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26
126
“쿰마 중위가 언제 코이두로 돌아간다고 했지?”
“원래 계획대로라면 여길 근거지로 해서 보름 동안 정찰 활동을 한 뒤 철수하는 걸로 되어 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중간에 습격을 받아 피해가 큰 상황이라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
“병력의 반을 잃었으니 정상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기는 불가능하겠지.”
“그럴 겁니다.”
“그럼 우리도 서둘러서 움직여야겠군.”
낮에 있었던 전투처럼 정부군의 호위 없이 단독으로 돌아다닐 수 없을 만큼 현지 상황이 안 좋았기에 안전을 위해서 쿰마 중위 부대와 함께 움직여야 했다.
“시간도 부족한데 은완코까지 다쳐서 꼼짝을 못하니 정말 골치 아프게 됐군.”
정보를 알아보려고 해도 당장 말이 제대로 통하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뜨겁게 내려쬐던 태양이 지고 사방이 어두워질 때쯤 두 사람은 식사를 하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싸구려 창녀들만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홀은 어느새 손님들이 가득 들어차서 떠들썩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하게 차 있는 가운데 낡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뒤섞여 시끄럽게 들렸다.
두 사람이 내려오자 몇몇 사내들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다가 이내 흥미를 잃고 술을 마셨다.
아직 초저녁이었지만 벌써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이도 있었다.
슬쩍 홀을 둘러본 혁권은 빈 자리가 없자 바로 가서 앉았다.
그러자 아까 들어오면서 봤던 중년인이 한쪽 어깨에 흰 수건을 걸친 채 앞으로 다가왔다.
“술을 마실 거요?”
고개를 저으면서 혁권이 말했다.
“술은 됐고 식사를 할 수 있소?”
중년인은 나란히 앉아 있는 하킴을 슬쩍 쳐다보곤 조금 퉁명스럽게 이야기했다.
“메뉴는 하나뿐이고 2인분에 20달러요.”
10달러짜리 지폐를 두 장 올려놓자 냉큼 챙긴 중년인이 말없이 몸을 돌렸다.
혁권은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가만히 홀 안을 살폈다.
자신들을 제외하곤 손님 전부 이곳 주민으로 몇 명은 상당히 거친 분위기를 풍겼다.
아프리카에서는 혁권 같은 동양인을 좀처럼 보기 힘들었기에 어딜 가던 주목을 받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주민들의 태도에 그는 이채를 띠었다.
그때 중년인이 다가와 음식이 담긴 접시를 앞에 내려놨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고기에 약간의 야채와 볶은 쌀밥이 섞인 요리였다.
보기에는 별로였지만 허기가 져서 그런지 맛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금방 접시를 깨끗하게 비운 혁권은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는 중년인을 불렀다.
“뭐 좀 물어볼 것이 있는데…….”
중년인은 빈 접시를 치우면서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바쁘니까 딴 사람한테 알아보시오.”
“이야기값은 충분히 주겠소.”
돈을 준다고 하자 그때서야 중년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뭘 알고 싶은 거요?”
“TC인터내셔널이라고 들어 봤소?”
그러자 중년인이 짧게 혀를 차며 말했다.
“역시 다이아몬드를 찾으러 온 거구먼. 하긴 그게 아니라면 이 척박한 곳까지 목숨을 걸고 들어올 리가 없지.”
“…….”
“그러고 보니 그 회사 사람들도 댁하고 같은 동양인이었던 것 같군.”
뭔가 많이 알고 있는 듯한 중년인의 태도에 그는 몸을 앞으로 당겨 앉으면서 물었다.
“그 사람들이 아직도 여기에 있소?”
중년인은 대답 대신 한쪽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었다.
“돈을 얼마나 줄 거요?”
눈가를 살짝 찡그린 혁권은 지폐를 몇 장 꺼내 줬다.
대충 100달러 정도 됐는데 중년인은 누가 볼 세라 얼른 바지 주머니에 돈을 쑥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TC인터내셔널에 대해 아는 걸 이야기해 줬다.
“2년 전인가 그 회사 사람들이 정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북쪽 숲에서 다이아몬드를 채굴한다고 한동안 여기에 머물렀었지. 하지만 채 한 달도 안 돼서 반군들이 극성을 부리는 바람에 얼마 못 버티고 그냥 떠나 버렸소.”
“그럼 다이아몬드가 있는지 제대로 조사도 못 했겠소?”
그의 물음에 중년인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이아몬드는 고사하고 어찌나 겁이 많은지 반군 놈들하고 부딪칠까 봐 있는 동안 숲 근처에도 못가고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다가 돌아갔소.”
“흐음.”
중년인의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엄청난 광맥을 확인했고 곧 상업 생산에 들어간다는 TC인터내셔널의 내부 보고서는 완전히 엉터리라는 말이었다.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그가 보기에도 반군이 수시로 출몰하는 상황에서 채굴은 거의 불가능했다.
조금 더 알아봐야 되겠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서류가 왜 만들어졌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주가 조작.
호텔 객실에서 봤던 보고서를 공시해서 커다란 호재를 만들어 주가를 폭등시킨 다음에 차익을 챙기려는 속셈이 분명했다.
다이아몬드 광산이라면 사람들의 관심을 단번에 끌어 모을 수 있는 데다 위치가 먼 아프리카 오지이니 의심이 가더라도 당장 확인하기가 곤란했다.
그리고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사업성은 충분했으나 반군으로 인한 내정 불안 때문에 채굴이 어렵다며 꼬리를 자르기에도 용이했다.
그때는 아무리 하소연을 하려고 해도 이미 김인철을 비롯한 작전 세력들은 단물을 다 빨아먹고 빠져나간 뒤일 테니 엉터리 공시를 보고 덤벼든 개미들만 손실을 떠안게 되는 거였다.
“보스.”
하킴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혁권은 고개를 들어 중년인을 보며 말했다.
“하면 채굴을 하려던 지역에 다이아몬드가 아예 없을 수도 있겠소이다.”
“지금도 가끔씩 그쪽 숲에서 크고 작은 다이아몬드 원석을 주운 사람이 나오는 걸 보면 그건 아닐 거요.”
뜻밖의 이야기에 그는 눈을 반짝였다.
“그게 정말이오?”
주위를 두리번거린 중년인은 살짝 상체를 숙이고는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다.
“반군들이 그쪽에다가 광산을 만들어서 다이아몬드를 채취한다는 소문도 있소.”
“으음.”
혁권은 한쪽 손으로 며칠 면도를 하지 못해 까칠한 턱을 살짝 쓰다듬었다.
그러다 다시 입을 열었다.
“북쪽 숲을 가 보려면 어떻게 하면 되오?”
중년인은 정색을 한 채 머리를 내저었다.
“방금 내가 한 이야기를 못 들었소. 반군 놈들한테 잡히면 곱게 살아 돌아오기 힘드니, 아예 근처에도 갈 생각을 하지 마시오.”
딱 잘라 안 된다고 하자 그는 더 이상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다른 것들을 물어봤다.
호텔 주인이자 이곳 토박이인 중년인의 이름은 은고고로 의외로 프리타운에서 대학 교육까지 받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영어를 그렇게 잘하는 거였는데 마을에 하나뿐인 숙박업소 겸 술집을 운영하다 보니 이런저런 아는 것이 많았다.
은고고를 통해 이곳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코노 지역은 중앙정부의 통제에서 거의 벗어난 가운데 여러 반군 세력이 뒤엉켜 혼란스러운 상태였는데, 그중에서 여기 시두를 위협하는 건 쿠데타로 현 정부를 전복시켰던 시에라리온인민군(PASL)의 잔존 세력이었다.
잔당이라고 하지만 숫자가 만만치 않고 한때 정규군이었던 만큼 훈련도 잘되어 있고 장비도 좋아 토벌에 애를 먹고 있었다.
“광산에 직접 가 보실 생각이십니까?”
객실로 올라오자마자 하킴이 물었다.
윗도리를 벗어 소파 등받이에 걸쳐 두며 그가 담담하게 말했다.
“대답을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
그러자 하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봤다.
“길도 모르는데 어떻게 하시려고요?”
“안내자를 구해야지.”
“아까 호텔 주인이 한 이야기를 못 들으셨습니까.”
“돈을 많이 준다면 나서는 사람이 있을 거야.”
태평스럽게 대답한 혁권은 소파에 앉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것보다 무기를 좀 더 구해 봐. 권총만 가지고는 아무래도 불안해.”
안 된다고 말려도 들을 사람이 아니었기에 하킴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이야기를 했다.
“돈이 좀 필요할 겁니다.”
혁권은 반으로 접힌 달러 뭉치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이걸 써. 그리고 하는 김에 안내자도 알아봐. 아마 호텔 주인을 통하면 쉽게 구할 수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한 하킴은 돈은 받아 챙겼다.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신발만 벗고 침대에 누운 혁권은 악몽이라도 꿨는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어제 낮에 있었던 전투 현장에서 그가 수류탄을 던지려고 일어섰다가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쓰러지는 순간 깨어난 것이다.
황급히 주위를 둘러본 혁권은 어젯밤 잠을 잤던 객실이라는 걸 확인하곤 나지막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씨팔.”
하필이면 총에 맞아 죽는 꿈이라니 정말 기분이 찝찝했다.
꿈인데도 얼마나 놀랬는지 식은땀에 옷이 축축할 지경이었다.
오른쪽 팔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자 벌써 오전 10시가 넘어 있었다.
하킴은 벌써 나갔는지 객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신발을 신고 일어나자 늦잠까지 잤는데도 몸이 납덩이처럼 무거웠다.
제일 먼저 침대 머리맡에 놔둔 권총부터 챙겨 허리에 차고는 나무로 된 창문을 열었다.
끼이익.
낡은 경첩 소리를 내며 창문이 열리자 눈이 부시도록 밝은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지처럼 메마른 공기와 황토색 흙집들을 보면서 새삼 자신이 아프리카 오지에 와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하킴이 들어왔다.
“일어나셨습니까?”
“그래.”
몸을 돌린 혁권은 하킴이 손에 들고 있는 걸 보며 말했다.
“그건 뭐야?”
“아침을 챙겨 왔습니다.”
“안 그래도 되는데…….”
“식기 전에 드십시오.”
하킴이 쟁반에 가져온 건 잡곡이 많이 섞인 빵에 커피였다.
“고마워.”
소파에 앉은 그는 먼저 금방 끓였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부터 한 모금 마셨다.
설탕을 넣지 않아 약간 썼지만 커피를 마시니 조금 남아 있던 잠이 완전히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북쪽 숲까지 데려다줄 안내자를 구했습니다.”
빵을 조금 베어 물고 입안에서 오물거리던 혁권은 맞은편에 앉은 하킴의 이야기에 고개를 들었다.
“벌써?”
“처음에는 안 된다고 하더니 소개비로 500달러를 쥐여 주니까 금방 구해다 주더군요.”
“잘됐군.”
혁권은 빵을 씹으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무기는 어떻게 됐어?”
“AK소총 두 정하고 탄약 육백 발 그리고 수류탄 열 개를 구해서 차 트렁크에 실어 놨습니다. 수류탄 하나가 빵보다 싸더군요.”
하킴의 말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머뭇거릴 것 없이 바로 움직이지.”
“지금 말씀이십니까?”
“그래. 쿰마 중위의 부대가 언제 마을을 떠날지 모르잖아. 우리끼리 코이두로 돌아가지 않으려면 낭비할 시간이 없어.”
수긍을 한 하킴은 머리를 끄덕이면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준비를 해 놓을 테니 천천히 내려오십시오.”
잠시 뒤 식사를 마저 다 끝내고 혁권이 호텔 뒷마당으로 나가자 트리폴리에서부터 타고 온 사륜구동 옆에 하킴과 키가 작은 현지인 소년이 서 있었다.
“얜 뭐야?”
그는 소년을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북쪽 숲까지 데려다줄 안내자입니다.”
“이 꼬마가?”
“예.”
하킴은 담담하게 대답했으나 혁권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키가 작아서 그렇지, 나이는 열여덟 살이라고 합니다.”
“그것도 제 입으로 한 말이겠지?”
“그렇긴 합니다만…….”
신분증 따윌 확인했을 리 없으니 아무렇게나 둘러댔을지 누가 아나.
돈 벌려는 욕심에 나이를 부풀려 말하는 것쯤이야 어딜 가나 흔하게 있는 일이었으니까.
미간을 찌푸린 혁권은 안 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안 돼, 너무 어려. 다른 사람을 데려와.”
혁권의 그 몸짓에 여태껏 둘이 말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던 소년이 대뜸 고개를 쳐들었다.
“어리다고 얕보시다간 큰코다칠걸요. 이래 봬도 한 사람 몫은 톡톡히 한다고요.”
어디서 어깨너머로 배웠는지 약간 서툰 영어였으나 당당하게 자기를 내세우는 모습은 어른 못지않았다.
“허어. 이놈 봐라.”
혁권은 헛웃음을 내뱉곤 자그마한 소년의 머리통을 내려다보았다.
“우리가 갈 곳이 어떤 덴지 알기는 해?”
“북쪽 숲이라면서요.”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는 거냐? 너무 위험하다고. 까딱하다간 죽을 수도 있어.”
혁권의 으름장에도 소년은 기가 죽긴커녕 오히려 쳐든 턱 끝을 더 치켜세웠다.
“더 잘됐네요. 위험수당은 당연히 챙겨 주시는 거죠?”
“너…….”
“북쪽 숲은 어렸을 때부터 밥 먹듯 드나들던 곳이라고요. 장담컨대 나보다 더 나은 길잡이는 없을걸요.”
허리에 손을 턱 올리고 가슴을 쭉 내미는 모습이 아주 자신만만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