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23
123
“RUF 토벌 이후 내전이 종식된 것 아니었소?”
“그건 겉으로만 보이는 이야기지요.”
상대는 못 먹을 걸 먹은 사람처럼 찡그린 얼굴로 말했다.
“여당인 SLPP(시에라리온인민당)과 야당의 대립이 심각한 데다 일부 부족들이 정부 통제를 따르지 않는 통에 지방으로 가면 여전히 치안이 불안한 상태입니다. 그중에서도 코노 지역이 가장 심각한 곳이지요.”
“그러면 다이아몬드가 발견된다고 해도 정상적으로 채굴하기가 어렵겠군요?”
담당 공무원은 어림도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채굴은 고사하고 다이아몬드를 노린 반군들의 습격에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 겁니다. 그쪽 지역은 아예 발길도 하지 않는 것이 신상에 좋습니다.”
이야기를 들은 혁권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공무원과 헤어져 호텔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뭔가를 골똘히 생각했다.
그의 상념을 방해하지 않으려 묵묵히 운전에만 열중하고 있는데, 불현듯 혁권이 입을 열어 말했다.
“하킴.”
“말씀하십시오.”
“내일 코노 지역으로 갈 테니까 준비를 해 놔.”
그러자 하킴이 눈썹을 살짝 치켜 올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거긴 위험하다는 이야기를 방금 들으셨지 않습니까?”
“알아.”
“그런데 왜?”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어.”
“그럼 제가 대신 다녀올 테니 보스께서는 이곳에 계십시오.”
하킴의 말에 그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직접 봐야겠어.”
단호한 어투에 하킴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위험 지역이라니까 준비를 단단히 해야 될 거야.”
“예.”
고개를 돌린 혁권은 차창 밖으로 스치고 지나가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봤다.
이른 아침부터 호텔을 나선 혁권은 급히 구한 현지인 운전수가 모는 사륜구동차를 타고 코노로 향했다.
곱슬머리에 약간 들창코인 은완코라는 이름의 운전수는 여유롭게 한쪽 팔을 차문에 걸친 채 차를 몰았다.
직선거리로 320킬로미터였지만 관리가 제대로 안 돼 도로 상태가 엉망이었기에 실제로는 그것보다 더 오래 걸렸다.
중간에 연료를 채울 곳도 마땅치 않아 뒤쪽 짐칸에 가득 채운 휘발유 통을 세 개나 실었다.
일행이 탄 사륜구동차는 흙먼지를 잔뜩 피워 올리면서 비포장도로를 시속 80km가 넘는 속도로 빠르게 달렸다.
아프리카하면 바짝 메마른 삭막한 사막을 먼저 떠올리는 것과 달리 시에라리온은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정글과 드넓은 초원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쉬지 않고 2시간쯤 달렸을까 운전대를 잡고 있던 은완코가 억양이 센 영어로 뭐라고 말을 하곤 도로 한쪽에 차를 세웠다.
차 문을 열고 내린 은완코가 보닛을 열자 하얀 연기가 화악 밀려 나왔다.
뜨겁게 내려쬐는 태양에 엔진이 과열된 것이다.
은완코 옆에 같이 서 있던 하킴이 그가 탄 뒷좌석으로 와서 말했다.
“여기서 조금 쉬면서 엔진을 식히고 다시 움직여야 될 것 같습니다.”
생수병을 손에 들고 냉각수를 채우는 은완코를 힐끗 쳐다본 혁권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아직 정오도 안 됐으니까 천천히 해.”
하킴이 앞쪽으로 가자 차에서 내린 혁권은 목을 좌우로 꺾으며 굳은 몸을 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과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이는 광활한 대초원은 여기가 거친 야생이 숨 쉬고 있는 아프리카라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줬다.
건기라 반쯤 말라 있는 초원에는 버팔로와 영양 같은 동물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어 먹고 있었다.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그것들을 바라보던 혁권의 눈에 한 마리의 사자가 보였다.
배를 바닥에 깔고 누렇게 말라 몸 색깔과 비슷한 풀숲 사이에 숨어 있어 금방 알아보지 못했다.
사자가 가만히 노려보고 있는 곳에는 얼룩말 무리가 머리를 숙여 작은 웅덩이에 고인 물을 마시고 있었다.
사냥을 하려는 걸 눈치챈 혁권은 얼른 쌍안경을 집어 들었다.
그러자 바짝 엎드려서 기회를 엿보고 있는 사자의 모습이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포복을 하듯 천천히 움직이며 사자는 먹잇감과 거리를 좁혀 갔다.
그것도 모르고 얼룩말 무리는 목을 축이고 있었다.
긴장된 순간, 쌍안경으로 바라보던 혁권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을 때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챈 얼룩말들이 고개를 들고는 주위를 살폈다.
그와 동시에 사자가 풀숲에서 뛰어 나와 벼락처럼 얼룩말 무리를 덮쳤다.
화들짝 놀란 얼룩말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달아났다.
사자는 그런 얼룩말들 가운데 다리를 다쳤는지 절뚝거리는 놈을 노리고 쫓아갔다.
필사적으로 도망쳤지만 불편한 한쪽 다리 때문에 무리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바로 옆에 바싹 붙은 사자는 풀쩍 뛰어오르더니 날카로운 송곳니로 얼룩말의 목덜미를 사정없이 물었다.
얼룩말은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사자를 떼어 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결국 구슬픈 비명과 함께 얼룩말은 그 자리에 쓰러졌고 사자는 앞발로 머리를 찍어 누른 채 다시 한 번 목을 물어뜯었다.
시뻘건 피가 흘러나와 메마른 흙바닥을 흥건히 적셨고 그대로 숨이 끊어진 얼룩말은 힘없이 축 늘어졌다.
사냥에 성공한 사자는 오랜만에 포식을 했고 동료의 희생 덕분에 위험을 벗어난 다른 얼룩말들은 혹시 있을지 모르는 다른 맹수들의 공격을 피해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보기 어려운 사자의 사냥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한 혁권은 어리거나 늙고 병든 약한 개체는 상위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는 철저한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법칙이 적용되는 야생이 인간 세계와 너무나도 닮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인간 세계에서도 강한 자가 약한 자를 희생시켜 이득을 취하고 짓밟는 건 마찬가지였다.
방금 죽은 얼룩말처럼 당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힘을 기르고 자신을 지켜야 했다.
그 자신도 약자였기에 실컷 이용만 당하고 헌신짝처럼 버려진 거였다.
다시는 그런 비참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힘없는 얼룩말이 아니라 맹수가 되어 그 누구도 자신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며 혁권은 손에 든 쌍안경을 꽉 움켜쥐었다.
잠시 뒤 엔진이 다 식고 냉각수 보충이 끝나자 일행은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언제까지고 끝없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은 초원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3시간쯤 더 달려가니, 군인들이 바리케이드를 쳐 놓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정부군 검문소입니다.”
말과 함께 은완코가 서서히 속력을 줄였다.
십여 명 가량의 모두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과, 다른 한쪽엔 모래주머니를 쌓아서 만든 기관총 진지까지 있는 것이 분위기가 아주 살벌해 보였다.
혹시 몰라 준비한 권총을 시트 아래 깊숙이 숨기며 혁권이 물었다.
“이런 곳이 많나?”
앞에 달린 룸미러로 그를 힐끗 쳐다본 은완코가 심드렁하니 답했다.
“수시로 반군들이 출몰하고 최근에는 IS 놈들까지 설치는 통에 경계가 더 심해졌지요. 아마 코이두Koidu까지 저런 검문소를 서너 곳은 더 거쳐야 될 겁니다.”
“그렇군.”
듣던 것보다 코노 지역의 치안 상황은 훨씬 더 안 좋았다.
혁권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는 사이, 은완코가 바리케이드 앞에 차를 멈추자 총을 든 군인 한 명이 운전석으로 다가왔다.
이 지역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검은 피부에 두꺼운 입술을 가진 그는 마치 군인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려는 것처럼 눈에 잔뜩 힘을 준 거만한 표정이었다.
군인은 차에 탄 혁권과 일행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현지 말로 빠르게 중얼거리더니 손을 내밀었다.
“여행 증명서를 보여 달랍니다.”
은완코가 군인의 말을 통역했다.
조수석에 탄 하킴이 여권과 함께 프리타운을 떠나기 전 발급받은 여행 증명서를 건네자 군인이 슬쩍 내용을 들춰 보더니 금방 이죽거리는 투로 말했다.
“사업상 출장이라고? 반군 놈들이 득실거리는 곳에서 무슨 사업을 한다는 거지.”
아무래도 순순히 보내 줄 것 같진 않은 반응에 은완코가 미리 혁권에게서 받아 둔 50달러짜리 지폐 두 장을 군인의 주머니에 슬쩍 찔러 넣었다.
“돈이 어디 사람을 가린답니까. 궁한 쪽이 먼저 찾아 나서야지요.”
이런 일을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닌 듯 바로 옆에서 보고 있던 혁권조차도 놀랄 정도로 매우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흐음.”
군인은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충 서류를 훑어보는 척만 하고는 금방 돌려주었다.
“좋아. 통과!”
그의 말과 함께 다른 군인들이 옆으로 길을 비켜 주었다.
엑셀을 밟아 잠시 멈췄던 차를 다시 앞으로 전진시키며 애교스럽게 눈인사를 건넨 은완코는 검문소가 뒤로 멀리 사라지자 얼른 표정을 바꿔 불평을 쏟아 내었다.
“쳇. 저래서야 어떻게 반군들을 상대한다고. 돈이라면 제 가족도 팔아넘길 놈들이 군인이랍시고 한자리 차지하고 있으니 나라가 이 모양 이 꼴이지.”
그러고도 한동안 은완코의 신랄한 비평은 계속 이어졌다.
아무래도 평소에 쌓인 게 많은 듯했지만, 은완코의 심정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뇌물 하나만으로 이렇게 간단히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다면 아무리 경계를 강화시킨다 한들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짓인 것이다.
“코이두까진 앞으로 얼마나 남았지?”
은완코가 마음껏 울분을 풀도록 내버려 두던 혁권은 그가 잠시 숨을 고르는 틈을 타 물었다.
“1시간 정도는 더 가야 됩니다.”
“그렇군.”
혁권은 별다른 반응 없이 다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제 풀에 지친 은완코도 동시에 입을 다물어 버리니 차 안은 다시 평온한 정적으로 가득 찼다.
코노 지역의 중심지인 코이두는 한때 시에라리온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인구가 10만 명이 넘었다.
풍부한 다이아몬드 매장량에 광산업이 크게 발달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아주 부유한 곳이었다.
하지만 수년에 걸친 내전으로 그 모든 것이 깨지고 말았다.
특히나 코이두가 위치한 코노 지역은 다이아몬드 광산을 두고 정부군과 반군 사이에 뺐고 빼앗기는 치열한 전투가 이어지면서 큰 피해를 입고 말았다.
그 결과 코이두는 시가지 상당 부분이 파괴됐고 인구도 급감하는 아픔을 겪었다.
지금도 다이아몬드의 저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불안한 생활을 이어 가고 있었다.
지평선 위로 석양이 붉게 내려앉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일행이 탄 사륜구동차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 코이두에 들어섰다.
일행은 은완코의 안내를 받아 뉴바튼 호텔에 객실을 잡았다.
시설이 그다지 좋진 않았으나 외지인이 머물 만한 숙박업소는 여기밖에 없었기 때문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하룻밤을 묵은 혁권은 바로 다음 날부터 TC인터내셔널 소유의 광산이 있다는 시두Sidu로 갈 방법을 찾았다.
똑똑.
객실 소파에 앉아 베레타 권총을 분해해서 청소하고 있을 때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내려놓고 조심스레 일어나 문에 달린 방범 렌즈로 바깥을 확인한 혁권은 잠금장치를 풀고 상대를 맞이했다.
“총을 점검하고 계셨습니까?”
안으로 들어온 하킴이 탁자에 널린 권총 부품들을 흘낏 쳐다보았다.
그는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어?”
은완코와 함께 거리로 나갔다 온 하킴은 살짝 표정을 굳히며 대답했다.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어느 정돈데 그래?”
“정부군과 반군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어서 유일한 대중교통 편인 버스는 이미 한 달 전에 운행이 중단됐고 일반인의 통행도 극도로 제한되고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