을 할 수 있다면 마음도 있는 건가? 살아 있나? 그렇다면, 자식도 낳을 수 있다는 뜻인가?=”
이런 순간에 후라이팬이 새끼를 칠 수 있는지 여부는 왜 궁금한 걸까?
민준은 슬슬 짜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네 궁금증이나 해소하자고 마련한 자리는 아니다, 도플갱어.”
“=도플갱어? 아니다. 내 이름은 하비브야.=”
자꾸 딴소리를 하기에 일단 한 대 후려 까고 시작할까 고민중이던 민준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후라이팬이 도플갱어라는 단어를 고유 명사 그대로 통역해 준 모양이다. 외계인은 그걸 자기 이름을 잘못 부른 것으로 착각했고.
“하비브(حبيب)? 그건 아랍 이름인데.”
그 뜻은 물론 민준도 안다.
사랑받는 자.
혹은, 사랑받는 친구.
“=그래, 하비브. 그 아이가 내게 준 이름이지. 내가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갈 이름.=”
“그 아이라면?”
“=마리얌.=”
사하르에게도 이야기했지만, 외계인은 이미 저항의 의지를 잃은 것 같았다. 언어의 장벽이 해결되자 취조는 술술 진행되었다.
몸은 그림자 채찍에 꽁꽁 묶인데다가, 바닥에 새긴 마법진 때문에 파이로키네시스 능력이 봉인 된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태도가 고분고분해진 그에게 민준은 사하르가 가장 궁금해하던 것을 물었다.
“너는 왜 마리얌으로 변신해서 불을 내고 사람을 죽였지?”
그 순간, 고양이 하비브의 눈빛이 반전되었다.
두 눈동자는 짙은 증오의 감정으로 물든다.
“=그래야 놈들이 알테니까. 자기가 죽는 이유를.=”
“뭐?”
민준이 끼어들기 전 쉴 새 없이 말을 이어나간다.
“=내가 마리얌의 모습으로 그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단순히 불만 질렀다면? 그럼 놈들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알라’의 이름을 외치고 이걸 그의 뜻으로 여기며 죽어갈 게 뻔했다. 그 꼴통들은 삶에 닥치는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전부 신의 의지라고 생각한다. 화재라는 사고도 신이 내린 재앙으로 인식했겠지. 왜 신벌을 받냐고? 그 대갈통으로 떠올릴 생각은 뻔해. 고통스럽게 죽는 이유는, 자기가 신에게 완전히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전의 가르침대로 생활하는 걸 게을리 했기 때문이고!=”
민준이 생각해도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그치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는다.
“=나도 놈들의 사고 방식은 잘 알지. 마리얌이 몇 번이고 설명해 줬거든. 하지만 난 놈들이 마지막 순간에 그리 오해하도록 유도하기 싫었다. 이 죽음이 놈들이 저지른 죄악의 결과임을 똑똑히 알려주고 싶었다. 그 죄목은 절대로, 신에게 충성치 못했다는 것이 아니다. 마리얌, 그 불쌍한 아이를 밀고하여 잔혹하게 살해한 것이 죄다! 놈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교리를 따른 결과 벌을 받게 됐다는 걸 알려주려고 했다! 마리얌의 죽음에 연관된 모두에게.=”
“한 마디로 그들이 죽어가면서도 정신승리를 하는 건 바라지 않았다는 거군.”
학생이든 교사든, 종교 경찰이든 이맘이든 전부 복수 대상이었다는 건가?
분노에 가득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양이의 입에는 웃음 비슷한 것이 떠올랐다.
“=굳이 마리얌으로 변신한 이유는 또 하나 있다. 그 얼굴을 본 놈들이 공포에 질릴 게 뻔했거든. 저승에서 망자가 돌아왔으니 말이야. 그것도 혐오스러운 지옥의 불길과 함께!=”
“공포라고?”
“=그 공포 때문에 놈들은 내게 저항하지 못했다.=”
설사 저항을 했더라도 쉽게 제압할 수 있었을 텐데?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민준은 하비브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놈들 교리에 따르면 천국행을 100% 보장하는 유일한 길은 지하드(جهاد), 알라를 위한 전쟁에서 죽는 것이다. 놈들은 죄를 신에게 달아 놓은 부채라고 생각하지. 그 부채를 계량할 저울은 현세에 없다. 저울 눈금이 과연 천국으로 충분히 기울어져 있는지 살아있는 동안엔 알 수 없어. 따라서 놈들은 사후 지옥에 가지 않을지 죽기 직전까지 불안해하며 살아야 한다. 하지만 성전에서 죽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이교도와 싸우다 죽은 놈들은 ‘금과 보석과 정숙한 여인들’이 기다리는 천국으로 갈 수 있거든. 알라의 심판도 받지 않고 바로 낙원의 문을 통과하는 꼼수야!=”
이 녀석, 생각보다 이슬람 교리에 빠삭한데?
이것도 다 마리얌이 알려준 것일까?
“=하지만 그 문을 열기 위해서는 성전에서 용감히 싸우다 죽어야 한다. 난 놈들에게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다. 내가 이 모습으로 나타나면 남자든 여자든 겁을 먹어서 얼어붙었지. 감히 누구도 무기를 들고 달려들지 못했다. 대부분 등을 돌리고 도망가기에 바쁘더군.=”
하비브는 즐겁다는 듯이 말했다.
“=온 몸이 불길에 휩싸여 죽어가는 순간 놈들은 절망했을 것이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마지막까지 불안에 떨었겠지. 과연 내가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삿된 것과의 싸움에서 비겁하게 도망을 친 내가!=”
“결국 그들이 죽는 순간에도 천국에 간다는 안도감을 주기 싫었다는 뜻이군.”
“=그건 안 될 일이었다. 절대로!=”
“그런데, 그 소녀는 왜 안 죽였지? 이름이 나디아였던가? 왜 태우는 대신 납치하려고 한 거냐?”
“=내가 나타났을 때 놈들의 반응은 거의 비슷했다. 마리얌의 얼굴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거나, 지옥으로 돌아가라고 욕을 하거나, 알라에게 구원을 애타게 청했지. 하지만 그 소녀만 달랐다. 불 속에서 나타난 나를 보고 도망치는 대신 어떤 말을 했다. 순간 갈등이 생기더군. 그래서 일단 죽이는 대신, 손짓 발짓이라도 동원해서 이야기를 해 보려고 했지.=”
“나디아가 뭐라고 했기에?”
“أنا آسفة”
그것은 하비브도 알아들을 정도로 간단하고도 흔한 아랍어 표현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단 한 번도 마리얌으로 변신한 하비브에게 한 적이 없는 말이기도 했다.
민준은 그 뜻을 알고 있다.
– 미안해.
그것은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표현이 아니다.
사람이 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사과의 마음을 전하는 말이다.
여기까지 들으니 민준은 더 궁금해졌다.
“너, 마리얌과는 얼마나 오래 알고 지냈지?”
“=반년 정도.=”
마리얌과의 기억이 떠오르기라도 하는 듯, 하비브의 표정은 다시 침울해졌다.
“애초에, 어떻게 만난 거냐?”
***
하비브는 아브젤 인으로서 지닌 자신의 본체가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한다.
최초로 기억하는 순간부터 그는 이미 다른 종족의 모습으로 변신한 상태였다고 했다.
변신하는 법을 딱히 누구로부터 배운 것도 아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혼자였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민준은 생각했다.
‘무리 짓는 종족이 아닌 것은 알았지만, 양육도 하지 않고 방치하는 건가?’
하비브는 자신이 다른 생물로 변신할 수 있다는 사실 및, 종족 특성과는 별개로 파이로키네시스라는 이능력을 지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두 능력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았다.
용병업과 살인 청부업, 그리고 지구에는 마땅히 대체할 표현이 존재하지 않지만 굳이 말을 만들자면 ‘테러 대행업’ 등이었다.
돈만 된다면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였다. 수많은 건물을 불태웠다. 잡힐 것 같으면 다른 종족으로, 다른 얼굴로 변신해서 그곳을 떠났다.
영원히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날,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기 전까지는.
“=어떤 의뢰를 수행하던 중, 나는 사령술사 몇 명을 한꺼번에 죽였다. 경솔했지. 미리 알았다면 좀 더 조심해서 죽였을 것이다.=”
“사령술사들은 자기 자신의 영혼에도 저주를 걸어 놓지.”
“=그리고 그 저주는, 그들을 살해한 사람에게로 옮겨간다. 나는 그 사실을 몰랐다.=”
그 후로 하비브가 사람을 죽일 때마다 높은 확률로 망령이 그에게 따라 붙었다.
그 영혼들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능력이 하비브에겐 없었지만, 간혹 결정적인 순간에 환청이나 환각이 들리고 밤마다 잠이 드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악몽에 시달렸다.
그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 민준도 잘 알았다. 그도 사령술사를 죽여봤기 때문이다. 물론, 그를 따라다니던 망령들은 본인 스스로 사령술을 마스터하는 방법으로 퇴치했지만 말이다.
반면 하비브에게는 사령술의 적성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날 이후 하비브는 의뢰 수행 중 실수를 저지르는 일이 잦아졌다. 수면 부족으로 정신은 항상 지쳐있었고, 매우 중요한 순간에 눈과 귀의 감각이 흐려졌다.
그러다가 결국 꼬리를 밟히고 만다.
“=다른 차원에 둥지를 튼 큰 범죄조직이, 내가 아브젤 인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놈들은 내게 원한을 품고 있었지. 그리고 악착같이 뒤쫓기 시작했다.=”
하비브가 변신 능력과 파이로키네시스 능력을 지녔다는 정보를 입수한 그들은 포위망을 좁혀나갔다.
그리고 결국 큰 싸움이 벌어진다.
“=압도적인 수로 포위를 당한 이상, 아무리 큰 불을 일으켜도 여러 번 변신을 해도 다 소용이 없었다. 큰 부상을 입고 겨우 도망쳤지.=”
출혈은 간신히 멎었지만 장기에 큰 손상을 입은 채, 하비브는 지구라는 변방으로 도망친다.
내상을 치료해 줄 신성력 능력자를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모든 재산을 강탈당한 상태라 대가로 지불할 돈도 없었다. 게다가 본래 그를 괴롭히던 망령들의 정신공격에 더해, 몸이 갈기갈기 찢겨질 것 같은 통증까지 생겼다. 손상된 장기 때문으로 보였다.
계속 떠돌다가 쿨라파 자치구까지 흘러든 하비브는 그때부터 눈에 보이는 여러 종족으로 변신을 해 보았다. 어떤 형태를 취하면 그나마 가장 통증이 덜한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고양이의 모습일 때, 가까스로 버틸 만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양이로 변신하면 손상된 장기가 어떤 방식으로 바뀌는지, 왜 아픔이 줄어드는지는 하비브도 정확히는 몰랐다. 자기 배를 갈라서 직접 확인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생물 자체가 통증을 잘 견디는 종일수도 있다. 나도 확신은 못 하겠지만.=”
하비브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쯤에 마리얌, 그 아이를 만났다.=”
그녀를 만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아픔을 견뎌 가며 쿨라파 거리를 떠돌던 어느 날. 고양이의 예민한 청각은 한 소녀의 낭랑한 목소리를 들었다.
하비브는 그때나 지금이나 아랍어는 간단한 단어밖에 알아듣지 못한다. 당연히 그 긴 문장도 이해 못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것은 기도문이었다.
“=나는 홀린 듯 그 소리를 따라갔다.=”
마침내 어느 여학교의 뒷마당에 도착한 하비브는, 고양이들과 함께 있는 마리얌을 본다.
그녀는 고양이에게 단순히 밥만 준비해 준 것이 아니였다. 그 소녀는 이 자리에 모인 고양이들의 앞날에 알라의 축복이 있기를, 신이 이 작은 생물들까지 돌봐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비브는 그 기도소리에 어떤 힘이 실려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음성을 듣자, 내 아픔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완전히 치료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걸 듣고 있는 순간에는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
그 말을 들은 민준의 얼굴이 확! 굳었다.
“=너무도 기이한 일이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엉겁결에, 내가 그 당시 쓰던 언어로 목소리를 내서 말했지.=”
돌아올 반응이 뻔한데도, 자신이 고양이로 변신한 사실도 잊고 질문했다.
– 이거, 대체 어떻게 한 거냐?
하비브는 당시 마리얌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고양이가 말을 건 충격적인 순간. 소녀는 잠깐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진 행동은 하비브의 예상과 달랐다. 그녀는 놀라서 비명을 지르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다른 소녀들 같으면 악마가 나타났다며 바로 성직자나 교사에게 일러 바쳤을 터다.
그러는 대신 마리얌은 흥미진진하다는 표정으로, 두 눈에 호감과 호기심을 가득 담은 채 하비브에게 손을 뻗었다.
그때 마리얌이 했던 말은, 나중에 알고 보니 이런 뜻이였다고 한다.
– 넌, 신의 가호를 받은 고양이로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