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g-awaited RAW novel - Chapter 125
125
#블러드 다이아몬드Blood Diamond
사상자들을 모두 트럭에 태운 쿰마 중위는 반군이 재차 공격해 오기 전에 서둘러 다시 행렬을 출발시켰다.
동료가 죽고 피를 봐서인지 다들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는데, 혁권은 부상을 당한 은완코한테 뒷자리를 양보하곤 언제든 쏠 수 있게 권총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다행히 목적지인 시두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 전투가 없었다.
시두는 한국의 작은 읍내 같은 분위기였다.
대부분 흙을 구워서 만든 벽돌 건물에 그나마도 이 층 이상 높이는 하나도 없었다.
특이한 건 뿌연 흙먼지가 날리는 비포장 도로 양옆에 허술하게 지은 천막들이 늘어서 있는 거였다.
“저 천막들은 뭐지?”
혁권이 총탄에 맞아 깨진 차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을 가리키며 묻자 피가 살짝 묻은 붕대를 허리에 칭칭 감은 채 뒷좌석 시트에 다리를 올리고 비스듬히 앉아 있던 은완코가 대답했다.
“피난민 캠프입니다.”
“피난민들이 저렇게 많단 거야?”
얼굴에 낀 선글라스를 벗으면서 놀란 듯 그가 되묻자 피를 지혈하고 진통제를 맞아 상태가 많이 좋아진 은완코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프리타운 근처는 조금 좋아졌다지만 이곳은 여전히 내전이 진행 중이니까요. 고향 마을로 돌아가고 싶어도 반군들이 약탈과 방화, 강간은 물론이고 심지어 병사로 쓰기 위해서 젊은 남자와 어린아이 들을 납치해 가니 그럴 엄두를 못 내고 그냥 여기서 머물고 있는 겁니다.”
“으음.”
그가 있었던 리비아보다 훨씬 더 끔찍한 상황에 혁권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너무나도 열약한 피난민 캠프의 모습만 봐도 이 지역 상황을 적나라하게 알 수 있었다.
차량 행렬은 피난민 캠프를 가로질러 시가지에 도착했다.
선두를 따라 차를 멈춰 세우자 쿰마 중위가 조수석 쪽으로 다가왔다.
“도시 안이라도 반군이 수시로 출몰하는 곳이니까 가능하면 밖으로 나가지 말고 항상 무기를 가지고 다니도록 하시오.”
방금 전에 호되게 신고식을 치렀기에 그는 별다른 반발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린 경찰서 옆에 있는 주둔지에 머물 테니까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그쪽으로 오시오.”
“그러죠.”
“그리고 저쪽으로 돌아가면 병원이 있으니 환자는 그리로 데려가면 될 거요.”
“고맙습니다.”
이야기를 끝낸 쿰마 중위가 몸을 돌려 사라지자 혁권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서 말했다.
“병원부터 가.”
“예.”
대답과 함께 하킴이 차를 다시 움직였다.
쿰마 중위가 가르쳐 준 대로 가자 병원이 있었다.
하지만 말이 병원이었지 허름한 단층 건물에 낡은 간판 하나만 달랑 붙어 있는 것이 과연 여기서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대안이 없었고 한쪽에 군용 트럭이 서 있는 걸 보니 정부군 부상자들은 벌써 와서 먼저 치료를 받는 중인 것 같아 서둘러 차에서 내렸다.
“으윽.”
다친 곳이 쑤시는지 신음을 내뱉는 은완코를 그가 얼른 옆에서 부축했다.
“바로 치료를 받게 해 줄 테니까 조금만 참아.”
“……예.”
“제가 부축하겠습니다.”
“괜찮으니까. 반대쪽을 잡아 줘.”
하킴이 왼쪽에서 온완코를 붙잡고, 혁권이 반대쪽에서 발을 맞추며 양쪽에서 부축해 병원 건물로 들어갔다.
끼이익.
삐걱거리는 나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병원 특유의 소독약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리고 동시에 사이렌을 울리듯, 정부군 부상병들의 신음이 갑자기 온 사방에서 넘쳐흘렀다.
“아아악!”
“내 다리!”
그곳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아비규환의 한가운데였다.
병실에 다 수용되지 못하고 대기실에 그대로 방치되어 죽어 가고 있는 환자들의 고통에 찬 비명, 고름이 썩어 가는 냄새.
누군가는 신을 찾으며 기도하고 다른 한 편에서는 저주를 내뱉는, 선악이 불분명한 태초 그대로의 혼돈이 그 자리에 존재했다.
“이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최악인 상황에 혁권은 미간을 찌푸렸다.
원래부터 시설이 열악한 데다, 직원들도 몇 명밖에 없어 겨우 간판만 걸고 체면치레를 하고 있던 병원이다.
그런 곳에 중상을 입은 환자들이 갑자기 쏟아들어져 왔으니 미처 다 감당하지 못하고 기능이 마비되는 것도 당연하다지만, 이건 너무 심했다.
“보스, 일단 여기 앉아서 좀 쉬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런 와중에 용케 빈자리를 찾아낸 하킴이 온완코를 힘겹게 벤치에 앉혔다.
10분만 앉아 있어도 엉덩이에 쥐가 날 것같이 딱딱한 의자였으나 지금은 이것마저도 감지덕지였다.
“이대로는 길게 못 버팁니다.”
그사이 상태가 더 안 좋아져서 색색 가는 숨을 내뱉으며 축 늘어진 은완코를 살피며 하킴이 말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눈을 제대로 뜨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마저도 힘겨운지 창백해진 얼굴로 이마엔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놔두다간 급격한 출혈로 인한 저체온증, 혹은 쇼크 때문에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한시가 급하다고 판단한 혁권은 무릎을 굽히고 있던 몸을 일으켜 병원 안쪽으로 몸을 돌렸다.
“의사를 데리고 올 테니 잘 보살피고 있어.”
“저희 차례가 돌아오려면 한참 걸릴 텐데요.”
“이쪽은 응급환자가 있다고. 멱살을 잡아서라도 끌고 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
어차피 이런 상황 속에선 순번 따위 아무런 의미 없었다.
그래도 명색이 의사라면 눈앞에 환자가 있는데 설마 외면하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혁권은 엉망으로 섞여 있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유일하게 흰 가운을 입고 있는 인물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켰다.
“선생님, 피가!”
“꽉 잡고 있어!”
동맥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가 천정과 벽면에 마구 흩날렸다.
움찔움찔 경련하는 사내의 건장한 체구를 겨우 붙들어 놓고 심폐 소생술을 시행하던 그는, 가래 끓는 소리와 함께 목이 뒤로 꼴깍 넘어가는 것을 보더니 기운 빠진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렸다.
역시,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런 익숙한 좌절감이 노인의 온몸을 휘감았다.
제대로 된 장비도 인력도 없는 상태에서 환자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그는 생생하게 살아 숨 쉬던 생명이 제 손바닥 아래에서 사라지던 끔찍한 감촉을 회상하며 힘없이 청진기를 집어 들었다.
“아파!”
“제, 제발 살려 주세요. 아무도 없어요?”
고막을 뚫고 들려오는 비명에 노인은 귀를 막고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것을 겨우 눌러 참았다.
대체 이 지옥에서 날 더러 뭘 어찌하라고?
차라리 모든 게 다 끔찍한 악몽이고, 눈을 감았다 뜨면 익숙한 제 방 천장이 보였으면 좋겠다.
그렇게 늙은 의사가 현실 도피를 시작했을 때, 불현듯 강한 힘으로 제 어깨를 쥐어 오는 손이 있었다.
“누구…….”
“급한 환자가 있습니다.”
상대는 낯선 동양인 청년이었다.
이런 오지에서 동양인을 보는 건 처음이었기에 순간 신기한 눈으로 혁권을 바라보던 늙은 의사는 곧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환자가 한두 명이오. 당장 이 주위만 해도 손을 쓰지 않으면 10분 내로 죽어 갈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노인은 이미 너무 많은 죽음을 봐서 지쳐 있었다.
염세적인 태도로 중얼거리던 그는 이내 자신만이 희망이라는 듯 강하게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를 의식하고는 결국 졌다는 듯 이마를 짚고야 말았다.
“알았소. 알았으니까 제발 그 눈 좀 치워 주시구려.”
아무리 가슴이 메말랐다고는 하나 저런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으면 의사가 환자를 보지도 않고 버리려 했다는 사실이 양심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아 참을 수가 없었다.
일단 노인이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자, 혁권은 그를 호위하듯 나란히 서서 하킴이 기다리고 있는 벤치까지 그를 잡아끌듯 데려갔다.
창백한 얼굴로 벤치에 가로 누워 있는 은완코를 본 노인은 서둘러 부상 부위를 살펴보곤 바로 치료를 시작했다.
다행히 총알이 몸을 관통한 상태였기에 수술용 실로 더 이상 피가 새어 나오지 않도록 봉합하고 항생제 주사까지 놨다.
간호사한테 붕대를 감는 걸 맡기고 노인이 몸을 일으키자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혁권이 급히 물었다.
“이제 된 겁니까?”
“일단 치료는 했지만…….”
살짝 말끝을 흐리는 모습에 혁권은 불안한 얼굴로 노인을 봤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위험할 수도 있소.”
“그럼 어서 수혈을 해 주십시오.”
혁권의 말에 노인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 싶지만 여긴 따로 준비된 혈액이 없어서 수혈을 하려면 다른 사람의 피를 뽑아서 넣어 주는 수밖에 없소.”
“그렇게라도 해 주십시오. 필요하다면 제 피라도 뽑아 드리겠습니다.”
만난 지 얼마 안 됐지만 그래도 일행이 죽는 걸 그냥 구경만 할 수 없었던 혁권이 수혈을 해 주겠다고 나서자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면 혈액형 확인부터 합시다.”
간단히 혈액형을 알 수 있는 진단 키트가 병원에 있었다.
다행히 은완코와 혁권의 혈액형이 같았고 하킴도 O형이라 수혈이 가능했다.
그러자 백짓장처럼 창백했던 은완코의 얼굴에 차츰 혈색이 돌며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병원에서 나온 두 사람은 여기서 유일하게 영업을 하고 있는 호텔로 갔다.
영어로 적힌 간판이 아니라면 호텔인지 모르고 지나칠 정도로 아주 허름한 곳이었는데 1층은 식당 겸 술집이었고 나머지 2, 3층을 객실로 쓰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턱수염을 기른 중년인이 탁자를 닦고 있다가 고개를 돌렸다.
“영업합니까?”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 중년인은 한쪽에 있는 카운터로 걸어가면서 입을 열었다.
“묵고 갈 거요.”
은완코가 없어 행여나 말이 통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하던 혁권은 상대가 영어를 쓰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중년인은 녹이 조금 슬어 있는 열쇠를 카운터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식사는 따로 계산하고 하루에 50달러 선불이오.”
그가 주머니에서 달러를 꺼내자 누가 훔쳐 가기라도 하듯 얼른 낚아챘다.
그러고는 턱으로 바깥을 가리키면서 이야기를 했다.
“내일 나왔을 때 다 훔쳐 가고 껍데기만 남아 있는 걸 보기 싫으면 호텔 뒷마당에 차를 가져다 놓는 것이 좋을 거요.”
하킴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그는 열쇠를 챙기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옮겨 놓고 와.”
“예.”
서둘러 하킴이 나가자 중년인이 상체를 앞으로 숙이고는 얼굴색 때문에 유달리 하얗게 보이는 이빨을 드러내면서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여자들이 많으니까.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시오.”
중년인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홀 한쪽에 야하게 옷을 입은 여자들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저 애들이 싫으면 열일곱 살짜리 처녀도 구해 줄 수 있소.”
아무리 여자가 궁하다고 해도 그런 짓은 싫었기에 혁권은 정색을 했다.
“필요 없소.”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하룻밤에 30달러밖에 안 하니까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말하시오.”
중년인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려들으면서 그는 짐을 챙겨 객실이 있는 위층으로 올라갔다.
휑한 복도를 지나 오른쪽 제일 끝에 위치한 206호실이 그가 머물 방이었다.
끼이익.
제대로 기름칠도 해놓지 않아 삐꺽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혁권은 방을 둘러보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난 벽면과 바닥에 철제 침대는 군데군데 칠이 벗겨져 시뻘건 녹이 피어 있었다.
다른 가구들도 낡고 부실해 보였고 천장에는 형광등이 달려 있었지만 스위치를 켜도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탁자 위에 기름을 넣어서 쓰는 랜턴이 놓여 있었다.
오성급 호텔 객실을 바라지는 않았지만 이맛살이 찌푸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이런 열약한 환경을 처음 겪어 보는 건 아니었기에 금방 적응했다.
짐을 내려놓은 뒤, 아무리 꼭지를 돌려도 나오지 않는 수돗물 대신 욕실 한쪽에 있는 플라스틱 통에서 물을 퍼 간단히 얼굴과 손을 씻고 대충 세수를 끝냈다.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내면서 나오자 마침 하킴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씻고 계셨습니까?”
“그런데 수돗물이 안 나오는군.”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하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대답했다.
“마을 바로 지척까지 반군이 출몰하는데 그런 것들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지요.”
“하긴.”
작게 머리를 끄덕인 혁권은 권총을 탁자에 올려놓고는 삐걱거리는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