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21
121
10년이 넘게 계속된 미국의 경제 봉쇄에 현대적인 고층 건물이 늘어서 있고 넘쳐나는 오일머니 덕분에 활기가 넘치는 도하와 달리 부세르는 낡고 오래된 건물이 많고 어딘지 모르게 가라앉아 있었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자동차들도 하나같이 10년 이상 된 구형 모델이었고 하다못해 그가 타고 온 이란 항공 여객기도 하늘에 뜨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낡은 구소련제 비행기였다.
공항 청사를 나오자 제일 먼저 그를 맞이한 건 이란 혁명을 일으킨 종교 지도자인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의 대형 사진이었다.
그걸 보며 혁권은 나지막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정말 이란에 왔군.”
“뭐라고 하셨습니까?”
함께 온 하킴의 물음에 그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탄 두 사람은 곧장 시내에 있는 호마 호텔로 향했다.
객실만 해도 200개가 넘는 상당히 큰 호텔이었지만 이곳 역시 여기저기 낡은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래도 오래되어 보이는 외관과 달리 실내는 상당히 깔끔하고 잘 정돈되어 있어서 그럭저럭 지낼 만했다.
1층 로비로 들어서자 높다란 천장에 매달린 프랑스산 대형 샹들리에는 한창 잘나갔던 예전 모습을 보여 주는 것 같아 어쩐지 씁쓸한 느낌이 들었다.
체크인을 하고 올라간 곳은 10층에 위치한 로열 스위트룸이었다.
거실과 함께 침실이 2개로 나뉜 상급 객실이었지만 고급스럽다기보다 어쩐지 휑한 분위기였다.
한쪽 벽에 있는 텔레비전은 한국에서 이제 거의 사용하지 않는 평면 브라운관이었고 냉장고도 텅 비어 있었다.
습관적으로 리모컨을 들어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 보던 그는 재미도 없는 영화와 뉴스만 나오자 이내 흥미를 잃고 텔레비전을 껐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와이파이Wi-Fi를 확인해 보곤 인터넷이 잡히지 않자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
“인터넷도 안 되는군.”
대충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얼마 전까지 쉽게 인터넷을 쓰다가 안 되니 너무 갑갑하게 느껴졌다.
여행용 가방을 한쪽에 놔두고 객실을 살펴보던 하킴이 가까이 다가오며 말했다.
“아까 프런트에서 물으니까 로비에 있는 비즈니스 센터는 인터넷이 된다고 합니다.”
그나마 없는 것보다 나았지만 거북이처럼 느려 터질 것이 뻔했기에 그냥 당분간 안 쓰기로 했다.
“내일 움직이려면 차가 필요할 테니 미리 구해 놓도록 해.”
“예.”
스프링이 낡아 삐꺽거리는 소파에 앉아 담배를 한 개비 입에 물었을 때 객실 전화가 시끄럽게 울렸다.
따르릉. 따르릉.
전화를 받아 든 하킴은 몇 마디를 하고는 약간 굳은 표정을 지으며 한쪽 손바닥으로 말하는 곳은 막은 뒤 고개를 그에게 돌렸다.
“보스.”
“왜 그래?”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서 빼며 묻자 하킴이 얼른 말을 이었다.
“하즈사피 씨의 전화입니다.”
“……!”
하즈사피라면 이번 오더를 준 이란의 거물 상인이었다.
이란에 온다고 말했지만 어디서 묵는지 알려 준 적이 없는데, 도착하자마자 객실까지 알고 전화를 해 온 것에 살짝 놀랐다.
하지만 금방 평정심을 회복한 혁권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리 줘.”
“네.”
하킴이 전화기를 들어 그가 앉아 있는 소파 앞 탁자에 내려놓자 혁권은 수화기를 받아 귀에 가져다댔다.
그러고는 영어로 입을 열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이거 내가 쉬고 있는데 귀찮게 한 건 아니오?
“괜찮습니다.”
-미리 말을 했으면 근처에 있는 내 별장에서 머물렀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소이다.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지요.”
-별장에서 보는 사막의 석양이 아주 아름다우니 언제 꼭 한번 초대하겠소.
“감사합니다.”
-그건 그렇고 내일 화물이 도착하는 건 확실한 거요?
이게 전화를 건 진짜 용건이었다.
수화기를 고쳐 쥐며 그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정오 무렵에 배가 들어올 겁니다.”
그러자 하즈사피가 만족한 듯 말했다.
-그럼 내일 봅시다.
“그러시죠.”
수화기를 내려놓은 혁권은 피우려다가 만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옆에 서 있던 하킴이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불을 붙여 주자 그는 한 모금 길게 연기를 빨았다가 내뱉었다.
그렇게 가만히 담배를 피우면서 혁권은 약간 풀어졌던 마음을 다 잡았다.
“하킴.”
“예.”
“한국에 연락해서 배가 잘 오고 있는지 확인해.”
“알겠습니다.”
하킴의 대답을 들으면서 그는 반밖에 피우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다음 날.
그리스와 이란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라 시차 때문에 고생할 일이 없었던 혁권은 일찍 일어나 준비를 하고는 시간에 맞춰 항구로 나갔다.
두 사람이 탄 차량은 벤츠 오프로드 차량인 G바겐이었다.
오래된 구형 모델이기는 해도 관리가 잘되어 있어 타는 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부우우웅.
조수석에 앉은 그는 선글라스를 낀 채 물끄러미 차창 밖을 바라봤다.
거리는 사막처럼 온통 회색 일색이었다.
넓은 포장도로 양옆에 세워진 건물들은 대부분 5층을 넘기지 않았는데 현대식 고층 건물들이 즐비한 다른 중동 산유국과 너무 비교됐다.
이제는 익숙한 히잡을 머리에 두른 여자들과 야자수 그리고 모스크의 커다란 원형 돔을 스쳐 지나 조금 더 가자 드디어 부두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크레인들이 세워져 있는 부두는 규모와 비교해 정박해 있는 선박이 그리 많지 않았다.
뒤편 하역장에도 빈자리가 많아 경제 봉쇄의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도로를 나와 부두로 들어가는 입구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고 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수신호에 따라 차를 멈춰 세우자 콧수염을 기른 군인 한 명이 운전석으로 다가왔다.
조금 따분해 보이는 얼굴을 한 군인은 힐끗 차량 내부를 살펴보곤 입을 열었다.
“무슨 용무로 온 거요?”
하킴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오늘 들어오기로 한 화물을 확인하러 왔습니다.”
그러면서 건네주는 여권 사이에 50달러짜리 지폐를 한 장 끼워 넣었다.
돈을 본 군인은 얼른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고 여권을 다시 돌려줬다.
무사히 검문소를 통과한 두 사람은 차를 몰고 화물선이 들어오기로 되어 있는 2번 부두로 갔다.
부두에 도착하자 한쪽에 커다란 배가 한 척 떠 있었다.
일반 선박과 달리 갑판이 높게 솟아있는 모습에 바로 한국에서 온 자동차 운반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벌서 도착했나 봅니다.”
“그런 것 같군.”
선수에 영어로 ‘블루스타5호’라고 적힌 운반선은 한 번에 1천 대가 넘는 승용차와 트럭을 옮길 수 있었다.
차에서 내린 혁권은 하킴과 함께 한쪽에 내려진 화물 램프로 다가갔다.
그러자 주황색 작업복을 입은 한국인 선원이 그를 보곤 한쪽 팔을 내저으면서 제지했다.
“위험하니 저리로 가시오!”
“화물을 인수받으러 왔소.”
혁권이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자 상대는 그를 탐색하듯 슬쩍 살펴보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솔 루시두스…….”
“맞소.”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자르자 선원은 바뀐 태도로 양해를 구한 뒤 허리에 찬 무전기를 빼서 윗선에 상황을 보고했다.
잠시 뒤 선원은 두 사람을 운반선 함교로 안내했다.
넓은 함교에는 배를 움직이는 데 필요한 최첨단 장비들이 모두 설치되어 있었다.
“선장님.”
단정하게 자른 머리에 편안한 복장을 한 중년인이 뭔가 지시를 내리고 있다가 선원의 말에 몸을 뒤로 돌렸다.
그러고는 두 사람을 가볍게 훑어보며 말했다.
“이분들인가?”
“그렇습니다.”
“자넨 그만 내려가 봐.”
“예.”
꾸벅 허리를 숙이며 대답한 선원이 함교를 나가자 선장은 두 사람을 보며 물었다.
“송장][Invoice]을 보여 주시겠습니까?”
그러자 혁권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받았다.
“편하게 한국말로 하시면 됩니다.”
“아. 한국분이셨군요.”
혹시 몰라 영어로 이야기를 했던 선장은 그의 이야기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여기 있습니다.”
안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보여 주자 꼼꼼하게 확인한 선장은 살짝 머리를 끄덕이고는 송장을 다시 돌려줬다.
“맞군요. 귀찮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서로 확실한 것이 좋지요.”
기분 나빠할 수도 있었지만 혁권이 별다른 불만을 보이지 않고 넘어가자 선장도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럼 지금 바로 하역을 시작하실 겁니까?”
혁권은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화물을 인수받을 상대가 아직 도착 안 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으음. 다음 스케줄도 있으니 너무 지체되면 곤란한데요.”
“그렇게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잠시 미적지근한 태도를 취하던 선장은 결국 혁권의 말을 믿기로 했는지 가볍게 수긍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때가 되면 알려 주십시오.”
혁권은 한 발짝 양보해 준 선장에게 고개를 까딱여 감사를 표했다.
그리곤 하킴과 함께 함교에서 부두로 내려와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며 잠시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담배 한 대가 거의 다 타들어 갈 때쯤, 하킴이 멀리서 다가오는 차량들을 먼저 발견했다.
“보스, 저기 오는 것 같습니다.”
은회색 사륜구동차를 선두로 차량 여러 대가 마치 행렬을 하듯 나란히 열을 맞추어 그들 앞에 다가와 섰다.
한눈에 봐도 위험해 보이는 사내들과 함께 이슬람 전통 복장을 입은 중년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다리던 상대라는 걸 직감한 혁권은 피우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버린 뒤 구둣발로 비벼 끄고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미스터 김?”
“그렇습니다.”
“이거, 반갑소. 내가 하즈사피요.”
환하게 웃으며 먼저 손을 내민 하즈사피는 텁수룩한 수염에 특이하게도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다.
“김혁권입니다.”
맞잡은 손바닥 사이로 거친 살가죽이 느껴졌다.
단단하게 박인 굳은살과 갈고리처럼 쭉 뻗은 손가락이 동시에 그를 압박해 오자, 혁권은 내색하지 않은 채 제 손에도 힘을 꽉 주었다.
뒤로 빼지 않고 마주 덤벼드는 모습에 하즈사피는 하얀 이빨을 드러낸 채 미소를 지으며 손에서 힘을 뺐다.
“손힘이 세구먼.”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 주의라서 말입니다.”
듣기에 따라 건방지게 느껴질 수도 있는 대답에 하즈사피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런 패기가 있어야지. 이거,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군.”
그러곤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친하게 지내도록 하세.”
“저도 원하는 바 입니다.”
위축되지 않고 당당한 혁권의 태도가 하즈사피는 더욱 마음에 들었다.
“자아, 그럼 사설은 이쯤에서 끝내고 먼저 물건부터 확인을 하고 싶소.”
“그러시죠.”
혁권은 길안내를 자청하며 하즈사피를 데리고 아래로 내려와 있는 화물 램프를 이용해 거대한 자동차 운반선 안으로 향했다.
3층으로 나누어진 넓은 화물칸에는 주문한 중고차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깔끔하게 정비를 끝내고 세차까지 해서 배에 실은 자동차들은 중고가 아니라 공장에서 방금 만들어 낸 신차 같았다.
하즈사피는 그걸 보고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역시 듣던 대로 일처리가 아주 깔끔하구먼.”
배도환의 꼼꼼한 일처리에 내심 미소를 지으면서 혁권이 어깨를 펴며 말했다.
“정비를 다 끝내 놔서 몇 년은 문제없이 탈 수 있을 겁니다.”
“아주 훌륭하오.”
크게 만족한 하즈사피가 부하들을 향해 손짓했다.
뒤에 도열해 있던 건장한 덩치의 사내들 중 한 명이 검은색 하드 케이스 가방 두개를 들고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