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27
127
“그러니까 괜히 헛고생하지 마시고 그냥 저랑 같이 가요.”
“이 녀석.”
아무리 봐도 어린애의 치기치고는 너무 호언장담하는 것이, 진짜 제 말마따나 자신이 어느 정도 있지 않으면 저렇게 눈앞에서 대놓고 말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으음.”
이제 와서 다른 길잡이를 구하기엔 확실히 시간이 너무 지체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 이 어린애를 믿고 가야 하나?
주위를 기민하게 살피는 눈동자나 날렵하게 움직일 것 같은 마른 체구가 길잡이로는 안성맞춤이긴 했으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게 자꾸만 발목을 붙잡았다.
열여덟 살이라고 하긴 했지만 그것도 사실일지 의문이고.
이리저리 고민하던 혁권과 고집스레 이쪽을 쳐다보는 새까만 눈동자가 서로 맞부딪쳤다.
“하아. 어쩔 수 없군.”
긴 한숨과 함께 혁권이 백기를 들자, 소년의 얼굴에 기쁨의 빛이 깃들었다.
“단, 조건이 있다.”
혁권은 엄한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일단 숲에 들어가면 길 안내는 네가 해 줘야겠지만, 그 외엔 우리 지시에 따라야 해. 알겠어?”
만약 약속을 지킬 자신이 없다면 지금 당장 돌아가라는 혁권의 말에 소년이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
소년을 부르려던 혁권이 순간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름도 듣지 못했군. 김혁권이다.”
“토롱카.”
소년은 엄지손가락으로 제 가슴팍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그래 잠시지만 잘해 보자.”
“예.”
주눅 들지 않고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는 토롱카의 모습에 혁권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마을 빠져 나와 10분쯤 달린 사륜구동은 길도 없는 초원을 빠르게 가로질렀다.
그렇게 얼마쯤 갔을까 왼편에 높다란 돌산을 두고 키가 작은 잡목림이 펼쳐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 커다란 나무 뒤편에 차를 세워요.”
시트 사이에 고개를 삐죽이 내밀고 있던 토롱카가 한쪽 팔을 내밀면서 소리치자 하킴이 시키는 대로 운전대를 돌렸다.
끼이익.
차를 멈춰 세우자 뿌연 흙먼지가 피어올랐다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한쪽 손에 AK소총을 들고 내린 혁권은 날카로운 시선으로 주위를 빠르게 훑어보곤 말했다.
“조금 더 들어가야 되지 않아?”
“근처에 반군 초소가 있어서 차를 타고 가면 바로 들킬 거예요.”
토롱카의 이야기에 그는 가만히 머리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쪽에 차를 숨기면 아무도 못 찾거든요.”
고개를 돌리자 커다란 바위 무더기 사이에 약간의 공간이 있었다.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를 잘라서 덮어 두면 가까이 와서 살펴보지 않는 한 쉽게 차를 발견하기 어려웠다.
혁권과 하킴은 차를 안쪽으로 밀어 넣고는 준비해 온 정글도를 써서 잎사귀가 많이 달린 나뭇가지를 골라 잘라 냈다.
눈치가 빠른 토롱카는 가만히 있지 않고 자기 몸만 한 나뭇가지를 옮겨 말한 대로 한 사람 몫을 했다.
그걸 본 혁권은 살포시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세 명이 힘을 합치자 작업은 30분도 되지 않아 다 끝났다.
“으쌰.”
마지막 나뭇가지를 차 지붕에 올린 그는 양 손바닥을 털면서 말했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지?”
“예.”
손목에 찬 전자시계를 확인한 혁권은 흙바닥에 놔둔 배낭을 집어 들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해가 지기 전에 다녀오려면 서두르자고.”
어린 토롱카를 제외한 혁권과 하킴은 각자 배낭을 하나씩 등에 메고 잡목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듬성듬성하게 나 있던 나무들은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빽빽해졌다.
정오가 지났지만 한 낮의 뜨거운 열기는 전혀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니,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 때문에 땀이 더 비 오듯 쏟아 내렸다.
그렇게 얼마쯤 걸어갔을까 앞서 가던 토롱카가 갑자기 멈추더니 가로 누워 있는 커다란 고목 뒤에 몸을 숨겼다.
“왜 그래?”
숨을 죽인 채 살금살금 다가간 혁권이 목소리를 낮춰 묻자 토롱카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다.
“반군이에요.”
고개를 돌리자 토롱카의 말대로 낡은 군복을 입고 무기를 아무렇게나 멘 반군 십여 명이 어슬렁거리면서 숲을 지나가고 있었다.
하마터면 멋도 모르고 걸어가다가 반군하고 바로 맞닥뜨릴 뻔했다.
내심 가슴을 쓸어내린 그는 손바닥으로 옆에 있는 토롱카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면서 작게 말했다.
“잘했다.”
“헤에.”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하는지 토롱카는 그를 보며 헤실 웃었다.
그대로 숨어서 반군이 지나가는 걸 지켜본 세 사람은 거리가 멀어지자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큰일 날 뻔했군.”
“그러게 말입니다.”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낸 그는 토롱카를 보며 말했다.
“얼마나 더 가야 되지?”
그러자 토롱카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며 거리를 가늠해 보곤 대답했다.
“저 언덕만 넘어가면 돼요.”
그리 높지 않은 언덕을 본 혁권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다시 힘을 내 움직였다.
정확히 30분 뒤.
세 사람은 목적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도착했다.
“으음.”
바위 뒤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쌍안경으로 아래를 내려다본 혁권은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낮게 침음을 흘렸다.
잡목 숲 한가운데 마치 소행성이 날아와 충돌한 것처럼 커다란 구덩이가 깊게 패여 있고 수십 명의 현지인들이 그 안에 들어가서 삽과 곡괭이로 흙을 파내고 있었다.
그렇게 파낸 흙은 채와 물로 걸러 내서 다이아몬드를 찾는 거였는데 무장한 반군 병사들이 주위에 서서 작업을 감시했다.
“소문이 사실이었습니다.”
혁권은 대답 대신 쌍안경에서 눈을 떼고는 고개를 돌려 입을 열었다.
“카메라 가져왔지.”
“예.”
등에 메고 있던 배낭을 벗어 흙바닥에 내린 하킴은 안에서 최신 DSLR카메라와 망원렌즈를 꺼내 혁권한테 건넸다.
그는 능숙하게 카메라에 망원렌즈를 끼워 넣고는 반군들이 다이아몬드를 채굴하는 모습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찰칵. 찰칵.
망원렌즈로 당겨서 보자 쌍안경을 쓸 때보다 훨씬 자세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사진을 찍어 두면 나중에 확인해 보기 좋았다.
한참 촬영을 하던 혁권은 뭘 봤는지 눈가를 찡그렸다.
제대로 먹지 못해 깡마른 사내 한 명이 흙을 나르다 무게를 이기지 못해 쓰러지자 근처에 있던 반군 병사가 득달같이 달려와서는 군홧발로 마구 구타를 해 댔다.
쓰러진 사내를 마구 걷어차다가 나중에는 벌레를 밟듯 짓이겼다.
순식간에 피투성이가 된 사내는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그저 몸을 웅크린 채 때리는 대로 다 맞았다.
끔찍한 광경에 다른 노역자들은 감히 말릴 생각도 못 한 채 자신도 그렇게 당할까 봐 몸을 떨면서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다른 반군들은 그 모습을 보며 낄낄거리며 웃어 댔다.
이것만 봐도 반군이 노역자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다.
“개자식들.”
카메라에서 눈을 뗀 혁권은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으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하킴 역시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주변 마을에서 잡아온 사람들이에요.”
고개를 돌리자 토롱카는 전혀 놀란 기색 없이 의외로 담담한 표정이었다.
“저러다가 죽거나 병들어서 일손이 부족해지면 마을로 가서 사람들을 강제로 납치해 가요. 저희 가족도 그걸 피해서 시두로 피난을 간 거예요.”
이야기를 듣고 나니 시두 외곽에 가득 들어차 있는 난민 캠프가 왜 생겼는지 이해가 됐다.
착잡한 얼굴로 그만 돌아가려던 혁권은 무슨 일인지 갑자기 아래쪽이 시끄러워진 걸 보곤 얼른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렌즈를 이리저리 돌리던 그는 노역자들이 잔뜩 몰려 있는 곳에 초점을 맞추다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노역자들을 밀쳐내고 들어간 반군 병사가 뭔가를 집어 하늘 위로 들어 올렸다.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이는 건 바로 다이아몬드였다.
반군 병사는 곧장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둔덕에 세워져 있는 낡은 지프차로 뛰어갔다.
그러고는 선글라스를 낀 채 조수석에 앉아 있는 사내한테 건넸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내는 다이아몬드를 보고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은 뒤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그 안에 집어넣었다.
“다이아몬드가 진짜 있군요.”
하킴의 말에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다이아몬드를 챙긴 지휘관을 뚫어질 듯 쳐다보며 사진을 찍었다.
충분히 정보를 수집한 그는 다시 카메라와 렌즈를 분리해서 하킴한테 건네주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예.”
짐을 다 챙긴 세 사람은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나 언덕에서 내려왔다.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지며 사방이 붉게 물든 숲을 빠르게 헤치면서 나아갔다.
바닥이 고르지 않은 데다 시야가 어두워져 자칫하면 발을 헛디뎌 넘어질 수도 있었기에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반군을 경계하느라 신경을 바짝 곤두세운 채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보니 잠시 쉬면서 식었던 땀이 다시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다.
금방 해가 져서 사방이 칠흑같이 어두워졌지만 날다람쥐처럼 움직이는 토롱카 덕분에 길을 잃지 않았다.
“다행히 그대로 있군.”
잡목 숲 초입에 도착한 혁권은 바위 무더기 사이에 숨겨 둔 사륜구동이 그대로 있는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숨을 돌린 세 사람은 서둘러 차에 덮어 둔 나뭇가지들을 치웠다.
부르릉.
시동을 건 하킴이 차를 뒤로 빼자 나뭇가지가 바퀴에 밟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전조등 불빛을 보고 반군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어서 출발해.”
“알겠습니다.”
기어를 바꾼 하킴이 가속 페달을 밟자 사륜구동은 덜컹거리면서 힘차게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제대로 된 길도 없고 사방이 어두워 전조등으로 앞만 겨우 볼 수 있었지만 하킴은 속력을 늦추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쯤 달려가자 멀리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듬성듬성 불이 켜진 마을이 보였다.
이제 안전하다고 생각한 혁권은 몸을 살짝 돌려 뒷좌석에 타고 있는 토롱카를 봤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지폐를 한 뭉치 꺼내 내밀었다.
“약속한 돈이다.”
많아 보였지만 전부 합쳐서 300달러가 조금 넘었다.
어린 토롱카가 큰돈을 가지고 있으면 자칫 험한 일을 당할 수도 있었기에 일부러 소액권으로 준 거였다.
“고맙습니다.”
돈을 받아 든 토롱카는 행여나 잊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두 손으로 꼭 움켜쥐고는 머리를 숙였다.
“잘해 줬어. 네 말대로 한 사람 몫을 해내더구나.”
칭찬에 토롱카가 환하게 웃는 걸 보고 그도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마을에 도착한 혁권은 토롱카를 보내고는 저녁도 건너뛰고 객실로 올라가 그대로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잔뜩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보니 피로감이 컸던 모양이었다.
새벽녘 타는 듯한 갈증에 깨어난 혁권은 약간 멍한 상태로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작은 기름 램프 하나가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가운데 소파에 가로 누운 하킴이 AK소총을 옆에 세워 둔 채 잠들어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그는 탁자에 놓인 주전자에 든 물을 컵에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물을 반쯤 마셨을까 바깥에서 휘파람 소리 비슷한 것이 들렸다.
“……?”
의아한 얼굴로 머리를 갸웃거리는 순간 요란한 폭음과 함께 객실 벽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마구 흔들렸다.
꽈아앙!
쨍그랑.
손에서 놓친 유리컵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지만 그런 걸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쉬이이익~!
쿠쿵! 쿵!
연이어서 폭음이 터졌고 천장에서 허연 시멘트 가루가 먼지처럼 떨어져 내렸다.
“어서 일어나!”
갑작스러운 소란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깬 하킴을 보며 크게 소리 친 혁권은 침대 옆에 놔둔 권총과 짐을 챙겼다.
그사이에도 계속해서 폭발음이 울렸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거기도 테이블과 의자가 뒤집어진 채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건물 안은 위험해. 밖으로 가!”
거리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는데 허겁지겁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공포에 질린 채 비명을 질러 댔다.
“꺄아악.”
“살려 줘!”
그때 섬뜩한 파공음을 내면서 날아온 포탄 한 발이 바로 건너편 건물에 떨어지면서 시뻘건 불기둥이 치솟았다.
콰꽝!
“크윽.”
강력한 충격파에 혁권은 순간 중심을 잃고 바닥에 쓰러질 뻔했다.
“보스!”
뒤따라오던 하킴이 화들짝 놀라 소리치자 그는 괜찮다는 듯 한쪽 팔을 가볍게 내저으면서 말했다.
“빨리 안전한 곳으로 피해야 돼!”
주변을 살핀 하킴은 거리 한쪽에 정부군이 만들어 둔 모래 참호를 가리켰다.
“저쪽입니다!”
하킴의 외침에 역시 참호를 발견한 혁권은 다른 걸 생각할 것 없이 앞으로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