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20
120
“요즘 이래저래 정신없거든. 제대로 된 밥을 언제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나네. 기왕 여기까지 나왔으니 당 보충 좀 할까 하고.”
“저런, 카페가 아니라 레스토랑으로 약속 장소를 잡을 걸 그랬군요.”
홍성완 지사장은 신경 쓰지 말라며 손을 내젓곤 미안하다는 투로 말을 덧붙였다.
“빨리 나오려고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서 말이야.”
“바쁘신데 제가 괜히 귀찮게 해 드린 것 아닙니까?”
“괜찮아.”
재킷 단추를 푼 편안한 자세로 홍성완 지사장이 대꾸했을 때 종업원이 주문한 커피를 가지고 왔다.
“지난번에는 감사했습니다.”
“내가 뭘 한 것이 있다고 그냥 소개만 시켜 줬을 뿐인데.”
“지사장님이 아니었으면 그런 고위 인사와 접촉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허허. 그게 또 그렇게 되나?”
뜨거운 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홍성완 지사장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로 만나자고 한 건가?”
“그때 말씀드린 걸 지키려고 왔습니다.”
“응?”
혁권은 살짝 입가에 미소를 지으면서 의아해하는 홍성완 지사장한테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뭔가?”
“직접 보시죠.”
“…….”
홍성완 지사장은 봉투를 받아 안에 든 서류를 꺼내 조금 살펴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었다.
“이건?”
“일거리가 생기면 지사장님한테 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그냥 인사치레로 한 이야기 아니었나?”
“그럴 리가요.”
몸을 뒤로 기댄 혁권은 미소 띤 얼굴로 이야기를 이었다.
“밀가루를 비롯해 각종 생필품과 차량 타이어까지 스무 가지 품목에 주문 액수는 1천만 달러어치 정도 됩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가뜩이나 실적이 안 오르는 상황에서 1천만 달러면 적은 액수가 아니었기에 홍성완 지사장은 바로 머리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이거 자네 덕분에 그래도 부하 직원들한테 체면치레는 할 수 있겠군.”
사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아테네 지사를 책임진 자리에 있다 보니 실적 문제로 스트레스가 많았다.
“일이 잘 풀린다면 매달 이 정도의 오더를 계속 낼 수도 있습니다.”
“그게 정말인가?”
홍성완 지사장이 상체를 앞으로 당겨 앉으며 되묻자 그가 바로 대답했다.
“제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하긴 그렇지.”
“오더는 이번에 제가 새로 설립한 회사를 통해 정식으로 낼 거고 대금도 선불로 드리겠습니다.”
마지막 말에 홍성완 지사장은 다시 한 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금 전액을 먼저 주겠다는 건가?”
“예.”
보통 일부를 계약금으로 걸거나 아니면 신용장을 개설해 거래가 모두 끝난 뒤에 대금을 지불하는데, 그러지 않고 미리 한꺼번에 다 주겠다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신 한 가지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그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홍성완 지사장이 허리를 곧게 폈다.
“말해 보게.”
“카이로 시민 아파트 공사 현장으로 가는 자재 운송을 저한테 맡겨 주십시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홍성완 지사장은 두 눈을 껌뻑였다.
“자재 운송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그룹 계열사 중에 하나인 태일 건설이 이집트 정부의 발주를 받아 작년부터 카이로 외곽에 5천 세대 규모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짓고 있었다.
여기에 들어가는 자재 가운데 한국에서 가져오면 운송비가 많이 나오는 시멘트를 비롯한 여러 품목을 구입해 공급하는 업무를 아테네 지사가 대행하고 있었다.
“우리가 자재 공급을 맡고 있다는 걸 자네가 어떻게 알았나?”
살짝 얼굴을 굳히고는 추궁하듯 묻자 혁권은 별거 아니라는 듯 앞에 놓인 커피 잔을 집어 들며 대답했다.
“몇 달 전까지 제가 카이로 지사에 있었다는 걸 잊으셨습니까.”
“참, 그랬지.”
머리를 끄덕이며 홍성완 지사장이 표정을 풀었다.
자재를 보내면 최종적으로 공사 현장까지 보내는 곳이 카이로 지사였으니 공사건을 알고 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자네한테 맡기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계약을 맺은 운송업자가 있네.”
기분 나쁘지 않게 돌려서 거절했지만 혁권은 진지하게 말했다.
“운송비를 10% 더 낮춰서 받는다면 어떻습니까? 물론 계약서는 그대로 두고 나중에 현금으로 돌려 드리는 걸로 말입니다.”
“……!”
“조만간에 임기를 끝내시고 귀국하실 텐데 그 전에 돈을 좀 마련해 두셔야죠. 아시겠지만 한국 부동산 가격이 하루가 다르게 뛰어서 웬만한 액수로는 서울에서 집을 구하기 어렵습니다.”
은밀한 제안에 홍성완 지사장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봤다.
“나한테 뒷돈을 주겠다는 건가?”
그러자 혁권이 웃는 얼굴로 여유롭게 말을 받았다.
“따로 횡령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약간의 커미션은 늘 있어 왔던 일이지 않습니까.”
잠시 가만히 그를 바라보면서 입을 다물고 있던 홍성완 지사장은 이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거 내가 한 방 제대로 먹었구먼.”
“지사장님께 절대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자재를 운송할 선박은 있나?”
“설마 배도 없이 이런 부탁을 드리겠습니까.”
“흐음.”
팔짱을 낀 채 고심하던 홍성완 지사장은 이내 결정을 내렸다.
“좋아. 자네한테 일을 맡기도록 하지.”
“절대 후회하시지 않으실 겁니다.”
원하던 대답이 나오자 그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한바탕 태풍이라도 몰아친 것처럼 어지럽혀져 있는 테이블 앞.
크리스털 재떨이에는 담배꽁초가 작은 산을 쌓듯 수북하고, 먹다 만 안주는 치우지도 않은 채 그대로 방치되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여자들을 불러 질펀하게 놀다가 이젠 그것마저 질린 것처럼 나른하게 풀린 눈빛으로 혼자 연거푸 술잔을 들이켜고 있는 남자는 바로 김인철이었다.
그가 있는 곳은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자리한 고급 술집으로, 비싼 연회비를 내고 멤버가 되어야만 출입할 수 있는 가게였다.
덕분에 종업원들의 서비스는 물론 시설도 최상급인 데다 흔히 말하는 물 관리도 잘되는 편이라 김인철이 저랑 친하게 지내는 무리와 함께 반쯤 아지트처럼 지내기도 했었다.
그래,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게 다 잘되어 갈 때 말이지.
와장창!
힘껏 내던져진 술잔이 벽면에 맞아 사방으로 유리 파편을 흩날렸다.
진한 얼룩을 남기면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액체를 성난 눈빛으로 노려보던 김인철은 곧바로 근처에 있는 다른 술잔을 찾아 독한 양주를 콸콸 쏟아부었다.
그러고는 잔을 깨 버릴 듯 테이블 위에 세게 내려놓으면서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내가 이대로 주저앉을 것 같아! 날 깔아뭉갠 대가가 뭔지 똑똑히 보여 주겠어.”
엉망으로 흐트러진 채 울분을 터트리는 모습에 동석해 있던 이동철이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사님.”
“뭐야!”
“많이 취하셨습니다. 이제 그만 일어나시지요.”
그러자 김인철은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괜히 이동철에게 화풀이를 했다.
“이제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됐다고 너까지 날 무시하는 거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동철이 황급히 팔을 내저었지만 김인철은 눈에 준 힘을 풀지 않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말이 많아!”
모난 성격을 그대로 드러내며 이동철이 다시 양주를 병째 입에 가져가자 김인철은 몰래 눈가를 찡그렸다.
황금 동아줄인 줄 알고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며 지금껏 비위를 맞췄는데, 이렇게 공든 탑이 한꺼번에 무너지지 정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모든 걸 잃고 패배자가 될 수는 없었기에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말했다.
“이사님, 아직 다 끝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회장님께서 노여움에 벌을 내리셨지만 오래지 않아 풀리실 겁니다. 그때를 위해서라도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으음.”
술병을 내려놓으면서 약간 반응을 보이자 김인철은 더욱 적극적으로 이동철을 설득했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이왕 이렇게 된 거 너무 조급해하지 마시고 차분히 뒤에서 준비하고 있다가 기회가 오면 한꺼번에 상황을 역전시키는 겁니다.”
이동철이 눈을 번득이며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면 돼.”
“일단 TC인터내셔널을 통해 자금을 확보하시고 그걸로 재기를 하시는 겁니다.”
“그렇지. TC인터내셔널이 있었지.”
술 대신 얼음이 담긴 물 컵을 집어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이동철은 무겁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작업이 얼마나 진행됐지?”
그러자 룸 안에 단둘뿐임에도 불구하고 김인철이 누가 들을세라 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이번 일로 잠시 진행이 중단되기는 했지만 다행히 제가 TC인터내셔널 전무로 내려가게 됐고, 다른 형제분들이나 최 대표도 눈치를 못 채고 있습니다.”
가만히 머리를 끄덕인 이동철은 자세를 바로 하고는 옆에 앉아 있는 김인철을 보며 이야기를 했다.
“좋아. 일단 비밀을 철저히 유지하고 자넨 그사이에 회사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어. 분위기가 정리되고 예정대로 계열 분리가 끝나면 그때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자고.”
“알겠습니다.”
이미 이동철 라인으로 찍힌 만큼 자신이 살려면 어떻게 해서든 재기를 돕는 수밖에 없었기에 김인철 역시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타악!
잔에 넘칠 만큼 술을 따라 부은 그는 남은 빈 병을 테이블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이 치욕은 꼭 되갚아 주겠어.”
그때까지 즐겁게 기다리고 있으라고.
입에 술을 털어 넣는 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꿀렁거렸다.
홍성완 지사장의 배려(?)로 이집트 공사 현장에 들어가는 자재 운송권을 따낸 혁권은 즉시 장기 임차한 화물선을 투입했다.
이걸로 혁권은 충분하지는 않지만 한 달에 두 번 정기적인 일거리를 확보해 최소한의 운용 경비를 뽑을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사실 최저 비용으로 책정된 운송비에서 다시 10%를 더 낮춰서 화물을 나르면 수익은 고사하고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뒷돈까지 줘 가며 이번 운송권을 따낸 건 다른 곳에서 손해를 메울 자신이 있어서였다.
그건 바로 밀수였다.
합법적으로 수입되는 건설 자재 사이에 몰래 밀수품을 숨겨 가져갈 계획이었다.
그러면 낮은 운송비로 인한 손해를 보충하는 건 물론이고 많은 시세 차익을 올릴 수 있었다.
담배부터 시작해 술, 각종 전자제품까지 밀수를 할 물건은 넘쳐흘렀다.
밀수품을 넘길 암거래상은 약간의 사례(?)를 하고 압둘라흐만을 통해 소개받았다.
마음 같아서는 스스로 유통망을 개척하고 싶었지만 아직은 인맥이 적은 데다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었기에 아쉬운 대로 도움을 받았다.
며칠 뒤 태일 건설 이집트 공사 현장에서 쓸 건설 자재와 밀수품을 가득 실은 화물선이 피레에프스 항구를 출발했다.
첫 운송이라 그가 직접 가고 싶었지만 이란 쪽 거래와 겹쳐 어쩔 수 없이 가장 신뢰하는 자말을 책임자로 대신 보냈다.
그리고 혁권은 카타르 도하를 거쳐 거래 장소인 이란 부세르 항구로 갔다.
이란 남서부에 위치한 부세르는 인구가 16만 명이 넘는 항구도시로 한때 핵무기 개발 계획에 따라 외곽에 플루토늄을 추출하기 위한 핵발전소가 세워지면서 미국과 이란이 대치하고 있기도 했다.
국적 항공사인 이란 항공Iran Air 여객기를 타고 부세르에 도착해 처음 느낀 건 습하고 후덥지근한 기후와 함께 마치 과거로 시간 여행을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