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22
122
“약속한 잔금이오.”
그러자 하킴이 기다렸다는 듯 가방을 건네받아 내용물을 확인했다.
“600만 달러가 맞습니다.”
그가 머리를 끄덕이자 하즈사피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좋은 거래였소.”
“마찬가지입니다.”
잠시 뒤 하즈사피가 데려온 운전수들이 운반선에 실린 중고차를 한 대씩 선착장으로 하역시켰다.
무려 1천 대나 됐기에 시간도 많이 소요 됐는데 작업이 끝날 즈음에는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었다.
혁권은 마지막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하즈사피와 악수를 나누고는 호텔로 돌아왔다.
만족스럽게 거래를 끝낸 혁권은 그리스로 돌아가지 않고 두바이를 경유해서 아프리카 서부에 위치한 시에라리온Sierra Leone으로 향했다.
오랜 세월 영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상당히 늦은 1961년에서야 독립을 쟁취한 시에라리온은 다이아몬드와 철, 보크사이트 등 광물 자원이 아주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는 축복받은 땅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시에라리온 국민들한테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어 버렸다.
세상 그 어느 것보다 빛나고 아름다운 다이아몬드를 차지하기 위해 독립 이후 지금까지 끊임없이 쿠데타와 내전이 반복되며 하루도 총성이 그칠 날이 없고, 국민들은 광산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가난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런 국내 상황을 반영하듯, 국제공항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도 믿지 못할 만큼 조악한 시설에 혁권은 내심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런던의 히드로나 서울의 인천공항처럼 거대한 규모를 상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구두 바닥에 들러붙은 정체불명의 끈적끈적한 갈색 액체를 매트에 비비며 그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비행기에서 내려 짐을 챙기고 공항 입구까지 걸어오는 동안 바닥에 지뢰처럼 흩어져 있는 오물들을 피하느라 신경을 잔뜩 썼더니 없던 편두통이 갑자기 생길 정도였다.
“어쩐지 여기 햇살은 더 따가운 것 같군.”
전에 있던 곳도 더위로는 만만찮은 지역이었는데, 잠깐 에어컨이 나오는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고 그새 시원한 온도에 익숙해져 버린 모양이었다.
잠깐 렌트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하킴이 돌아와 말했다.
“차를 구해 왔습니다.”
“그럼 얼른 움직이자고 이러다가 완전히 통구이가 되겠어.”
더 이상 피부가 탔다간 부모님조차 몰라보게 생겼다며 혁권이 반쯤 장난 섞인 농담을 내뱉었다.
공항을 나온 일행은 곧장 미리 예약한 호텔로 향했다.
호텔로 가는 길에 본 프리타운 시가지는 한 나라의 수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볼품이 없었다.
3층이 넘어가는 건물이 드물었고 그나마도 오랜 시간 유지보수가 제대로 되지 않아 엉망이었다.
도로 역시 군데군데 아스팔트가 패여 있고 시내 임에도 불구하고 비포장인 곳도 많았다.
지나다니는 행인들의 허름한 옷차림과 활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표정에 이 나라가 처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특히 팔이나 다리가 잘려 나가 불구된 이들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띄었는데 다 오랜 내전이 낳은 아픔이었다.
서로 상대에게 공포를 심어 주기 위해 병사와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행동하는 걸 서슴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날카로운 정글도로 사지四肢 중 한 곳을 잘라 내거나 여자들을 무참히 강간하는 일들이 무수히 많이 벌어졌다.
그리고 곳곳에 무차별적으로 묻어 놓은 지뢰에 아무런 죄가 없는 민간인, 특히 어린아이들이 크게 다치거나 희생됐다.
차창 밖을 바라보며 혁권이 씁쓸한 표정을 짓는 가운데 운전대를 잡고 있던 하킴도 왠지 이곳과 트리폴리의 모습이 겹쳐져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게 무거운 분위기 속에 얼마쯤 더 달려가자 숙소인 메리어트 호텔이 나왔다.
영국 식민지 시절 지어진 호텔은 10층짜리 건물로 해변에 세워져 아름다운 주변 풍광으로 유명했다.
직원에게 차를 맡기고 로비로 들어서자 바깥과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바닥에 깔린 대리석은 바짝바짝 윤이 났고 원목으로 만들어진 집기와 잘 가꿔진 화분들이 고급스러움을 더했다.
한쪽에는 옷을 잘 차려입은 손님들이 호텔 직원의 시중을 받으면서 차를 마시거나 외국 신문과 잡지를 읽고 있었다.
약간 이질감을 느끼며 프런트로 가자 짙은 색 유니폼을 입은 호텔 직원이 영국 억양이 강한 영어로 말했다.
“뭘 도와 드릴까요?”
“예약을 했는데 확인을 좀 해 주시겠습니까.”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존슨입니다.”
자주 쓰는 가명을 대자 호텔직원은 예약 명부를 꺼내 이름을 찾았다.
“아. 여기 있군요. 511호실입니다.”
“바로 체크인을 해 주시오.”
“보증금 200달러를 내셔야 합니다.”
레오네라는 독자적인 화폐가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미국 달러나 유로를 더 선호했다.
호텔 직원의 말에 나란히 서 있던 하킴이 보관하고 있던 경비에서 50달러짜리 지폐 네 장을 꺼내 올려놨다.
그러자 돈을 챙긴 호텔직원이 511호라는 숫자가 적힌 카드키를 건넸다.
“필요한 것이 있으시면 언제든 전화를 하십시오.”
카드키를 챙긴 두 사람은 짐을 가지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역시 좋게 말하면 고풍스러운 멋이 있었지만 너무 낡고 좁아 운행되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그래도 객실은 상당히 깨끗하고 정리가 잘되어 있었다.
특히 창문을 열면 바로 내려다보이는 넓은 해변과 에메랄드빛 바다는 마치 태평양의 휴양지에 와 있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하킴이 짐을 정리하는 동안 미니 냉장고를 열고 생수를 집어 한 모금 마시면서 소파에 앉은 그는 위성전화기를 꺼냈다.
비행기를 타는 동안 꺼 뒀던 전원을 켜자 수신된 메시지가 몇 개 떴다.
메시지를 열어 살펴본 혁권은 저장된 번호 목록을 내리다 하나를 선택해 전화를 걸었다.
부착된 액정에 위성과 연결됐다는 표시가 나타나며 긴 신호음이 울렸다.
-보스, 이제 도착하셨나 봅니다.
자말의 목소리에 그는 등을 뒤로 기대며 이야기를 했다.
“방금 호텔에 들어왔어. 이집트 쪽 일은 다 끝났나?”
-네. 화물을 전부 무사히 넘겼고 대금도 확실하게 받았습니다.
“수고했어.”
조금 걱정이 됐는데 일이 잘 끝났다니 마음이 놓였다.
-아닙니다. 그런데 그쪽에서 추가로 화물을 더 주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는데, 어떻게 할까요?
“호오. 그래?”
긍정적인 얼굴로 혁권이 말을 이었다.
“액수가 얼마나 되는데?”
-600만 달러입니다.
“꽤 되는군.”
-매달 이 정도 물건을 공급해 주고 상황에 따라 1천 만 달러까지 늘릴 수도 있다고 합니다.
“흐음.”
한쪽 손으로 매끈하게 면도한 턱을 매만지면서 고심하던 혁권은 차분한 어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생각은 어때?”
-글쎄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자말이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직접 가서 봤으니 아무래도 나 보다는 더 잘 알 거 아냐?”
그러자 자말이 신중한 어투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거래를 늘려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 그렇지?”
한쪽 다리를 반대편 무릎 위에 올리며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아직 좀 더 두고 봐야 되겠지만 이번 거래로 최소한의 신뢰는 생겼고 무엇보다 인구가 수천만에 달하는 이집트에 제대로 루트를 뚫게 된다면 앞으로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논리적인 대답에 혁권은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좋아. 자네 판단을 믿지.”
-그럼?
“오더를 받아들이도록 해. 그리고 스와이단한테 연락을 해 봐.”
혁권의 말에 자말이 꺼림칙한 태도를 보였다.
-설마 미스라타에 다시 배를 끌고 가실 생각이신 겁니까?
“뭘 염려하는지 나도 잘 알고 있어. 하지만 그쪽에 길을 열게 되면 트리폴리는 물론이고 주변 도시에 지금보다 훨씬 수월하게 물품을 공급할 수 있게 되잖아. 그걸 생각하면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 값어치가 있어.”
-그렇긴 해도 스아이단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낮고 살기가 가득 묻어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만약 또다시 내 등에 비수를 꽂으려고 든다면 그때는 지난번에 죽지 못한 걸 후회하도록 만들어 줘야지.”
보이지 않음에도 선명히 느껴지는 그의 서릿발 같은 기세에 자말은 오싹 끼치는 소름에 침을 꿀꺽 삼켰다.
다음 날 호텔에서 나오는 뷔페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두 사람은 차를 몰고 밖으로 나왔다.
“저깁니다.”
하킴의 말에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외벽이 떨어져 나간 허름한 단층 건물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금이 가 있는 것은 물론, 무작위로 아무렇게나 붙은 벽보와 페인트로 그린 낙서가 건물의 폐허 같은 분위기를 더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아무리 겉만 봐서는 모른다지만 도저히 다이아몬드를 채굴하는 업체 사무실이 있을 만한 장소로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TC인터내셔널이 한국에서 공시[Disclosure]한 정보에 나와 있는 현지 사무소 주소는 분명히 이곳이었다.
대체 이런 곳에 사무실을 차리는 사람은 어떤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 그 전에 사람이 드나들긴 하나?
혁권은 심히 미심쩍은 눈빛으로 건물을 바라보다가 하킴에게 말했다.
“일단 사무실이 진짜로 있는지 확인부터 해 봐.”
“예.”
하킴이 돌아올 때까지 할 일이 없어진 혁권은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폐에 깊숙하게 연기를 들이마셨다가 길게 후 뿜어내면서 무료하게 시간을 죽이는 순간이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새 두 번째 담배를 손에 들고 이걸 피울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 건물 쪽으로 사라졌던 하킴이 다시 차에 올라탔다.
“어떻게 됐어?”
그의 물음에 하킴이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대답했다.
“건물을 쓰는 사람들이 있기는 한데 말씀하신 사무실은 아니었습니다.”
“그럼?”
“반군을 피해 고향을 떠나 프리타운으로 피난 온 사람들이 비어 있는 건물을 무단 점거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변 노점상들한테 물어도 TC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혁권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거 더 냄새가 나는군.”
“이제 어떻게 할까요?”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을 한 혁권은 이내 고개를 들며 말했다.
“TC인터내셔널이 이곳에서 사업을 하는 것이 맞는지부터 알아봐야겠어. 대통령 궁 근처에 담당 관청이 있다고 했으니까 그리로 가지.”
“네.”
대답과 함께 엔진 시동을 건 하킴은 자동차를 천천히 출발시켰다.
담당 관청에서 확인한 결과 TC인터내셔널이 시에라리온 정부로부터 다이아몬드 탐사와 채굴 허가를 받은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내 엉터리로 기재되어 있는 주소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TC인터내셔널에서 탐사와 채굴 허가를 받은 코노 지역이 현재 반군들 손아귀에 들어가 있다는 거요?”
그의 물음에 뇌물을 받은 담당 공무원이 혹시 누가 들을세라 주위를 살피고는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정부에서 주민들의 동요를 막으려고 보도 통제를 하며 숨기고 있지만 코노 시 주변 상당수가 반군들한테 점령당한 상태입니다.”
수도 프리타운에서 동쪽으로 32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코노 지역은 예전부터 다이아몬드가 대거 채굴되던 주요 광산 지역이었다.
2000년 RUF 지도자인 포다이 상코가 체포되면서 반군이 거의 와해되다시피 해 오랜 내전은 정부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계속된 부정부패와 정치적인 혼란으로 정국이 불안정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