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er on the Frontier RAW novel - Gaiden 9
외전#1. 수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9)
***
민준은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는 현재 착수금만 받은 상태이다. 영국 정부를 경유하여 들어온 의뢰 내용에는 중요한 정보가 상당 부분 빠져 있었다. 영국과 이스라엘의 사이가 워낙 안 좋다 보니 해당 의뢰의 보안 등급을 상당히 올려 놓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민준은 이곳에 도플갱어 같은 외계인이 출몰한 것 같다는 매우 간략한 말만 듣고 현장에 파견된 상태다.
이런 경우 민준은 착수금만 받고, 상세한 의뢰 내용을 들은 뒤에 아니다 싶으면 거절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다.
사하르의 목적은 잘 알았고, 이곳에 사는 여자들의 안타까운 사연도 이해했다.
하지만 민준은 자원봉사자가 아니다. 요원은 머릿속으로 이해타산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일단, 달란트를 얻을 확률은 적겠군.’
수형자들만 볼 수 있는 영계통신망을 뒤져봤지만, 형태 변환 능력을 지닌 현상수배범의 케이스는 보이지 않는다. 위원회가 아직 직접 달란트를 걸 정도로 위험한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럼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일단 지구의 화폐. 그리고 영국 정부와 마녀협동조합에 빚을 달아 놓는 정도이군. 거절할 수도 있는 임무를 굳이 수락한 것이니.’
앞으로 자신이 지구에 얼마나 더 거주하게 될지는 민준 자신도 알지 못한다.
단지, 그 기간이 꽤나 길어져도 상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요즘 자주 하곤 했다.
지난 근무지였던 ‘아쉬탈’ 차원 같은 경우, 아무런 미련도 없이 떠나왔다. 좋은 추억도 많았지만 그걸 모두 덮을 만큼 나쁜 추억도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구의 경우 좋은 기억이 더 많다. 아직까지는.
더군다나 얽힌 인연도 꽤나 많아졌고.
‘내 예상으로는, 위원회도 나를 꽤 오랫동안 여기서 굴릴 속셈일 거다. 워낙 변방이라 수배범들의 좋은 도피처가 되니까. 유례 없이 많은 집단 이민을 겪기도 했고··· 이 차원이 안정화되려면 아직 멀었어.’
결국 지구인들에게는 민준과 같은 수형자들의 지원이 한참 더 필요하다는 뜻이다.
위원회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차원에서 오래 머물게 될 거라면, 영국 정부와의 관계에 신경을 써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이스라엘보다는 그쪽이 영양가가 높다.’
민준은 결정을 내렸다.
“네, 알겠습니다. 한 번 잡아보지요, 그 외계인.”
그러자 강철같이 굳어 있던 사하르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얼굴 근육의 긴장이 풀리며 대놓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휴우우! 다행이네요. 요원님이 거절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했다고요.”
본인 어깨의 근육을 주무르며, 한탄을 하듯 말한다.
“저나 다른 마녀들이나 지금까지 여자들 구조에나 신경 썼지, 외계인 같은 건 한 번도 잡아본 적 없어요. 우리끼리 진행하게 되었으면 꽤나 애 먹었을 걸요?”
자신들이 얼마나 절박했는지 굳이 밝히지 않는 선택지도 있을 텐데, 말하는 것을 보니 꽤나 솔직한 성격인 것 같다. 오늘 처음 만난 요원 앞에서도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외계인을 잡아본 적이 없다고요? 하지만 이곳은 불법체류자들이 숨어들기에는 최적의 조건 같은데요. 이능력자라면 저 장벽 정도는 돌파할 수 있을 터고. 아니면 물자를 운송하는 유대인들 틈에 섞여 들어올 수도 있고요.”
민준은 오크 커뮤니티를 떠올리며 그렇게 물었다. 장벽 안의 열악한 환경은 그곳과 비교해서도 절대 뒤지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외계에서 도주해 온 범죄자들이 모이기 딱 좋은 터다.
그러자 사하르는 옅게 웃으며 이렇게 답했다.
“그만큼 이 동네가 열악하다는 뜻 아닐까요? 어지간한 외계인들조차 못 버티고 도망갈 정도로.”
“······.”
“자, 그럼. 의뢰를 수락하셨으니. 더 자세한 이야기를 나눠 보죠.”
사하르는 책상 위에 지도를 펼쳤다.
“지난 세 달 간 발생한 화재는 모두 25건이에요. 지도에 마킹을 해 둔 장소에서 발생했죠. 대충 3~4일에 한 번씩 발생한다고 보면 되겠네요. 우린 그 외계인이 불을 지르는 타깃의 기준이 무엇일지 고민했어요.”
“얼핏 봐서는 패턴이 안 보이는군요. 제 눈에는 아무런 규칙도 없이 닥치는 대로 불을 지르고 다닌 것처럼 보입니다.”
“이 지도만 봐서는 그렇죠.”
사하르는 지도의 곳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은 나지라 알-사다드의 집이에요. 그리고 이곳은 자흐라 이사의 가족들이 운영하는 가게죠. 또 여기는 이에샤 알-압둘카림의 남자 형제들이 다니는 예배당이고요. 또 이곳은 카마리아 아지즈의 아버지가 일하는 자동차 정비소랍니다. 그리고···.”
그 후로도 한참 민준이 알지 못하는 이름과 장소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사하르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린 뒤 요원은 묻는다.
“지금 언급한 이름들. 다 누구입니까?”
사하르가 한층 차분해진 눈빛으로 답한다.
“마리얌이 다니던 학교의 화재 사고. 기억하시죠? 그곳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의 이름이에요.”
“······”
요원은 손가락으로 턱을 괸다.
“그러니까, 마리얌이 살려낸 그 생존자들과 연관이 있는 장소들에 화재가 발생하고 있다?”
“우리는 그렇게 결론을 냈어요.”
민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렇게 물었다.
“마리얌이 죽은 것은 확실합니까?”
“네, 이미 말씀드렸잖아요. 저희가 시신을 확인했어요. 그것도 두 번이나. 왜 두 번이냐면, 그 천벌 받을 것들이 그 애를 파내서 불태웠으니까요!”
“하지만 언데드가 된 마리얌이 돌아와서 복수를 하는 중이라고 하면 이야기가 딱 맞아 떨어지잖습니까. 기숙사 화재 현장의 기적을 불러일으킨 게 마리얌이라는 정보는 생존자들에게서 흘러 나왔겠죠. 자신을 밀고한 친구들에게 복수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친구의 남자 가족들이 다니는 예배당을 태워 봤자 복수가 될까요?”
“그 예배당의 이맘을 노렸을 수도 있지요. 친구들은 그녀가 죽은 간접적인 이유를 제공했고, 남자들은 직접적인 이유를 제공한 것이니까요. 저 같으면 그 복수의 리스트에 양쪽 모두의 이름을 적어 놓을 겁니다.”
하지만 사하르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리얌은, 그 불쌍한 아이는 죽었어요. 이건 외계인의 소행이구요.”
“그렇다면 그 외계인이 왜 마리얌의 복수를 대신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잡아내고 나면 알 수 있겠죠. 여튼, 이 사실을 파악한 뒤, 저는 앞으로 타깃이 될 만한 장소 중 아직 화재가 일어나지 않은 곳을 정리했어요. 저 말고 다른 마녀들이 그 장소들 근처에서 은신 중이죠. 페이스를 보면 앞으로 하루 이틀 안에 또 불이 날 것 같군요. 그러면 그녀들이 제게 그 사실을 알릴 거고···.”
“저는 당신과 함께 누구보다 빨리 출동해서 외계인을 잡으면 된다?”
“정확해요.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현장에 매복하고 있던 마녀가 외계인의 발을 묶어 놓거나, 도주할 경우 그 뒤를 쫒을 거예요. 그런 계획이랍니다.”
“이해했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잘 먹고, 잘 쉬고, 현장에서 연락이 들어오는 걸 기다리는 일이죠. 그럼 이동할까요?”
이동이라니?
“이곳에서 대기하는 게 아니였습니까?”
“여긴 예비용 쉘터예요. 저희가 보호해야 하는 여자들의 수가 늘어나는 경우를 대비해 미리 구축해 놓은 장소죠. 그리고 손님은 거하게 대접하는 게 저희 문화인데, 이곳에 먹을 거라고는 고양이 사료밖에 없는 걸요? 염분이 거의 없는 말린 닭간을 선호하는 특이한 입맛이 아니면, 절 따라오는 게 좋을 거예요.”
***
사하르가 옷과 짐을 챙기는 동안 민준은 오늘 들은 단어 하나가 머릿속에 진득하게 남아 있는 것을 느꼈다.
‘쉘터(Shelter)라···.’
여러 의미가 있는 단어이긴 하다. 사하르가 꺼낸 이 말이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모르겠다.
뭔가 중요한 것을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도 계속 머릿속을 자극한다.
수형자가 되고 기억이 소거되고 나서 이런 기시감을 몇 번 느껴 본 적은 있지만, 요즘 들어 그 빈도가 꽤나 늘었다.
‘이것도 용혈의 효과인가?’
그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외출복을 챙겨 나온 사하르가 손짓을 하며 그를 불렀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녀가 고양이에게 말한다.
“자, 너도 같이 가야지?”
“냐아앙!”
검은 고양이는 대답을 하며 먼저 계단을 오른다.
“말을 잘 듣는군요.”
“네, 샤샤는 착하고 똑똑한 아이니까요.”
밖의 골목으로 나온 뒤 사하르는 다시 결계를 봉인했다. 그리고는 챙겨 나온 양탄자를 길바닥에 깐다. 민준은 이 아티팩트의 용도를 바로 알아차렸다.
“역시 마녀라도 빗자루 같은 것은 안 타는군요.”
“그런 건 지구 미신인 거 아시잖아요? 그 가느다란 나무 막대기 위에 올라 탔다가는 좌골이 남아 나질 않을 거예요. 자세도 허리 디스크 걸리기 딱 좋겠네.”
마녀는 양탄자 위에 앉았다. 민준도 그 곁에 탄다. 고양이는 사하르가 양탄자를 깔자 마자 진작에 올라타서 자리를 잡고 누운 상태였다.
사하르는 주문을 외우며 품에서 꺼낸 보라색 가루를 뿌렸다. 그러자 양탄자와 탑승자 모두 공기에 녹아들듯 투명해지며 모습을 감췄다.
“날아라.”
두 사람과 한 마리를 태운 양탄자가 하늘 위로 부유하며 비행을 시작했다.
***
사하르가 민준을 인도한 곳은 현재 여자들이 거주하고 있는 쉘터였다.
“이 안에 있는 아이들은 다 이능력이 없는 평범한 여자들이에요. 말씀드렸다시피 다른 마녀들은 전부 밖에서 매복 중이거든요.”
마녀는 입구의 결계를 푼 뒤 문 너머를 향해 말했다.
“나 왔어. 아이샤 안에 있니?”
그러자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아, 사하르! 돌아오셨군요.”
“응. 근데 샤샤랑 외부인 한 명을 데려왔어. 남자분이야.”
“아아···.”
“불편한 애들은 다 미리 방에 들어가 있으라고 그래. 그런 다음 문을 열어.”
그러더니 민준을 보며 말한다.
“나쁜 뜻은 없어요. 이곳 여자들은 도망친 이유도 각각이거든요. 그 중 많은 수가 아직도 자신이 평생 배우고 체득한 규율에 익숙해져 있어요. 솔직히 세뇌당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지만, 그게 본인들에게 편하다면 굳이 강요를 하지는 않거든요.”
“외간 남자랑 같은 방에 있을 수는 없다는 뜻이군요. 괜찮습니다. 이해합니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일행은 안으로 들어섰다. 20대 정도로 보이는 금발의 여인이 안에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머리카락과 얼굴은 가리지 않았지만 복장은 사하르와 상이했다. 몸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는 좀 더 전통적인 의상이다.
“아이샤입니다.”
그녀는 쑥쓰러운 얼굴로 자신을 소개했다. 눈을 마주치기 부담스러운지 시선을 피한다.
사하르는 민준을 위해 미리 비워 둔 방이 있다며 그곳으로 안내했다.
“곧 기도시간이에요. 그 후 저녁 준비까지 끝내고 올 게요. 그때까지 여기에 계셔도 되겠죠?”
남자를 불편해하는 다른 여자들과 마주치지 않게 격리하겠다는 뜻인가.
민준은 별 상관이 없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방문이 닫히고 잠시 후, 여러 명의 여인들이 입을 모아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민준의 민감한 귀는 그 모든 목소리를 구분해 냈다.
‘전부 열 네 명이군.’
그 중에는 지금까지 함께 움직인 사하르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기도가 끝나고 나서는 여러명의 여인들이 한꺼번에 움직이며 음식을 준비하는 소리가 났다. 듣지 않으려고 해도 예민한 요원의 귀는 그 대화 내용을 전부 캐치해냈다.
사하르가 누군가에게 아랍어로 묻는 소리가 들린다.
“파티마는 아직 방에 있어? 아까 기도 때도 표정이 안 좋아 보이던데.”
“그 애··· 지금 고민이 많은 것 같아요. 오늘도 사하르가 오기 전에 몇 번이나 울었어요.”
“고민이라니?”
“아무래도 집에 돌아가야 할 것 같다면서 울상이에요.”
“돌아간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이렇게 도망쳐서 가족들에게 죄를 지은 것 같다고. 그리고 알라께도···.”
“그게 무슨 소리야! 알라라고 여자들이 이 감옥 같은 세상에서 고통 받기를 원하실 것 같아? 우린 애초에 죄인도 아니고, 갇혀 살아야 하는 수형자도 아니야. 내가 몇 번이나 이야기했잖아. 원한다면 언제든지 외국으로 보내줄 수 있어. 여기서 하는 공부도 그걸 위한 거고!”
“그 애는 불확실한 앞날이 무서운 거예요. 익숙한 곳을 떠나는 것도, 가족들과 떨어지는 것도.”
“마리얌도 같은 이유로 고민하다가 죽었어. 물론 파티마는 이능력 같은 것이 없지만··· 위험한 건 마찬가지야. 그 애, 가족들이 억지로 Khtan(ختان)을 시키려고 해서 도망친 거잖아!”
주변의 여자들을 의식하듯, 사하르는 한 단어를 말할 때만 목소리를 낮춘다.
민준은 그 ‘Khtan’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
할례.
하지만 이것은 어제 만난 유대인 드워프가 경험해야 했던 그 할례와는 다르다.
물론 민준의 기준으로는 둘 다 멀쩡한 생식기에 손을 대는 기괴한 일이지만, 여자의 경우는 훨씬 잔혹하고도 위험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민준은 알고 있었다.
똑, 똑.
여자들의 다수가 방으로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 뒤, 사하르가 민준의 방문을 두드렸다.
부엌에는 한상이 거하게 차려져 있었다. 참석자는 민준과 사하르, 아이샤 세 명뿐. 나머지는 자기 몫의 음식을 가지고 다른 방으로 이동한 것 같다.
음식의 맛은 꽤 괜찮았다. 식사를 하며 민준은 이곳에 와서야 알게 된 사실에 대해 언급했다.
“사하르. 당신도 무슬림이었군요?”
“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다들 놀라죠.”
그러더니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무슬림이 왜 규율을 어기냐고 비난을 할 생각은 아니겠죠?”
“아니, 그런 것엔 관심 없습니다. 내가 궁금한 것은 하나입니다.”
민준은 어떻게 하면 무례하지 않게 질문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이 이상으로 돌려 말할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원래 돌려 말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그래서 그냥 떠오르는 대로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자기 자신을 ‘열등하다’고 선언하는 종교를 믿을 수가 있습니까?”
사하르가 피식 웃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지는 짐작이 가요. 제가 아까 그렇게 목에 핏대를 높이며 우리 경전과 교리를 비판했으면서, 정작 아직 이 종교를 버리지 않은 게 이상하다는 거죠?”
“솔직히 그렇습니다.”
“이건 설명하기 어려워요. 종교와 신은 제 삶의 일부거든요. 절대 저 자신과 분리될 수가 없죠.”
그러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렇다고 이곳의 이맘들이 주장하는 그 모든 것들을 긍정한다는 뜻은 아니구요. 그랬다면 애초에 이런 일을 하고 있을 필요도 없겠죠. 저는 제 나름의 방식으로 알라를 섬겨요. 하지만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 희생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죠. 우리가 굳이 차별당하고 괴로워하지 않아도, 다시 말해 우리가 평범한 삶을 통해 행복을 누려도 알라는 기뻐하실 걸요. 저는 그런 믿음으로 이 활동을 하고 있어요. 왜냐면 지금 저 방에 있는 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건 절대 평범한 삶이 아니니까요. 이해가 되나요?”
“솔직히 완벽히는 이해가 안 되는군요. 저는 종교가 없어서요.”
“그럴 수 있죠. 종교를 버린다는 건, 제게 있어서 삶의 의미를 버린다는 것과 같아요. 요원님, 당신이 생각하는 삶의 이유는 무엇인가요? 삶의 목적은요?”
“······.”
민준의 머릿속에 몇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 중 압도적인 것은 물론 ‘자유’였다. 그는 수형자의 신분에서 탈출하여 자유로운 신분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대답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었는지 사하르는 말을 이었다.
“제게 신앙은 그런 뜻이랍니다. 나를 구성하는 중요한 의미 중 하나죠.”
민준은 쉘터의 모습을 둘러보며 생각했다.
‘하지만, 당신은 이미 종교가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서 삶의 의미를 찾은 것 같은데.’
물론 그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채 식사를 마쳤다.
***
사하르는 지금까지의 패턴을 볼 때 하루 이틀 사이에 또 화재가 발생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민준은 그때까지 이 쉘터에 죽치고 앉아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도 다음날부터는 사하르가 만든 리스트의 장소를 둘러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새벽 네 시, 사하르가 닫힌 그의 방문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을 때 민준은 이미 잠에서 깨어난 상태였다.
문을 두드리며 사하르가 말했다.
“요원님, 일어나세요. 불이 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